1화.
https://arca.live/b/reversal/104185322

"사건을 정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으로 보이는데, 피해자분께서 이번 사건을 통해 큰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스트래스에 반응하여, 부정형 자기 방어기제가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진료실 문 너머에서 의사가 뭐라뭐라 설명하는게 희미하게 들려왔는데, 김남붕은 나름 귀를 기울였지만 환자, 충격, 사건, 정도의 단어밖에 듣지 못했다.

잠시 후, 다시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온 날카로운 인상의 경찰이, 최대한 부드러운 톤으로 김남붕이 벌써 몇번이나 답한 질문을 다시 던졌다.

"사건 당시의 일에 대하여 다시 상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절차적으로 필요한 일이며, 김남붕씨를 위해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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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밤.

현관문을 열고있던 김남붕을 향해 어떤 여자가 달려들었다. 김남붕은 그녀가 무언가를 피해 도망치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그녀를 현관속으로 밀어 넣으며, 현관으로 들어가 문을 잠구었다.

그런데, 경황이 없어 힘조절을 전혀 안한 탓인지; 달려오는 속도에 더하여, 김남붕의 힘까지 더해진 강렬한 운동량 그대로, 원룸 속으로 진입해버린 그녀는 직선운동을 멈추지 못하고 원룸돌벽과 정면충돌해버렸다.

"저.. 괜찮으세.. 아니이런씨발."

문을 잠구고 뒤를 돌아본 김남붕의 눈앞에는 기괴한 자세로 눅눅한 비닐장판 위에 쓰러져 착 달라붙은 여자가 한명 있었다. 약간 꿈틀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나름 이쁘게 생긴 것 같기도하고, 어깨까지 오는 머릿결 사이로 피가 흘러 조금씩 이마를 타고 내려오는..

"아니 미친, 아니, 아!"

피를 보고 황급히 제정신을 차린 김남붕은, 달달거리는 손으로 폰을 꺼내 911을 누르고 상황 설명을 이어갔다.

"어, 그러니까, 제 방에 어, 의식불명의 여자가 한명.. 이마에서 피를 흘리고요, 벽에 부딫혀서,.."

전화 너머로 무어라 설명했는지는 기억도 안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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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김남붕씨는 그 여성분이 무언가를 피해 김남붕씨를 향해 달려왔고, 김남붕씨의 실수로 그녀가 김남붕씨의 원룸 안에서 머리를 부딪혀 상해를 입었다는 것인가요?"

"그, 제가 그 사람을 현관으로 당겨넣은 것은 맞지만, 애초에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고.. 아니. 맞습니다...그, 혹시 그 분은 많이 다쳤나요?"

"피부가 까져서 피가 좀 흘렀을 뿐, 유의미한 외상은 없다고 합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혹시 고소는.."

"실질적인 범죄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특히, 피의자에게 범행의도가 없었다고 증언하셨기 때문에, 주거침입 정도로만 기소할 수 있겠습니다."

"아니아니아니 가능한 최대한 완만하게 합의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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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시간의 조사가 끝나고 귀가조치를 받은 김남붕은 상당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오늘 밤 일어난 이 일련의 소동 속에서, 전혀 납치범 같은 것으로 오해받지도 않았으며, 본인 담당은 남성 경찰이였지만, 스쳐가며 본 경찰들은 묘하게 여경비율이 높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조사과정 내내 상당히 배려받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를 강간범으로 몰아가는 함정 질문 같은게 있을까봐 쫄았었는데, 이 정도의 중립성과 친절함이라니. 민중의 지팡이는 달라도 다르군.. 이게 법이고, 이게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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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 근처에 살지도 않으면서 왜 그 남자 뒤따라갔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그냥 산책중이였고, 운동삼아 조깅이나 좀 하는건대, 우연히 동선이 곂친거에요."

"야이 새끼야, 그 남자 집에는 왜 들어갔어!"

"그냥 뛰다가 실수로 잘못 들어갔다고요"

"주머니에 칼넣고 실수로 혼자 사는 남자 원룸에 달려들었다?"

"칼 아니고 칼모양 장난감이에요. 뾰족하지도 않고, 날도 없는 부드러운 플라스틱이 칼은 무슨"

"그 칼로 뭐 하려 했어?"

"그 '장난감'은 그냥 주머니에 있던 거에요. 그리고, 애초에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해요? 이딴게 민중의 지팡이?"

"아오! 이 미친년을 진짜!"

서늘한 온도의 경찰서. 머리에 혹이 하나 달린 여자가 쇠고랑을 찬 채로 철제 의자에 앉아 형사와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경관 한명이 혹달린 여자를 신문하던 형사에게 조용히 다가와 '누님. 그게..' 이러며 무어라 말하자, 형사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누가봐도 강간미수지만, 피해자의 증언이 이상한 방향으로 일관적이며, 무엇보다도 고소의지가 없었다.

심증만으로 사람을 잡아넣을 수는 없는 법이기에, 형사는 으르렁 거리며 저 뺀질거리는 강간미수(심증)범을 풀어 줄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민원을 넣겠느니 어쩌니 하며 그녀의 신경을 긁는 미친년이였다.

"후.. 이딴게 법이고 사회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