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떠진다



마지막 기억은 분명히 익숙한 수도 신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을텐데 처음 보는 화려한 침실, 깔끔하게 세탁되어 잘 말려진 뽀송뽀송한 이불이 나를 덮고 있다.





"일어나셨습니까?"



생전 처음보는 광경에, 생전 처음보는 목소리가 더해진다.





"어? 어... 그.. 혹시 누구세요?"





"말씀 편하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알란님을 보좌할 한 명의 하인에 불과합니다.



너무나도 불편하다... 각종 선물과 금은보화를 들고 후원이랍시고 나의 얼굴을 보기 위해 찾아오는 작으로 마무리 되는 지위를 가진 년들에게 아양을 떨거나


또 그 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 위해 교태를 부리는 것은 익숙했지만, 갑자기 주인 대접이라니...






"혹시 이름이? 아.. 이름이 무엇인가."





"벨이라고 합니다."



주황색 머리를 단정히 묶고, 검은색과 흰색이 조합된 메이드 복을 단정히 입고 있는


나의 나이와 비슷해 보이는 남성은 공손하게 자신의 이름을 나에게 알려준다.





"벨... 벨? 나하고 단둘이 있을 땐 편하게 얘기하고 싶은데, 혹시 괜찮을까?"





"알란님? 그... 굉장히 결례가 되는 행동입니다..."





"왜 그래 벨? 너도 생각해봐 한 번, 갑자기 연고도 없는 곳에 부부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 오게 됐는데, 비슷한 나잇대의 같은 남자애가 있다면 당연히 친해지고 싶지 않을까?"





"너무 황송한 일입니다..."





벨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기색은 이미 온데간데 없고, 나의 머리를 빗어준다던가, 옷을 정돈 해주면서 자연스레 나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나저나 벨? 내 아내가 되실 분은 어떻니?"





"유리나 공작님은 굉장히 좋은 분이에요!"



벨의 눈이 하늘에 떠있는 별들이 박혀 있는 것과 같이 반짝거린다.





"그렇게 좋은 분이니?"





"당연하죠, 사용인들에게도 항상 예의를 갖추시고, 또 영지 주민들이 살기 좋다고 목소리를 모아 매 번 칭찬하세요, 그리고 또 싸움도 잘 하셔서 다른 세계에서 온 것들과의 전투에선 언제나 앞장서서 검을 휘두르시죠."



벨은 마치 자기 자랑이라도 하는 것 같이, 나의 아내가 될 유리나라는 사람의 좋은 점을 자랑스럽게 나열한다.





"아 알란님? 유리나님이 저에게 알란님께서 준비를 마치시면 식사를 위해 알려달라고 하셨는데 혹시 괜찮으신가요?"





"식사? 뭐 지금 하지."





"네 알겠습니다."



벨이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나의 머리를 빗던 것을 마무리하고, 인사를 마친 뒤, 문을 닫고 사라진다.



'빠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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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란님,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다시 나타난 벨이 나를 이끌고 식사하는 곳으로 간다.





"아, 알란, 잘 잤나요?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목소리는 나의 시선을 순식간에 훔쳐갔다.



나의 하얀 머리와는 정반대인, 밤하늘을 날고 있는 까마귀의 깃털이 달빛에 반짝이는 것과 같은, 아름다운 검은색이다.



눈동자도 머리색과 비슷하지만, 깊이가 더욱 깊어진 밤바다와 같이, 칠흙같은 어두운 색이다.



그와는 대비되는 창백한 피부, 그리고 간단하게 입고 있는 것 같은 검은색 옷



옷에는 하얀색 장식이 이것 저것 달려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혹시... 그..."




"제 이름말인가요? 이거 좀 서운한데요... 결혼하게 될 상대의 이름조차 모르다니..."





"아니요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근데... 어떻게 불러야 될지가..."





"나처럼 그냥 편하게 불러요, '유리나' 라고."





"유...유리나.."





"그나저나 어제는 잘 잤나요? 살다가 마차에서 세상 모르게 골아떨어진 사람을 보는 것은 어제가 처음이어서요."





시스티나... 이 개같은 년이 나를 물건처럼 보내기 위해서 강제적으로 수면 마법을 걸었을 것이다.





"제가 좀 잠이 많아서 그랬나봐요 미안해요..."





"아니요 미안할 것까지야, 어서 먹어요, 어제 아무것도 못 먹고 잠들었을텐데."





유리나의 말을 듣고, 식탁을 둘러보니 신전의 행사 때 쓰일 정도로 휘황찬란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실속있게 잘 조리해낸 요리들이 가득이었다.



소스는 없어도, 잘 구워낸 소고기가 자신의 익힘 정도를 드러내는 연붉은 빛을 썰려있는 단면을 통해 알렸고


향기롭게 코를 자극하는 버섯들도 버터에 볶아진 것인지 윤기가 흘렀다.


빵도 방금 구운 것인지 그 냄새가 코를 간지럽히고


스프는 양파의 달큰한 향과 치즈의 톡 쏘는 자극적인 향이 섞여서 뜨겁다는 걸 알리듯이 김을 펄펄 내고 있었다.





"자,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먹어요 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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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는 순식간에 해치워졌고, 하인들이 마무리를 위해 차와 달콤한 것을 내왔다.


나에게는 향긋한 홍차가 앞에 놓여지고


유리나의 앞에는 주황빛을 띄는 액체가 와인잔에 담겨 놓여진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건가? 술을 좋아하나...





"저기 유리나..."





"왜 그래요 알란?"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뭐 언제든지"





"근데 단둘이 좀..."



내가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 것을 티내며 몸을 안절부절하지 못하자 유리나는 하인들 중 유리나를 담당하고 있는 듯한 사람에게 눈짓을 했다.



눈짓 한 번에 그 많던 사람들이 단숨에 방을 빠져나가고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이 공간에는 유리나와 나 둘만이 남게 됐다.





"그래서 할 얘기라는게 뭔가요 알란?"



여자가 싱글거리며 웃는 것은 시스티나를 통해 많이 봤지만, 뭔가 다른 느낌이 든다.


시스티나의 미소는 그 속에 숨겨진 것이 무엇이 됐든, 그리 좋은 것은 아니라는걸 한 눈에 알 수 있는 미소지만


유리나의 미소는 그냥 미소다.





"저.... 유리나씨.."





"편하게 불러도 된다니까."





"유리나... 혹시 결혼 진짜 하는거야?"





"당연하지, 나같이 지위는 높지만 변방에 위치해 있기에, 매일 같이 수도를 향해 진군하는 다른 세계의 것들을 방패 같이 막아주기만 하는 사람에게."



유리나는 칠흙같은 두 눈을 나에게 고정한 채로 말한다.



"알란 같은 사람은 너무나도 필요해."





"진짜... 뭐 무효로 할 생각이라든가 이런 건 전혀 없는거지?"





"당연히 없어, 그리고 나쁘지 않은 것 같거든 너"



유리나는 그 말만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닫혀 있는 문을 열고 나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 뒤로는 문 밖에 있던 하인들이 들어와 뒷정리를 할 채비를 갖춘다.





"알란님 방으로 가실건가요?"



벨이 나에게 말은 건다.





"아니... 뭐 이제부터 살게 될 곳이니까 한 번 둘러볼까? 안내 좀 해줄 수 있니 벨?"





"당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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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꽤나 컸다. 역시 귀족의 집이라는 것인가.



사용인들도 꽤나 많았고, 유리나가 정원을 특히 좋아한다고 하는 것이 빈말은 아닌듯, 정원의 각 구역들은 제각각 좋은 느낌을 갖고 깔끔히 정리되어 있다.



근데 이상하리만치 사용인을 제외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저녁 먹을 때 물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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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게 먹어요 알란."


"참, 다들 식을 준비하기 위해 고생이 많아, 술을 좀 내줄테니 나눠 마시도록."



벌써 저녁이 다 됐다. 아침과 점심에 그러했듯이 같은 곳에서 유리나와 마주보고 식사를 한다.





"유리나 궁금한게 있어요."





"저한테요? 무슨..."



유리나는 자신에게 향한 이런 관심이 의외라는 듯이 대답했다.





"혹시 여기는 유리나와 저말고는 다른 사람들이 없나요?"





유리나는 나의 질문을 듣고, 사용인들과 나를 번갈아가며 보며 딱히 말로 하지 않아도


'얘네들은 사람이 아니니 그럼?'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리나의 가족이라든지..."



나의 말에 유리나 주변의 공기가 약간 무거워진 것만 같다.





"그래요.. 결혼을 할 사이인데 서로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좋겠죠?"



"오늘 저택을 한 번 둘러보셨다고 들었는데, 서재에 있는 그림들도 봤을거라 생각합니다."





"네 두 점이 걸려있던데요."





"한 분은 아버지, 십 년도 더 전에, 갑작스레 퍼진 전염병에 걸린 영지민들을 돌보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나머지 한 분은 어머니, 3년 전에 있던 유례가 없는 대규모 침공에 저와 같이 전선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셨습니다."



3년 전... 3년 전이라고 하면 다른 세계로부터 아주 큰 침공이 있었다.


그때 나는 수도에서 어떤 마법인지는 몰라도 거대한 신성 마법의 구축을 위한 일원이 되어 시스티나와 같이 신성력과 마력을 쏟아 붓고 있었을 것이다.



"미안해요 갑자기..."



나는 갑작스럽게 상처를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어 유리나에게 사과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 할 수도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쓰러지시는 동시에 관문이 닫혔으니까요."





낮게 깔린 분위기가 입을 함부로 열기가 힘들게 만든다.



"유리나 혹시 저에 대해 알고 싶은건 없나요?"





"알란에 대해서라... 알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다른 얘기라도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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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나와 함께 서로에 대한 얘기를 하다보니 저녁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어, 벨 왜 그래?"





"알란님 저 유리나님께서 잠시 시간을 내어줄 수 있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정원에서 기다리시겠다고..."





"그래? 그러면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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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와요, 잠시 괜찮죠 알란?"



유리나는 정원 한 켠에 마련된 작은 건물이라고 할 것에 마련되어 있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을 보니 잔과 또 포도주 병이 보였다.





"유리나 혹시 근데 술 좋아해요?"





"술? 술이라... 마시지 않으면 통 불편해서 꽤 자주 마시긴하죠..."



"알란은 술을 안 마시나요?"





"아니요, 좋아하고 많이 마시긴 하는데, 하루 종일 밥 먹을 때도 그렇고 빼놓지 않고 마시니 걱정되서..."





"그렇게 걱정되면 같이 마셔줄 수 있나요? 좀 많이 남아서"



유리나는 병을 흔들거리며 나에게 꽤 많은 와인이 병 속에서 찰랑거리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때요? 맛있죠? 제가 직접 골라서 모아 놓은 것이랍니다."





"와 진짜 맛있어요! 그냥 쭉쭉 들어가는데 와-"





"다행이네요"





"왜 그래요 유리나?"





"뭐 나도 이야기는 대충 알고 있거든요, 근데 이렇게 빨리 적응한 것처럼 보여서 정말 다행이에요."



야심한 밤, 유리나와 포도주를 마신 시간은 짧게 마무리 지어졌다.



잠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눕고, 이불을 덮어주고 떠나려 하는 벨에게 질문을 건넨다.



"벨, 너는 힘들지 않아?"





"저 말씀이신가요? 업무의 양은 꽤나 잘 조절되고 있기에 그렇게 힘들진 않은 것 같습니다.



벨의 말을 기폭제 삼아, 잠시 과거를 떠올려본다.





뭔 놈의 그렇게 챙겨야 할 행사가 이리 많은지 달이 한 번 차거나 질 때마다 찾아오는 행사를 위해 마력과 신성력을 빨리는 것이 부지기수였고



조금 큰 침공이 있다면 전선에서 직접 싸우는 유리나와는 달리 신성마법을 통해 관문을 닫기 위해, 큰 마법을 위한 톱니바퀴가 되어 굴려지고



돈은 많이 받... 았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생활에 충격이 느껴질 정도로 그리 넉넉하게 지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 지금 행복한건가?'


라는 의문을 품은 채 잠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