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이 좀 길다...


***



참 오늘도 하나같이 똑같은 날이었다.


등굣길은 조용하다.

나에게 주어진 몇 안되는 고요하고 평온한 시간이다.


잠에서 깨어나고 나면, 결국 오늘도 일어나버렸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


어젯밤에 당차게 했던 결심은 어느새 흐물흐물 풀어져 바닥에 스며들었다.

그러곤 언제 그랬냐는 듯 머리를 빗고, 샤워를 한 후에, 언제나처럼의 등굣길에 오르는 것이었다.


학교에 가는 길.

다른 의미로 지옥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그 길을 나는 매번 걸어갔다.

도망치려고 했던 적도 있었지만... 그래봤자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불행은 타인이 만드는 게 아닌, 내가 만드는거다.

결국 어디로 가든, 나는 불행했으니까.



"......."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바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하고, 완벽한 것일까?


많을 것을 바란 적은 없었다.

다만 남들처럼만 살아보고, 느껴보고, 살아보고 싶었다.


집에 돌아가면 따뜻한 부모님의 인사나, 귀찮은 잔소리를 듣고 싶다.

가끔은 반찬투정도 하고, 옷도 원하는대로 입고. 화장품도 사보고...

그냥, 적어도 반에 한두명은 믿고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하지만, 나도 안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지금 내 신발장 안에... 썩은 우유팩이 다 터진 채로 내 실내화를 적시고 있는 모습은, 현실이니까.


주변에서 낄낄대는 소리가 들렸다.

저것들은 이제 아예 자기들이 범인이라는 걸 숨기지도 않았다.


나는 이미 이런 것에 익숙하다.

우유와 함께 썩어버린 실내화를 쓰레기통에 내던지고, 새 실내화를 가방에서 꺼내 신었다.

반으로 올라가기 전에 행정실에 들러서 우유를 깜빡하고 저기에 두었다고 말한 후, 반으로 올라갔다.



그랬더니, 계단 위에 익숙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뭐냐? 최유진. 실내화 살 돈이 있는줄은 몰랐네? 엄마가 사줬냐?"

"......"

"뭘 봐, 이년이 언제부터 버릇이 잘못 들어서 눈을 뒤집어 까고 다니냐?"



툭, 이마에 가벼운 충격이 느껴졌다.

반쯤 남은 페트병이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

열려있는 뚜껑에서는 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푸흡, 이제야 내가 아는 안유진이네. 무서워서 오줌 쌌으면 뒤처리는 알아서 해라?"



그러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괜히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 따위를 위해서 또 언제 노란 물병도 준비했으려나.

이렇게 공을 들이는 노력으로 공부를 했다면, 김진아는 분명히 서울대에 갔을 것이다.


그 애는 집요했고, 나는 언젠가 그녀의 행동에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한번은 캐비넷 안에 나를 가두고는, 다음날 아침에 꺼내준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나오자마자 다리가 풀렸고, 그게 그렇게 재밌었는지, 그녀는 폭소를 터뜨렸다.


또 한번은 나를 다짜고짜 뒷골목으로 끌고가서는 마구 때린 적이 있었다.

아무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맞는 나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날도 그녀는 폭소를 터뜨렸다.



나는 세면대에서 물을 받아 옷에다 대고 비볐다.

다행히 물은 생각보다 쉽게 빠졌고, 나는 반으로 돌아와 조끼가 마를 때까지 책상 위에 펴두었다.


저 멀리서 김진아와 몇몇 애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뿐이었다.


그날은 그것 말고는 조용히 지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아무 느낌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갑갑했고.

나는 여전히 살아있고.

나는 여전히 여기 이 인생을 살고있으니까.


나는 보충수업을 1시간 한다.

김진아와 같은 시간에 집에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다.


딱히 공부를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본다.


오늘은 나에게 있어 어떤 날이었는지.

내일은 나에게 있어 어떤 날이 될지.

어제는 나에게 있어 어떤 날이었었는지...


그러다, 오늘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왜 오늘도 살아있을까.


......


......


......


유준이를 위해서지, 응.



집에 돌아가면, 방 안에는 항상 불이 켜져있다.

유준이는 고등학교 1학년이다.


전교 1등.

그런 무시무시한 타이틀을 놓친 적이 없는 말 그대로 노력의 천재다.



"유준아, 저녁은 먹고 하는 게 어때?"

"아! 벌써 밥 시간이야? 지금 갈게!"



나와 다르게, 유준이는 잘 웃고 잘 먹는다.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리면서... 나보다 인생을 더 잘 아는 것 같다.


공부를 잘 하면 인생은 살아갈 만 한 존재일까?

하지만 아마도 난 늦었을 것이다.


어차피 장학금을 탈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살지도 않았고, 재수를 할 여유도 없다.


그러니 동생의 장학금을 위해서... 난 일찍이 사회에 나가야 할 것이다.



"누나, 그거 알아? 나 내일 기말고사다?"

"... 그래? 처음 알았네."

"기말고사 끝나고 나면, 나도 좀 시간 남으니까... 같이 알바라도 할래?"

"응...? 알바...?"

"언제까지 누나만 일하게 할 순 없잖아. 그리고 슬슬 나도 머리에 쥐가 날 것 같거든."



그렇게 말하는 이 아이의 모습이... 난 참 자랑스러웠다.


학교에 가면 무슨 일이 있든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무슨 일이 있든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미 있었던 일이나, 아마 내일 일어날 일 같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괜찮겠어? 알바 이거 쉬운 거 아닌데."

"누나가 맨날 하는 일인데, 나라고 못 할 건 뭐야?"

"그래... 내가 좀 쉬운 걸로 알아봐줄게. 그때까진 공부나 해."

"네~ 네~"



학교가 나에게 급식이라도 먹기 위해 가는 곳이라면... 집은 나에게 미래 그 자체였다.


누군가는 학교에서 각자만의 꿈을 찾아 나아가지만...

애초에 그런 선택지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나같은 사람도 있었다.


유준이는...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맞다! 뉴스 봤어? 이번에 퀸 호프가 우리 동네에 팬싸인회를 하러 온대!"

"아~ 나도 봤어. 근데 우리는 거기 못 들어갈 걸."

"나도 알아, 그래도 신기하잖아~ 우리 동네에 퀸 호프가 온다니..."



유준이는 히어로의 열렬한 팬이었다.

남자들의 로망이니 어쩌니 하던데... 하나같이 여자 히어로만 좋아하는 걸 보면 그냥 그 시기 남자애인 것 같았다.


퀸 호프는 아이돌 히어로다.

말 그대로 아이돌이자 히어로인 셈이다.


그녀는 무대에 오르기도 하고, 전시상황에 나타나기도 한다.

소위 말하는 '전장의 아이돌'인 그녀는, 다른 아이돌처럼 팬싸인회도 하곤 했다.


물론 대부분의 히어로가 팬 싸인회를 하지만... 퀸 호프는 그보다도 더 자주 하니까.

그리고 어쩌다보니 나도 영업당해 굿즈를 모으고 있었다.

... 최대한 싼 걸로.



"이야... 진짜 부럽다... 우리도 티케팅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 그러네, 되게 아쉽다."

"걱정 마! 누나! 내가 언젠간 돈 많이 벌어서 누나까지 데려가줄게!"

"어이구, 시험이나 잘 봐~"



시답지 않은 말들이 지나가고... 그렇게 나는 잠에 든다.

그리고 결심한다. 아무리 학교생활이 지옥같고 고통스러워도... 기필코 해내리라고.


적어도 고졸, 그정도 학력은 있어야 어디 가서 무시받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아침마다 산산조각이 나는 결심이지만... 그럼에도 계속 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으니까.


유준이는... 곧 자기 생일이 다가오는 걸 알고는 있을까.


난 내 생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유준이의 생일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공부도 가끔은 쉬어가면서 해야겠지.

난 분명히 새벽에 일어나서 살벌하게 티케팅을 한 보람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언제나처럼, 나는 김진아 패거리에 둘러싸여 별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나는 지금 최대한 즐겨보려고 하는 중이다.

마조히스트가 되어서 고통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행복해진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여전히 맞은 곳은 기분나쁘게 아팠다.



"하아..."



아무 기분도 들지 않는다.

그래야 한다.


아니, 어쩌면 나도 지친걸까.

신나게 얻어터지는 날은, 수많은 괴롭힘 중에도 제일 힘든 날이었다.


멍자국이나 아픈 걸 숨기며 일을 하는 건... 쉽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이제는 집에 갈 시간이다.

그거면 됐다.


오늘은 바로 유준이의 생일이다.

비록 케이크는 빅파이지만... 그래도 선물은 정말로 좋아할거다.


그래, 분명히.


그랬을 것이었다.



"...?"



집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자세히 보니 소방차가 몇 대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멀리서 피어오르고 있는 연기도 보였다.



"... 에이, 설마."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잖아.

라는 생각은 목 안으로 삼킨 채... 나는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결국 또다시 현실과 마주쳤다.

전혀 봐주는 법이 없는 냉혹한 현실과.



"......"

"비키세요! 화재 진압 중입니다!"

"... 나와."

"ㅈ, 저기요...? 제 말 안 들리세요...?"

"나와, 나오라고... 저 안에 내 동생 있다고..."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지만, 눈이 크게 떠져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앞으로 가려 하고 있었다.


일렁이는 불기둥이, 내 집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와!!! 나오라고!!!!!"

"저기, 일단 진정하시고...! 구조를 기다리시는 게..."

"안 돼... 이건... 이렇게는... 안 된다고..."



현실은 봐주지 않는다.

아무리 눈을 비벼도 변하지 않는다.


상상속의 세계는 너무나 쉽게 부서진다.

하지만 현실은 절대 부서지지 않는다.


상상속의 주인은 나고.

현실의 주인은 세상이니까.


현실은... 부서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에 부딪힌 나만이...

추하게 가루가 되어버릴 뿐이었다.



***



"그러니까... 부실 공사로 전기선을 다 대충 때워뒀더라고요... 원래라면 전압기도 달아야 하고..."

"......"

"그리고 문도 좀 비틀려 있어서... 탈출에 지장이 갔던 것으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보험 회사 사람이 이리저리 떠들었지만... 내 귀에는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보험이 들어져 있었는지도 처음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건 완전히 회사 측 잘못이고 사기거든요... 아마 배상금이 상당할..."

"... 배상, 이요..."

"아... 크흠, 그렇습니다."



눈물이 꼴사납게 고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울어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보다는 덜 비참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가루가 되어버리지는 않았으니까.



거리로 나온 내 손에는... 난생처음 쥐어보는 돈이 있었다.

몇백만원 정도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주말이라 학교에는 문이 잠겨있었다.

나는 담을 넘고 학교로 들어가... 옥상으로 갔다.


여전히, 내 손에는 돈이 들려있었다.

이거라면 팬싸인회 티켓을 백 장, 천 장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나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되니... 정말 일이 간단해졌다.


옥상에 올라와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마 마지막일 것이다.



쓸모없는 회상이나 망설임은 없었다.

나는 온 길 그대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아마 내 죽음에는 주마등도 없을 것이다.

어떠한 고통도 없을 것이다.


신이라는 게 존재하고, 상식과 정신이 박힌 놈이라면.

나에게는 더 줄 고통이 존재하지도 않을테니까.


그렇게, 나는 몸을 던졌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고...

하늘이 내 얼굴을 시원하게 쓸고 지나갔다.


내 인생에 기억나는 일이 없다.

단지 아팠다. 아주 많이.



"... 아니, 지금은 조금 이르지. 아가씨."

"...?"



누군가가 뒤에서 내 손을 잡았다.

저승에서 들리는 목소리인걸까.


하지만... 여전히 아팠다.

지옥의 고문은 아니었지만, 익숙한 느낌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한 남자가 내 등을 잡은 채 미소짓고 있었다.



"... 누구?"

"미안, 소개할 이름이 없네. 나를 아는 사람은... 온 세상에 너가 유일하거든."

"그게 무슨..."

"일단 이 자세는 좀 불편하니, 앉아서 얘기할까?"



그러고는, 남자는 나를 세게 잡아당겼다.

나는 얌전히 제자리에 앉게 되었다.


텅 빈 머리였다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일을 겪은 건 사실이니까.



"들어보기나 하자,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죽으려 하나?"

"......"

"내가 맞춰볼까? 살 이유가 없어서 그렇겠지. 마지막 남은 동생조차 세상을 떠났으니."



남자는 이미 다 알고있다는 듯, 기분나쁜 미소를 유지했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렇게 쿨한 아가씨는 또 오랜만인데. 아무튼, 난 너같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아. 세상의 약자들 말이야."

"... 약자?"

"그래, 강자들에게 핍박받는 약자.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인생에서도. 너가 한 번도 강자였던 적이 있어?"

"......"



돌이켜보면, 없다.

나는 항상 피하고, 무시하고, 받아들였을 뿐이다.

익숙해지려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점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어허, 아가씨. 당신은 아주 예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야. 누구도 그걸 막을 자격은 없는거지."

"... 웃어?"

"그래, 세상에는 불문율이 있지. 강자와 약자로 나누어졌고, 강자는 약자의 위에 군림하며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수탈해 간다. 하지만 이건 굉장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규칙이야. 이유가 뭔지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고, 남자는 또다시... 입을 열었다.



"강자들은, 자기들이 평생 강자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 뭐?"

"그들은 자신이 누리는 세상이 당연하고, 그게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그리고 그들은 선을 넘기 시작해. 자신들의 능력 이상으로 권리를 누리려는 배부른 욕심을 부리는거야."

"... 하고싶은 얘기가 뭐야."

"간단하지... 아주 간단해."



남자는 손을 내밀었고, 거기에는 작고 검은 보석이 있었다.



"내가 힘을 빌려줄 테니, 네 손으로 강자들을 부수고 꺾도록 해. 그게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거래'야."

"거래...?"

"네 세상은 선을 넘었어. 가진 것 이상으로 너를 밀어붙였지. 그렇게 되면... 혁명이 일어나기 마련이야."

"......"

"약자들은 절대 선천적으로 약한 게 아니야...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지."



남자는 다리를 꼰 채로, 나에게 어서 받으라는 듯 보석을 아예 눈앞까지 내밀었다.



"돌아가서 너를 그렇게 만든 세상에 복수하면 돼. 그게 전부니까."

"... 복수, 라고."

"김진아, 그리고 퀸 호프라는 그 여자... 하나는 널 약자로 여기며 핍박했고, 하나는 영웅이라는 주제에 고통을 외면하지. 그들에게 복수하는거야."



텅 빈 머리에, 불꽃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그제서야... 머릿속에 생각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그들이 부끄러워하는 모습.

그들이 세상에서... 찢겨나가는 모습.



"그게, 전부인거야?"

"계약사기를 자주 당했으니... 이해해,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야. 내가 약속하지."

"... 흐흐흐흐, 언젠간... 언젠간 전부 갚아줄게... 당신..."

"아니, 그저 최선을 다해 찢고 부수는 걸로 충분해. 내가 필요한 건 그것뿐이니까."

"흐히히히... 으흐흐흐... 으하하하하하!!!"



남자는 그저, 모자에 가려진 눈으로 만족스럽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의 인간이 망가져버린 모습과...

그 상태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릇된 의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한 모습을.



"가장 추하고 볼품없게 만들겠어... 그게... 그들에게 걸맞는 모습이니까...!"

"흠, 이런 능력 발현은 좀 의외인데..."



물론, 이번 작품의 능력은 좀 민망한 내용이었지만...

그런 것도 가끔은, 나쁘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실제로 일어난 '현실'이지, 상상으로 떠올린 것이 아니니까.



***



다음 날, 안유진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학교에 왔다.

김진아의 괴롭힘에도, 이유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유진은 그날, 김진아의 책상에 편지를 남겼다.

아주 정성스럽게 쓴 손글씨로.



ㅡㅡㅡ

'학교 뒤로 기어나와, 이 걸레같은 년아.

ㅡㅡㅡ



"... 푸흡! 푸하하하하!!!"

"야, 김진아. 너 미쳤냐? 갑자기 왜 미친년처럼 쪼개?"

"야... 이거 봐바... 아흐으... 웃겨 죽겠네..."

"이야~ 우리 안유진이 멋있네~ 소신있게 말도 하고."

"아흐... 지가 언제부터 사람인 줄 알았을까... 병신새끼가..."



빨리 학교가 끝나길 빌며, 그들은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다가올 미래도 모른 채로.


그렇게 단체로 몰려간 학교 뒤편에는, 예상대로 안유진이 있었다.


김진아는 그런 안유진의 모습이 꽤 낯설었다.

항상 지겹다는 듯이 눈을 피하던 그녀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유진아~ 불렀어~? 왜~? 무슨 일이야~?"

"... 니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데..."

"응~? 잘 안들리는데?"

"이거, 그만 할 생각은 없는거지?"

"푸흡...!!! 그 소리 하려고 불러써여~? 아이구~ 우리 유지니 마않이 컸네~"



과장해서 비꼬는 그녀의 말투에도, 안유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것은 김진아의 심기를 거슬렀고... 그녀는 살짝 눈짓했다.



"저 미친년 이빨 다 뽑아버려. 아무래도 말을 다시 가르쳐야겠네."



덩치 좋은 자신의 친구들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체대를 준비하는 아이들도 많았던 만큼, 그들은 여고생이라곤 믿을 수 없는 체격이었다.


하지만... 안유진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고있었다.



"그래... 이제 와서 싹싹 빌면 어쩌나, 했다... 흐흐흐..."

"... 뭐야, 소름끼치는 년."

"니들은... 교육을 다시 해줄게."



그리고, 일은 갑자기 일어났다.

안유진을 향해 다가가던 여고생들이 하나같이 배를 붙잡고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으으으윽...! 갑자기... 왜 이래..."

"아흑...! 배, 배가...!"

"... 뭐, 뭐야? 니들 다 왜 그ㄹ... 윽...?!!??!"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진아 본인도 배를 부여잡고 쓰러지게 되었다.


배가 아프다.

뱃속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느낌.

그리고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복통이 아니라...

뱃속에 무시무시한 가스가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라는 걸.



"크윽...! ㅇ, 야 안유진...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아직도 말할 여유가 있어? 덜 혼났네, 우리 진아."

"ㅁ, 뭐? 끄으으윽...!!!"



뱃속에 가스가 미친듯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는지, 주변에 있던 여고생들도 함께 배를 잡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윽...! 뭐야, 이거... 일단 가스라도 몰래 좀 빼야...'



그렇게 생각한 김진아는, 슬며시 엉덩이 한 쪽을 들어 뱃속에 미어터지는 가스를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뜻대로 되지 않았다.



"ㅁ... 뭐야... 왜 안 나와..."

"응? 뭐가? 혹시 방귀라도 마려워?"

"뭐? ㄴ, 너 미쳤냐?! 개더러운 년이 무슨 소리를...!"

"아님 말고~ 어디까지 추잡해질 지 궁금하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녀의 배는 끓어올랐다.



"으흑...! 으으윽...! 아파!!! 미친년아, 그만 하라고!!!"

"뭔데~? 뭔지는 말을 해줘야 내가 반응을 하지... 안 그래?"



안유진의 표정은, 지금껏 본 것중에 가장 밝게 웃고있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만큼, 그녀가 살아있는 것 같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아흑...! 배 아파... 으으으윽...!!"

"우리 진아 자존심 세네... 뭐, 평생 그러고 있으시던지... 뒤지시던지."

"ㅁ, 뭐...? 그게 무슨...!"

"너, 그거 계속 참으면 피에 섞일거야. 그리고 방귀 가스에는... 발암 성분이 있지."

"ㅇ, 야...! 아까부터 자꾸 더러운 소리 할...! 끄으으윽...!"



그녀는 싸늘한 표정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쯧, 그냥 죽자. 안 되겠다."

"아아아악...! ㅈ, 잠깐만...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응, 그래. 그래서?"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것 좀... 그만 해... 줘..."

"응? 뭐 말하는거야?"

"이, 끄윽...! 이..."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울상이 된 채로 모든 자존심을 포기하고 말해야만 했다.



"제발 방귀 좀 뀌게 해줘...!!!"

"푸흡...! 진짜 인지부조화 오네... 그래, 난 착하니까... 들어줄게?"

"아흣...?! 앙... 흐으으응...!"



그리고, 마침내 자유를 얻게 된 그녀들의 항문은...

아까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자존심이란 것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뿌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읅!!!!!

뿌아아아아아아아아앙!!!!



끔찍한 소리들.

엉덩이 사이에서 가스가 솟구치는 흉악한 소리가 학교 뒤편을 가득 채웠고...


교내에서도 아름다운 얼굴로 유명해서 남자친구만 몇 번을 갈아탄 그 김진아의 얼굴은...

오직 쾌락.

고통에서 벗어난, 그러면서도 몸 안에 가득 쌓인 것을 내보내는 쾌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부으으으으으으으읅!!!

뿌라라라라라라라라라랅!!!!


마침내 끔찍한 연주를 멈춘 그들은 바닥에 널부러진 채로 완전히 탈진해버렸고...

가장 심하게 힘이 빠져버린 김진아는 아예 몸을 움찔거리며 시원하게 소변까지 해결하고 있었다.



쉬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하응... 응하아... 하아아앙..."

"진아야, 내가 사람으로서 조언 하나 하자면... 우리 최소한 인간의 존엄은 지키고 살자... 알았지?"



하지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맨바닥에 엎드린 채 모든 배출을 끝낸 인간실격의 무언가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 이제, 다음은 그 여자인가..."



퀸 호프.

물론, 그녀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었지만...

그녀는 더이상, 이유나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정신은 복수에 불이 붙어있었다.

그녀는 더이상 자신이 무엇에 의해 복수를 시작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한 번 맛본 복수의 맛은 달콤했다.

그러니... 명분 따위는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



"우와아아아!!! 퀸 호프다!!!"

"안녕하세요~ 이렇게나 많이 모여주신 팬 여러분, 감사해요~!"



그녀의 가벼운 손키스에, 관중들은 이미 넋을 잃어가고 있었다.

안유진은 손에 그 티켓을 들고있었다.


동생에게 주기로 했던... 그 두 장의 티켓.

하지만, 그녀는 이제 그것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행사장으로 향할 뿐이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안유진이요."

"네, 좋은 만남 되시길 바랍니다."



히어로이자 아이돌이었던 그녀와의 팬미팅은 애초에 조금 독특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가장 익숙했다.


동생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말했기 때문이라는 건... 기억하지 못했지만.



"다음 분~?"

"안녕하세요... 우와, 진짜 퀸 호프 님이네요..."

"네~ 저도 반가워요~! 여성 팬 분은 굉장히 귀한데, 직접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전히... 말을 예쁘게 하시네요, 퀸 호프 님."

"과찬이세요, 저는 사람들에게 힘과 희망을 주는 일을 하는데,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그녀의 팬싸인회에, 경비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 본인이 최전방에서 빌런들을 때려눕히는 히어로였으니까.


하지만... 안유진은 그런 것 따위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고통스럽게 하고싶지 않았다.


그저... 이번에는 다르게 해보고 싶었다.



"윽...! 후우..."

"왜 그러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아,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하하하하..."

"그래요...?"



'윽... 갑자기 왜 이렇게 속이 안 좋지...? 어제 회식한다고 너무 신난건가...?'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저 과거의 자신을 탓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스가 뱃속에 차올랐고...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엉덩이 한 쪽을 들어 가스를 배출했다.



픗ㅡㅡㅡ스으으으으으....



순식간에 악취가 퍼져나갔고...

그녀는 아주 능청스럽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미소지었다.



"싸인은 어디에 해드리면 될까요?"

"음... 이 남은 티켓에 해주세요."

"네, 잠시만... 요?"



부으으으으으으으윽....



"여기... 이번 팬싸인회 기념 기념품... 이고요?"



뿌르륵...


부르르르륽...



"자, 싸인 여깄습니다. 부디 즐거운 시간 되셨길... 바래요...?"



부륵... 부르르륽... 뿌우우우우...



그녀는 정말 프로였다.

방송이든 무대든, 눈앞에 사람을 두고도 정말 조금의 소리도 흘리지 않으며 그 많은 가스를 내보내고 있었다.


안유진은 눈앞의 여자가 계속 방귀를 뀌고 있고, 자신을 마주하는 내내 오른쪽 엉덩이를 들고있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그것이 괘씸했고, 그녀는 결국 결정적인 한 방을 준비했다.



"저기... 혹시 악수 한 번만 해볼 수 있을까요...?"

"악수요...? 네, 물론 가능하죠..."

"그럼... 여기요."



손을 애매하게 먼 거리에 둔 채로, 그녀는 악수를 요구했다.

이미지든 원래 그런 사람이든, 퀸 호프는 몸을 살짝 일으키며 허리를 숙여야 했고...


안유진은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고 당겨버렸다.



"잠ㄲ... 으아아아앗?!!??!"



아무리 히어로인 그녀라도, 이런 컨디션으로 빌런이 당기는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고...


접이식 테이블과 함께 완전히 앞으로 자빠진 그녀의 괄약근은...

기압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순순히 길을 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뿌아아아아아아아앙!!!!


뿌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뿌러러러러러러러러럵!!!



청초한 아이돌이자 히어로의 배출은 안유진의 예상보다도 더 끔찍한 악취를 풍겼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안유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의식을 잃고 말았다.


바닥에 꼴사납게 엎어진 채로 끊임없이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히어로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움찔거리고 있었다.



"... 죄송해요, 이렇게 될 줄은."

"흐... 흐아... 아... 아앙..."



뿌우우우웅!!



남은 가스까지 내보내버려 완전하게 탈진한 그녀를 둔 채로, 안유진은 자리를 떠났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그런 사건이 있어버린 후로... 퀸 호프는 의도치 않게 음지 생활을 해야 했다.

물론 수입은 전보다 나았지만... 그녀는 하루아침에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안유진은 가만히, 자신이 뛰어내리려 했던 옥상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예전이라면 분명 죽을 거리였지만... 지금은 이런 높이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 괴물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크게 상관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아무 생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



"자, 이제 좀 말할 생각이 드니?"

"저게... 정말... 제 누나라고요...?"

"그래. 네 누나다. 얼마 전까지 너를 위해 온 힘을 다했던 네 누나."

"말도 안... 돼..."



깊은 지하의 어딘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사내는 여전히 기분나쁜 미소를 지으며 소년을 내려다봤다.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소년은 자신이 본 걸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사내는 고개를 마저 저었고...

소년은 고개를 푹 숙였다.



"누나가... 언제 저런 걸... 준비했었던걸까..."

"하지만, 이제는 자기 좋으려고 쓰던데... 그 여자는 너희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이름 그대로 희망이 되어줬는데 말이야."

"제가... 말려야 해요."

"내가 도와줄 수 있단다... 아주 확실하게 말이지..."



소년은 다시금, 화면 속의 누나를 바라보았다.

끔찍한 표정을 짓고선 고통을 즐기고 있는 그 모습에...

소년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까 하신 제안... 받아들일게요."

"아주 잘 선택했어... 넌 역사에 아주 큰 인물이 될 거다."

"설마... 저도 저런 능력을 받는 건 아니죠?"

"아니지, 그럴 리가. 아주 마음에 들 거란다..."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세상에 영원한 강자는 없으니까."



***



사실 구상은 한참 전부터 머릿속으로 해뒀는데... 탱자탱자 놀다가 이제야 다 썼다...

그리고 분량조절 망한듯. 방커소설인데 방커분량이 뭐 이것밖에 안 되냐...


반응 좀 괜찮으면 마저 써봄.


그리고 쓰던 원신소설도 다시 손에 잡을 것 같다.


대황아를절대찬양해나는숭배해야만해아이고아버지이제야깨달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