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들의 작품을 볼 때마다 가장 아쉬운 것을 하나 꼽으라면, 서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오래 묵은 유저거나 무슨 사이비 친목집단의 일원이라서가 아닙니다. 진심으로 좋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서식의 비전문성이나 문체의 오류 때문에 좋지 못하게 여기게 되는 경우가 상당합니다. 

서식의 오류



주로 SCP 작품 작성에서 가장 많이 목격됩니다. 재단은 어반 판타지를 보고서라는 정형화된 서식에서 쓴다는 특이함을 지닌 만큼, SCP 작성 또한 입문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아래에 쓰인 글은 제가 지금부터 대략 6년 전, SCP 재단 한국어 위키를 처음 접했을 때 썼었던 초안입니다.

일련번호: SCP-972


등급: 유클리드(Euclid)


특수 격리 절차:
제품표시 뒷면으로 "동물에게 주지 마시고 상온상태로 두시오" 라고 써있지만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다.
설명:
대상은 한 통 용량의 알약이다 뚜껑 위쪽에 "그린 박사의 자라버려라 알약" 이라고 쓰여있으며 제작사와 유통사가 적혀있지만
실존하지 않는 사였다 이후 D급 인원 1 명에게 이 알약을 먹여보았다 아래는 면담자료이다.



면담 대상: D급 인원 ㅇㅇㅇㅇ

███ ██:좋아 이제야 좀 깨는구만 

서론: SCP-972 를 먹고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기록 시작, 

[오후 6:30] 면담자:[안녕하신가 ███ 자내는 그저 그 알약을 하나 먹어봐주면 된다네] 
[아, 그래 그 옆에 그릇에.. 아니! 거기는 말고 말일세!]
[음…. 일단 초콜릿향이 나는군요….. 그리고…]
[면담자 ███가 갑자기 늙어 죽음으로써 면담을 종료합니다 ] 

기록 종료, [6:31.] 

결론: [SCP-972 를 먹거나 주입할경우, 시간이 배속으로 가는걸로 추정. 실험자 ███ 는 죽기 직전.] 자신이 왜 이딴곳에 있냐" 며 기억상실을 호소, SCP 제단이 ██ 할것을 이야기하며 발작하며 사망하였다.]


비평할 사항이 많이 보입니다. 엄청난 양의 문체와 서식 오류만 고쳐도 이 SCP에 대한 의견은 더욱 좋아질 것이고요. 다만, 이건 매우 극단적인 예시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되는 사항은 초보 작가분들의 서식 구성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일련번호에 KO가 붙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창작된 모든 SCP에는 항상 -KO가 뒤에 붙습니다. 이는 국가 코드로, 한국에서 발견되었다는 세계관 내적 의미가 아닌 한국에서 창작되었다는 외적 의미입니다. 하지만, 초보 작가분들의 작품에서는 종종 일련번호에 -KO를 붙이지 않는 모습이 보이곤 합니다.

  • 볼드체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볼드체는 문단이나 요소 구분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만큼, 서식에 항상 들어갑니다. 특히나 SCP 서식에서는 일련번호, 등급, 특수 격리 절차, 그리고 부록 부분에 볼드체를 넣어야 합니다.

  • 문단 분리나 요소 분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습니다. 특수 격리 절차 서술 바로 아래쪽에 설명이 붙어있고, 면담 기록의 대사는 서로 붙어있어 가독성을 떨어뜨립니다.

  • 면담 기록에 굳이 필요없는 [ ] 가 넣어져 있습니다. 서론이나 면담 인원도 볼드체가 적용되어있지 않네요.


그렇다면, 이걸 다 고친다면 어떨까요?

일련번호: SCP-972-KO


등급: 유클리드 (Euclid)


특수 격리 절차: 제품표시 뒷면으로 "동물에게 주지 마시고 상온상태로 두시오" 라고 써있지만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다.

설명: 대상은 한 통 용량의 알약이다 뚜껑 위쪽에 "그린 박사의 자라버려라 알약" 이라고 쓰여있으며 제작사와 유통사가 적혀있지만
실존하지 않는 사였다 이후 D급 인원 1 명에게 이 알약을 먹여보았다 아래는 면담자료이다.



면담 대상: D급 인원 ㅇㅇㅇㅇ

서론: SCP-972-KO 를 먹고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기록 시작.

면담자: 안녕하신가 ███ 자내는 그저 그 알약을 하나 먹어봐주면 된다네

면담자: 아, 그래 그 옆에 그릇에.. 아니! 거기는 말고 말일세!

면담 대상: 음…. 일단 초콜릿향이 나는군요….. 그리고…

면담자: ███가 갑자기 늙어 죽음으로써 면담을 종료합니다.

기록 종료.

결론: SCP-972-KO 를 먹거나 주입할경우, 시간이 배속으로 가는걸로 추정. 실험자 ███ 는 죽기 직전. 자신이 왜 이딴곳에 있냐" 며 기억상실을 호소, SCP 제단이 ██ 할것을 이야기하며 발작하며 사망하였다.


훨씬 나아졌습니다. 내용의 미약함과 문체는 그대로지만, 서식을 고치니 훨씬 읽고 이해하기 쉬워졌어요. 못 쓴 작품이라도, 서식이 잘 지켜졌다면 비평가에게 비평받기 훨씬 수월합니다. 깔끔한 글이 더 읽기 쉽고, 읽고 싶고, 리뷰하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서식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SCP 재단은 온라인 소설 플랫폼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바스크립트나 CSS를 이용한 치장이 가능하다는겁니다. 물론 과도한 치장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절한 div 박스와 멋진 CSS 구문을 글에 넣는다면, 사람들의 시선을 더 끌고 글을 읽는 것을 더 재밌게 만들 수 있을겁니다. SCP 서식 틀 페이지를 둘러보세요. 페이지 아래에 있는 "설정" 부분을 누르고 "페이지 소스" 를 눌러 다른 작품들이 사용한 구문들을 뜯고, 또 사용하세요. 이런 자잘한 구문들이 언젠가 작성할 글의 연출에 도움이 될 겁니다.


문체의 오류



문체의 오류는 서긱의 오류와 다릅니다. 서식의 오류가 페이지 정렬의 문제라면, 문체의 오류는 내용의 문제입니다. 재단은 보고서로 서사를 푸는 플랫폼입니다. 그런 만큼, 원래부터 사용하던 소설 문체나 일상적인 구어체는 글에 잘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보 작가들은 가끔 그걸 인지하지 못 하고 글을 작성하기도 합니다. 이 오류는 글이 무언가 어긋나보이게 만들고, 전문성을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개인의 문체인 만큼 확실하게 잡기 어려운 오류이기도 합니다. 아까 그 글로 예시를 들어봅시다.


일련번호: SCP-972-KO


등급: 유클리드 (Euclid)


특수 격리 절차: 제품표시 뒷면으로 "동물에게 주지 마시고 상온상태로 두시오" 라고 써있지만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다.

설명: 대상은 한 통 용량의 알약이다 뚜껑 위쪽에 "그린 박사의 자라버려라 알약" 이라고 쓰여있으며 제작사와 유통사가 적혀있지만
실존하지 않는 사였다 이후 D급 인원 1 명에게 이 알약을 먹여보았다 아래는 면담자료이다.



면담 대상: D급 인원 ㅇㅇㅇㅇ

서론: SCP-972-KO 를 먹고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기록 시작.

면담자: 안녕하신가 ███ 자내는 그저 그 알약을 하나 먹어봐주면 된다네

면담자: 아, 그래 그 옆에 그릇에.. 아니! 거기는 말고 말일세!

면담 대상: 음…. 일단 초콜릿향이 나는군요….. 그리고…

면담자: ███가 갑자기 늙어 죽음으로써 면담을 종료합니다.

기록 종료.

결론: SCP-972-KO 를 먹거나 주입할경우, 시간이 배속으로 가는걸로 추정. 실험자 ███ 는 죽기 직전. 자신이 왜 이딴곳에 있냐" 며 기억상실을 호소, SCP 제단이 ██ 할것을 이야기하며 발작하며 사망하였다.




  • 설명과 특수 격리 절차가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조금 더 늘리고 자세한 사항을 넣어 분량을 채웁시다. SCP는 보고서인 만큼, 자세한 설명과 관리가 필요합니다. 전문적으로, 자세하게 만들어봅시다.

  • D급 인원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D계급 인원으로 바꿉시다.

  • 보고서임에도 불구하고 전문적인 단어가 없고, 문법 오류가 가득합니다. 고칩시다.

  • 면담 기록이 너무 어색합니다. 말투가 로봇들이 대화하는 것 마냥 부자연스럽습니다. 고칩시다.


그렇다면, 이걸 다 고친다면 어떨까요?


일련번호: SCP-972-KO


등급: 유클리드 (Euclid)


특수 격리 절차: SCP-972-KO는 표준 재단 금고에 격리한다. 대상과 관련된 실험은 보안 인가 3등급 이상 인원의 허가 하에 가능하다.

설명: SCP-972-KO는 초록색 알약과 그 알약이 들어있는 통을 지칭한다. 대상의 겉면에는 "그린 박사의 자라버려라 알약" 이라고 쓰여져 있다. SCP-972-KO의 변칙성은 인간이 대상을 구강을 통해 섭취할 경우 확인된다. SCP-972-KO를 섭취한 인간은 신체 노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데, 이는 대략 5분 이내로 완료된다. 노화가 완료되었을 때의 평균 신체연령은 75세이며, 신체는 비변칙적 상태 그대로이다.

부록: 실험 기록



피실험자: D-1912

면담자: 김한영 박사 

서론: 이하의 실험은 SCP-972-KO 섭취 후 나타나는 변칙적 현상을 관찰하기 위해 실행되었다.

기록 시작.

면담자: D-1912?

D-1912가 실험실 벽에 기대고 있다. 소리가 들린 순간 다시 고개를 든다.

면담 대상: 네- 예.

면담자:  잘 듣고 있나 확인해보려고 말했는데. 음, 아무튼. 혹시 앞에 있는 알약이 보이나?

D-1912가 알약을 오른손으로 집어 살핀다. 녹색 빛이 표면에 반사된다.

면담 대상: 보입니다. 

면담자: 혹시 생김새를 설명해볼 수 있겠나?

면담 대상: 굳이요? 카메라로 다 보이잖아요?

담자: 그냥 해. 실험 절차니깐.

면담 대상: 아우 알겠어요... 진짜. 성질머리하고는.

면담 대상: 음…. 일단 초콜릿 향이 나는군요….. 그리고… 별 거 없습니다. 그냥 알약이예요. 알약.

면담자: 그러면 알약을 섭취해볼 수 있겠나?

면담 대상: 좋습니다. 한 번 먹어보죠.

D-1912가 알약을 섭취하자, 대상의 신체연령이 급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점진적으로 신체적 변화가 관측된다.

면담 대상: 시간이 뭔- 왜-

성대에서 일어난 변형으로 인하여 대상이 잠시 말을 중단한다.

면담 대상: 애초에 내가 왜 이딴, 아니 실험실도 아니잖아- 뭐가 많이 바뀐 것-

D-1912가 바닥으로 쓰러져 경련한다. 대상은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사인은 심혈관계의 노화로 인한 심장 발작이었다.

기록 종료.

결론: SCP-972-KO를 섭취할 경우, 섭취 대상자의 시간이 가속되는 것으로 보인다. 섭취 대상자는 일종의 "시간 이동" 을 겪는 것이라 추정되는데, 이는 D-1912가 사망 직전 언급한 실험실의 변화에서 알아낼 수 있었다.

자세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확실히 나아졌습니다. 독자가 서사를 이해하기도 쉬워졌고, 용어가 변경된 것 덕분에 전문적인 톤도 더해졌네요.

재단은 보고서 형식의 소설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어쩔 수 없이 소설을 쓸 때 사용하는 문체, 단어, 시점이 나오곤 합니다. 고인물 작가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문체만 바꿔도 글의 첫인상을 180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짧은 에세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식과 문체의 문제를 너무나도 많이 봐왔는데, 그걸 알려주는 에세이는 별로 없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