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썩 좋은 어린시절을 보냈었다.


사업가로서 꽤 성공한 아버지, 궂은 일은 해보시지 않으셨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어머니.

내 어린시절은 그 둘 사이에서 따뜻하고 배부르게 보냈다.

영화에 나오는 갑부들 만큼이야 아니였다만,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풍요롭게 자란 탓일까, 내 머릿속에는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생각이 아닌,

새롭고 더욱더 이상적인 것들을 그리고 싶어하는 욕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런 내 예술에 대한 욕구를 일찍이 알아차리셨고, 갖가지 지원을 해주셨다.

비싼 캔버스, 보석을 간 물감, 좋은 스승, 내게 해주실 수 있는 것은 모두 해주셨다.


문제는 내가 예술 고등학교를 재학 중이던 일학년의 일학기 중에 일어났다.


지금껏 자신의 몸이 이상해도 그 신호를 무시하며 몸을 혹사시키시던 아버지의 몸이 드디어 한계를 맞이한 것이였다.

시간이 금이라며 평생을 일하신 아버지는,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만 보석 같은 시간을 놓쳐버리셨다.


어느날 아버지가 서재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되셨다.

조치를 취했을 때는 아버지의 몸에 가증스러운 암덩어리들이 이미 자리를 잡은 뒤였다.


우리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다.

몇날밤을 그의 병실과 그 근처 모텔에서 지셌는지 새는 것 조차 힘들어졌다.


줄어들 것 같지 않던 통장의 영이 하나하나 줄어가도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무뚝뚝하고 우리와 보낸 시간이 결코 많지 않았으나, 그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제외하더라도 많았다.


집의 물품이 하나하나 사라져가고 집이 바뀌었다, 허나 어머니는 결코 캔버스와 물감, 붓은 처분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아직도 내가 꿈을 붙들고 있기를 바라시는 것 같았다.

헛수고였다, 나는 그해 십이월, 고등학교 다니기를 그만뒀다, 사립이였기에 학비가 너무나 컸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개월 즈음 지났을까, 아버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었다.

아버지를 살리려던 노력도 헛수고였다.


가난해진 것은 문제가 아니였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 가족 곁에서 사라졌다, 처음에는 미술 교사가 사라졌고, 그 다음에는 가정부들이,

학교를 그만두고선 친구도 없어졌다.


생각해보면, 나의 모든 관계는 돈으로서 맺어진 것이였다, 그렇기에 그들이 사라지는건 당연한 일이였다.

그들에게 쏟은 시간 또한 헛수고였다.


그저 단지... 모두 헛수고였다 생각하니, 모든 것들이 허무해졌다.


어머니는 나를 먹여 살리시려 작은 음식점을 하나 차리셨다, 업종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시지 않았다, 

단지 음식점이라 말씀하실 뿐이였다.


이상한 것은 그녀의 몸에는 단지 손가락을 배인 상처라던지, 화상자국 같은 일반적인 상처가 아닌,

이유를 알 수 없는 멍과 얼굴에 상처같은 것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하지 않았다, 더이상 무언가를 더 알아봤자 무엇하리- 그런 생각이였다.


어느날 부터 나는 더이상 붓을 들지 않았고, 캔버스 앞에 앉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냐는 물음에는 그저 무엇을 그릴지 고민하고 있었다라며 얼버무릴 뿐이였다.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되었으니, 내겐 많은 시간이 있었다.

성년이 되지마자, 나는 일을 시작했다.(어머니께서는 내가 일하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기에, 성년이 되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나에겐 학력도, 경력도 없었기에 그런 것들이 없이 몸으로 때우는 일을 하기로 했다.


나는 평생 무거운 것이라곤 들어본 적도 없는 손으로 공사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지금 팔리고 있는 상품의 가치도 모른 채 편의점에서 일하기도 했다.

일을 늘려갈 수록 나는 세상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 되었고,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이였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언젠가 편의점에서 일할 때, 어머니를 마주쳤었다.

통근을 쉽게 하기 위해 가까운 곳을 찾은 것이 화근이였다.


화낼 것이라 생각해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에게 어머니는 아무 표정도 지으시지 않으시고,

그저 커피 한캔을 계산해 나가셨다.


뒤돌기 직전 보였던 표정은 너무나 지치신 채로 집으로 돌아오셨던 아버지의 표정과 닮아있었다.

그녀는 지친 것이다, 나의 꿈을 밀어주는 것도 이제는 힘에 부친 것이였다.

집에 와서도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은신채 밥을 차려주시고 씻으시고 함께 잤다.


그날, 오늘은 빌라 옥상에 올라가 그림을 그리려 한다.

별은 보이지 않지만 단지 오늘은 밤하늘을 그리고 싶어졌다.


낡아버린 캔버스 천에 눌러붙은 페인트를 긁어내고, 그 위에 얼마 남지 않은 물감을 칠했다.


남색이 부족했기에 검은색을, 검은색이 부족했기에 초록색을 칠했다.

그렇게 그려진 밤하늘은 도저히 밤하늘이라 부를 수 없는 엉망진창이였다.


웃음이 나온다, 그 그림이 그저 너무나 웃겼다.

아침도, 밤도 아니고, 태양도, 별도 하나 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


그 날 혜성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내 캔버스에는 붉은색 곡선이 선명히 남았다.

굳어 검은색이 될, 선명한 붉은색 곡선을 내 그림에 남기고 나는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