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방패의 전설 모음집

----------

12화, 폭풍이 지난 후


아인이 방에 도착하고, 카이저는 자신의 직속 사제와 연금술사를 불렀으나 그들 역시 뾰족한 방법을 내지 못했다.


“이건 그저 하늘에 맡기는 것이 최선입니다.”


사제는 그렇게 말하더니 빛에 기도를 드린 뒤 방을 나섰다.


“이건 연금술의 물약으로도, 마법으로도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연금술사 역시 상처를 아물게 하는 약을 바르고는 방을 나섰다. 카이저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네, 나 역시도 뾰족한 방법이 없네. 기록에 따르면 그에게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이틀… 일세.”


잔은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이제까지의 전투와 지금의 일로 너무나 지쳐 더 이상 말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카이저시여! 놈들의 근거지로 간 병사들이 돌아왔습니다.”


문 밖에서 신하가 말했다.


“대장을 데려와라.”


그들의 대장이 카이저에게 경례를 한 다음 자신들이 본 것을 말했다.


“르블랑 양이 말하신 곳으로 군사를 보냈습니다만 놈들이 이미 먼저 눈치를 챘습니다.”


잔은 그가 다음에 할 말을 알 것 같았다.


“그 뜻은 설마!”


“네… 전원 자살했습니다.”


방 안은 순간 정적이 돌았다. 예상은 했지만 그것이 사실로 드러난 것이었다.


“놈들이 자살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약을 가져왔습니다.”


대장은 문 밖의 부하를 시켜 상자를 가져온 뒤 상자를 열고 안의 병을 꺼냈다. 마리가 물었다.


“이건… 포도주 병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안에는 술만 들어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잔은 병에서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바로 그날, 그들의 본거지에 굴러다니는 술병에서 잔이 맡은 냄새였다.


“이건… 아마 마약일거야.”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제가 며칠 전 놈들의 소굴에 잠입했을 때, 병에서 이 냄새가 났어요. 그때 본 놈들의 표정도 어딘가 정신이 나간 듯했고요. 아마 환각성분이 든 버섯이나 약초를 원료로 했고 이걸 많이 넣어 자살용 독약으로 만든 것 같아요.”


“놀라운 추측이군요. 이 병에 든 내용물을 왕실 연금술사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카이저의 명령이 떨어지자 대장은 다시 경례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카이저는 의자에 쓰러지듯 앉으며 말했다.


“결국 놈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나… 광장에 있던 이들도 불리해지니 전원 자살, 아지트의 놈들도 자살이라니… 로베르트의 행방을 어디서 찾지?”


카이저가 이렇게 말한 순간 전령이 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카이저시여! 급한 전갈입니다!”


“무언가?”


“오늘 아침 트리움피한 남서쪽 ‘수확자의 요새’에서 남서쪽으로 날아가는 용을 봤다는 전갈입니다!”


그 순간 방에 있던 3명 모두 크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장 먼저 마리가 소리쳤다.


“수확자의 요새!!”


잔이 소리쳤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남서쪽이라면…! 놈이 숨을 만한 곳은!”


“용의 입 협곡!”


용의 입 협곡, 트리움피한에서 남서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용의 척추’ 산맥의 산 ‘텍툼’과 ‘루미네’ 사이에 난, 넓이 300미터의 협곡으로써 전설에 따르면 용들의 전쟁 당시 영웅이자 초대 카이저 미카엘 드래곤베인이 용 ’바알’을 처 죽인 장소이다. 잔이 소리쳤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 놈이 있다니, 놈이 다시 공격하는 것도 시간문제예요!”


“아니, 아마 놈은 곧바로 공격하지 않을 거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왜죠?”


“아마 놈은 아인을 경계하고 있을 거야. 그의 방패가 자신의 불꽃을 막은 것도 모자라 아마 자신의 부하 비룡들이 죽은 것도 알았겠지. 그리고 우리 역시도 병사를 모으는데 시간이 걸려.”


카이저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눈을 잠깐 감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자네들도 좀 쉬게, 내가 성에 방을 따로 마련해 두었으니 내 하인들이 방까지 안내할 것이야.”


카이저는 손가락을 튕기며 시종을 부르자 시종이 번개처럼 빠르게 튀어나왔다.


“두 분, 이쪽으로 오십시오.”


마리와 잔은 시종을 따라 복잡한 복도를 이리저리 돌고 계단을 수없이 오르내린 끝에 방에 도착했다.


“잔 님은 오른쪽 방, 마리 님은 왼쪽 방입니다. 필요하시다면 시녀를 부르십시오.”


시종이 바람과 같이 사라지자 잔과 마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야 좀 쉬겠네. 어제부터 제대로 쉬지를 못했어… 잔? 왜 그래?”


잔이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아인이 조금 걱정돼서 그래.”


그러자 마리는 장난기가 돈 듯 미소를 지었다.


“뭐야 잔, 설마 아인에게 그런 마음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거든!”


마리는 잔을 본격적으로 놀리기 시작했다.


“고향에 남자도 있으면서.”


잔은 얼굴이 잘 익은 사과만큼 새빨개져서 항변했다.


“그러니까, 그 녀석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고!”


“얼굴이 빨게~ 좀 있으면 각성하겠다.”


마리는 깔깔대며 더 잔을 놀렸다. 잔은 허공에 얼음을 만들다가 그만두었다.


“거기까지만 하자. 평생 남자도 못 만드는 주제에.”


“알게 뭐야? 상관없는데~.”


잔은 화를 삭이며 방으로 들어가 겉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하루 종일 사건이 많아서 그런지 그녀는 침대에 눕기가 무섭게 바로 골아 떨어졌다. 

얼마나 지났을 까, 새벽녘은 어느새 해가 중천에 뜰 무렵이 되었다. 잔은 잠에서 깨어 옷을 갈아입고는 복도로 나왔다. 마리는 아직 자고 있는 듯했다. 잔은 마리의 방문을 지켜보다가 장난기가 돋았는지 조용히 마리의 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자던 마리를 슬쩍 보더니 지팡이로 마리를 겨누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는 지팡이를 타고 마나 결정 끝에서 수십배는 큰 목소리가 되어 방을 울렸다.


“수녀님 예배 시간에 무슨 불경한 짓입니까!!”


마리는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으와아ㅓ앟러아!! 주교님 죄송합니다아아악!!”


마리는 정말 놀란 얼굴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잔은 그런 마리를 보고 배를 잡고 웃었다.


몇 분 뒤, 마리는 옷을 갈아입고는 자신에게 신나게 얻어맞은 잔을 질질 끌며 복도로 나왔다.


“그러니까 잔, 장난은 적당히 쳐야지.”


잔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리는 씨익 웃었다.


“아인에게 가자, 몸이 좀 나아졌을 지도 몰라.”


마리는 아인이 있는 방의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 둘은 방안에 들어와 아인에게로 갔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잔은 놀라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상처 주위로 퍼렇게 퍼져 있던 독이 대부분 사라진 것이다. 잔은 애꿎은 하인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요? 비룡의 독에 감염되었잖아요!”


“죄… 죄송하지만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잔뜩 흥분한 잔은 하인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그게 할 말이에요? 뭐라도 좋으니 명확한 답을 내놔봐요!”


그때, 방 안에 들어온 카이저가 근엄한 목소리로 그녀를 말렸다.


“르블랑 양, 가만히 있는 하인을 건드려 봤자. 그는 아는 것이 없네.”


잔은 하인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고는 그에게 경례를 했다. 마리가 물었다.


“카이저님, 그렇다면 이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나도 잘 모르겠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잔은 카이저의 말을 듣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카이저님, 황실 도서관에 관련된 고문서가 있지 않겠습니까?”


카이저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황실 도서관이라 하면 지난 1000여년 간의 수많은 자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 분명 관련된 무언가 있을 것이라고 잔은 확신했다. 그리고 마침내, 카이저가 입을 열었다.


“사실… 나도 모르네.”


잔은 순간 어이를 잃고 멍하니 서있었다. 그러더니 잔뜩 열이 받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게 말이 됩니까! 카이저 맞아요?”


“잔, 카이저께 말이 너무 심해!”


마리가 말렸지만 잔은 더 크게 소리쳤다.


“카이저쯤 되는 사람이 황실 도서관의 책도 몰라요?”


“사실… 난 글을 잘 못 읽네…”


잔은 그 말에 너무나 놀라 화를 내는 것조차 멈추고 말았다. 카이저는 창피한지 새빨개진 얼굴로 변명했다.


“어렸을 때는 중요한 문서를 읽거나 쓰는 걸 하인에게 맡기고, 카이저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로베르트가 도맡았으니까…”


마리가 말했다.


“그럼 저와 잔이 도서관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잔은 깜짝 놀라 마리를 보며 물었다.


“야! 제정신이야?”


“응, 지금 아인의 일을 아는 건 우리뿐이야. 그리고 글을 읽을 줄 아는 것도 우리 둘뿐이지. 그러니까 우리가 찾아야 해.”


마리는 잔을 설득시켰다. 잔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 뭐.”


카이저는 하인을 불러 둘을 도서관으로 안내하라고 전했다. 잠시 후, 하인은 둘을 도서관 앞에 데려다 주고는 사라졌다 마리는 양 팔을 풀며 말했다.


“좋아, 그럼 들어가서 찾아보자.”


잔이 말했다.


“쉽지 않을 걸, 안에 책이 한 두 권이 아닐 거니까.”


마리는 자신만만하게 문을 열었다.


“그래 봤자 얼마나 한다고…”


마리는 도서관 안을 보며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도서관에는 1000여년 간의 방대한 기록들이 책장에 꽂혀 있었는데, 문제는 그렇게 세워진 책장들의 행렬에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어… 좀 많네…”


“이럴 때는 보통 ‘좀’이 아니라 ‘엄청’이라고 하지. 가자 마리, 비룡의 독에 관련된 책은 엄청나게 안쪽에 있을 거야.”


잔과 마리는 도서관 안쪽을 향하여 걸어갔다. 안쪽을 향할수록 책 냄새가 코를 자극할 정도로 강하게 풍겨왔고 점점 거미줄의 비중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34대 카이저 가브리엘 드레곤베인 3세의 기록쯤 에서는 언뜻 해골로 보이는 것을 보기도 했었다. 어느새 꽂혀 있던 책이 두루마리로 바뀌고도 한참을 더 지나 둘은 제국 초기의 기록이 있는 반대편 벽에 도착했다. 잔이 몸을 풀며 말했다.


“드디어 도착했다. 그럼 시작하자.”


둘은 손에 집히는 두루마리를 펼치며 관련된 기록을 훑어보았다.


“‘83용의 기록’은 아니고… ‘용과 그 피조물’… 아니고, ‘마지막 드레이크’… 이건 관련 없고… ‘맹독의 기록’… 이거다…! 우왔!”


마리는 순간 비명을 질렀다. 천 년의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삭아버린 두루마리가 그녀의 손 안에서 순식간에 부스러진 것이다. 당황한 마리는 멍하니 그 부스러진 것들을 바라보았다. 잔이 말했다.


“깔끔하게 부스러졌네.”


잔은 주문을 외워 부스러진 부분을 다시 복구했다. 마리가 집어 들기 전 수준의 모습은 아니지만 글자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잔은 두루마리를 공중에 띄우고 펼쳐서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비룡은 몸에서 독을 만들어 낸다. 그 독은 관을 따라 꼬리의 작은 가시들로 연결되고 그 가시가 대상을 공격할 때 뿜어져 나와 대상의 상처를 통해 체내로 침입한다. 독이 침투한 대상은 상처를 중심으로 초록색의 반점이 생기며 고열에 시달린다. 그리고 48시간 뒤, 대상의 온 몸에 독이 퍼져 숨이 끊어진다.’ 그러니까 해독방법은 없는 거냐고!”


“’일직이 카이저 미카엘 드래곤베인께서도 비룡의 독에 감염된 적이 있었다. 제국력 1년 9월 22일 카이저께서 43번째 비룡을 쓰러뜨리려 할 때, 비룡 하나가 비겁하게도 등 뒤에서 카이저님을 기습하였고 그분의 오른쪽 어깨에 … 내었다. 주변의 모든 미카엘 님의 부하들은 물론 현재 … 황태자이신 베르너 드래곤베인 님과 직후… 에서 전사하신 베르너 드래곤베인님의 친형 데니스 드래곤베인 님, 미카엘 드래곤베인 님의 외동딸 가브리엘라 드래곤베인 님까지도 미카엘 드래곤베인 님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 할 정도였다. 그러나 위대하신 솔리스 님의 가호 덕에 카이저께서는 사흘만에 완치되어 일어나셨으니 그야말로 솔리스님의 가호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씨발 아무런 쓸모가 없잖아!”


머리 끝까지 분노한 잔은 번개마법으로 두루마리를 먼지로 만든 다음 신나게 욕을 퍼부었다. 


“뭣 같은 사관 따위를 믿은 내가 잘못이지! 내 머리카락에 맹세코 내가 다시는 이딴 소설을 볼까보다!”


마리가 그런 잔을 말렸다.


“잔, 화내지 마. 그냥 돌아가자.”


잔은 화를 삭이며 광장으로 가는 차원문을 열고는 마리를 두고 사라져 버렸다.


“야! 나는!”


마리의 분노 섞인 목소리가 공허한 도서관을 울렸다.

----------

쉽지않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