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과거에 매이다 -5-


늦었다.

또 실패했다.

모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 르노는 몸이 기억하는 원한을 이끌고 나섰다.

신원을 특정하기 힘들도록 신분증부터 시작해서 패치, 현금 등 소지품을 전부 버렸다.

장비는 모니카가 노획해둔 불법 밀반입품중 상태가 적당한 권총과 싼 값에 구한 중고품 옷가지들, 그리고 얼굴과 머리를 가릴 흙먼지 묻은 쉬마그 한 장까지. 언제 버려도 상관없을 것들로만 챙겼다.

중간에 바꿔 입을 옷들을 숨겨둔 뒤 목표를 찾아 나선다. 마침 아주 가까운 곳이였기에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그를 잡고, 계속해서 연결고리를 이어 나가 도달한 꼭대기에서 묻고 싶었다. 아니, 죽이고 싶었다. 그들의 목숨과 헌신은 무엇이였냐고. 그의 피와 육신을 술삼아 먼저 간 이들의 넋을 기리고 싶었다.

그러나 신은 역시 방관자일 뿐이였다. 있다면 말이지. 아르노가 도달하고 본 풍경은 허망한 끝이 기다릴 뿐이였다. 그가 원한 목은 이미 누군가가 취하기 직전이였다.


" 너... 아니... 당신은... "


잠시 이성을 잃었다. 그 동안의 일은 생각나지 않았다. 제정신을 차리고 난 뒤 주변을 살핀다. 총상에 신음하는 자, 팔이나 다리가 최소 하나는 떨어져 나간 채 숨이 빠져나가기만 하는 자, 그리고 이미 스러져나간 자까지.

아르노는 탄만 뺀 빈 권총을 바닥에 버렸다. 이제 필요 없었다. 찾아온 사람은 죽었다. 이야기도 듣지 못한 채, 또다시 연결고리 하나가 끊어져 버렸다.


" 대체 왜. "


허망함. 그리고 뒤이어 찾아오는 슬픈 분노.

나도 죽었어야 했을까. 모니카가 도운다 해도 찾을 수 있을까.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늪에 갇힌 기분이였다. 팔다리 말단부터 천천히. 과거의 무게는 여전히 무거웠다.

무엇을 위해 이 곳까지 온 것인가. 결국 얻은 것은 없었다. 아니, 없진 않았다. 비참한 패배감을 얻었다.

정신이 다시 든다. 시계를 확인한다. 너무 오래 있었다. 주변을 대충 살핀다. 추적당할 여지는 없었다. 장소를 이탈하여 장비를 숨겨둔 곳으로 향했다.

보는 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말라죽은 나무 밑을 파냈다. 종이 봉투가 나왔다. 흙을 털어내고 포장을 뜯자 미리 준비한 옷이 드러났다. 다행히 외부의 흙이나 물기가 유입되지 않았다.

입고 있던 장비를 전부 벗고 숨겨둔 것으로 바꿔 입었다. 벗은 장비는 한데 모아서 불태웠다.

벌어진 일은 아마 선전용으로 쓰일 것이다. 마침 벽 밖의 반군이 쓰던 장비까지 던져 두었겠다, 날조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어차피 진실이 무엇이 중요할까. 그 놈들이라면 거리낌없이 희생시킬 것이다.


" 머리가... 아파... "


몸의 피가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였다. 두통에 기력부진까지 왔지만 신체적 문제는 아닌 정신적인 문제였다.

무거운 등과 함께 아르노는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벌어진 참사에서 대피하는 사람들과 반대로 뛰는 군부 속에 섞여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흔적을 태운 흔적 또한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 할 말 있어요? "

" ...... "

" 없어야 하겠죠? "


아르노는 모니카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조용히 갔다왔다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생중계에 살짝 찍히고 만 것이다. 그마저도 최대한 덜 수상한 선에서 얼굴을 가렸건만, 어떻게 알아낸 건지 뒤늦게 복귀한 모니카에게 들키고 말았다. 잠시 둘만 있자는 말에 속아 버린 것이다.


" 후련해요? "

" 전혀. "

" 그러시겠죠. 이미 작업당했을 테니. "

" 네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

" 제 탓으로 돌려봐야 의미 없어요. "


모니카는 아르노의 책상 위에 있던 차 한 팩을 꺼냈다. 자기 것도 아니건만, 자연스럽게 꺼내어 컵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부을 때까지도 아르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대충 예상은 했어요. 언젠간 터질 문제이기도 했고. "

" 일부러 내버려 둔건가. "

" 리스크가 크긴 했지만, 엇나가지 않으리란 확신도 있었고요. 봐요, 돌아왔잖아요. "


모니카는 아르노의 맞은편에 앉아 차를 들이킨다. 뜨거우니 살살 불어 식히고 입술만 살짝 댄다. 작은 찻잔에서 나는 차 향이 방 전체에 도는 것 같았다.

말 없이 차만 마시며 아르노를 응시하는 모니카. 아르노의 눈에 비치는 그녀는 평소의 흐느적거리며 막 사는 여자의 이미지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만큼은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눈이였다.

찻잔이 비워졌다. 모니카가 잔을 내려놓고 일어난다.


" 언제라고는 확신을 못 하겠지만, 보수는 제대로 준비해 줄게요. 기다려 줄 수 있죠? "

" 안 기다리면 뭐 할 수 있는게 있나. "

" 아주 잘 알고 계시네요. 차 잘 마셨어요. 추스리면 밖으로 나와요. 이바 상태도 봐야 하고, 할 말도 있으니까. "


모니카가 나갔다. 방 안엔 다시 아르노 혼자다.

잠시 앉아있던 아르노는 개인용 테이블 앞에 섰다. 잠겨있는 서랍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끼릭, 달칵, 하고 서랍이 열렸다.

안에 있는 물건들을 옆으로 치웠다. 드러난 것은 깊이 숨겨둔 나츠에의 신분증. 전 동료들의 물건들이 남아있지 않은 현 시점에서 유일하게 남은 유품이였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살아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헛된 꿈이였다. 모니카에게 주워진 후 언제였던가. 언론을 보다가 그의 팀의 죽음이 작전 중 전사로 처리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 이용당한 것이다. 누구들처럼.

그나마 다행인 건 가는 길을 그렇게 이용당한 덕에 허울뿐인 명예라도 얻었다는 것이다. 최소한 안치된 곳에 가볼 수는 있게라도 된 것이니 말이다. 물론 의심은 적당히 피할 조치는 해야겠지만.

아르노는 쥐고 있던 신분증을 도로 서랍 속에 넣었다. 아르노라는 이름을 얻고 난 이후가 아닌, 그 전의 흔한 일반병으로써의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남은 건 흔적 뿐, 마치 과거에 매달린 유령과도 같았다.


" 야. 방구석 소위아저씨. "


벌컥 문을 열고 나타나는 실비아. 마음에 안 드는 듯 살짝 찡그린 얼굴. 하필 옛 생각을 하던 때에 들어온 탓에 그녀와 나츠에가 순간적으로 겹쳐 보였다. 그녀 또한 아르노를 포함한 팀원들에게 잔소리를 할 때 이러한 얼굴이였다.

아니, 아니다. 이제 와서 뭘 생각하는 거야. 아르노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평소처럼 살짝 삐딱한 말투로 응수한다.


" 뭔데. "

" 너가 5분 넘게 안 나오면 모니카 씨가 데리고 오래. "


아르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이미지가 그려졌다.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우쭐대는 표정을 짓는 모니카. 이걸 떠올리자마자 없었던 두통이 또 생기는 듯했다.


" 다 아는 것마냥 굴고 있어, 진짜. "

" 나도 그건 좀 약오르긴 해. 때려주고 싶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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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랑 스토리 다시한번 정리하는데 좀 어긋난 거 많아서 꼴받는다

쓰면서도 정리가 안 돼서 머리아프다

예전에 메모한거 잃어버리지만 않았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