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30분이 넘게 자기가 쓴 글을 지웠다 돌렸다 다시썼다 하는, 그런 평범하게 나약하고 평범하게 재주가 없는 그런 사람이다. 그에게 자기 의사를 표출한다는 것은 마치 판타지나 다를 바 없었으리라. 딱히 그가 못나서 그런 것은 아니다. 딱히 그가 내성적이기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단지 그에게 있는 여러 욕망이 서로 충돌하다보니 결국 스스로 얼이 빠져 몸을 관성에만 맡긴 채 움직여가는 그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는 지금 시간여행을 하는 중일 수도 있다. 꿈 많던 시절, 그가 살아있던 시절로부터 언젠가 그가 다시 살아날 그 순간까지, 그 사이를 그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여행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화요일부터? 지난주 금요일? 아니, 5개월이 흘렀거나, 9년이, 아니면 17년이 흐른 걸 수도 있다. 보다 꿈 많던 시절이라면 더욱 더 예전부터일 수도 있다. 그에게 매일매일은 아주 긴 시간이다. 그에게 한달은 굉장히 짧은 시간이다. 그에게 10년은 찰나와 같은 시간이다.


그는, 그래, 전지하다고 스스로를 여겼다. 스스로를 신이라 생각하는 오만불손하고도 불경한 미치광이여서가 아니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그에게 더 위로가 되었으련만. 단지 그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그는 그가 모르고 있다는 것 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웃과 인사를 할 지, 어디서 그들에게 마음을 나눌지, 왜 그에게 이웃이 필요할지, 누구의 이웃이 될 지, 그리고 언제 이것들을 깨달아야 할 지 조차도 그는 몰랐다. 그렇다고 그가 딱히 세상의 심오한 진리나 감추어진 논리적 비밀을 알고 지식을 탐구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때때로 한번씩 해보는 그 상상—세상에 진정 존재하는 사람이 오직 그 혼자라면 하는 그런 부류의—을 했을 뿐이다. 친애하는 독자 (누군가가 이걸 읽어준다면 청자가 되겠지만) 여러분은 이것을 명심해 그를 단편적으로 미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선 그에게는 미움받아야 할 단점이 이밖에도 여럿 있고, 사실, 누군가 그를 제일 미워하거든 그것은 내가 되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의 일이다. 그가 회사를 나서서 퇴근길에 올랐는데 마침 가는 길에 청설모가 있더란다. 아예 다르게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흔히들 다람쥐라고 잘못 부르는 크고 귀 둥글고 회색빛 띄는 그 청설모 말이다. 비둘기와 더불어 늘상 도심지에 보이는 동물이니 별 생각없이 가려는데 유독 그 날 만큼은 그 청설모가 눈에 밟히더란다. 이상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청설모를 응시하며 갔는데 청설모도 그를 쳐다보더란다. 그가 충분히 가까워지자 그를 바라보던 청설모는 순식간에 나무를 기어올라가선 그의 시야에서 없어졌단다. 그리고선 그는 이야기를 끝마쳤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애초에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아니,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게 맞는 건지조차 나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생애를 조금 알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단조롭기만 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스스로 세상을 무채색으로 보고 푸념하는 그의 마음가짐과는 다르게 말이다. 아무리 재미없이 시간을 때우기만 하듯 살아가는 그라고 할 지라도 몇몇가지 이야깃거리는 있고, 그가 때때로 그것을 표현해보고자 하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다만 그에게는 이야기꾼과는 조금 다른 소명이 주어졌을 지도 모르겠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도 모르는 게 많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는 말하고 싶어하지만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모른다. 아무런 생각도 내용도 없이 다만 말하는 행위만을 하고 싶어할 뿐이다. 그는 또한 무언가 읽고 싶어하지만 그러면서도 깨우치지 않는다. 빈 껍데기를 쌓아 올리는 것도 근사해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존재한다. 존재하기 때문에 그가 사는 세상을 알 수 있다. 그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알 수 없다. 나와 여러분도 그러할 것이다. 그가 완벽하게 모든 것을 관찰하려면 필연적으로 그는 존재해야만 한다. 


그는 여러분의 친구이자, 경멸받아 마땅한 한량이기도 하고, 여러분에게 가르침을 갈구하는 학생이자, 또 여러분에게 보여지는 타산지석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여러분이 시간을 내어 읽고 있는 이 글을 쓴 자다.


보라, 여기에 두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