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말이지만 공모전에서 떨어진 작품.

엄청 예전에 쓴 거라 언제 낸 건지 기억도 안 남. 한 2년 3년 된 거 같은데.

그래서 철자나 내용 등 여기저기 문제가 좀 많을지도 모름.

그냥 파일 정리하다 우연치 않게 발견해서 여기도 올려봄. 딱히 올릴 만한데도 없고...




나, 그리고 우리.




아무것도 하기 싫고, 의욕도 없다. 

물론,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갑자기 의욕이 넘친다. 

이유는 모른다. 내 감정 상태이지만 나 조차도 이해가 되질 않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조울증 같기도 한데… 설마. 그 정도는 아니겠지.

아마 ‘조울증’ 이라는 말이 의사 입에서 나오려면, 나보다 훨씬 더 상태가 심각한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기분이 왔다 갔다 하는 건 부정하는 건 아니다.

부정과 긍정 사이의 간극. 

그 간극 사이에서의 평행은 이미 그 균형을 잃어버린 체 부정적인 쪽으로 기운지 오래고, 100점 만점에 조증이 50이라면, 한번 우울로 떨어질 때는 -70이다.

바꿔서 말하면 -20만큼 우울하다는 거지.

조증도 70까지 올라가야 균형이 맞을 텐데… 뭐, 우울감이 -100을 찍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한다. 

왜냐하면 익숙하니까. 인간은 원래 적응의 동물이 아닌가?

물론, 익숙하다고 해서 우울하다는 것이 좋다는 건 아니고, 조증과 우울증 둘 증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조증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실시간으로 하는 것 없이 시간을 버려도, 지금 이렇게 글이 써지지 않아도, 하루하루가 의미 없고 무기력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냥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물론, 정확히 따져 보면 ‘기분이 좋다’ 라는 느낌보다는 어디까지나 남들이 생활하는 평소의 기분에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것까지 생각하면 다시 우울 해지니까 그만하자.

그래,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라는 동물은 어떻게든 우울한 상황을 최대한 피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긍정적인 걸 상당히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

애초에 성향 부터가 긍정적인 성향이랑은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나는 매우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라는 거지.

 

‘현실을 생각하면 그 누구라도 부정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내 생각이자 나름대로의 철학이다. 

물론, 내가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문장이 최소 8할 이상은 맞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우리 엄마가 이따금씩 내게 하는 말 만 떠올려 보아도 바로 알 수 있다.

분식집. 우리 엄마가 근 1년 전부터 내게 농담 반 진담반으로 하는 말이다.

이제 일을 그만두고 퇴직금으로 분식집을 한번 차려보는 게 어떻겠냐는 게 주된 내용인데… 솔직히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긍정적으로 말 할 수가 있는가?

당연한 말하지만 그런 건 불가능 하다.

특히나 내가 더더욱 엄마의 분식집 창업을 말리는 이유는, 내가 직접 분식집에서 일을 해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까지만 말 하면 내가 무지성으로 부정적인 생각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 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 나 나름대로의 사고 프로세스를 한번 서술해 보겠다.

분식점. 도대체 분식점은 뭘까? 

액면으로만 보면 분식을 파는 식당라는 뜻이지만, 다른 각도로 보면 요식업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직종이다.

요식업이라 함은 곧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만들어서 파는 것이고 이것은 힘들다.

어떻게? 일단 기본적으로 요리를 만드는 것 자체가 힘들고, 사업을 시작할 때의 자본금도 상당히 많이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리스크가 꽤나 크다는 거지.

빚내서 벌려 놨는데 그거 망해버리면 도대체 뒷수습은 어떻게 감당해.

돈 있는 사람들이야 좌절감 정도 맛보고 끝 나겠지만, 돈 없는 사람들은 과연 좌절감으로만 끝날까?

게다가 요식업이라는 직종은 업무시간도 살인적이다. 

차이야 조금씩 있겠지만 오전 11시에 오픈해서 저녁 10시 즈음에 문을 닫는다고 치자. 

그러면 벌써 기본 근무시간만 11시간인데,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시간이 그렇다는 것이다.

시작 전 최소 30분 ~1 시간 정도는 일찍 나와 장사 준비를 해야 하고.

장사를 마치고도 마무리 청소를 해야 하니, 하루 24시간 중 얼추 13시간 이상은 일을 하는 데에 소모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분식은? 

일반적인 요식업이 이렇다면 엄마가 그토록 원하는 분식점은 어떨까? 

분식은 일단 튀김이 튀김이야 필수적이다. 튀김이야 말로 분식의 왕라고 할 수 있으니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튀김이라는 것이 상당히 관리하기가 까다롭다. 

뜨거운 기름을 다루는 데에는 생각 이상으로 위험성이 따르며, 기름을 다루기 때문에 주기적인 청소와 관리는 필수적이다.

거기다가 떡볶이까지 있다. 

스텐으로 만들어진 떡볶이 용기는 항상 따스한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벽면에 떡볶이 소스가 눌러 붙는 것이 당연하고. 눌러 붙은 떡볶이 보온용기 설거지는 상상 이상으로 힘들다.

어떻게 아냐고? 내가 그걸 알바 하면서 씻었으니까.

나 역시 불려도 불려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이 떡볶이 소스라는 걸 별로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찌됐든, 내 안 좋은 허리를 갈아가면서 느낀 바로는 이건 사람 할 것이 못 된다.

게다가 간식과 식사 그 어중간한 포지션에 끼여 있는 분식이라는 특성상 분식집에는 브레이크 타임이 따로 없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따져보면, 분식이라는 것은 요식업 중에서도 꽤나 난이도가 높은 요식업에 속하는 것인데… 만약 여기에서 장사까지 안된다면? 

 

애초에 다 떠나서, 분식 이전에 요식업을 해서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뭐… 누군가는 성공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긍정 부정을 떠나서 그냥 액면상으로 보이는 확률을 한번 이야기해보자는 뜻이다.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을까? 아니면 성공할 확률이 더 높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이건 더 볼 것도 없이, 그냥 누가 봐도 실패할 확률이 더 높다.

물론, 누군가는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도 있다고 할지도 모르겠지.

나 역시도 실패로부터 배우는 건 좋고, 그때의 실패로 배우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실패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건 정신적인 문제뿐 만이 아니라 물질적인 문제도 포함하는 것이다. 

요식업이라는 건 시간도, 돈도 많이 들어가는 리스크가 꽤나 상당한 사업이라고.

그런데 만약 실패를 한다면? 돈은? 돈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데…?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돈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것이며 시간은 곧 생명과도 같다. 

그런데 그런식으로 피 같은, 생명과도 같은 돈을 계속 태워가면서 정신적 데미지를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게다가 우리 엄마는 열정적으로 요식업을 할 가능성이 낮다.

맨날 허리 아프다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힘든 주방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젊은 사람도 하기 힘든 사업을 나이 60이 다 된 사람이 시작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

바꿔 말 하면, 이 모든 것을 다 감안했을 때 분식집을 하는 건 그냥 돈을 허공에다가 던지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라는 판단이 서는 것이다.

물론, 우리 엄마는 내가 이런 말을 해도 수긍하는 듯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지만. 어찌됐든 왜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이 분식점 이야기로 잘 설명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 사고방식 메커니즘 안에서만큼은 부정 = 현실이라는 것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긍정이냐 부정이냐를 떠나 냉정하게 따져보면 사업이 망할 확률이 더 높은 게 사실이지 않는가?

 

내가 이런 이야기를 엄마뿐 만이 아니라 내 친구에게도 한 적이 있는데, 바로 오늘 나와 약속이 잡혀 있는 C라는 친구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녀석과는 중학교 시절부터 친해진 친구라고 알고 있었지만.

C라는 친구의 말에 따르자면 나와의 첫 만남은 초등학교였다고 한다.

무슨 기타 치는 곳에서 처음 만났다나?

왜 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체험 같은 걸 요즘도 종종하지 않는가? 

아마도 그런 곳에서 처음 나를 만난 것 같은데, 그 녀석이 말하길 내 첫인상이 상당히 험악했다고 한다.

 

‘뚱뚱하고, 키 크고 덩치 크고 시커먼 녀석.’

 

항상 내 어릴 적 이야기가 나올 때 마다, 친구 놈 입에서 나오는 나의 이미지는 어순이 바뀔지 언정 그 내용 자체는 변하지 않는데, 그도 그럴 것이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또래에 비해서 키도 크고, 수염도 많이 났었다.

초등학생이 수염이라니… 좀 웃기긴 한데 실제로 그랬다. 

그래서 그런가 지금도 수염이 상당히 많은 편이지만, 안타깝게도 키만큼은 그때의 자취가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한창 많이 커야 할 중학교 시절에 아팠던 탓인가 싶기도 하다.

아마 중학교 3학년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 식중독 비슷한 병에 걸려서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이게 얼마나 심했냐면, 뚱뚱하다 못해 돼지라는 소리를 듣던 사람이 몇 달 만에 멸치가 되어 버렸다. 

물론, 키는 유전의 영향이 9할 이상이라고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인간인지라 이때 더 먹었으면 키가 더 컸을까… 라는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인간은 원래 과거에 사는 if의 동물이 아닌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 키가 완전 작은 편은 아니라는 것이다. 

5점 만점에 3.5정도 될까? 쉽게 말해서 그냥 평균보다 약간 더 큰 정도다.

그래서 그런가 항상 5cm 정도는 더 컸으면 하는 바램이 있지만, 이뤄 질 수 없는 꿈이니 키 이야기는 여기 까지만 하자. 

어찌됐든 주로 집에 있는 걸 선호하는 내가 C를 만나는 이유는 다름아닌 저녁 식사 때문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더 파티 뷔페 식사 권 하나가 남는데 같이 가자고 하더라고.

물론,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지만. 

도대체 무슨 짓을 해야 더 파티 뷔페 식사권이 남을 수 있는 건지…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물어보니 C 의 말로는 자기 부모님은 더 파티 보다 더 좋은 곳에 다닌다고 한다.

더 파티는 맛이 없다나 뭐라나?

그래서 계속 안 쓰고 계셨던 모양인데, 쓰레기통 위에 올라와 있는 걸 자기가 구조해왔다고 한다.

 

“… 맞나. 그러면 니도 더 파티 별로인 거 아이가?”

“아니… 우리 엄마랑 아빠가 싫다는 거지. 내가 싫다는 게 아이다이가.

“우리 엄마랑 아빠는 무슨 모임에서 가는 거라 항상 나는 빼놓고 간다.”

“…”

 

그렇구나. 그것 참 서운하네.

C 왈. 자기가 불평하면 알아서 돈 벌어서, 그렇게 가라고 말씀하신다는데.

뭐… 덕분에 내가 공짜 뷔페를 얻어먹게 되었으니까, 적어도 내 입장에서 보자면 마냥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다.

 

“니 그나저나 다 왔나. 나 벌써 도착했디?”

“어? 벌써? 도착했나? 나 이제 4정거장 남았는데?”

“시발 니 왜 이래 늦노?”

“아니… 나도 늦고 싶어가 늦는 게 아니다. 버스 놓쳐 가지고… 한 대 놓치니까17분 쳐 기다리라더라. 정신 나간 거 아이가?”

 

정신 나간 거 아니냐는, 진심 어린 내 한 마디에 수화기 건너편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17분이라니… 내가 방금 말 하고도 어이가 없는데 실제로 이 동네가 이렇다.

눈 앞에서 버스를 놓치는 눈도 비일비재한데, 그걸로도 모자라 17분씩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면 인생의 부조리함이 느껴진다.

생각해보니까 열 받네? 도대체 왜 이 동네는 버스 배차를 안 늘리는 거지?

집에서 밖으로 나갈 때도 나갈 때이지만 들어올 때도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방향에 있는 버스정류장.

그 좁아 터진 곳에 우글우글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진짜 얼마 없는 인류애도 사라지는 기분인데, 그나마 다행이라면 C는 이런 내 사정을 어느정도는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러면 그냥 역에서 기다리지 뭐.”

“고맙다 C 야.”

“그래 고마워해라 임마. 내가 밥도 사주고, 기다려도 주고… 어?”

 

오늘 내게 베푸는 게 얼마인데 처신 잘 하라는.

나는 친구 놈의 농담에 대답 대신 웃음으로 답하고.

이때까지만 해도 그저 아무런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대화에 불과 했다.

C 라는 친구가.  ‘소설’ 이라는 단어를 별 생각 없이 입 밖으로 꺼내기 전 까지만 해도 말이다.

 

“어? 소설… 말이가?”

“그래. 니 요새 쓰는 소설은 잘 되가나?”

“…”

 

씁쓸한 이야기에, 잠시 침묵이 흐른다.

솔직히 이런 이야기하기 싫은데… 그렇다고 해서 말 하기 싫다고 할 수도 없으니.

나는 그냥 대충 입에 발린 말로 녀석의 질문에 답한다.

 

“아니. 잘 돼 가면 내가 이러고 있겠나. 맨날 똑같지 뭐.”

“맞나… 그러면 도착하면 연락해리.”

“…”

 

전화가 끊어지고, 나는 지하철 한 구석에 선 체 멍 하니 창 밖을 바라본다.

짙은 검 회색으로 물든 콘크리트 벽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지루한 풍경.

이렇게 빠른 속도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칙칙하고 습해 보이는 게 꼭 마치 내 인생을 보는 듯한데, 도대체 뭐가 어떤 식으로 내 인생처럼 보이는 가를 설명하자면 다시 분식점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엄마가 열열하게 열망하는 분식점이 과연 성공할까?’

 

당연한 소리지만 100% 실패하겠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사막에 콩을 심는다고 그 콩이 날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어찌됐든 콩이라도 심어야 싹이 나든 뭐가 나든 할 거 아닌가.

바로 여기서.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가 드러난다.

아마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도, 그저 쓰레기통처럼 내 감정 하소연이나 잔뜩 받다가 저 어디 휴지통 같은데 박히겠지. 

다시 말하지만, 이건 부정적인 게 아니라 정말 쓰레기 통에 박힐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소설이 어떻게 완성이 되어서 공모전에 나간다고 치자.

그러면 아무리 못해도 경쟁률이 몇 백은 될 텐데… 과연 내가 1% 미만의 확률을 뚫을 수가 있을까?

아마 거의 불가능 하겠지. 

하지만 방금 전에도 말했듯, 뭔가 성과를 거두려면 씨앗을 심어야 한다.

이미 안 된다는 것이 머릿속으로 계산이 다 끝났는데도 계속해서 뭔가 성과가 있을 때까지 도전하고 또 도전해야 하는 것이다.

끔찍하지 않은가? 

어떤 멍청이는 이걸 아름답다며 포장하기도 하던데, 내가 볼 때는 그저 승자의 자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 나 역시 이 지랄하다가 성공하면 이때까지 느꼈던 환멸감과 증오. 자기혐오 등등…

그야말로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체 한달도 안 되어서 두루뭉술하게 변해버리겠지.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는 존나 힘들었지만. 지나와서 생각해보니 다 추억이네...’ 

 

물론, 지금의 나로서는 이러한 일련의 사고 프로세스 과정을 납득하기가 든 것이지만, 분명 나 역시도 그렇게 될 것이다.

원래 개구리는 올챙이적 기억 못 하는 것이다. 서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도 없고.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분명히 개구리들도 올챙이 시절을 거쳐 왔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은 100% 온전하지가 않은 것이거든.

기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무의식 적으로 편집해서 행복과 불행의 평균값을 내어 기억한다.

가령 70의 고통을 받고 30의 행복을 느꼈다면, 당연히 70의 고통으로 기억해야 맞는 것이지만.

실제 인간은 행복과 고통의 평균값을 내어 총 50으로 기록을 남긴다.

그러니 한 사건에 대해서, 그 끝이 좋았다면 아무리 끔찍했던 기억이라도 최악이 아니라 차악이, 고생이 아니라 추억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평균값 낼 행복도 없고, 개구리도 되지 못해 올챙이에서 헤매는 나는?

아니 애초에… 나라는 존재는 개구리가 될 수 있나?

 

“…”

 

우울하다. 

이런 생각 안 하는 게 좋다는 건 그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지난 6년간의 삶 때문일 수도, 아니면 나는 그냥 타고 나기를 이렇게 타고 났을 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출제자인데 답을 모르는 상황이다.

이게 무슨 궤변 같은 말인가 싶지만, 적어도 내가 느낀 삶과 인생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

“왔나.”

“어… 그래 왔다.”

“뭔데? 니 어데 아프나? 표정이 안 좋노.”

“아니 그냥… 뭐 좀 생각 좀 하느라… 그나저나 더 파티는 어디고? 몇 번 출군 데?”

“7번인가? 몰라 확인해 봐야 된다. 잠만 기다려 봐라.”

“…”

 

확인해봐야 한다는 말을 끝으로, 나와 C는 잠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싫다거나 어색한 것은 아니다. 

좀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친하니까 말이 없는 것이다.

 

“… 7번 맞네.”

“확실 하나?”

“어. 확실하니까 니는 그냥 나만 믿고 따라오면 된다.”

“…”

 

믿고 따라오라는 친구의 말에, 나는 어딘가 모르게 서늘함이 느껴지는 대리석 계단을 따라 지상으로 나온다.

높은 빌딩. 그리고 크고 넓은 도로 위로 스쳐 지나가는 차량들.

나는 낯선 곳의 거리를 두 눈으로 유심히 살핀다.

따스함 보다는 차가움과 딱딱함이 느껴지는 이 빌딩 숲을 말이다.

 

“와… 이 동네는 건물이 으리으리하네…”

“잘 사는 동네니까 그렇지… 니는 무슨 촌에서 올라왔나?”

 

말하는 것만 보면 무슨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이 할 법할 소리를 하고 있다고.

C는 내 반응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내 두 눈은 여전히 이 낯선 환경을 담느라 정신이 없다.

 

“아니… 나는 이 동네 사람 아니니까 잘 모르지. 내가 여기 올 일이 뭐가 있노?”

 

백화점이며, 바다며, 호텔이며, 유명한 곳은 전부 다 반대쪽에 있으니…

가면 거기로 가지 이쪽으로 올 일은 잘 없다고.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이 녀석도 이제서야 어느정도 수긍하는 듯한 눈치다.

 

“하긴 뭐… 생각해보니까 이 동네 사람 아니면 올 일이 없긴 하겠네.”

“그래, 백화점도 저 짝에 있고… 볼만한 건 다 반대쪽에 있으니까 올 일이 없지.”

 

집에서 멀기도 먼데, 굳이 이 먼 곳까지 와서 이런 볼거리 없는 곳에 올 일은 없으니…

나는 그렇게 친구를 따라 이 낯선 거리를 걷는 것도 잠시.

저 멀리 보이는 익숙한 간판에 발걸음을 멈춘다.

 

“어? 저기 W&M 이네?”

“뭔데 그게…”

“리쿼샵. 술 파는 데다. 나중에 갈 때 저 리쿼샵 좀 들렸다가 가자.”

“왜? 니 뭐 위스키 살라고?”

“아니. 위스키는 너무 비싸고 그냥 맥주 괜찮은 거 있으면 집어 올라 그러지.”

“맞나. 그러면 나도 하나 추천해줘 맥주.”

 

시원하게, 집에 가서 한잔하고 싶다고.

그러니까 맛있는 걸로 추천해 달라는 친구 놈의 말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는 그렇게 리쿼샵에서 한참을 더 걸어가 빌딩 숲의 끝자락에 다다른다.

도심에서 꽤나 떨어진, 이제는 사람도 많이 안 보이는 한산한 곳.

아무리 봐도 이런 곳에 뷔페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여기 확실하냐고 물어보니까 C의 말로는 제대로 찾아 가고 있다고 한다.

 

“그래?”

“그래 저 봐라. 저 있네.”

“…”

 

회색의, 아무런 특징도 없는 빌딩.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오피스 빌딩처럼 보이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정말 더 파티라고 적혀 있다.

 

“아니… 뭐 이런데 뷔페가 있냐?”

“몰라. 그런 게 지금 중요한 게 아이다이가! 하… 시발 나 존나 떨린다고.”

“뭐가.”

“오랜만에 이런데 와서 떨린다고.”

“떨리기는… 뭐가 떨리노 임마.”

 

새끼… 어지간히 떨릴 것도 없다고.

나는 친구의 호들갑에 웃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우리는 그렇게 오피스 건물 5층으로 향한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걸려있고, 황 동색 계열의 장식품과 검붉은 카펫이 깔려 있는 곳.

그것은 언제든, 그리고 누구든, 우리 같은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 하는 듯하지만. 

화려한 장식과는 달리, 뷔페 내부는 생각보다 한산했고.

그래서 그런가, 우리를 안내하는 직원분의 표정 역시 한층 밝아 보인다.

 

“여가 우리 자리인갑네… 나는 창문 옆에 앉고 싶은데…”

“뭐 어쩌겠노. 배고픈데 어서 가지러 가자.”

“그래 가자. 알제? 찬 음식부터 배에 넣어야 많이 들어가는 거?”

“어. 니가 전에 말해줬다 이가.”

“…”

 

그랬던가? 

사실 나도, 찬 음식부터 먹어야 한다는 말을 어디 공신력 있는 곳에서 들은 게 아니다.

그냥 예전 학원 선생님에게서 들은 말이라, 이게 진짜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확실히 이렇게 먹으면 조금 더 많이 먹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래 그러면 일단 회부터 먹을까? 찬 음식이다이가.”

“그러자. 나는 회랑 샐러드랑 해서 담아 갈란다.”

 

처음에는 가볍고, 새콤하고, 상큼한 음식으로.

나는 그렇게 접시에 음식을 담아 자리로 돌아온다.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다. 이런 여유… 평소에는 느끼기 힘든 것이니...

나는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가져 다가 먹기로 한다.

 

“맛있네. 나 회 진짜 오랜만에 먹는다.”

“그래? 나는 요 며칠 전에도 회 먹어서 그런가 솔직히 그냥 그렇네.”

“아니 니는 존나 잘 쳐 먹고 다니네? 어? 나는 시발? 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먹을 게 없어서 낑낑거린다는 친구 놈의 말에 나는 그저 웃는다.

확실히. 이렇게 맛있는 거 먹으면서 친구랑 이야기하고 있으면 삶에 대한 스트레스가 느껴지지 않는 것 같기는 하다. 

문제라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곧 줄어듦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만.

 

“야. 그나저나 니는 뭐 재미있는 일 없나?”

“나? 나야 맨날 집에 쳐 박혀가 글 만 쓰는 데 재미있는 일이 있을 수가 있나?”

“그래도… 그래도 잘 찾아보면 하나 정도는 있을 거 아이가.”

“없다… 뭐가 있겠노.”

“…”

 

단호한 내 한 마디에, 잠시 불편한 침묵이 흐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현실이고 팩트다.

맨날 밥 쳐 먹고 글만 쓰는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제발 누가 좀 알려 줬으면 좋겠는데… 사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친구 놈 역시도 딱히 재미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상황이 구조적으로 재미 있는 일이 일어날 수가 없는 상황이니까.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C 라는 친구는, 이제 대학교 졸업해서 취직도 못하고 백수로 신분 강등당했고. 동시에 집에서의 눈치밥을 피해 알바나 전전 긍긍 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좋은 소리가 나와? 

그건 그것대로 나름 리스펙 해줄 만하지만… 아마 이 녀석도 아차 싶었을 것이다. 

어차피 이런 말 나올 게 뻔한데, 이런 이야기… 해 봐야 좋을 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러는 니는 뭐 재미있는 일 있나 C ?”

“아니 나도 없다… 그냥 한번 물어봤다. 혹시나 해서…”

“…”

 

서글프구만.

그런데 사실, 이런 상황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났으니까 근황은 물어 봐야겠고, 물어본 근황은 100이면 100 좋은 말 안나 올 게 뻔하고, 그렇다고 해서 입 닫고 밥만 먹으면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지만 만난 의미가 없는 것 같고…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것도 일종의 딜레마가 아닐까 싶다.

 

“야. 그나저나 니 알바는 할 만하나? 뒤질 것 같다며?”

“어. 시발 진짜 개 좆같다. 어떤 한 새끼 추노해가지고 내가 대타 하느라 요번 주 쉬지도 못했다.”

“맞나…”

“어. 아니 야. 와… 진짜로 몇 시간 동안 초밥 네타 올리고 있으면 정신분열 올 거 같다니까?”

“…”

 

알지. 나도 그 마음.

비록 C처럼 알바를 길게 해본 경험은 적지만, 이것저것 종류 다양하게 많이 해본 경험은 있어서 공감이 많이 된다. 

특히나 C의 정신분열 걸릴 것 같다는 말이 인상 깊게 느껴지는데.

내가 예전에 공장에서 단순 반복 작업 알바를 한번 해봐서 그런가 남일 같지가 않다.

진짜 한 4시간 진공 포장기만 누르고 있으니까, 정말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나처럼 이런 단순 반복이 안 맞는 사람들은 진짜로 사람이 미쳐버린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바로 알 수 있다.

 

“알지. 나도 예전에 식품공장 알바 했었다이가.”

“내가 항상 말하지만 수명을 팔아서 돈으로 바꿔야 하는 시대가 와야 한다니까?”

“니는 또 그 소리가 시발.”

 

습관처럼, 한 번씩 튀어나오는 내 레퍼토리에 녀석이 웃는다.

사실, ‘수명을 팔아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기능.‘ 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항상 주장하는 것들 중 하나인지라 이런 반응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나는 그럼에도, 항상 이 이야기를 꺼낼 때 마다 나름 진지하다. 

 

“아니. 니 영화 그거 봤제? 내가 말하는 거랑 똑 같은 영화가 있다니까?”

“알바도 장기적으로 보면 시간 낭비인 거 알제?”

“알지. 그런데 그게 불 가능하다이가.”

“…”

 

그렇지… 그렇게 말하니까 또 슬프네.

물론, 누군가는 알바도 경험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길게 잡아도 1달 정도나 색다른 경험이지 익숙해지면 그냥 빨리 퇴근이나 하고 싶은 게 알바생 마음이다.

그리고 지금 저 녀석 꼴을 봐라. 알바 한다고 아무것도 못 하고 알바만 하고 있지 않은가.

알바 하는 곳의 정직원을 노리거나, 아니면 사람을 다루는 서비스직종으로 취직할 계획이 있다면 장기적으로 알바 한 게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리고 이 녀석도 그런 쪽은 질색이다.

왜냐고? 일단 기본적으로 성향도 성향이거나와, 지금 눈 앞에 있는 내 친구.

그리고 서비스직에 근무하는 엄마, 주변 친척, 인터넷 등등… 서비스 직이라는 직종은 욕이 나오면 나왔지 좋은 말이 나오는 걸 본 적이 없다.

특히나 나는 아주 실감나게, C로 부터 온갖 진상 이야기를 듣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 느낌이 훨씬 더 하다. 

가뜩이나 없는 인류애 자리에 인간 혐오가 생겨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니… 그런 새끼들은 도대체 사고 회로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몰라 시발… 내가 분명히 우리 지점 말고 다른 지점이라고 했는데, 그걸 우리 지점 맞다고 박박 우기면서 우리 지점 예약해 달라고 하면 내가 뭐 어떻게 해야 되는데?”

 

A 지점에 예약을 해야 하는데.

B지점이 A 지점이라고 우기면서 B지점을 예약할 것을 요청.

그래서 A 지점이라고 재차 말했는데, 그걸 또 B 지점이라고 우기면서 화내는 경우.

음… 다시 봐도 정말 인류애가 사라지는 기분이 아닌가? 

그래서 결국 온갖 고객이라는 개새끼의 지랄이라는 지랄은 다 들어주고 그렇게 끝난 줄 알았는데, 도대체 왜 좆 같은 일은 끝까지 디테일 하게 사람 기분 나쁘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진짜가? 네이버 후기에 그렇게 써 놨다고?”

“어. 아마 내 이야기하는 것 같더라, 직원이 불친절 하고 예약도 안 해준다고.”

“…”

 

어지럽네. 

그런데 여기서 더 웃긴 점은 이 인간, 리뷰는 또 B 지점으로 써 놔서 엄한 B지점 알바만 당하게 생겼다.

 

“와… 그 정도면 지능 문제아이가?”

“몰라… 하. 이 동네 진짜 이상한 새끼들 너무 많다. 돈만 있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때려 치울 텐데.”

“그래.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라도 한시 빨리 우리의 수명을 파는 기술이 등장해야 한다. 맞제?”

“아니… 니는 시발 또 그 소리가? 그 이야기 한 번만 더하면 어? 알제?”

“…”

 

알긴 뭘 알아 임마…

장난치듯, 일부러 오버하는 친구 놈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만나면 항상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는 것 같다.

항상 시작은 뭐 재미있는 일 없냐로 시작해서, 오늘처럼 늘상 했던 이야기들이 그냥 쭉 이어진다.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

그리고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엄연히 따져보면 좆 같은 이야기들… 

바꿔 말하면, 지금 우리의 인생은 지루하고, 별반 다를 것도 없으며 좆같다고도 할 수 있는 거겠지.

 

“야, 그나저나 니는 뭐 작품 하고 있나? 뭐 웹툰 새로 구상하고 있다며.”

“나? 하고는 있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다. 알바 하느라 시간도 없고.”

“… 맞나. 전에 내 한테 이야기한 그 웹툰 하고 있는거제?”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거 할려고… 그나저나 니는? 니는 요새 쓰는 소설 어떤데?”

“…”

 

아까 지하철에서 했던 질문이 또 다시 되풀이된다.

유쾌하지가 않다. 내 실패와 고통을 되 돌아본다는 점에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좆 같은 건, 이렇게 이야기해봐야 이 시궁창 같은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 초창기에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어느 순간인가 깨달아버렸다.

이렇게 말 해봐야 이 거지 같은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더라고, 괜히 말 해봐야 나만, 그리고 내 말을 듣는 사람만 고통스럽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그냥 입을 닫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었지만… 이 녀석이랑 만나게 되면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냥 그렇지 뭐… 솔직히 말해가지고 뭐 되겠나 이거.”

“아니다. 그래도 모르는 거 아이가.”

“…”

 

모른다라… 그래, 모르는 거 맞지.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안다는 말도 있지만 내가 겪은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굳이 안 대어 봐도 알 수 있는 게 있다고.

물론, 석가모니 말하길.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걱정하지도 말고 어떻게 될지 판단하지도 말라 했지만… 나는 석가 같은 성인이 아니라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속에 허우적거리며, 앞날의 불안감에 지나온 과거로 어떻게든 미래를 밝혀보려 애쓰는 한낱 중생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내게, 앞날은 모르는 거라고 말하면 도대체 뭐라고 답해야 하지?

 

“…”

 

여러가지, 안 좋은 감정들이 스쳐 지나가지만 결론은 하나다.

그래,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지도 모르겠지.

영혼 없는, 그야말로 빈 깡통 같은 말이지만 이게 정답이다. 

병신 같지만 그저 하염없이, 쥐구멍에 볕들 날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건 내 친구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냥 좋은 말 해주는 거지, 그게 좋은 거고 서로 좋은 거니까. 

그러니까 나도 굳이 재를 뿌리고 싶지는 않다.

 

“하아… 그래, 언젠가는 좋은 날 오겠지.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네.”

“그래. 좀 니는 긍정적으로 좀 생각해라.”

“긍정? 니 지금 나 한테 긍정론을 들먹이나? 어?”

 

진짜 뼛속까지 우울하게 해줄까? 라고.

내가 그렇게 장난식으로 말하니까 이 새끼, 실실 웃는다.

 

“아니. 됐다. 내가 잘못했다. 그나저나 니 더 먹을 거제?”

“어. 이제 한 접시 먹었는데 당연히 더 가져와야지.”

“우리 같은 놈들이 뷔페 오기 쉽나? 왔을 때 아무리 못해도 본전의 80% 정도는 뽑아야 될 거 아이가.”

“80? 이 새끼 배때지가 불렀네. 120, 150까지 채워야 될 거 아이가!”

 

배 터지게 먹어보자는, 친구 놈의 말에 나는 접시를 옆으로 치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런데 딱히 입맛이 없다. 소화도 안 되는 것 같고.

시발… 이게 다 저 놈 때문이다. 

쓸데없이 글 이야기를 들먹여서 또 다시 온갖 잡생각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는 것이다.

 

“뭔데? 니 고기 안 가져왔네?”

“어, 그냥 다음 접시에 먹을려고.”

 

차마, 얻어먹는 입장으로서 너 때문이라고는 말 못하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나는 최대한 소화 잘되는 음식으로만 구성된 흰 접시 위로 젓가락을 올려본다.

새우, 야채, 그리고 가리비 같은 해산물.

첫 두 세점 정도는 위와 식도를 연결하는 통로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는데, 막상 또 이렇게 잡담하면서 꾸역꾸역 집어넣으니까 어떻게 들어가기는 한다.

 

사실. 친구 탓을 하기는 했지만, 평소에도 자주 있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신경 병인 것이다.

원채 내가 타고나기를 잡 생각이 많게 타고나기도 했고.

특히나 요 근래 한 6년 동안 인생 심하게 말아먹으면서 그게 너무 심해졌다. 

그래서 한 2~3년 전까지만 해도 역류성 식도염 약을 달고 살았다. 

안 좋은 식습관도 없고, 규칙적으로 식사도 하고, 심지어 3끼 외에는 일절 먹지도 않는데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얼마나 잡생각이 많아져야 이 지경에 오를 수 있는 건지, 나 자신이 겪고 있으면서도 놀라울 지경인데. 

어디선가 들은 이 한 마디가, 어느 순간인가부터 내 뇌리에 종종 등장해서 나를 괴롭힌다.

‘매너리즘에 쪼들리다 못해 절여졌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딱히 행복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지금 이 순간이 사실 내 인생 최고의 전성기라면?’ 

인생은 각각 전성기가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가 먼저 성공해도 조급해하지 말라던 어느 현자의 이야기였는데, 내 머릿속의 사고과정을 거치면서 이렇게 부정적으로 변했다.

가장 힘들다고 느꼈던 순간이 지나와보니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라.

만약 어느 순간 문뜩 이 사실을 깨 닫게 되면 얼마나 내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질까?

이제 남은 시간은 1년. 아니, 지금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7개월.

이제 7개월만 지나가면 학생이라는 신분에서 백수라는 신분으로 강등 당하는 걸로 모자라 본격 적으로 취업 준비를 해야 한다.

아니,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잘 풀리면 괜찮겠지만 내 인생에서 그런 경험은 단 한 번 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이미 많이 뒤쳐졌다. 얼마나? 글 쓰느라 소모한 시간 6년만큼.

만약 글 쓰는 걸로 먹고 살 수 없다면 이 6년은 휴짓 조각이 되어버릴 것이고, 그러면 그만큼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도 힘들겠지.

부정적인 게 아니라, 확률 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다. 

내가 너무 부정적이고 생각도 많다는 건 나 역시도 잘 알고 있다고.

그런데 나도 변명을 좀 해보자면 이렇게 생각이 떠오르는 걸 제어할 수가 없다.

인간이라는 생물이, 그다지 썩 탐탁지 않은 환경에 오래 노출되면 진짜 별의 별 생각을 다 하게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혹시 알고 있는가?

나 역시 별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 인생이라는 게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으니 어느 순간 몸에 베이다 못해 나와 하나가 되어버렸다.

내 경험, 과거, 데이터. 

나름대로 체계와 논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기초적인 사고 처리시스템을 활용해 생각해 봤을 때, 당연히 확률 적으로 실패할 확률이 높으니까 자연스럽게 모든 사고가 실패하는 쪽으로 기울어 물들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인가부터 실패라는 단어가 곧 나를 지칭하는 단어가 되어버린다.

성공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싶고, 모든 목표 의식이 흐릿해지기 시작하고.

동시에 왜 살고 있는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이런 짓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지. 

더 나아가 지금도 이런 짓을 하고 있는 나는 제정신인가에 관하여 매일매일 생각한다.

그런데 웃긴 건, 그것조차 어느 순간인가 또 적응을 한다.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이 아무런 영양가도 없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야. 근데 니 이 가리비 어디서 가져왔는데?”

“저기 니 폭립 가져온데 바로 건너편에 있던데? 니 못 봤나? 하나 먹어바라.”

“아니. 됐다. 그냥 내가 가져다가 먹으면 되지.”

“그래, 이 접시 다 비우고 다음에 갈 때 가져 온나.”

“…”

 

무심한, 내 한마디와 함께 대화수가 급격하게 줄어든다. 

먹느라고 그러는 것도 있는데, 딱히 할 이야기가 없다.

앞에서도 말 했지 않은가? 

우리 인생은 앞으로 비참할 예정이며, 지루할 것이며, 똑 같은 것이며 이미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

이야기를 해도 맨날 했던 이야기의 반복이다. 

몇 가지 정해져 있는데 내 친구 놈의 어린시절 이야기, 여행, 그리고 군대. 딱 이 범위에서 벗어나는 일이 잘 없다.

그런데 이건 남들도 다 그럴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같은 중생들 사는 게 하나같이 비슷하지 뭐… 그렇지 않은가?

물론, 그럼에도 내가 유독 싫어 하는 게 있는데, 군대이야기랑 내 친구 놈 어릴적 이야기를 그다지 썩 좋아하지 않는다. 

재미가 없어서 싫은 게 아니라 너무 자주 들었다.

아마 한 10번은 듣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런가, 이번에는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야. 니는 근데 그 알바 언제까지 할 건데?”

“하아… 몰라. 자취하고 있어서 당분간은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

“자취? 어디서?”

“수영.”

“수영? 아니… 그냥 한 1~2년 정도는 부모님이랑 같이 살지 왜? 월세 돈 많이 든다이가.”

“맞는데… 집에 있으면 눈치 준다. 그리고 작업 공간도 필요하고.”

“…”

 

서글픈 친구 놈의 한 마디에, 나 역시도 기분이 씁쓸하다.

친해서 남일 같지 않은 것도 있지만, 어쩌면 7개월 뒤의 나의 모습과 저 녀석의 모습이 닮은 것 같아서.

마치 거울을 보는 듯 무의식 적으로 겹쳐져서 그럴 지도 모르겠다.

대학을 졸업하면 나는 뭘 하게 될까?

아무런 계획도 없는 취업준비? 아니면 계속 써오던 답도 없는 글 쓰기?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 이 녀석처럼 무의미한 알바를 하게 될까?

 

“그래, 그러면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혼자 살면 편하기는 하겠네.”

“사실 혼자도 아니다. 그냥 내 아는 사람이 같이 자취하자고 해서 돈 절반씩 내기로 했다.”

“맞나? 그러면 경제적으로는 조금 부담이 덜하네?”

“어. 그 사람 없었으면 내가 이렇게 못 하지… 그나저나 니는 더 먹을 거가?”

“…”

 

더 먹을거냐는.

이제 더 이상 이런 이야기는 하기 싫다는 친구 놈의 대답.

비록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어쩌면 이 녀석도 아까 나처럼 신경성 소화 불량을 호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골 아픈 이야기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한다.

그래, 내 경험상 우리끼리 이렇게 말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고 딱히 의미도 없다.

그냥 입에 발린 긍정적인 말이나 한 두 마디 툭툭 내 벹는 것. 그게 끝이다.

나도, 그리고 저 녀석도, 고민 말해봐야 서로 해결해줄 수 있는 능력도 처지도 안된다.

제 코가 석자인데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누구를 걱정한다는 말인가?

물론, 누군가는 고민은 말 하는 걸로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도 하지만, 내 경험상 그냥 현실도피다. 

어찌됐거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해결될 문제라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고.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그러니 인생이 좆같이 느껴지는 거겠지.

 

“아니… 나는 됐다.”

“그래? 그러면 이제 나갈까?”

“어. 소화도 시킬 겸 산책하면서 아까 본 리쿼샵에 잠깐 들리자… 괜찮제?”

 

내 제안에, C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나는 이 녀석이 당연히 내 의견에 동의할 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랑 이 녀석은 항상 이랬거든, 밥 먹고, 산책하면서 이야기하고.

둘 다 걷는 것 좋아하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가면 뭐 사지? 그거 살까?”

“뭐?”

“어. 니 전에 맥주 이야기 했다이가. 존나 느끼하고 시커먼 맥주 있다매?”

“아… 그거? 근데 그거 비싸디 할인해서 한 병에 4900한다.”

“4900원?! 시발 뭔 맥주가 그리 비싸노?”

“…”

 

그러게나 말이다. 

그런 맥주… 아무런 부담 없이 원 없이 사보면 소원이 없겠다고.

나는 그런 쓸데없는 말을 툭툭 던지며, 친구 놈과 함께 밖으로 나온다.

 

“… 쌀쌀하네.”

“그러게… 하긴 벌써 시간이 8시 30분이니까…”

“벌써? 얼마 안 있었던 것 같은데…?”

“어. 믿을 수 없지만 그렇더라.”

“…”

 

C의 말에, 나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솔직히 나는 C가 장난 치는 줄 알았는데… 폰을 확인해보니 정말 8시 30분이다.

아슬아슬하게 지평선에 걸려있던 햇빛은 이제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고.

나는 뭔가에 홀린 듯, 환하게 빛나는 빌딩 숲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야 C야. 니는 20대 들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나나?”

“몰라? 갑자기 그건 왜?”

“그냥… 어제 교수가 20대 들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적어보라고 하더라고…” 

“자기는 20대때 뉴욕 갔을 때가 제일 행복했었다고 그러더라.”

 

그때 뉴욕에서 본 빌딩 숲이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다고 그랬었는데.

지금 이렇게 내 눈 앞에 빌딩이 있으니… 나도 모르게 무의식 적으로, 문뜩 그 교수가 했던 질문이 떠오른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뭐라고 적었는데? 20대 행복했던 순간.”

“그냥 니네들이랑 일본 여행갔던거랑… 공익.”

“어? 공익?”

“…”

 

어, 공익기간. 

참…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다.

가장 비참하고 힘들었다고 생각하는 시기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가장 행복 했던 것 같다니…

물론, 공익 전체기간이 행복했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말년만큼은, 내 20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 왜지? 니 말년은 편했어서 그런가?”

“뭐… 그런 것도 있는데… 글 쓰면서 돈 받아 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

 

물론, 글 때문에 돈을 준건 아니지만. 뭐랄까… 뭔가 지원을 받는 듯한 느낌

화가들도 공방이나 돈 많은 사람들의 지원을 받는다고 하던데… 나도 약간 그런 느낌 비슷하게 간접체험 해 본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말년이 편했다는 것이다. 

‘힘들다.’ 라는 감정이 객관적인 수치로 표기되어 나타나는 게 아닌지라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공익 시작 전후 1~2년 정도가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다. 

물론, 군 생활만 따져보면 지금 내 옆에 있는 친구 놈이 고생은 훨씬 더 많이 했을 것이고, 객관적으로도 나의 공익 일은 힘들게 전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공익 초반시절. 

정확히 말하면 공익 시작 전후 1~2년 이 시기를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확언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다. 그때는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도대체 왜? 어째서 그 시기가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었는데? 라고 물어본다면, 일단 내 실패의 역사를 다시금 되돌아봐야 하며. 그 뿌리는 고등학교에서부터 시작한다.

 

“니 근데 뭐 때문에 공익 갔지? 허리였나?”

“어. 디스크.”

“니 요즘도 허리 안 좋나?”

“어. 나는 이제 컨디션이 100% 였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나 저번 달 초에도 허리 박살나가 못 일어났다이가.”

“… 진짜가?”

 

어. 진짜로 나 그날 디스크 터진 줄 알았다고.

그날 저녁부터 허리가 좀 심상치 않기는 했는데, 설마 그 정도로 허리가 망가질 줄이야.

몸을 일으켜 세울 수가 없어서 끙끙거리며 엄마 아빠를 부르던 그 순간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다고, 나는 그렇게 지난 일을 회상하며 C에게 말한다.

 

“119 부를라 했는데 엄마랑 아빠가 일으켜 세워주니까 겨우 일어나 지기는 하더라…”

“허리를 삐끗한 거가?”

“몰라.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찌됐든 그래가 병원에서 주사 한 대 맞았다.”

 

엉덩이 말고 척추에 주사 한방 맞았다고.

그렇게 맞고도 한 일주일 고생했다고 하니까, 이 새끼 나를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니 고등학교때부터 허리 안 좋았제?”

“어… 안 좋았지. 근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중학교 시절때부터 조짐이 있었던 것 같다.”

“무슨 조짐?”

“니 내 중학교 때 살 확 빠진 거 기억하나?”

“어. 기억나지.”

 

그때 무슨 식중독 같은 게 걸려서 살이 확 빠졌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내 인생의 분기점이 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건강도 안 좋아지고, 활발하던 성격도 내성적으로 변하고.

무슨 마법에 걸린 것처럼, 불과 몇 달 사이에 돼지에서 멸치가 되어버렸으니 사람이 변할 만하지.

왜 그런 병이 걸렸는지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의문인데… 어찌됐거나 그런 몸의 급격한 변화 때문에 어디 하나 나사가 빠져도 단단히 빠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때부터 몸도 많이 약해지기도 했고 말이다.

 

“아마 그때부터 몸이 확 약해지지 않았을까?”

“근육도 확 빠지면서 허리 쪽에도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은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 맞나. 어찌됐든 니 고등학교때부터 본격적으로 허리가 안 좋았던 건 맞제.”

“어.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많이 안 좋았지.”

 

오래 앉아있는 것은 허리에 쥐약이다. 그런데 고등학생은 오래 앉아 있어야 한다. 

이 간단한 두 가지 현실은 내 건강을 점점 악화시켰고, 결국 다니던 미술 입시도 포기하게 되었다. 

갑자기 입시 미술이라니… 좀 뜬금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원래 나는 글보다는 그림이랑 훨씬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만화가가 꿈인 사람이었다고. 

그래서 처음에는 만화로 입시 준비를 하려고 했지만, 만화로 먹고 살 수 있냐는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디자인으로 살짝 경로를 틀었다.

뭐… 결과론 적으로는 만화를 택하든 디자인을 택하든 중간에 포기했으니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겠지.

 

하지만 변명 좀 해보자면 나도 버티기 싫어서 버티지 않은 게 아니다.

웬만하면 버티고 싶었는데… 디자인은 등 받이 있는 의자에서 하는 게 아니라 등 받이도 없는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서 하더라고. 

물론, 누군가는 나보고 의지력 부족이라고 말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지력을 가득 담아 끝까지 했더라면 아마 지금 다리 한쪽 정도는 절고 있겠지.

그 만큼 디스크라는 것은, 과거의 나를, 그리고 지금의 나를 족쇄처럼 구속했고.

동시에 내 삶을 일반적인 고등학생의 삶과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다.

 

“니 매일 운동가고, 한의원에 가서 침 맞고 그랬다이가.”

“… 그랬지.”

 

아마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때, 의사로부터 디스크 판정을 받고 본격적으로 치료를 목적으로 pt를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처음 pt를 받을 때만 해도 그냥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병적으로 운동을 꾸준히 하게 된 시발점이 된 것 같다. 

마냥 좋은 건 아닌데…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어찌됐든 그때부터는 야자도 하지 않고, 매일마다 운동을 하고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았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 허리가 막 드라마틱 하게 낫지는 않았다. 

정말 미친듯이, 아주 숨 막힐 듯 느리게 허리가 낫기 시작했다.

처음치료를 시작할 때만 해도 10분 앉아 있기도 힘들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때 즈음에는 1시간 30분 정도는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면 나머지 시간은 어떻게 버티냐고? 간단하다. 나머지 시간은 그냥 뒤에 서 있었다. 

뒤에 스탠드 책상이라고, 잠 오는 놈들 뒤에 서서 공부하라고 만들어 놓은 다리 긴 책상이 있었는데, 스탠드 책상이 곧 내 자리였다.

아마 학교에 있는 시간 중 7할 정도는 서 있었을 것이다. 허리가 아프니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내 입에서 나오는 고등학교 시절이라는 것은 결코 좋을 수가 없고. 

동시에 디스크는, 내 인생에서 땔 레야 땔 수 없는 그림자와 같은 관계가 되었다.

 

“니 요새도 예전만큼 허리 아프나?”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맨날 아프기는 아프지…”

“그래? 그러면 니 글은 어째 쓰노?”

“뭐… 허리 아프면 서고, 다리 아프면 앉고…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쓴다.”

 

고등학교 시절 자주 이용하던 스텐드 책상 하나 사서 내 방에 들여 놨다고.

그렇게 그 책상 위로 키보드랑 마우스 올려서 그렇게 쓴다고.

나는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내 친구 놈에게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으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 슬프지만 아마 앞으로도 평생 이렇게 살아가겠지.

공익 근무시절에도 허리 아파서 서 있었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허리가 좋지 않아서 서서 글을 쓰고 있다. 

앞으로도 나는 계속 요통으로 고통받을 것이다. 

뭔가 의료 혁명 같은 게 일어나서 내 디스크를 특수 물질로 바꾸지 않는 이상은 그렇겠지.

어찌됐든, 지금 내가 지병으로 달고 다니는 허리디스크는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여기는 공익 근무 전후 1~2년의 기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비율로 따지면 한 3할 정도 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머지 7할은 뭐냐? 라고 물어본다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글쓰기와 관련이 있다.

 

“니 근데 그렇게 서서 쓰면 글 잘 써지나?”

“어. ctrl키 누른 다음에 마우스 휠 땡기면 글자 커지거든. 그렇게 보면서 타자 치면 칠 만하다.”

“하… 니도 참 큰일이다…”

“괜찮다. 원 투데이 이렇게 쓰는 것도 아니고 매일 이렇게 쓰고 있는데 뭐.”

 

무려 6년 째라고,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이 녀석 깜짝 놀란다.

 

“벌써?”

“어… 내 나이 26이다이가 20살부터 썼으니까 6년 됐지.”

 

설마, 이걸 이렇게까지 오래 쓸 줄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는데…

다시금 말하지만, 나는 글쓰기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글쓰기라고는 초중고 시절 일기 쓴 게 전부였으니 말 다했지. 

그런데 그런 인간이 글을 쓴다? 

정말 뜬금없는 것이지만, 글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들은 건 수능을 치고 나서였다.

물론, 그 말을 들은 나는 당연히 나는 갑자기 무슨 글이냐고 반문했지만, 그래도 내 친구는 나에게 글을 쓸 것을 권했다.

내 친구, 그래 지금 내 앞에 있는 저놈이다.

일반적인 소설이 아닌 웹소설을 추천해 줬는데, 내 친구도 그리고 나도 만화를 상당히 좋아했으니 그런 의미에서 보면 웹소설은 어느정도 일맥 상통하는 것은 맞았다.

웹 소설 시장은 블루 오션이라고, 지금부터 쓰면 파이를 차지 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의 내가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성과를 못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개탄스러워할까?

 

“하… 시발… 그때만 해도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긍정보다는 부정에 훨씬 더 가까운 한 마디에 다시금 침묵이 흐른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벌써 년 수로 따지면 6년 째다. 

저 녀석이 처음 제안한 건 고등학교 3학년 수능 마치고였고, 내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건 대학입학하자 마자였으니…

그때는 체계도 없이 그냥 무작정 핸드폰 메모장에다가 썼는데 정말로 형편없었다.

오타도 많았고, 재미도 없었고, 내가 이걸 이렇게 오래 하게 될 줄은 그때 까지만 해도 상상 못할 일이었다.

그저 그때만 해도 뭔가 열정이라는 걸 쏟아붓고 싶은 일을 찾았기 때문에.

내가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만큼 뭔가를 꾸준히 하게 된다면 어떻게든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 최대한 꾸준히 썼던 것 같다.

 

“야. 올해 채우면 나 글만 만 시간 썼다.”

“만 시간의 법칙인가 뭔가 하는 거 어디 갔노 시발.”

 

글 쓰기에는 재능이 없는 건가? 그래서 시간을 존나 부어도 안 되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그냥 만 시간을 썼다고 착각하는 건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는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금 내 꼬라지가 영 말이 아니다.

공모전에 참여하고, 또 참여하고, 또 참여하고… 

그렇게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나는 그렇게 패배자가 되었다.

 

“야. 만 시간의 법칙은 그 분야에 통달하는 게 만 시간이다이가.”

“만 시간 붓는다고 성공하는 건 아님.”

“야. 시발새끼야. 그걸 농담이라고 하냐? 어?”

 

개새끼… 지금 누구 염장지르냐고.

내가 웃으면서 때리는 시늉을 하니까. 이 새끼, 오바 떨면서 몸을 움츠린다.

당연히 농담이지. 농담인데… 한편으로는 논리적으로 너무 완벽해서 반박할 거리가 없는 게 슬프게 느껴진다.

나도 알고 있다. 

내가 만 시간을 태웠다고 해서, 100% 실력이 늘고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물론, 아예 인과관계가 없다고는 말 못하지.

하지만 완벽하게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아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아마 여러 분야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겠지만 나는 게임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시간을 암만 부어도 하위 50%를 못 벗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만 부어도 상위 1%에 도달하는 사람이 있다. 

뭐… 내가 이런 말 할 처지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재능의 문제 아니겠는가? 

그게 아니라면, 아직까지도 내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

사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잘 모르겠다. 내가 그 이유를 알았으면 이러고 있지도 않겠지.

 

“야. 그나저나 니 요번에 하는 공모전에 투고할 거가?”

“아니. 그냥 쓰던 거나 열심히 쓸라고…”

“맞나.”

“어.”

 

어차피 해봐야 될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지금 내가 연재하고 있는 소설로도 벅차다고.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C 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야. K 야.”

“왜.”

“니 이때까지 공모전 몇 번이나 나갔지?”

“몰라? 한 4번?”

“아니… 니 그렇게 많이 나갔나?”

“…”

 

그러게 말이다. 

4번이라니… 참. 세월이 무심하구만.

첫 번째 공모전 말아먹을 때만 해도,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첫 번째 소설은 성공하는 게 이상한 소설이었다.

스토리 전개도 미흡하고, 오타도 많고, 연재 횟수도 적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겠지.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계속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다. 

왜냐하면 그때는 첫 공모전이었으니까. 

비록 공모전에서는 입상하지 못했지만, 꾸준히 쓰다 보면 언젠가 결실이 맺어질 거라는 생각에 계속 연재를 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글을 쓰는 시간은 늘어났다.

3시간. 많게는 4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때부터는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맨날 글을 썼다. 

아마 108화 까지인가 썼던 것 같은데 그때 조회수가 1만1천 언저리였다. 

대략 1년이 조금 안되는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인가 문뜩 깨달았다. 

망했다 이 소설은, 아마 여기서 더 쓰더라도 가망이 없다.

그래서 연재를 중단했다. 그때 처음으로 가슴이 답답하고 찢어지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여러모로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감정. 실패였다.

 

“야. 근데 니는 글 쓰는 게 좋나?”

“어. 그러니까 계속 이 지랄하고 있는 거 아니겠나?”

 

애증의 관계지. 나에게 있어서 글쓰기라는 건.

어쩌면 중독일지도 모른다. 

좋게 말 해서 글쓰기지 어쩌면 나는 도박과도 같은 행위를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을 베팅 하면서 어떻게든 한방 터지기를 고대하는 것. 이게 도박 아니면 뭐야?

물론, 다시금 말하지만 나는 애당초 글쓰기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글쓰기를 좋아한다.’ 라고 빈 말로라도 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차려보니 왠 폐인이 방에 틀어박혀서 글을 쓰고 있다.

분명히 처음에는 딱히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던 적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맞나… 그래도 좋겠다. 니는 그래도 좋아하는 게 있다이가.”

“아니. 별로? 이거 하다가 안 되면 나는 끝장인데?”

 

차라리 놀다가 6년 버린 거면 억울하지도 않지.

이런 식으로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나게 되면 6년 통으로 버리는 건데, 그 뒷감당을 내 정신이 버틸 수 있을지는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의문이다.

뒤쳐졌다는, 도태되었다는 것에서 비롯된 조급함. 

그리고 어차피 안 될 걸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이 좆 같은 상황.

나도 이런 것 별로 알고 싶지도, 경험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보니 뼈에 스며들다 못해 영혼 깊숙한 곳까지 아주 잘 절여졌다.

물론, 나 역시도 처음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보다는 희망이, 허무함보다는 보람이 더 많았다.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젊었고, 정신적인 흠집도 나지 않은 새것이었으니까.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하는 게 정말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고난을 겪으며 성장하듯이 나 역시 지금 이 경험이 경험치가 되어 언젠가는 성공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아이 그러지마라… 언젠가는 되겠지.”

“…”

 

그래, 언젠가는 되겠지.

나는 이 잔인하고도 무책임한 한 마디에 홀려 곧 바로 2번째 소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공모전에 나가지 않고 그냥 연재하기로 했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너무 난해한 장르를 하지 말고 적당히 나름대로 대중성이 있는 장르를 해보자고 생각했다.

게임물이었다. 말 그대로 가상현실에 들어가서 게임을 하는 이야기를 썼다.

내가 즐겨 하던 블레이드 엔 소울이라는 게임을 바탕으로 약간의 pvp와 던전을 섞어 놓은 게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썼는데… 이것 역시 실패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도 망할 만했다고 생각한다. 

웹소설이라는 장르에 100% 맞지 않은 것이다. 

사실 지금도 웹소설이라는 장르가 뭔지 잘 모르겠다. 

유명한 작품들을 읽기도 읽고 분석도 해 보았지만 다들 스토리가 다 다르다. 

장르에 따른 큰 흐름은 비슷하지만, 그 흐름이 비슷하다고 해서 스토리까지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들 첫 부분 정도만 비슷하지 중간 정도 되면 작가의 역량에 따라서 이야기가 다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나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썼다고 생각했는데… 모르겠다. 모르니까 계속 실패한 거겠지. 

어찌됐든 그 게임물은 아마 60화가 되기 전에 관두었던 것 같은데, 잘 찾아보면 60화 이상의 비축분이 아직도 컴퓨터 하드에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누군가는 너무 포기가 빠르냐고 말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은 한정적이고 웹소설은 잔인하다. 당장 클릭 몇 번이면 계산이 다 끝난다고.

실시간으로 인기 있는 소설들이 계속해서 업데이트 되고, 대략적인 화수와 조회수가 두 눈으로 보이는 순간 이미 머릿속으로 판단은 끝난다.

몇 화 정도면 대략 조회수가 얼마구나, 최소 얼마는 되어야 그나마 연재할 가치가 있구나… 라는 생각을 바보 병신이 아닌 이상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50화 중반에 조회수 6천? 이건 그냥 객관적으로 봐도 망했다고 봐야지.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계속해서 써도 시간만 버린다고 생각했고, 스토리 측면에서도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또 새로운 작품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가 아마 대학교 2학년 올라갈 때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에는 기존에 쓰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을 한번 채택 해보기로 했다.

늘 쓰든 것처럼 그냥 손 가는 대로 쓰는 게 아니라, 한 회 차의 내용을 4~5줄 정도만 쓰고 넘어 간 다음 나중에 살을 덧 대어서 글을 쓰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러자 정말 빠르게 글이 써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애정은 없었다. 

아무리 연재를 중단하는 소설 들이지만 나는 항상 내 소설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지금 역시도 애착을 가지고 쓰고 있다. 

하지만 그 소설은 그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주인공에게 마검이 떨어져서 그 마검으로 게이트, 일명 균열이라고 하는 것들을 닫는 헌터물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찌됐든 그 소설은 처음으로 내게 혹평을 선사했고, 심지어 그걸로도 모자라 오히려 필력이 떨어진 것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충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글을 써 놓고도 연재를 하지 않았고, 연재를 위해 쌓아 뒀던 비축분을 그냥 폐기해버렸다.

하지만 슬프지 않았고 오히려 후련했다. 

내가 하고 있던 행위와 생각이 맞다고 생각해서일까?

물론, 지금 와서는 그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순간만큼은 그렇게 생각 했을 것이다. 

 

“야. 니 예전에 그말 했던 거 기억하나?”

“무슨 말?”

“왜 그때 그랬다이가. 첫 작품은 망하고 네번째 작품부터 성공한다고.”

“어? 내가 그런 말 한적 있었나?”

“…”

 

어, 그런 말했었는데… 역시 기억 못 하는구나?

하긴, 그저 풍문에 불과한 것인데… 그걸 내심 믿고 있던 내가 바보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 못해, 나 자신이 조금은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인데.

그만큼 내가 4번째 작품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곧바로 집필에 나섰다. 쉴 여유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뭔가 느낌도 좋았다. 뭔가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물론, 결론부터 말하자면 망했지만, 사실 지금도 소재만큼은 상당히 괜찮다고 생각한다. 

어찌됐든 시기상으로는 대학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시작했던 시점으로 기억한다.

글 때문에 휴학을 한 건 아니고… 공익 가려고 휴학을 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때는 다들 공익 군대 할 것 없이 바로 못 가서 안달이었거든.

안달이라니… 지금 내가 타이핑하고도 참 웃긴 표현이긴 한데 실제로 그랬다. 

도대체 일처리를 어떤 식으로 하길래, 사람도 없는 저출산 시대에 군대가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경쟁률이 생기는 건지는 지금도 의문인데… 특히나 공익들은 정말 경쟁률이 높았다.

나는 허리디스크로 4급 판정을 받았고, 이미 이 시점에서부터 2번 떨어진 상태였다.

다들 2번은 기본으로 떨어지고 3번째 부터는 붙여 준다고 해서 무조건 될 줄 알았는데 보란듯이 그대로 떨어져버렸다.

하지만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절호의 찬스라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썼고, 덕분에 이때 글 쓰는 시간이 확 늘었다. 

 

8시 3~ 40분 사이 기상. 

아침 식사를 마치고 씻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10~ 10시 30분.

여기서 2~ 2시간30분가량을 쓰고 점심을 먹고 휴식.

휴식 후 설거지하고 씻고 다시 앉으면 1시 30분~2시 30분.

여기서 또 2시간을 글을 쓰면 4~ 4시 30분이 되고, 운동을 갔다가 오면 5~ 5시 30분. 

그 뒤로는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부모님이 도착하면 함께 식사를 하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씻고 쉬었다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으면 빠르면 8시 늦으면 9시.

여기서 컨디션에 따라 2시간이나~ 4시간정도 글을 쓰고 취침.

 

이러한 일련의 사이클은 글에 대한 집착과 애증을 만들어 내었고.

마치 족쇄처럼 내 생활을 통재하고, 동시에 내 삶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물론, 만약 내가 글로서 성공한다면, 내가 언급한 이 1년 은 상당히 중요한 시기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까지만 보면 시간 낭비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해서 이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마도 심리적 안정감 때문일 것이다. 

그냥 이게 편하다. 아무것도 안 하면 불안하고.

아마도 뭔가를 하고 있다고, 나름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무의식 적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이겠지.

 

사실.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이때까지 소모해버린 시간. 그러니까 글을 쓰는데 투자했던 일련의 시간들은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하는 순간 시간 낭비이며, 멍청하게 벽을 쳐다보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의미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는 것 정도는 그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안다.

그러니 지금도, 그리고 그때도 악착같이 글을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돌아가기에는 너무 긴 길을 걸어온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포기하고 다른 걸 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 그런 생각 해본들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

 

어찌됐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그렇게 4번째 작품을 쓰게 되었다. 

사실 구상은 이전부터 끝나 있는 작품이었다.

유일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C 그 녀석뿐이라 그 놈이랑 이야기하다가 우연치 않게 발굴한 소재를 바탕으로 쓰는 작품이었다. 

이세계 물이라고… 쉽게 말하면 중세 배경에 마법이 나오는 장르다.

나도, 그리고 내 친구 놈도 아주 익숙하고 친숙한 장르였다. 

거기다가 약간 코믹함을 섞었다. 

가볍고 재미있으면 전개에 있어서 상당히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루한 부분은 조금이나마 재미있게, 무거운 부분은 조금이나마 기분 나쁘지 않게.

그렇게 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평이 좋았다. 

친구 놈도 재미 있다고 했고, 건너 건너 꽤나 공신력 있는 사람에게도 재미있다는 평가를 들었다.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4번째 작품이야 말로 내가 여태껏 쓴 소설들 중 유일하게 호평을 들은 소설이었다.

그런데 망했다. 아주 처참하게 말이다.

 

“근데 니 그 4번째 작품 괜찮았는데…”

“몰라 시발. 안될 놈이 썼으니까 안된 거겠지.”

“그러지 말고 니 다음에 언제 그거 한번 리메이크 해봐라.”

“…”

 

리메이크라…

그 작품 한 번 더 리메이크 하면 벌써 리메이크만 두 번 하는 건데, 그쯤 되면 리메이크가 아니라 그냥 작품을 새로 하나 써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 녀석은 그런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내가 그렇게까지 네번째 작품에 집착한 것 보면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는 거겠지.

첫 작품, 그리고 두번째 작품 까지는 문피아라는 사이트에서 연재했는데, 네 번째 작품은 문피아를 제외하고 네이버와, 북팔, 그리고 조아라에서 연재를 시작했다.

그냥 뭔가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이 비참했던 과거를 깡그리 지워 버리고 싶었다면 설명이 될까?

필명도 바꾸고, 새 마음 새 뜻으로 써보자는 생각으로 글을 썼다. 

당연히 공모전도 참가했다.

유료가 아니라 무료로 연재하는 건 공모전 참여도 가능하고 온갖 사이트에 다 써도 상관이 없으니 지금 내가 연재하던 걸 그대로 들고가서 공모전에 참여했다.

네이버에서 한 공모전이었는데, 아마 총 조회수가 1천 중반 정도가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망한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공모전에 입상 정도는 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멍청한데… 어찌됐든 그때 내가 쓰고 있던 작품이 판타지라는 장르 안에서의 조회수만 따져봤을 때 100등 안에는 들어갔던지라 나름대로 기대를 하고 있었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딴 건 없었지만 말이다.

 

“리메이크…? 니 내가 네이버 공모전 망하고, 다시 리메이크 해서 망한 거 모르제?”

“… 진짜가.”

“어. 니 그때 기억나나? 내가 전화해가지고. 막 떨어졌다고 그랬다이가.”

“어… 그랬나?”

“…”

 

역시… 기억 안 나는 구나?

그때 이 녀석, 아마 pc 방에서 게임하다가 전화를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너무 태평하게 이야기해서 살짝 섭섭했던 기억이 나는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엄청 분해서, 그래서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동시에 화병이 걸릴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서 그날은 잠도 제대로 못 잤다.

100등 안에도 못 들어서? 물론 그런 것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때까지 쏟아온 노력이.

이때까지 허공에 태워버린 시간이라는 매몰 비용이 이런 작은 결실조차 맺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서러웠다.

하지만 이 결과를 받아들이는 대는 체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 해 봐도 왜 그걸 미쳐 못 본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고작 마우스 몇 번 클릭하면 다른 공모전에 참여한 사람들이. 

타 장르에서 나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압도적인 조회수를 가진 작품들이 우수수 쏟아지는데 말이다.

충격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허탈감이라고 해야 할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겪은 감정 중에 가장 끔찍한 감정이라는 건 확언할 수 있다.

아마 이때부터 조금씩 틀어지던 모든 것이 일그러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환장하겠는데, 진짜로 돌아버리겠는데, 어디 말할 곳도 없고 괜히 신경만 날카로워졌다.

물론, 우리 가족들은 내가 글을 쓰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서러움과 슬픔을 타인에게 말 하고자 하면 너무 길었으며, 구태여 설명하기도 싫었다. 

애당초 내가 글쓰기에 얼마만큼의 노력을 쏟고 있는지를 모르니, 말 한다고 한들 공감을 받는 것도 위로를 받는 것도 힘들었겠지.

애초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위다. 

공감을 받고, 위로를 받는다고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 네이버 공모전은 쓸데없이 내 기대가 커서 벌어진 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 그런 것이다. 

실패는 익숙하고, 징징거려봐야 달라지는 건 없으며.

내 기분이 좋지 않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불안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 작품을 계속해서 연재했다.

어찌됐거나 내 유일한 호평 작이었으니까 계속 쓰다 보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충격으로 인해 살짝 정신에 금이 간 건지. 

안 그래도 느린 글 속도는 점점 더 느려졌고, 일주일에 고작 3번 연재하는 것도 힘겨웠다.

어쩌면 핑계일 수도, 타고난 재능의 차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영장이 날아왔거든.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까지 망하고 네번째에 된다더니…

설마 그게 글이 아니라 공익이 될 줄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오라는데 가야지, 대한민국 남자라면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 존나 힘들었지 시발…”

“공모전 떨어지고 영장 날아와서 바로 훈련소 들어 갔다이가.”

“그래?”

“어. 다들 축하해주던데 그게 더 좆같더라.”

“맞다 기억난다. 니 한방에 안 되가지고 몇 번 넣었제?”

 

어. 시발 4번 넣었다 4번.

진짜 살다 살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 끌려가는 걸 축하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물론,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다. 

내 주변의 친구들은 군대 다 다녀올 동안에 나는 계속 떨어져서 국가의 의무를 다 하지 못했고 이번에 겨우 됐으니까. 

하지만 싫었다. 그냥 딱 까놓고 말해서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공익이라지만 강제로 끌려 가는 상황을 축하하는 게 웃기잖아. 그렇지 않은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4주 정도면 다시 사회로 복귀한다는 것, 그리고 훈련받으러 저 먼 강원도 산골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정도였지만. 

그래도 그냥 끌려간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어찌됐든 저 멀리 따른 지방으로 안 가고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훈련을 받았으니까 말이다.

 

“어… 4번만에 붙어서 53사단에서 훈련받았지…”

“53사단?”

“어. 나는 이 동네에 그런 데가 있을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빌딩 숲을 지나면 보이는 굴 다리, 그리고 그 넘어에 있는 53사단 부대 입구.

무슨 판타지 영화도 아니고… 도심 바로 옆에 군 부대가 있으니까 되게 이질적이었는데.

특히나 훈련받으러 갈때마다 보이던 굴다리 너머의 사회가 참 인상 깊었다고.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이 녀석 킥킥거리면서 웃는다.

 

“아니. 진짜 농담 아니라.”

“불침번 서면 창 밖에 빌딩이 보이고 사회가 보이는데… 와… 진짜 돌아버린다니까?”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곳에서 바라보는 진짜 세상.

지금 당장이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눈 앞에 사회가 아른거리지만. 

결코 4주가 끝나기 전에는 나갈 수 없는 절망적인 감각.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진짜 현실판 이세계가 따로 없는데… 문제라면 이곳에는 마법대신 냄새나는 남자들 밖에 없다고.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이 새끼 오늘 웃은 것 중에 최고로 크게 웃어 보인다.

 

“야, 그래도 풀이랑 나무 밖에 없는 것 보다는 낫다이가.”

“아니? 오히려 보이니까 더 미치겠던데?”

 

차라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내가 군대에 있다는 걸 실감할 텐데.

계속 두 눈으로 외부의 자극을 받으니까 지금 내가 느끼는 현실과의 괴리감 때문에 힘들었다고.

니가 눈앞에 보이는데도 잡을 수 없는 이 끔찍한 감정을 아냐고 말하니까.

이 새끼… 그제서야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한다.

 

“알지. 임마. 니는 그래도 여서 훈련 받았다이가.”

“나는 논산에서 받는다고 하루 전부터 올라가서 거서 숙소 잡고 하룻밤 잤다.”

“진짜로?”

“어, 진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입맛이 없더라.”

 

마치 목에 떡이라도 달라붙은 것 것처럼 답답했다고.

얼마나 입맛이 없었으면, 자기 인생에서 남긴 유일한 소고기가 훈련소 들어가기 전 먹었던 소고기라는 데.

아이러니 하게도, 훈련소 입소하고 나면 남긴 소고기가 눈에 밟힌다나 뭐라나?

그래서그런가 이 녀석, 내가 훈련소 입소할 때 아무리 입맛이 없어서도 마지막 사회에서의 식사는 어떻게든 꾸역꾸역 다 먹으라는 조언을 내게 했었는데…

훈련소 입소할 때까지만 해도 크게 와닿지 않는 조언이었지만, 지금 와서는 나 역시도 정말 공감하는 대목이다.

 

“나도 알지 그 심정. 나 입소하기 전에 중국집에서 먹었거든?”

“진짜 존나 맛없는 밍밍한 잡탕밥이었는데, 심지어 그거 억지로 다 먹었는데도 생각나더라.”

 

정말로, 이 녀석의 조언을 떠올리며 토할 것 같아도 꾸역꾸역 집어넣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보니 세월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니 여름에 들어갔제?”

“어. 정확히 말하면 6월 초에 들어갔지.”

 

첫째 주였던가? 아니면 셋째 주였던가? 

정확히 몇째 주 무슨 요일에 들어갔는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그 뙤약볕 아래에서, 저 멀리 보이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버스가 오길 기다리던 순간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마치 가로수처럼 사람들이 쭉 늘어서 있고, 아스팔트에서는 아지랑이가 일렁이던 53사단 밑. 

하지만 그 강렬했던 풍경 너머로는 딱히 떠오르는 게 별로 없다.

분명 끔찍했던 건 확실한데,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그냥 할 만 했다로 뭉뚱그려져 버렸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인상 깊은 기억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입소 첫날 석식을 더 먹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다들 하루 아침에 사회와 단절된 충격이 컸던 것이겠지.

다른 메뉴도 아니고 무려 삼겹살 볶음이었는데도, 다들 산 송장처럼 아무런 말도 없이 먹었고. 그날 있었던 침묵은, 어쩌면 내가 경험한 가장 끔찍한 침묵일지도 모른다. 

하루아침에 자유를 빼앗기고, 낯선 시간 축에 짓눌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이들과 지낸다는 것. 

그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엄청난 스트레스이자 큰 충격인 것이고,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 남자라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니는 그래도 훈련 나름 괜찮았제?”

“어. 공익들은 몸 안 좋으니까 현역만큼 빡 세게 시키지는 않지.”

“야, 그래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름 추억 아니가?”

“아니. 이 좆같았던 기억을 추억 같이 어감 좋은 단어로 포장하려고 들지 마라.”

 

정말 진심으로, 아주 질린다는 듯한 내 반응에 녀석이 다시금 킥킥 웃는다.

물론, 이렇게 말하지만 마냥 싫었던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다.

참 신기한 곳이더라고.

적응하면 적응할수록 사람이 단순하고 멍청해지는데, 덕분에 훈련소 안에서 지낼 때만큼은 오히려 스트레스가 조금 줄었다.

생각이 없어지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

물론, 그게 좋은 거라고는 생각 안 한다. 

어찌됐든 근본적인 문제 해결 방법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도 니 훈련소 나오고 나서 공익 생활은 편하지 않았나?”

“뭐… 말년에는? 초반에는 나도 존나 힘들었다.”

 

물론, 뭐… 공익이 현역에 비할 바는 못 된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공익 초반에 많이 힘들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공익생활 시작은 나에게 있어 일종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요 몇 년간 화약고처럼 쌓이고 쌓여온 온갖 스트레스가 터지게 계기가 된 것이다.

이게 참 쉽지가 않더라고. 하루 아침에, 사회와 단절된 곳으로 강제로 끌려가서 4주동안 세상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다시 사회로 돌아 온지 24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또 다시 새로운 환경에 던져진다.

물론,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좆 같은 상황을 견디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개인적인 성향도 성향이거니와, 계속해서 축적되어 온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더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왜 동물들도 보면, 연약한 개체는 환경이 휙휙 변하면 스트레스 많이 받아서 죽지 않는가?

어떻게 보면 내가 그런 부류에 속하는 인간이었다. 

장기간의 실패, 그리고 외부에서 가해지는 스트레스는 나를 연약하게 만들었다.

 

“니 어디서 근무했더라?”

“법원. 잊을 수가 없지… 아마 치매 걸리기 전까지는 기억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치매가 와서, 내 뇌의 주름이 다 펴져도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냥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인생에서 최고로 힘든 시기였다.

가뜩이나 내향적인 인간인데, 근 1년 동안 집에 쳐 박혀서 글만 쓰니까 사회성은 이미 상실해버린 지 오래고. 

그 때문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힘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때의 나는 우울 했고 의욕도 없었다. 

시발 뭘 해도 다 쳐 망하는데 의욕이 있고 활기차면 그건 재정신이 아니잖아.

그런데다가 외부에서 압력까지 가해지니까 사람이 진짜 미칠 노릇이었다. 

돌아버리겠더라고.

마음이 약해지니까 의욕이 사라져버리고, 동시에 무기력함과 우울감이 몰려왔다.

막을 수가 없었다. 그저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7월이었지… 내가 법원에서 공익 생활 시작한 게…”

 

정확한 시기는 잘 기억 나지 않지만,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되던 시기는 확실하다.

그때도 나는 글을 쓰고 있었다. 

훈련소에 들어가기 전에 쓰던 걸 계속해서 쓰고 있었는데 아마 60화 즈음 연재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조회수는 형편없었다. 

이번에도 늘 그렇듯 가망이 없었다고 판단했고, 그때부터 내 인생에서 가장 폭풍과도 같은 시기가 시작되었다.

 

  • 올라가는 건 좆같이 힘들어도, 내려가는 건 쉽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생이라는 건, 정처 없이 배를 타고 떠나는 표류하는 것, 혹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거센 눈보라를 해쳐 나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미래도, 희망도 보이질 않고, 당장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아마도 재미도, 감동도 없는 지루하고 힘든 하루하루가 반복될 확률이 높겠지.

그것이 마냥 싫지 만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무기력하게 할 것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누군가는 내가 부정적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까지 내가 살아온 인생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고 그게 사실이었다.

내가 살아온 지난 세월이 그랬으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될 거라고 나도 모르게 믿게 된다.

특히나 갓 공익에 들어간 그 시절의 나는 그냥 하루하루가 살기 싫었고 시도 때도 없이 자살 생각이 들었다.

살 가치도, 이유도, 필요성도 느끼질 못했다.

왜냐하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끔찍한 나날이 이어질 것 같으니까.

어차피 계속 글을 써봐야, 이렇게 힘든 시기를 끊임없이 감내해봐야 이런 좆 같은 나날이 계속될 것 같으니까 삶에 의욕이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집에서부터 내려다보면 개발을 하려고 비워 둔 엄청 거대한 공터가 보이는데, 만약에 죽을 거면 저기서 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자살 방법으로는 헬륨가스를 쓰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여러가지 방법들을 고려해봤을 때 그게 제일 고통 없이 깔끔하게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방법도 생각보다 간단했으니까.

 

“니 처음 공익 들어갔을 때는 존나 힘들다고 막 그랬다이가.”

“어. 그랬지.”

“왜 힘들었냐 근데? 일이 힘들었나?”

“아니. 솔직히 일은 별로 안 어려웠는데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정신적으로…?”

“어. 정신적으로… 힘들었지.”

 

우울감과 무기력함. 그리고 자살충동.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제 막 훈련소를 나와 공익 생활을 시작한 나의 멘탈 상태는 그다지 썩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버틸 수도, 버틸 가치도 없다고 느끼는 건. 

아니 애초에 인생을 버텨야 하는 것이라고 느끼는 그 순간부터 지옥은 시작이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거의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임계점의 언저리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살아있다. 

살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둘 다 하고 싶었던 건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부끄러워서 지금 말한 그 모든 것을 숨기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

 

정확한 시기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공익 들어가고 한 달이 채 안 됐을 때였던 것 같은데, 나는 제 발로 정신 병원에 갔다. 

이유야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여러가지가 있지만, 아마도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소설을 홧김에 다 지워 버린 게 문제였을 것이다.

연식 오래된 빌딩의 거의 맨 꼭대기 층에 있는 병원이었는데, 그때 첫 진료로 처음 만난 의사 선생님과15분 정도 상담을 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잘 기억 나지 않는다.

엄청 울었던 건 기억나는데 보나마나 이때까지 겪었던 온갖 고생들을 이야기했겠지.

그런데 생판 모르는 남이 와서 갑자기 우니까 의사선생님이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이 직접 부모님과 같이 병원에 올 것을 권유했는데, 다음 방문 때 엄마와 같이 병원에 왔던 기억은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아마 첫 상담을 마치고 바로 그 다음주였을 것이다. 

그날도 의사 선생님이랑 마주보고 앉아서 그날 했던 이야기랑 똑 같은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이야기 한지 1분도 채 되지 않은 시점부터 눈물이 터져서 제대로 상담이 이뤄지지가 않았다. 

내 상태가 안 좋아 보이니까 일단 밖에 나가서 진정 좀 하라고.

그러면서 우울증 검사지부터 작성 하라고 해서 밖으로 나왔는데, 도대체 나는 뭐가 서러워서 그렇게 울었던 건지… 아마 한 30분 정도는 펑펑 울었던 것 같다. 

얼마나 심했냐면 지켜보던 간호사 분이 상태 안 좋아 보이니까 약도 하나 줬다. 진정하라고.

정말로 그때 심하게 울면 발작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내가 태어날 때도 이렇게까지 심하게 울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가장 슬프고, 비참하고, 볼품없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고? 왜?”

“하는 거 다 쳐 망하는데 정신적으로 멀쩡할 리가 없다이가.”

“근데 더 좆 같은 건 그렇게 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더라…”

 

배는 이미 무풍지대에 돌입해서 멈췄고, 눈보라를 헤매던 한 남자는 크레바스 아래로 떨어졌다.

구조대도, 근처를 지나가는 배도 없다. 그러니까 오직 자력으로 탈출해야 한다.

현실이라는 것은 한 30페이지 정도 넘어가면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소설 같은 곳도 아니고, 고뇌하고 괴로워하는 연기를 잠깐 펼치면 바로 이야기의 절정으로 치닫는 히어로 영화도 아니다. 

떨어지면 떨어진 만큼, 헤매면 헤맨 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뒤쳐 질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물론, 누군가가 조금은 도와줄 수도 있다. 가족 혹은 친구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들은 차도 아니고, 비행기도 아니고, 배도 아니다. 

걷는 건 나고, 기어올라가는 건 나다. 

하루아침에 무풍 지대에서 벗어나는 기적 따위는 없으며, 크레바스 위로 구조 헬기 따위는 절대로 뜨지 않을 것이다. 

그냥 정신 못 차리면 거기서 죽는 것이다.

그러니까 애당초 빠지지 말고, 지옥과도 같은 곳에 갇혀서도 안 된다.

그날이 있고나서 정상 궤도 언저리에 도달하는지 얼마나 걸렸는지 생각해보면 최소한 1년도 더 걸렸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던 시기이고, 이날을 기점으로 나도 많이 변했다.

환골탈태… 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마 뼈 절반 정도는 갈아 끼우지 않았을까?

 

“도대체 뭐가 달라지는 게 없어…?”

“어? 아 그런 게 있다. 알려고 하지마라.”

“하… 이 새끼 말을 하다 마네 좆같이… 뭔데 말 해봐라.”

“그런게 있다. 그냥 마 인생의 터닝 포인트 같은 거라고 생각해라.”

“… 터닝포인트?”

“…”

 

어, 최대한 좋게 잘 포장하면 그렇지.

문제라면 인생의 전환점이 아니라, 그냥 내 성격상에서의 전환점이라는 게 문제지만.

어찌됐든 그날 이후로, 나 스스로가 개인적으로 피드백을 좀 많이 했다.

피드백 내용은 이 무기력과 우울감에 대한 피드백이었는데… 시간과 내 무의미한 감정 소비에 관한 컨트롤과 연관이 있다.

악순환의 고리라고나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그렇더라고.

괜히 사소한 거에 짜증이 나고, 짜증이 나서 화를 내고, 화를 내면 우울하고, 그러면 무기력해지고, 무기력해지면 아무것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하면 또 짜증이 난다.

그러니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일단 사소한 거에 짜증이 나는 것부터 막아야겠지.

그런데 나는 사고 자체가 삐딱한 사람이라 이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보기 싫으면 눈을 감고, 씨끄러우면 귀를 막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이렇게라도 해야지 뭐… 어쩌겠는가?

 

“터닝포인트지… 성격이 변했다이가 사람이…”

“그 정도가.”

“어.”

 

물론, 저 놈이 보기에는 그때의 나나 지금의 나나 별반 차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많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좋든 나쁘든 변하려면 뭔가 계기라는 것이 필요 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공익 생활 초반 정신병원을 들락날락 하던 시기는 나의 26년 인생 중에서 가장 큰 계기이자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문제라면 그다지 썩 좋은 방향 같지는 않다는 것인데… 내가 하는 게 그렇지 뭐.

어찌됐든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게, 정신과 약이 약국에서 처방해주는 게 아니라 병원에서 직접 제조를 해주는 방식이었는데, 꼭 끊지 말고 달아서 먹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당부에도 나는 처방받은 약을 이틀정도 먹고 더 이상 복용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증세가 그리 심각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현실 회피를 위한 꾀병, 내지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마음의 감기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원래 정신병자는 자기 발로 병원에 찾아가지 않고 남의 손에 붙잡혀 끌려 들어가는 법이다.

물론,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건 아니고, 뒤에 후술할 이모 할머니가 내게 했던 말이지만.

어찌됐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왜 약을 먹지 않았냐고 물어본다면 일단 우리 엄마의 반대가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야 건강에 좋지 않으니 먹지 말라는 것이었지만. 

차후에 생길 취직 관련된 문제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정말로 우리 엄마는 내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독심술사도 아니고 우리 엄마 속을 100% 알 수는 없으니 장담은 못 하지만.

확실한 건 엄마의 반대가 있었고, 나 역시도 약을 먹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글 쓰는 데 방해가 됐으니까. 

당장 제 발로 병원에 들어간 그날도 글을 쓰고 있었는데, 그 약을 한 알 먹으면 가뜩이나 잘 안 써지는 글이 더 안 써지니 더더욱 먹기가 싫었다.

글쓰기라니… 지금 와서 생각 해봐도 진짜 재정신이 아닌 것 같기는 한데, 아마도 이게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겠지. 

그때 내가 쓰고 있던 소설이 홧김에 다 지워버린 소설을 다시 복구한 것이었으니… 

어쩌면 나에게 있어 글쓰기라는 것은 중독이고, 열정보다는 집착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내가 이때까지 소모한 시간이라는 매몰비용이 아까워서 이렇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이제는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고 생각해서 그럴지도 모르고.

그것도 아니라면, 습관처럼 맨날 하던 걸 그만두려니 무서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이걸 하지 않으면 내 인생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느껴져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글쓰기가 싫다는 건 아니다. 

앞에서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쭉 늘어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신빙성이 있나 싶기는 한데… 정말로 글쓰기가 싫은 건 아니다. 

애초에 싫었으면 6년 꾸준히 못쓰지. 오히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정확히 정의하자면 나와 글쓰기는 애증의 관계다. 

컴퓨터 게임처럼 재미는 있는데, 적어도 지금 까지의 인생을 되돌아보자면 별로 도움은 안 된다.

그래, 내 26년간의 인생을 생각해보자면 최대한 줄이는 게 맞는 것이다. 

왜냐? 돈이 안되니까. 

돈이 인생의 대부분이라는 건 그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고.

돈의 액수를 떠나, 내가 한 행위에 금전적 보상이 있다는 것은 정신적인 측면뿐 만이 아니라 현실적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왜? 금전적인 보상은 현실과 정신의 안정감을 찾아 주니까.

가족을 비롯한 주변사람들의 지지를 끌어 모아주는 것도 돈이고, 최소한의 삶을 영유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돈이다.

사람이 사람 답게 살고, 인정받으려면 자기 밥벌이는 해야 한다고.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사람이 사람 답게 인정받지 못할 것 같으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말이다.

 

“… 야. C.”

“어?”

“만약에 나 이거 안 되면 앞으로 뭐 해야 되노?”

“솔직히 말해서, 내가 글로 벌어먹고 살 확률이 얼마나…”

“야. 내가 이야기 했제? 니는 너무 걱정이 많다. 어?”

“…”

 

걱정이 너무 많다는, C의 한마디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 어쩌면 정말로. C 가 말하는 것처럼 그저 열심히 하다 보면 뭐가 되든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이토록 걱정되는 이유는.

정말 글쓰기라는 게 별로 살아가는데 쓸모가 없어서 그렇다. 

내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내가 볼 때 이건 그냥 전자 오락이랑 비슷하다.

운동 같은 취미는 건강이라도 챙길 수 있고 게임은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누군가랑 친목 다질 때라도 쓰지… 이건 진짜로 글 쓰는 직업을 가지지 않는 이상 쓸모가 없는 능력이다.

물론, 억지로 만들어내면 만들어 낼 수야 있겠지.

논리력이니 사고력이니 하면서 글쓰기에 좋은 점을 누군가가 쭉 나열할지도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르겠다. 

마치 스쿼트를 하면서 등이 커지길 기대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등에도 부하가 걸리니까 등에 아예 자극이 안 오는 건 아닌데, 스쿼트는 어디까지나 하체운동이다.

등 근육 키우려면 등 운동을 해야지 누가 스쿼트로 등 근육을 키워.

글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모순적이게도 더더욱 글쓰기를 그만 둘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걸로 벌어먹지 못하면 이때까지의 매몰비용이 종이 쪼가리가 되어버린다고.

들어간 시간이라는 매몰 비용이 6년인데, 멍청하게 누워서 벽이나 쳐다보거나, 컴퓨터 게임이나 하던 사람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되어버리면 포기할 수 있는가?

 

“하아… 그래, 니 말대로 나는 생각을 좀 줄여야 될 것 같다.”

“그래,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어서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봐라.”

“뭐? 공익 이야기?”

“어.”

“…”

 

아니…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좋지도 않은 이야기, 도대체 뭐가 그리 궁금해서 이러는 건지…

딱히 말 하고 싶지 않은데, 옆에서 계속 쪼아 대니 그냥 간단 하게나마 말 해주기로 한다.

 

“… 진짜가? 정신병원?”

“어.”

“하… 이 새끼. 어쩐지 사상부터가 존나 우울하더라.”

“그건 내 기질이 그냥 그렇게 타고난 거고.”

“이거 봐라 시발. 니 말하는 게 존나 부정적이라니까.”

“뭐가 부정적이야. 그래서, 뭐… 더 이야기하지 마?”

“아이… 그러지 말고 임마. 그래서, 약도 안 먹고 어떻게 좋아졌는데?”

“…”

 

새끼…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사실 세세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긴데, 결론만 말하면 간단하다. 

그냥 버티는 거지 뭐. 

내 뇌를 초기화 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장 수술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니까 그냥 버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정말 악으로 깡으로 버텼냐 하면 그건 8할 정도만 맞는 말이다.

그러면 나머지 2할은 뭐냐? 

1.5할은 이 삶을 영위하게 해준 가족들의 지원.

그리고 나머지 0.5할은 이모 할머니가 있다.

 

“… 무속인?”

“어. 우리 이모 할머니가 무속인이다이가.”

“아니 그래서… 거기 간 거가.”

“어. 엄마가 같이 가자 더라.”

“가서 뭐했는데…? 뭐 구마의식 같은 거 하고 그랬나?”

“…”

 

구마의식 같은 소리하네…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오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영화 같은 장면은 없었다.

우리는 집안 식구 중에 그런 분이 계시니까, 그냥 편하게 집안에 골치 아픈 일이나 고민 거리가 생기면 종종 들리는 편인데, 내가 빌빌거리고 있으니까 엄마 나름대로는 큰일이라고 생각했던 거겠지.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딱히 별일은 없었다.

왜냐하면 정신 병원에서의 일이 그냥 똑같이 반복되었으니까.

나는 울고, 엄마는 위로하고, 그러면서 공모전에 떨어져서 괴로웠다.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자살하고 싶다 뭐 등등… 

이제 와서는 생각할 가치도 없고, 딱히 기억도 잘 안 나는 기억의 편린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몇 가지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아보자면, 아까 앞에서 말한 ‘정신병자는 자기 발로 병원에 찾아가지 않고 남의 손에 붙잡혀 끌려 들어가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공익을 그만둘 수 없으니, 연차나 쓰고 저 동해 바다나 보고 오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이었는데… 그건 그냥 내가 거절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냥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그냥 우주에서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지.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별반 다를 건 없다. 죽기 아니면 살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내 방에 먼지 쌓인 헬륨 가스 통을 오픈하는 것 아니면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그냥 살아야지 뭐. 방법 있나? 

그래서 그렇게 한 10개월 정도 고생했던 것 같다. 

숨 한번 쉴 때 마다 자살 생각을 하며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 나갔다. 

그리고 좀 뜬금없지만 이때 즈음 갑자기 또 쓰던 글을 때려치웠다. 

아마도 나 같은 인기 없는 무명 작가들은 다들 수천번은 머리로 곱씹어 봤을 텐데.

이거 계속 써봐야 의미 있나? 시간낭비 같은데 차라리 다른 작품을 준비하거나 아예 글쓰기를 때려 치우는 게 맞는 거 아닐까? 라는 생각이 진짜 PTSD처럼 사람을 괴롭힌다.

그런데 더 비참한 건, 이게 맞다는 거다.

시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때려 치울 거면 그때 때려 치웠어야 했는데…

 

한2주 안 썼나?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가장 오랜 기간 글을 쓰지 않았는데, 막상 이렇게 안 쓰니까 인생이 너무 공허 하더라고, 지루하고, 재미도 없고.

뭐,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때의 나는 글쓰는 것 만이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하루 아침에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렸으니…

결국, 나는 다시 키보드 위로 손을 올리게 되었고. 

그때 비로소, 나는 작가가 되는 게 내 길이라고 생각했었다 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작가라는 꿈도, 아무런 생산성도 없는 글쓰기라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자기 합리화라고나 할까?

‘글쓰기는 앞으로 내가 먹고 살 길이고 상당히 생산성 있는 일, 그러니까 지금 내 모든 컨디션을 글쓰기에 지장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라고. 자기 최면을 거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나는 일단 쓸데없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로 했다.

우울함. 슬픔. 분노. 두려움… 그냥 생각만 해도 의욕을 저하시키는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제어하려 노력해왔다. 

특히나 그때의 나는 이러한 능력이 정말로 필요했는데, 한번 우울함에 빠지면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감정 제어에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극한의 우울함이 닥치면?

그냥 글을 썼다. 설령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꿋꿋이 글을 쓰겠다는 악을 불태우며 무작정 글을 썼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치는 감정을 평행선에 가깝게 맞추기 위해 힘썼고. 

하루하루 모든 것이 짜증으로 가득한 일상에 쓸데없이 감정을 이입하려 하지 않았다.

무시하고, 무시하고 또 무시했다. 

감정에 휘둘리는 순간, 그날 하루는 다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냉철하게 생각했다. 

 

‘여기서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슬픔을 느끼는 것이 과연 내게 있어서 도움이 되나?’

 

사실. 그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여태껏 짜증도 많이 내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고 그러한 것들은 오히려 내게 있어서 마이너스였다.

그래서 바꿨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논리적으로, 그리고 비감정적으로, 최대한 나의 모든 상태를 평행선에 가깝게 맞추기 위해 노력해왔다.

가령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변태까지는 아니더라도, 모든 뼈를 갈아치우는 환골탈태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최대한 바뀌려 노력했고.

그러다 보니 20대 들어 처음으로, 나는 내면의 평화를 아주 잠깐 맛봤다.

 

“그래서, 이모 할머니집 다음에는 어떻게 됐는데…?”

“별거 있나? 그냥 시발 시발거리면서 공익 생활하는 거지 뭐… 별 수 있나?”

“그러다가 이제 위에 선임들 한 번에 우르르 다 빠져 가지고 고생 좀 하고…”

“아. 기억난다. 그때 일 존나 많다고 내 한테 그랬다이가.”

“…”

 

그래, 일 존나 많았지.

아마 내 기억상으로는8개월 9개월 차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기존에 있던 사람들이 한 번에 빠지면서 공익 생활 중 2번째로 힘든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대략 6명 정도에서 처리하던 일을 나 포함 단 두명에서 하게 되었으니… 단순히 따져봐도 일의 양이 3배나 늘어난 것이다.

물론, 짬도 쌓이고 어느정도 안정 궤도를 찾아가던 시기인지라 처음 발령 받았을 때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고생한 만큼 보상도, 보람도 있었다.

내가 최고참이었기 때문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 공을 인정받아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편안한 부서로 배정받게 되었다.

물론 그냥 배정된 건 아니고, 내가 어떻게 담당자님에게 잘 말해서 배정받게 된 것이지만. 

어찌됐든 그날부터 나는 가장 혼란했던 시기를 떠나보냄과 동시에, 아이러니 하게도 20대 최고 안정기에 돌입하게 된다.

그냥 아침에 출근해서, 서류 모아서 각 부서로 전달해주면 끝. 

30분 정도면 일이 끝나고 그 뒤로는 자유 시간이니 여유 있게 자리에 앉아 글이나 쓰면 된다.

그런데 그걸로 모자라 적은 액수지만 꼬박꼬박 돈까지 줘?

비록 아무런 연관도 없지만, 글을 쓰면서 돈을 받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스트레스도 그때가 최고로 적었다.

그냥 생각 할 것없이 눈 떠서 출근하고 30분 일하면 그 뒤로는 자유시간이고, 꼬박 꼬박 매달 적은 액수이지만 돈까지 나오니… 당연히 마음이며 정신이며 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미화가 아니다. 그냥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좋았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당장 그때만큼 20대에 안정적인 시기가 있었냐고 나 스스로에게 물어보자면, 나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no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니 만약에, 정말 만약에, 하는 거 족족 다 망하고, 취직도 못하고, 당장 오늘내일 나이 30을 바라보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찾아오게 된다면.

나는 최고참으로서 아무것도 안하고 글이나 쓰던 그때 그 시절을 아주 사무치게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

물론, 그런 최악의 상황이 내 인생에서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내가 이때까지 보고, 듣고, 겪은 현실이라는 것은 행운보다 불행에 더 맞닿아 있는 것 같아 앞날이 걱정되는 건 어찌 할 수가 없다.

 

“와 이 새끼… 진짜 말년에는 상상 이상으로 편했네…”

“뭐… 그렇지. 그래서 그런가 공익 소집해제 될 때 마냥 좋지 만은 않더라.”

 

별로 좋지 않은 경험,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 가득한 곳.

나는 그렇게 또 다시 하루 아침에, 현실로, 다시 사회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런 안정적인 시기가 끝나자 나는 다시 불안과 스트레스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물론, 이전만큼은 아니고 그때보다는 덜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느끼기에 그렇다는 것이지, 현실과 사회는 나를 이전과 똑같이 대우했다.

 

“소집해제하고… 복학하고… 바로 공모전 참여하고…”

“그래가 또 다시 시원하게 말아먹었지.”

 

공익 하면서 야심 차게 준비한 차기 작이 설마 그렇게 망할 줄이야.

얼마나 망했냐면, 비축분이 꽤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5화까지 연제하고 때려치웠다. 

이건 진짜 심각했던 게 정말로 그냥 보는 사람이 없었다. 

진짜로 조회수 0이었다는 말이다. 

아마 갓 소집해제한 3월 초였던 걸로 기억한다.

군대 가기전에 상당히 괜찮다고 생각했던 소설을 다시 가다듬고 가다듬은 소설이었는데 그냥 이렇게 허망하게 가버리니까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참 웃긴 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번엔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무감각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다른 작품들 보다 더 많은 애정을 쏟은 작품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 한 것이겠지.

어디 가슴 한 켠에 구멍이라도 난 것 같은, 익숙한 듯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감각.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뭐든 다시 시작해서 어떻게든 이 감정을 떨쳐버려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크레바스에 빠지면, 무풍지대에 갇히면 진짜로 답도 없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열심히 발버둥 치기로 했고 또 다시 글을 썼다. 

이번에는 웹 소설 말고, 한 번도 써 본적 없는 순수 문학이었다.

도대체 왜, 갑자기 무슨 이유로 웹소설에서 순수 문학으로 넘어 갔는지에 대해 물어본다면, 그냥 나는 순수 문학이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일단 첫째로. 나는 연재속도가 진짜 심각하게 느리다.

보통 웹소설 작가들이라 하면 보통 일주일에 5~6회 정도 연재하는데, 나는 밥만 먹고 글만 써도 일주일에 3번이 전부였다. 

요상하게 다른 실력은 느는 것 같아도 유독 글 쓰는 속도만큼은 잘 늘지가 않더라고.

물론, 그냥 글 쓰기 자체에 아예 재능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글을 빨리 쓰는 쪽으로는 심각하게 재능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매 회 새로운 걸 시도하고 싶었다. 

그런데 새로운 걸 시도하는 건 웹소설과 맞지 않다. 

이건 내 개인 의견이 아니라 모 대학에서 웹소설을 가르치시는 교수님 PPT에 그냥 새로운 걸 시도하고 싶으면 웹 소설 쓰지 마라고 대문짝 만하게 붙여 놨다. 

교수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익숙함에 참신함 한 숟갈이 웹소설에 맞는 것이다.

그런데 순수 문학은 진짜 온갖 주제로 글을 쓰니까 은근히 나랑 잘 맞는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도 분량이 짧으니까 부담이 없었다.

넉넉히 잡아서 웹 소설 한 20편 정도 분량이면 책 한권 뚝딱 만들어지니까 말이다. 

게다가 매일 연재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없으니, 어쩌면 나와 더 잘 맞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갑자기 밥 먹다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우울해지기만 하고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될 것 같아서 작품 하나를 집필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도 공모전에 떨어졌다.

마법이라는, 어떤 남자가 사이비 종교에 빠진 여자를 사랑하는 뭐… 대충 그런 내용이었는데.

문제라면, 나 개인적으로 그 소설에 별로 애정이 없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냥 개인적으로 싫었다.

이게 참 웃긴 게, 그냥 막 써도 써지는 게 글이기는 하지만. 

내가 쓰기 싫고, 내가 재미가 없으면 작품에 들어가는 애정이라는 것이 줄어들고 글도 재미가 없어지는 것 같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개인 의견이다. 하지만 이런식으로 쓴 글들은 항상 혹평이었다. 

일단 쓰는 사람도 흥미가 있고 재미가 있어야, 읽는 사람도 재미있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인지라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 소설은 아마도 별로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시간이 촉박해서 기존에 준비하고 있던 스토리를 잘라버리고 편집해버렸으니… 

나름대로 말이 되게 끔 최대한 끼워 맞췄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어색한 부분이 있었겠지.

게다가 그때의 나는 바빴다. 

전역하고 3일있다가 바로 복학해서 정신이 없었고, 이미 다른 작품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니… 니 순수문학 공모전에도 작품 투고 했었나?”

“어… 놀랍제? 근데 더 놀라운 건 그것도 말아먹었다.”

 

처음에는 분하고 억울하고 슬펐는데… 이제는 하도 떨어지니까 그냥 그러려니 한다고.

점점 무 감각해진다는 내 말에, 이 새끼 측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 해보면 망할 만했다.  

80페이지 남짓한 분량의, 웹소설도 순수 문학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의 괴상망측한 혼종.

그런 졸작이 공모전에서 떨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나에게 있어서 아예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단 순수 문학으로서는 첫 작품이었고, 내 역사상 처음으로 마무리를 지은 소설이었으니까.

 

여름이었다. 아마 7월 26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공인 중개사를 하고 있는 이모의 사무실에서 원고를 인쇄를 했는데.

도대체 왜 메일 같은 걸로 안 보내고 굳이 이렇게 인쇄해서 종이로 보내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이모의 말을 나는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하지만 이모의 의견과는 달리, 나는 이렇게 하는 게 좋았다.

내 역사상 처음으로 끝을 맺은 졸작이, 컴퓨터 안으로만 존재하던 내 노력의 결실이 이렇게 종이에 인쇄되어 나오는 게 감회가 남 달랐던 것 같다.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저 부끄러운 흑역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80장 남짓한 원고 용지를 두꺼운 봉투에 넣어서 출판사로 보내던 그 경험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작가도 아닌데 괜히 작가가 된 것 같고, 돈도 안 나오는데 이상하게 원고료가 나올 것 같은 기분.

결과론적으로 따져보면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헛발질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갓 소집해제를 끝 마치고 참여한 두번째 공모전은 마냥 나쁜 기억만 있지는 않다.

비록 처참하게 망해버렸지만 처음으로 완결을 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 충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쩌면 이 시기는 내 인생 제2의 안정기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9월1일. 

나름대로 안정적이던 내 인생에 다시금 파란이 일었다. 

1학기때에는 코로나사태로 인해서 집에서 인터넷 강의로 수업을 듣는 게 절반 이상이었는데, 2학기때부터는 학교로 전면 등교를 하기 시작했다. 

방에 쳐 박혀 가지고 글이나 쳐 쓰고 있을때는 몰랐는데, 매일 마다 밖으로 나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있자니 정말 뼈저리게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특히나 시간에 대한 압박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는데, 대학교 3학년 2학기였으니 이제는 정말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1년, 넉넉히 잡아도 내년 까지가 거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제는 취직해야 하니까, 내 밥 벌이를 구해야 할 것 아닌가?

게다가 그때부터는 학생도 아니니… 마냥 좋게 보던 가족들의 시선도 달라 질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이런 골치 아픈 상황이 오기전에 성과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내 뜻대로 되질 않는다. 

그래서 무섭다. 내일이, 그 다음 날이, 내 미래가 무서워 미칠 것만 같다.

 

“야. 그래도 언젠가는 되겠지… 두드리면 열린다. 알제?”

“모르겠는데? 두드리다가 내 손 다 아작 나는 거 아이가? 나중에는 손 없어져 가지고…”

“아니… 야. 내가 말했제? 니는 긍정적인 사고 방식이 필요하다 어?”

“…”

 

긍정적인 사고 방식인가… 그래, 생각해보면 C의 100번 맞는 말이기는 하다.

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이,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 안 하면 사람이 버틸 수가 없더라고.

긍정적인 사고 방식은 그냥 진통제 같은 것이다.

계속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나만 힘들다고.

그러니 ‘그래도 사람 앞일 어떻게 될지 모르지!’ 라고 나 스스로가 최면을 걸어야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이번에도 실패하고, 이번에도 안 될 가능성이 높은 게 사실이지만.

이 잔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그래… 니 말대로 긍정적으로 생각 해야지.”

“그래 임마.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된다. 뭐 이런 말도 있다이가.”

“그거야 그냥 하는 말이지… 그냥 능률적인 측면에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효율이 안 나오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겠나.”

“와… 이 새끼… 진짜 생각하는 거 레전드네… 어?”

“뭐가… 니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면서, 나는 이렇게 해야 긍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에서 샘솟던데?”

 

나름 체계 있는 나만의 긍정이론이라고.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이 새끼 표정이 질린다는 듯한 표정이다.

 

“… 뭘 그렇게 봐. 맞잖아.”

“아니… 아니다. 니 그나저나 요새도 웹 소설 연제하나?”

“어. 연제하지. 그것 때문에 내 첫 순 문학 공모전이 망한 것도 있는 것 같은데?”

“왜?”

“작품 2개를 동시에 연재하니까 아무래도 신경이 절반으로 쪼게 지는 거지…”

“그 웹소설 쓰느라 시간도 촉박했고…”

“맞나.”

“어. 원래는 더 이상 웹소설 안 쓰려고 했는데…”

 

정신 차려보니까 또 쓰고 있다고.

솔직히 이쯤 되면 웹소설을 계속해서 쓴다는 것은 내 지능에 심각한 문제가 있나 싶은 생각도 드는데, 다시금 말하지만. 나, 더 이상 웹 소설 쓰지 않으려고 했다.

소집 해제하고 나서 참여한 공모전이 아주 처참하게 망했기 때문도 있지만, 망한 건 둘째 치고 쓸 만한 소재 거리가 없었으니까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점심때 라면 먹다가 문뜩 괜찮은 소재거리가 떠 오를 줄은 누가 알았겠냐고. 

그래서 한창 공모전 준비해야 할 때, 그 새로운 웹소설에 꽂혀서 한 번에 작품을 2개를 동시에 쓰다 보니 알게 모르게 공모전 출품 작에 문제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

물론, 지나간 일이니 이제 와서 왈가왈부해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지만.

어찌됐거나 그러한 일념 하나로, 나는 몇 개월간 야심 차게 준비한 웹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그때 연재하던 웹 소설을 지금도 연재하고 있다.

정확히 얼마 동안이나 썼는지 궁금해서 첫 게시날짜를 확인해 봤는데 이제 8개월차다.

일반적인 작가라면 아무리 못해도 150화 정도는 썼을 텐데, 나는 이제 60화 쓰고 있으니 잘 되길 바라는 것도 웃기긴 하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글 쓰는 시간이 적은 건 아니다. 

차라리 어쩌다가 한 번씩 써서 이 정도 연제 속도면 억울 하지라도 않지… 

나 지금 주 7일에, 하루 평균 7시간 글 쓰고 있는데도 쏟아 붓는 만큼 결과물이 나오질 않는다. 

왜지? 집중력의 문제인가? 그게 아니라면 재능의 문제? 

뭐, 앞에서 말한 것도 문제점들 중 하나가 될 수 있겠으나. 개인적을 생각하기에 가장 큰 문제는 기복이다.

글이 잘 써지는 시기도 있긴 한데, 보통은 그냥 적당히 써지는 시기와, 안 써지는 시기가 사이클을 타면서 오락가락한다. 

그래서 글이 잘 써질 때는 하루에 10000 자도 넘게 쓰는데, 안 써질 때는 거의 하루 종일 붙잡고 있어도1000자를 못 채울 때도 많다. 

이게 얼마나 심하냐면, 너무 안 써질 때는 한 화를 거의 한달 동안 붙잡고 있을때도 있었다. 

이것은 추정치가 아니다. 정말로 나 자신도 왜 이걸 마무리 짓지 못하는지 궁금해서 시간을 계산해보았고, 계산한 결과가 딱 4주 정도 걸려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기복이 조금씩 줄고 줄고 줄어서 그 정도 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이 잘 써지는 시기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라 비약적으로 글 쓰는 속도가 늘어날 것 같지는 않다.

처음에는 안 써지는 시기가 찾아오면 슬럼프라고 시작했는데, 이게 계속해서 반복되니까 그냥 그러려니가 된다. 

원인도 모르겠다. 뭔가 사건이 터져서, 그래서 내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힘들 때 안 써지는 것도 아니고, 뭔가 좋은 일이 있다고 잘 써지는 것도 아니다. 

그냥 발생한다. 치료약도. 방법도 없다. 

그저 써지든 안 써지든 워드를 켜 놓고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는 게 유일한 처방이다.

내가 이걸 제어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나는 글 쓰는 기계가 되었겠지. 

그렇기에 나는 이러한 글 안 써짐 현상을 대비하기 위해 미리미리 쓰고 비축분을 만들어 두는데, 이런 상 하향 곡선 사이클을 고려하고 미리 써 둔 비축 분까지 사용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서 연재할 수 있는 횟수가 일주일에2~3편정도인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내게 구차한 변명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진짜로 작정하고 안 써지면 답도 없이 안 써지니 방법이 없다.

친구를 만난다 거나, 여행을 간다든가, 아니면 잠깐 게임이라도 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면 조금이나마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던 시기도 있었는데… 이때까지의 경험상 꼭 그렇지도 않다. 

내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건 내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과는 그다지 큰 상관이 없다.

그냥 사이클이다. 어쩌면 이런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사이클 그 자체가 내게 있어서는 징크스 일지도 모르지.

게다가 지금의 나는 의욕이 별로 없다.

열정이라는 장작은 벌써 다 타버려 숯이 되었고, 마음이라는 재로 가득한 화로 한 가운데 파묻혀 그 온기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

불이 계속 타오르려면 불쏘시개든 장작이든 화로 안으로 계속 들어가야 할 텐데, 땔감 없이 그저 하염없이 타오르기만 했으니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한 번씩은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천금 같은 기회나 성공이 찾아오게 된다면.

열심히 달려야 하는 시기가 찾아온다면 과연 내가 뛸 수나 있을까?

열정이라는 에너지는 이미 다 연소되어 숯이 되어버렸는데, 다시 장작을 넣는다고 불꽃이 살아나기나 할까?

잘못된 것 같다. 어디서부터 인가 단단히 잘 못 꼬인 게 분명한데 정확히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나는 만약이라는 단어로 만들어진 과거의 바다를 두둥실 떠돈다.

실패와 독기라는 휘발유는 불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지만 열정이라는 장작을 빠른 속도로 태워버렸고.

그렇게 열정은, 하염없이 타오르다가 어느 순간 재가 되어 버렸다.

 

“안 쓰려고 했는데… 뭐?”

“그냥… 쓰다 보니까 60화 정도 썼다고...”

“와… 니 벌써 60화 썻나?”

“벌써라니… 이제 겨우 60화 쓴 거지…”

“그래도 쓰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컨텍 올 수도 있다이가?”

“…”

 

컨텍이라… 

솔직히 냉정하게 말해서, 내가 벼락 맞을 확률이랑 비슷할 것 같은데…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웹소설 역시 조회수가 많이 아프다.

60화에 조회수 3000. 그냥 단순히 그냥 계산해봐도, 120화를 써야 조회수가 6000. 

잘 쳐줘도 겨우 8000정도 될 텐데… 정녕 이걸 계속 써야 할 의미와 가치가 있을까?

없지. 그럼에도 내가 이걸 계속 붙들고 있는 건, 어쩌면 꿈이라는 이름의 탈을 쓴 미련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미 돌아오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래서 계속 앞으로 걸어갔는데 목적지가 나오질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이미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으니까.

매일, 매주, 매달, 매년 느끼지만 벗어 날 수 없는 딜레마.

그것은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내 정신을 늙고 피폐하게 만든다.

하지만 더욱더 무서운 사실은,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어느 순간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분노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나중에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무던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다들 나와 같은 딜레마에 갇혀 사는 걸지도 모르지.

끝이 안 보이는 길 한 가운데에서, 멈춰 서면 불안하니까 뛰고, 뛸 수 없다면 걷고, 걸을 수 없다면, 구르고, 구를 수 없다면 긴다.

그러다가 만약 더 이상 한발 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면? 모르겠다. 아마 죽겠지.

물론, 옆으로 빠지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옆이라고 해서 앞이 보이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나는 더 이상 첫 소설을 연재하던 20대 초반의 내가 아니다. 

체력도 처음 출발했을 때만큼 넉넉하지 않고, 자신감도 없으며, 모든 것이 무섭고 두렵다. 

인간은 학습이라는 걸 한다. 과거로부터 경험이라는 데이터가 축적이 된 게 곧 나라고.

그런데 고개를 돌려 왔던 길을 돌아보면 그다지 썩 순탄 하지가 않다. 

그러니 저 옆으로 가면 내가 이때까지 왔던 것만큼 또 걸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또 똑 같은 고생을 해야 할 것만 같다.

계속 앞으로 가야 할지, 옆으로 빠져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돌아가야 할지 그 누구 하나 알려주는 이가 없으니 사람이 미쳐버릴 것 같다고.

그러니 나는, 그리고 우리는 매일마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고대한다.

매일마다 이 끔찍한 곳에서 탈출하는 망상을 하며,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꿈을 꾼다.

하지만 기적은 없을 것이다. 

다른이가 나를 도와주기를 기대한다면 다들 자기 앞가림 하기 바쁘고.

신에게 구원을 바라고자 한다면 나보다 밑 바닥인 놈들이 산을 이루고 있으니까.

그러니 유일한 방법은, 어떻게 든 자력으로 발버둥 치는 것뿐이다.

 

“… 하아… 시발. 제발 좀 컨텍이든 뭐든 좀 됐으면 좋겠네.”

“그래. 잘 될 거다. 열심히 하고 있다이가.”

“…”

 

잘 될 거라는 친구 놈의 말.

그런데 어째서,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또 녀석의 말에 반박을 하고 싶은 건지…

나는 애써 나오려는 부정적인 말을 꾸역 꾸역 삼키며 눈 앞의 리쿼샵을 향해 걸어간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 해야지. 긍정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