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풀을 헤치며 어디론가 향하는 사냥꾼.

 

그녀는 깊은 숲 속에서도 능숙하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

 

깊은 숲에 누군가 만들어 놓은 작은 공터.

 

사냥꾼은 천천히 두 손을 머리 옆으로 올리고

 공터에 발을 밀어 넣었고.

 

“숲에서 가장 두려운 건 뭐지.”

 

소름 끼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의 목소리가

 공터 주변에서 울려 퍼졌다.

 

하지만 사냥꾼은 익숙한 듯 무뚝뚝하게 답했다.

 

“자기 자신.”

 

“이유는?”

 

“숲에서 가장 멍청한 존재니까.”

 

“푸흐, 역시 네놈이군.”

 

아름다운 목소리가 피식 웃더니 아무도 없던

 공터에서 갑작스레 한 여인이 나타났다.

 

비단처럼 윤기 나는 금발 머리와 나뭇잎처럼 푸른

 눈동자. 그리고.... 인간의 귀보다 긴 귀.

 

세계수의 자손. 엘프가 나타났다.

 

“물건은.”

 

누군가는 생에 한 번도 보기 힘들 고귀한

 존재이지만, 사냥꾼은 무덤덤하다.

 

“허, 급해 보이는군.”

 

“누구처럼 피가 푸르진 않아서.”

 

오히려, 경계하는 사냥꾼.

 

“그럴 거면 차라리 오지 말지 그러나. 고작

 약초와 식량 조금 가지고 모험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인간.”

 

엘프의 말에 잠시 왼쪽 눈 대신 씌워진 안대를

 만지작거리는 사냥꾼.

 

“..... 굶어 죽을 바에 엘프한테 찢겨 죽는 게

 훨씬 나아.”

 

“하, 단명종의 생각은 한 치를 모를 정도로 

 멍청하기 그지 없다니까.”

 

“요구한 물건은 이거다. 받아라.”

 

엘프의 비아냥에도 사냥꾼은 묵묵히 가지고 온

 가방과 사냥의 부산물을 건넸다.

 

“오. 오늘도 냄새는 좋군.”

 

엘프는 가방을 열어 훈제 고기와 소시지,

 그리고 육포의 향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

 

“나 참, 이런 물건을 노인네들 때문에 이렇게

 몰래 사야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다니까.”

 

“장로들도 고기를 먹는다고 들었다 만.”

 

“그러니까. 지들도 먹는 마당에 아랫것들은

 먹지 말라고 염병하니 더 열 받지.”

 

적당히 대꾸를 해주자, 엘프는 쌓아 두었던

 불만을 좔좔 털어놓기 시작한다.

 

“.... 네 사정은 알 바 아니고, 값은.”

 

“쯧. 싸가지 하곤. 너 내가 너보다 나이가 

 몇 백은 더 먹은 건 알고 그러는 거냐?”

 

“단명종에게 노인 취급 받고 싶다면 한번은

 해주겠다만. 그런 취향인가?”

 

“저, 저저.... 에휴, 요즘 것들은. 쯧쯧.”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은 엘프는 허리 춤에 찬

 주머니를 사냥꾼에게 던졌다.

 

“이걸로 값은 치른 거다?”

 

“....... 그래.”

 

“야, 근데 너 그걸로 뭐 하는 거냐? 달맞이 꽃이

 마력 생성에 도움을 주긴 해도 그 정도 양으론

 효과는 거의 없을 건데?”

 

“거래에 필요한 질문은 아닌 듯한데.”

 

“그건 모르지 않나? 혹시 아나. 다음 거래에

 주머니 무게가 달라질 수 있으니까.”

 

“..... 애초에 달맞이 꽃이 효과가 없다는 건

 엘프 기준이지 않나. 인간 기준으론 충분히

 영향은 있다.”

 

“그런가? 뭐. 하긴.... 단명종 기준에선 나름

 쓸만할지도 모르겠군.”

 

사냥꾼의 말처럼, 엘프 숲에서 밤에 달빛을 

 받아 자라는 달맞이 꽃은 엘프에겐 관상 

 식물에 불과하지만, 인간에겐 마력 생성에

 영향을 미치는 영약에 가까운 식물.

 

물론 구하기도 어렵고, 비슷한 효과는 돈만

 있으면 더 구하기 쉬운 영약류가 많아 잘 

 찾지 않는 식물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처벌은 끝난 건가?”

 

“응? 진작에 끝났지. 내가 너랑 이야기 해주고 

 있다고 내 몸에 흐르는 푸른 피를 잊은 거냐?

 나 이래 봬도 숲에선 다들 눈도 못 마주쳐.”

 

“..... 가끔은 인간이나 엘프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군.”

 

“쯧. 개소리하지 마라. 어딜 단명종 따윌.”

 

“그러던지. 요구 물품이 있으면 이번처럼 

 화살에 쪽지 끼워 넣어 쏴라. 구할 수 있으면

 구해 볼 테니까.”

 

“그래야지. 단명종. 이제 숲에서 꺼지도록.”

 

“듣고 싶던 말이군.”

 

거래는 끝났으니, 사냥꾼은 미련 없다는 듯

 숲을 질주해 빠져나왔다.

 

얼마나 달렸을까.

 

정오를 넘어 오후 때쯤 저 멀리 보이는 목책을

 보곤 잠시 걸음을 멈추는 사냥꾼.

 

사냥꾼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로브를 내리자

 묶어둔 것인지,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

 

“....... 후우. 오늘도 무사통과네.”

 

숲에선 살벌하기 그지 없던 그녀의 붉은 

 눈동자도 숲을 나와서 일까. 조금은 유해진

 느낌이었다.

 

활을 등에 멘 그녀는 천천히 목책으로 걸었다.

 

“그렇다니까!”

 

“지랄도 풍년이다. 네가 무슨 고블린을 잡아?”

 

“뭐 임마!? 내가 너같은 놈인 줄 아냐?!”

 

인적이 드문 작은 시골 마을의 경비라서 인지,

 두 남자는 무기도 대충 목책에 걸쳐놓곤

 누가 오는지도 모른 채 수다를 떨고 있다.

 

“...하아.”

 

그저 한숨만 나오는 상황에 인상을 찌푸린 그년

 터벅터벅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 진짜라니까! 아님 한... 야, 야.”

 

“왜. 말 돌릴... 아.”

 

이내 눈이 마주친 세 사람.

 

“.....................”

 

흔히 없는 흑발의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온

 사냥꾼의 외모는 상당히 눈에 띄는 특이한

 외형이기에, 경비병들은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지나가도 될까요. 스미스 씨.”

 

“아, 어, 응.”

 

“그, 리엔. 혹시 오늘 저녁에...”

 

“죄송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물론 그것 때문에 경비병들이 사냥꾼을 빤히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흑발에 붉은 눈을 가진 소녀. 리엔은 마을에서

 상당히 미인이라는 평가가 자자했기에, 그들은

 매번 이런 식으로 불쾌한 시선을 보내온다.

 

“수고 하세요.”

 

“아, 어, 응.”
그녀는 그들과 더 이상 대화하기 싫다는 듯,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젠장. 비싼 척은.....”

 

“그러니까. 보나 마나 또 몸 팔고....”

 

그런 그녀의 뒤를 보며 뒷담하는 그들.

 

“...........”

 

물론 전부 그녀의 귀에 들렸지만, 그녀는 아무

 말없이 걸음을 옮길 뿐이다.

 

저기서 화낸다고 뭔가 달라지진 않으니까.

 

어차피 시끄러워지면 마을 사람이 올 거고,

 그럼 본인만 난감해질 게 분명하기도 하고.

 

그녀가 향한 곳은 마을 중앙의 잡화점.

 

그녀가 거주하는 시골 마을에 유일하게 있는

 상점은 오늘도 마을 사람들이 붐빈다.

 

“자, 자! 오늘 막 들어온 제국 제 종이가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서두르세요!”

 

상점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은 큰 소리로

 마을 사람들에게 물건 홍보를 하고 있다.

 

“..... 제국 놈들이 보면 기겁하겠네.”

 

물론, 리엔의 눈에는 싸구려 종이로 마을사람

 등 처먹는 범죄자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오지 마을인 이곳에 유일한 상인인 그였기에

 아무 말 없이 넘어가기로 했다.

 

“실례. 지나가겠습니다.”

 

몰려있는 주민들의 파도를 유려하게 넘어간

 리엔은 이내 상점 뒤쪽에 작은 가판대 앞에

 멈춰 섰다.

 

“왔나.”

 

가판대엔 가죽으로 보이는 것들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었고, 그 앞엔 한 노인이 앉아 있다.

 

“오늘은 사슴 가죽이에요.”

 

노인은 리엔을 아는 듯 그녀를 보자 일어났고,

 그녀 또한 익숙한 듯 배낭에서 사슴의 가죽을

 꺼내 그에게 건네 보였다.

 

“......흠.”

 

“얼마나 할까요.”

 

마을 사람들을 별로 좋게 보지 않는 그녀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녀는

 그에게 예의를 갖춰 말했다.

 

“5실버. 늘 그렇지만. 훌륭한 재주라니까.

 다른 놈들은 가죽이 아니라 걸레를 들고 

 오는데 말이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래서. 이제 얼마나 남았나?”

 

“......... 저도 잘 모르겠네요. 얼마나 필요할지.

 여길 떠나려면..... 돈이 상당히 필요하겠죠?”

 

“그걸 왜 나한테 묻나? 난 여기서 나간 기억이

 없는 노인네인데.”

 

리엔의 푸념에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노인.

 

“..... 여길 떠나면 어쩔 생각이냐?”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노인의 눈에는 그녀를

 걱정하는 감정이 충분히 느껴졌다.

 

“모험가나 할 거 같네요. 어르신.”

 

“자살하러 갈 거란 말을 참 곱게도 하는구나.”

 

노인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지, 인상을

 쓰며 리엔의 말에 격하게 반응한다.

 

“지금도 별반 다를 게 없지 않나요?”

 

노인의 말처럼, 모험가란 직업이 별로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하는 직업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당장 방금 엘프와 밀수를 한 그녀에겐 이거나

 저거나 거기서 거기다.

 

“쯧. 이럴 거면 줍지를 말 걸 그랬어.”

 

“동감입니다. 어르신.”

 

“에휴. 한마디를 안 져요. 망할 년.”

 

“하하. 지금 아니면 언제 이겨볼까요.”

 

숲에서도, 마을에서도 무뚝뚝했던 리엔의

 얼굴에 옅지만, 미소가 피어오른 순간이었다.

 

“훈제 고긴 남았나?”

 

“조금은. 여기.”

 

그렇게 말하며 엘프에게 주고 남은 훈제 고기를

 노인에게 건네는 리엔.

 

“매번 고맙구먼.”

 

“어르신도 좀 드시죠. 매번 걔들만 먹던데.”

 

“늙어서 먹으면 탈 날 거다. 젊을 땐 이런 건

 숨 쉬듯 먹었는데.... 끙. 이젠 너무 늙었어.”

 

노인의 한탄에 피식 웃은 그녀는 이내 배낭

 깊숙한 곳에 숨겨 둔 물건을 꺼냈다.

 

“새끼 양으로 만들어서 드실만할 겁니다.”

 

“.......뭐? 너...!”

 

“얼마 안 들었습니다. 받으시죠.”

 

리엔의 선물에 몹시 당황한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떤 채 그녀를 바라보는 노인.

 

“주워 키워준 값은 치러야죠.”

 

“아니, 그래도 이건.....”

 

이걸 받아도 되는 건지 고민하는 노인.

 

“아, 할아버지! 여기 계셨어요!? 한참을.. 아.”

 

그때, 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쯧. 그럼 가보겠습니다. 어르신.”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리곤 인상을 찌푸리며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리엔.

 

“야! 너...!! 내가 할아버지한테...!! 야!! 너!!”

 

소녀 또한 리엔을 보곤 삿대질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지, 진정해. 소피아....”

 

그리고 그런 소녀를 말리는 한 소년.

 

“... 아서. 소피아. 무슨 일이냐?”

 

노인의 말에 가까스로 진정한 소녀.

 

“뭐긴. 촌장님이 부르시던데.”

 

“.... 리엔 일 때문이겠군.”

 

짐작 가는 바가 있는지, 안색이 어두운 노인.

 

“참나. 걔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소피.....”

 

“칫, 너도 걔 편이야?”

 

“아, 아니. 그런 게 아니잖아.”

 

아서라는 이름에 소년은 소꿉친구의 시퍼런

 눈초리에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을 시작한다.

 

“.... 촌장이 다른 말은 안 하더냐?”

 

“응? 응.”

 

“그래. 알겠다. 이거 가지고 집에 가 있어라.

 슬슬 해도 떨어지니 저녁 먹을 준비하고.”

 

“ㅎ, 훈제 고기?! 이거 어디서 났어!?”

 

노인이 건넨 고기를 보자 눈이 돌아간 소피아.

 

“어... 할아버지. 그건...”

 

“어쩌다 구했다. 저녁에 먹자꾸나.”

 

반면 아서는 노인이 건넨 고기가 리엔에게

 받은 것을 알아차린 건지, 소피아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노인과 시선을 교환했다.

 

“이거... 괜찮겠죠?”

 

“너만 조심하면 괜찮을 거다. 아서.”

 

“둘이 무슨 이야기야? 뭘 조심해?”

 

“네 요리 말이다.”

 

“그, 그건 그땐....!!”

 

“가거라. 해도 지니까. 들어가야지.”

 

“아, 예. 가자. 소피아.”

 

“나중에 봐. 할아버지~”

 

고기를 보곤 신이 난 건지, 손을 붕붕 흔들며

 먼저 집으러 달려가는 소피아를 한참을 바라본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