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유랑 패러디 (2)


본편(2)


츠츠츠츳-


[다시 쓰기를 종료합니다.]


[보상을 정산합니다.]


[소재운의 인연 레벨은 5 입니다.]

[청명의 인연 레벨은 3 입니다.]

[조창수의 인연 레벨은 2 입니다.]

[…….]


[’화산귀환‘ 에서 얻은 모든 능력이 ‘이야기의 힘’ 에 기록됩니다.]


***


[191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첫 번째 인연레벨 5 보상으로 추가 포인트와 스킬 창조권을 획득합니다.]


[’다시쓰기‘의 레벨이 4 상승합니다.]


['다시쓰기' 레벨 5 보상으로 스킬 강화권을 획득합니다.]


“후우..”


익숙한… 아니, 아직 적응되지 않은 중세의 거리 풍경.


화산귀환의 세계에서 돌아왔다는 사실에 어째선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파워벨런스가 높은 편에 속하는 화산귀환인 만큼,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던 듯 했다.


잠시간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이번에도 바로 [이야기의 힘]을 확인했다.


띠링-


[이야기의 힘]


-단전 (A)

내공을 담는 그릇입니다.

내공은 어느세계에서 쌓던지 공유됩니다.

(2000 포인트)


-빙천신검 (A-)

한기가 서린, 순수하게 뛰어난 검입니다.

능력치가 증가하는 옵션이나, 마법이 귀속되지 않은 상태이기에 다소 낮게 등급이 책정되었습니다.

(1500 포인트)


-인피면구 (B)

사람의 피부를 벗겨 만든 가면입니다.

집중해서 보지 않는다면 알아채기 힘듭니다.

내구력이 약해 가끔 찢어지기도 합니다.

(300포인트)


-매화검결 (무공서) (S)

화산파의 최고위 무공입니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상위 검법이며 매화를 펼쳐내는 검법입니다.

(3500포인트)


-자하신공 (무공서) (S)

매우 난해하나 성능만큼은 뛰어난 심법입니다.

경지에 다다를시 내공이 노을빛으로 물듭니다.

(3500포인트)


목록을 확인한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격이 비싸서?


아니었다.


“흐음…? 언제..바뀐거죠..?“


내가 놀란 이유는 어느샌가 물품들의 등급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마지막으로 확인했을때는 언노운이었는데 말이죠..’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해보아도 이야기의 힘이 표시한 등급은 그대로였다.


‘흐음…탑에 들어와야만 등급이 생기는 걸까요?’


그렇다면 ..왜 그런걸까.


“…으음..”


[속이기를 좋아하는 장난꾸러기가 뭐하는거냐고 묻습니다.]


“그저..의외의 사실에 당황했을 뿐이랍니다..?”


[기만하기를 좋아하는 밤이 쿡쿡 웃습니다.]


“하하..”


성좌들의 반응에 나는 그저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저 그랬을 뿐인데 왜 이런 메시지가 나타나는걸까.


[외눈의 현자가 당신에게서 시선을 거둡니다.]


갑자기 오딘이 나를 떠났다.


”….?“


왜?


[다수의 신들이 당신에게서 시선을 옮깁니다.]


또 한번 많은 신들이 내게서 떠나갔다.


왜?


“이런…왜…이러는거죠?”


띠링-


페르세포네가 상냥한 음성으로 내게 속삭였다.


[납치당한 봄이 당신에게 말합니다.]


[그저 당신이 저희가 찾는 이가 아닌 것을 눈치챘을 뿐이예요.. 당신이 잘못한건 없어요.]


‘…찾는 이?‘


“…하하..도대체..누구를 찾길래..이러시는건지요.”


내가 악에 받쳐 물어보지만 더이상 내게 답하는 신들은 없었다.


이제 내게 돌아오는건 짧은 위로뿐이었다.


[뿔을 든 여인이 이정도의 반응이 평범한 것이라고 위로합니다.]


“…하하..노력해야겠군요.”


나는 체념한듯이 너털웃음을 흘렸지만 속으로는 신들이 찾는 자의 정체를 추론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누구를 찾는건가요?’


‘역시 빙의자 일까요?’


‘아니, 이곳의 신들이 찾는거면 회귀자 일수도 있겠군요.’


천천히 생각해보자.


나는 숙소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골똘히 생각했다.


‘빙의자는…아닐것 같기는 한데 말이죠..’


만약 빙의자가 있다면 신들은 빙의자를 모르는 전개가 더 많은 만큼..아닐 확률이 높지만..


그래도 이쪽은 확률이 높다.


‘환생자..일까요?’


어느 신의 환생을 기다리는 것이라면 그럴수도 있다.


수식언으로 봤을 때 동양 쪽의 신들은 보이지 않았었으니까 그들 중 한명일수도 있겠지.


예를 들면 제천대성 이라던가.


“…음?”


제천대성..이 누구더라?


“잠깐..이게 무슨..?“


제천..대성..그게 뭐지?


아니, 분명..동양의 신 중에…


…그런데 동양에 신이 있기는 했나..?


그 순간,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신들께선..동양의..다른 신화의 신들을 기억하십니까..?”


나는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 그들의 행방을 신들에게 물어보았다.


띠리리링-


[번개의 주인이 황급히 말합니다.]


[그런 이들은 없다.]


[명계의 주인이 당황하며 대답합니다]


[무슨말이지?]


[외눈의 현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답합니다.]


[동양에 신들은 없다.]


[….]


아까의 무관심이 무색하게도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그들의 대답이 쏟아졌다.


하나같이 이상한 반응과 함께.


하지만 성윤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아아..그랬지요..분명히 동양에 신 같은건 존재하지도 않는데요..왜..그랬을까요.”


그래, 분명 그럴터이다.


그런데..나는 왜 그랬지?


유럽의 것을 제외하고서는 다른 신화라는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정신방벽이 강하게 발동됩니다!]


[정신방벽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 뭔가..이상한..”


내가 당황하며 중얼거리자 또다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띠링-


[번개의 주인이 급하게 낙뢰를 떨어뜨립니다.]


“…? 제우스..이게 무슨…!!”


나는 창을 보자마자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인간은 번개에 반응할 수 없었다.


콰앙-!


“끄으으윽….!!“


번개가 내리쳤다.


번개에 맞은 것은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영향은 막대했다.


검게 타버린 살.


크나 큰 고통.


아직도 남아있는 약간의 전류.


그 모든것이 나를 괴롭혔다.


-꺄아아악!!

-사..사람이 죽었다!

-신벌이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뒤늦게 들려왔다.


”흐으..죽지..않았는데 말이죠..“


..짜릿하다.


이 전류도.


사람들의 반응도.


신벌을 받는 이 상황 자체도.


나는 달뜬 숨을 내쉬며 재생이 시작된 몸을 이끌고 발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처음의 웅장한 숲.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고 혼자서 겪어보고 싶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것도 좋으나 이런 특별한 일 만큼은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왜..이러시는 겁니까..!“


나는 미약한 기대감을 품으며 신들에게 한탄했지만 또 이번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다만, 기대했던 신들의 반응 대신 갑자기 손등을 빼곡히 덮은 글자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무슨…!“


찌릿-


”으윽…?“


손등에서 약간의 전류가 느껴진다.


아프지는 않지만..어딘가 머리가 멍해지는…


아니..더욱 편해지는..기분이다.


[복수의 세 자매가 망각의 저주를 강화합니다!]


뭐지…?


신..? 다른..신화..?”


내가..무슨 생각을 했었지..?


나는…나는..


[정신 방벽이 망각의 저주에 저항합니다.]


[정신방벽이 강하게 발동됩니다!]


[정신방벽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끄으으윽..!?”


돌연 엄청난 두통이 찾아왔다.


머리를 단단한 돌로 계속해서 내리치는 듯한 고통.


전에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갔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아팠다.


[정신방벽에 금이 갑니다.]


점점 고통이 강해진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다.


[정신방벽이 파괴됩니다!]


[스킬-정신방벽(A)가 소멸합니다.]


채앵-!


무언가.. 유리가 깨지는듯한 환청마저 들려온다.


지금 무슨 상황인거지?


나는 죽는건가?


나는..


나..


내가..누구지?


-@(/%₩;!!!!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이건 환청일까?


[저주가 더욱 강화됩니다!]


[이지가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눈에 무언가 푸른 창이 보인다.


뭐라고 쓰인거지?


어떻게 읽는거지?


언어라는게..뭐였더라..


아아ㅇ-@&#&#;)@‘%’‘&(/


망각.


누군가는 망각을 축복이라 칭하기도 한다.


그게 사실이라는 걸까?


성윤은 마침내 모든 것을 잊었다.


또한 자유로워졌다.


지금 느끼고 있는 고통마저 망각하고, 모든 감각을 잊어버리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


전부터 성윤을 주시하던 인영이 뒤늦게 소리를 지르며 다가왔으나, 그는 이미 늦어버린 상태였다.


그렇게 편안함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물론 편안함이란게 무엇인지도 잊었지만 말이다.


-@%-&(₩/*@!!!!!!!!


인영이 울먹거리며 성윤에게 다가와 심장소리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그의 심장은 아직 뛰고 있었다.


그 이외에도 간단한 상태 확인을 하고 그가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쓰러진 성윤을 보물단지 다루듯 조심스럽게 들고 자신의 숙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띠링!


성윤에게는 또다시 시스템창이 나타났으나 이미 의식을 잃은 그는 확인할 수 없었다.


[대항자 후보, 손성윤의 이지가 소멸합니다.]


[본래 세계로 전송…실패합니다.]


[재현되지 않은 존재, 역경으로 판정을 변경..실패합니다.]


[의식이 재생되고 있습니다..]


[[다시 쓰기]가 사용자의 정신을 수복시킵니다.]


***


낯선 천장이다.


나는 어딘가 어색한 몸짓으로 침대에서 일어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푹신한 침대, 나무 천장…


원래 살던 곳이 어딘지는 기억나지 않았으나 그곳과 다르다는 것 만큼은 확실했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거지?


“여기는 어디지?“


뭐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뭐야, 이건.


왜 또 이런 상황인거지.


현재 상황을 직시하고 나니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나를 엄습했다.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누구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누구인거야.”


중얼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던 나는 문득 느껴지는 이상함을 깨달았다.


…이상하다.


왜 아무렇지도 않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해봐도 이유를 모르겠다.


도대체 왜 이 상황이 두렵지 않은거지?


왜 무섭지 않은거야.


아니, 그러면 즐거운가?


아닌데.


왜 이러는거지.


왜.. 또 이렇게 되어버린거지?


…또?


또..라고?


“으으윽…!?”


“끄아아악!!!!”


갑자기 머리에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머리에 전기를 때려박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눈물과 식은땀이 뻘뻘 흐른다.


“괘…괜찮으십니까..!!?”


어딘가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맑고 청아한 음성, 평시라면 한번 쯤 고개를 돌릴만한,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 고통과 함께라면, 그 목소리도 비명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끄으으윽….!!”


고통은 갈수록 점점 심해졌다.


이러다가 머리가 터져버리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통을 참기 위해 꽉 쥔 손과 강하게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그러나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아, 이대로 죽는건가.


그런 생각마저 드는 순간,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띠링!


[대항자 후보, 손성윤의 정신의 회복이 완료되었습니다.]


[경이로운 업적!]


[망각의 저주를 극복한 그대에게 경의를!]


[스킬-정신의 극의 (S+)가 생성됩니다.]


시스템창이 고통의 종료를 알리자, 나를 괴롭히던 격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놀라울정도로 빠르게 없어져 비명을 지르던 내가 당황할 정도였다.


“허억…허억..”


“아아..나는..나는..”


고통이 사라지자 망각했던 모든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다만, 그 다른 신화들에 대한 기억과 ‘그 사건’ 이전의 여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언어를 다시 되찾았고.


인연을 다시 떠올렸다.


어차피 그 잊힌 기억들은 지금 떠올려서는 안되는 일이다.


나는 그렇게 잠시동안 눈을 감고 다시  떠올린 기억들을 정리했다.


“후우우..“


대충이나마 기억들을 갈무리하고 나는 또다른 감정의 격류를 창조해냈다.


망각…


망각의 저주…


까드득-


나는 분노라는 감정을 만들어내 그것을 참아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신… 이 씹어먹을 것들이..!!‘


감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다니.


’그 사건‘ 이전의 기억이 여전히 지워진 상태라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바뀌어버렸을지 모르니.


신들에 대한 증오가 솟구쳐올랐다.


’그 직후의 더러운 기억들만 잔뜩 떠올랐군요.‘


이런 짓거리를 한 신들은 기필코 모두 찢어발겨 죽여버릴 것이다.


”쯧..“


나는 막 재생되고 있는 손을 꽉 쥐어서 생기는 고통으로 가까스레 나를 진정시켰다.


쉽게 진정이 되지는 않았으나 일단 겉으로는 평범하게 보이리라.


차분하게 심호흡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꽤나 호러한 분위기였다.


손바닥에서 흐른 피가 묻고 찢어진 이불.


진한 살기를 뿜어댔던 나.


땀으로 푹 젖은 옷과 배게.


그리고 울먹이는 저 여자.


잠깐.


울먹인다고?


당황하거나 무서워하는게 아니라?


나는 약간 당황하며 내 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당신께서..쓰러진 절 여기로 데려오신겁니까..?”


여자는 홍조를 띄우고 고개를 숙이며 부끄럽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네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주군…”


….주군?


뭔 소리지?


“주군이라니…무슨 말인가요..?”


내가 황당해하며 그녀에게 되묻자 그녀는 얼굴을 홍당무처럼 물들이고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미래의 주군께서 친히 거두신 부하입니다.”


..미래?


미래의 내가 거둔 부하라고?


미래를 안다는건가?


…설마!!


“미래..라니요. 당신은 혹시…“


미래를 아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예언자.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회귀자입니까…?”


그렇다면..


이 무슨 행운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물음을 긍정했다.


‘..신들이 찾던게 바로 회귀자인가.’


..그래, 이제야 이해가 간다.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당황했던 어리숙한 모습이 회귀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줬을 것이다.


신들을 다른 회귀자 후보를 찾기 위해 나를 떠났을테고.


‘…뭔가 이상한데.’


호들갑을 떨어야 할 신들이 잠잠하다.


“..혹시 이곳은 신들의 시선이 닫지 않는 곳 입니까..?”


“네, 이곳 뿐만이 아니라 휴식층의 숙소 안에서는 모두 신들의 시선이 차단됩니다.”


..그렇다면…!


신들은 회귀자의 정체를 모른다..!?


내가 속으로 생각하자 회귀자가 그에 화답했다.


”전 회차의 주군에 명령에 따라 회귀자라는 사실은 최대한 숨기려고 했으니 신들이 의구심을 가질수는 있어도 제가 회귀자라는 것을 확신하지는 못할겁니다.“


…그 말인 즉슨.


그녀가 회귀자라는 사실을 아는게 오직 나 뿐이라는 건가?


오직 나 만이?


오싹-


아아…


“..당신은..왜 회귀하게 된겁니까..?”


”으음…그게 사실 원래라면 주군께서 회귀해야 했지만 어쩐일인지 차원의 결계가 이상하게도 빨리 깨져버려 제가 회귀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회귀했어야 했다고..?


차원의 결계..라는게 이상하게도 빨리 깨졌다라…


이거.. 아무래도..


“그렇다면..저는 그 세계에서 죽은겁니까..?”


“예.. 주군께서는 결계를 깨고 침입한 ‘깨달은 자’와 대적하다가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확실하다.


잊혀진 세계선에서의 나는.


의도적으로 죽었다.


미래..아니 과거의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다.


내게 선물을 주려 했겠지.


”…모두 제 탓입니다. 제가 조금 더 결계를 잘 관찰했다면..!“


바로 ’회귀자‘라는 선물을.


아아..!!


”아닙니다.. 그게 어찌 당신의 탓이겠습니까…?“


미래의 나.


정말.. 최고의 선물이다.


회귀자!!


그 회귀자라니!!


심지어 나를 주인으로 떠받드는 회귀자라니!!


어떤.. 훌룡한 방법을 쓴 것이냐…!!


아아아…


또다시 엄청난 희열이 나를 감쌌다.


아아.. 웃으면 안되는데..


심각해야 하는데..


“흐으으..깨달은 자..는… 누구를 말하는겁니까..?”


나는 생각에 잠긴듯 고개를 숙여 미소를 겨우 감췄다.


”깨달은 자..는 가장 강대한 외신의 수식언입니다.“


”우둔한 아버지와 같이..흐으…말입니까..?”


“들려오는 소문으로는..그것의 전 수식언이 우둔한 아버지라고 하더군요. 수식언이 바뀌고는 다른 차원들을 침략하며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흐으으으..음.. 외신이 이곳을 침략한다면.. 신들이 후계자를 뽑는 이유는 그들의 대항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이겠군요…”


내 말에 여자는 잠시 놀란 기색을 보이더니 나를 찬양했다.


“정확합니다.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다만, 신들이 진짜로 후계자를 육성하거나 계약을 하지는 않더군요.“


…역시


어쩐지.. 갑자기 후계자를 뽑는다는 게 약간 이상하기는 했다.


“…외신들은..어느정도로 강한겁니까..?”


이어지는 내 질문에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로..강합니다. 이 차원의 모든 신들과 만신전주가 힘을 모아도 외신 하나와 대적하는게 고작일정도로…“


…그정도라고?


만신전주라는 등반자와 모든 신들이 힘을 합쳐야 겨우 그들 중 하나에 비견되는 정도라니.


이런 사기적인 능력이 주어진 이유가 있었나..


”흐으음…그렇군요..“


내가 수긍하는듯 하자 그녀는 급히 변명했다.


”하..하지만 미래의 주군께서는 무려 총 7체의 외신들을 죽일만큼 강하셨으니.. 이번에는 분명히 ‘깨달은 자’도 이기실 수 있을겁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일곱이라..


이 세계의 신들이 생각보다 약한건가?


..아니, 그래도 지금은 그들의 발끝에도 닫지 못하겠지.


지금의 나는 미약한 벌레일 뿐이다.


자만하지 말자.


“…대충 과거의 일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이번 생에서도 저를 주군이라 부르는겁니까?“


..이게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다.


회귀자인걸 숨기고.. 나를 이용할 수도 있을텐데.


왜 그러는거지?


내가 의문을 품고 던진 질문에 그녀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주군께서 베푸신 은혜는 하해와 같아 감히 한 번의 삶으로는 갚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답에 나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미래의 나.


정말 재미있는 장난감을 줬구나.


이건 얼마나 갖고 놀수 있을까.


세계를 구한 다음 내 본성을 알게된다면 어떻게될까.


그건 또 얼마나 짜릿할까..!


“주군께서는 더럽혀질뻔 했던 저를 구해주셨고.“


“저를 친히 거두어주셨습니다.”


”임무중 다른 단체에게 붙잡혔을 때 저를 구해주셨으며.“


“항상 기대를 걸어주셨고.”


”임무를 실패했음에도 저를 질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 은혜를 단 한번의 삶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멍청할 정도로 충직하다.


그렇기에..최고의 장난감이다.


“저는 이번에도 주군의 것입니다. 주군께서 원하신다면.. 그 어떤 명령이라도 받들겠습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는 결연한 의지가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흐으음... 그렇군요…”


…일 회차 때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길래 저정도로 내게 복종하는거지?


“..당신의 사연을 듣고 싶은데.. 들려주실수 있을까요…?“


미래의 나는,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것일까.


그녀는 잠시동안 회한에 잠긴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미래..아니, 과거의 저는..”


***


노을이 지는 저녁.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긴 흑발의 여자가 터벅 터벅 걷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도 고블린의 부산물을 팔고 주점으로 향했다.


***


나는 낙오자였다.


십층의 재앙에게 동료들을 잃고 모든 의지를 잃은 낙오자.


공포에 절망하는 패배자.


그 재앙이 처음으로 공략된지 반년이나 지났으나 아직도 나는 그때 그대로일 뿐이다.


“하아..”


탑이 통합된 이후에 진행된 십층의 보스전.


그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였다.


보스층.


십층 마다 존재하는, 다양한 몬스터들을 죽여야하는 다른 층과는 다르게 오직 강력한.. 믿기지 않을 만큼의 무력을 가진 몬스터 한 마리만이 있는 특별한 공간.


그리고 유일하게 홀로 진행하는 시련이 아닌 100명의 사람들이 모여 공략해야하는 시련.


한 번 공략된 이후에는 보스의 힘이 줄어들며 다른 층과 마찬가지로 혼자서 진행해야하는 형식으로 바뀌지만.. ‘첫 번째 공략’에 참여했던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그래도.


그래도.


아무리 보스가….그 악마가 강하다고 했더라도 그저 그것 뿐이라면 그런 학살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을텐데.


“..쯧.”


오히려 첫 번째 공략대를 가장 좌절시킨 것은 ‘시련 포기’의 불가능이었다.


다른 층들은 시련이 너무 버겁다하면 언제라도 포기할 수 있다.


그저 시스템에게 포기하겠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보스층은 달랐다.


탈출 조건은 두가지.


보스의 죽음.


혹은 파티원 90% 이상의 죽음.


…후에 누가 신들에게 왜 그런 조건을 달았느냐 물었다.


“..“괜한 공포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포기하는 파티나 결정적인 순간에 포기하는 이들이 없으면 했기에..” 였나..?”


..모두가 죽는 것 보단.. 차라리 그런게 나은데 말이다.


하하..


..남은 10%.


아니, 탈출을 시도하다 죽은 사람도 있으니 여덟이나 될지 모를 사람들도 죽었다.


후에 수소문해보니 셋은 등반 중에 죽고, 다섯은 자살했다더라.


..정말.


무어라 할 말이 없다.


터벅. 터벅.


짤랑-


나는 일층의 주점 한 곳을 열고 들어갔다.


“오! ‘고블린 헌터’ 오셨구만!”


-하하하하!!

-크크큭..

-고블린 헌터…크킄…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저층의 몬스터만 죽여 붙여진 별명.


주점의 주인, 한스가 그 별명을 부르며 나를 비꼬는 투로 맞이해주었다.


이어지는 다른 이들의 조롱은 일상이 된지 오래였다.


저층에도 고블린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조롱을 위한 별명인데 그딴게 중요하겠나.


“제일 싼 술이나 줘…”


나는 조용히 동화 몇개를 올려두고 평소와 같이 술을 주문했다.


“쯧쯧..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건가.. 이제 트라우마는 떨쳐내야지 않겠나.“


…나도 안다.


언제까지 두려움에 떨며 일층의 고블린만 잡을 수는 없다는 것을.


하지만 도저히…


도저히 그 악마에게 도륙당하는 동료들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어떻게 잊어버릴까.


악마에게 산채로 먹힌 예리의 모습이.


악마의 불에 타 죽은 성규의 절규가.


나를 구하다가… 죽어버린 내.. 언니의 희생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를 않는데.


”오늘따라 답지않게 무슨 말이야? 그냥 술이나 내놔.“


“쯧.. ‘악마 살해자’이 저층을 돌아다닌다던데 그에게 가서 빌어보기라도 하지 그러나. 도와달라고.”


“…악마 살해자님…? 그 ’혈금안‘님이?”


“그래.. 25층하고 1층을 돌아다닌다고 하더군. 어쩌면..이게 그 처지에서 벗어날 마지막 기회 일지도 모르지 않나.”


한스가 답지않게 좋은 정보를 물어왔다.


그렇지만.. 그 분이 나를 도와주실까..?


..나 같은 걸?


“….닥쳐. 네가 상관할일이 아니야..!!


악에 받친 내 대답에 한스는 혀를 찬며 술을 내놓았다.


꿀꺽-


“후우…젠장…!”


오늘도… 술은 쓰기만 했다.


…젠장.


젠장젠장젠장!!!!!!


언제까지 이렇게 하루벌고 하루사는 생활이나 해야하는거야…!!


이러면… 그들의 희생이 뭐가되냐고…!!!!


나는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읆조렸다.


“…미안해, 언니… 내가 이런년이어서 미안해…”


-에구, 저거 또 저러는군.

-…에휴..

-어쩔수 없지 않나.


“…취했네. 그만 마시게.”


“..취하려고 마시는건데 뭐가 문제야…!! 나도..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뭐 어쩔수 있나. 우리 같은 낮은 등급의 직업들은 노력해야지.“


울컥-


저 말을 듣고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나도 노력했다.


보스는 한번 공략된 이후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약해진다는 말을 듣고 몇번이나 십층에 도전했다.


그렇게 수없이 도전하며 그 악마에게 찾아간지가 벌써 백번이 넘었다.


하지만 언제나 악마를 마주할때면..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악마의 섬찟한 눈을 마주하면 그때의 지옥도가 다시 떠오른다.


사람들의 시체로 산이 쌓아지고 피로 호수가 만들어진 그 악몽이 떠오른다.


수십의 사람들이 몰살당한, 다시는 없어야할 사건이 떠오르고야 만다.


‘언니..’


나도 안다.


이제는 그 악마와 대등하게 싸워볼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썩을 염소를 마주할때마다 몸이 굳고 마나를 사용해보려 해도 마나가 꼬인다.


“너희가.. 너희가 대체 뭘 안다고 지랄이야!!! 내가..얼마나 노력했는지도 모르면서..!!”


한번은 몸이 굳자 단검으로 내 몸을 찌르기도 해봤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피는.. 트라우마를 더욱 자극시킬 뿐이었다.


..우리 같은 낮은 등급의 직업..?


차라리 그렇다면 마음이 편하겠다.


등급이 높으면 뭐하나.


쓸모가 없는데.


“하아..”


왜 나는 이렇게 된걸까.


나도 그냥 다른 생존자처럼 자살이나 할까.


…그럴순 없다.


언니의 희생을.. 헛되이 할수는 없다.


“한스… 악마 살해자님이.. 1층을 돌아다니신다는건.. 확실하지?”


“…그래. 악마 살해자의 다른 별명이 ’성자‘아닌가. 앞에 수식어가 더 붙긴 하지만… 뭐, 도움이라도 청해보게나.”


‘그분이라면… 나를 도와줄수 있지 않을까.’


공략되지 않은, 최초의 가장 강력했던 상태의 악마를 참살한 분.


심성이 곱기가 이를 데 없어 선행을 베풀고 다니는 분.


그 분이 악마를 죽였다는 말을 듣고는 한동안 그 분의 팬이 되기도 했었다.


탑에 오기 전 부터, 탑에 소환된 이후까지.. 다 조사했었지.


워낙 유명하셔서 딱히 어렵지는 않았다.


이후에 사정이 어려워져 그런 덕질을 때려치우긴 했지만..


그래도 그 분이 얼마나 선한지는 익히 들어 알고있다.


‘그 악마를 한칼에 베어버렸다는 분이라면..’


분명.. 방법이 있을것이다.


짤랑-


그때 문이 열리며 대여섯명의 사람들이 주점으로 들어왔다.


저 휘황찬란한 장비들을 보면 다음 휴식처에서 사는 이들일텐데..


어쩐일로 여기까지 온거지?


”오랜만입니다, 한스.“


”허허.. 블라드, 자네 여긴 웬일인가?“


..서양 쪽 탑의 사람인가.


감이.. 좋지 않다.


“..‘마약왕’이 제게 의뢰를 넣더군요. 고블린 헌터라는 여자를 건드리지 말고 데려오라고.”


“그 마약왕이 말인가!?”


마약왕.


소환 전, 현실에서는 갱단의 일원이었다고 전해지는 남자다.


그는 마약왕이라는 S급 직업으로 강화제, 일명 ’버프 마약‘을 생산해냈는데 효과가 뛰어나 탑의 선두를 달리는 이들이라면 모두 한번씩은 복용해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효과가 좋은 만큼 중독성도 강해 많은 등반자들이 그에게 목줄이 쥐어졌다.


덕분에 그는 탑의 거물중 하나로 군림하고 있다.


‘그런 자가.. 나를 왜 찾는거지?‘


“그자가.. 그녀를 왜..”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예전의 외모가 예쁘다는 말을 전해들었다면서 데려오라는 의뢰를 넣더군요. 저희도 그런 의뢰는 가급적이면 거절하려고 하지만.. 상대가 마약왕인지라.. 참 그런 소문은 또 어떻게 들었는지..“


”..하. 저층에서 올라간 놈들이 술먹고 옛날 이야기를 나불나불 댔나보군.“


한스에게 블라드라 불린 자의 설명을 듣자 심장이 철렁했다.


저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자신의 운명을 알아챌 수 있으리라.


‘..지금 이제 49층이 막 공략됐다고 했었나? 그곳에는..흉터같은 걸 치료하는 포션이라도 있는건가.’


포션은 25층 이상의 몬스터를 사냥하면 나오는 치료제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된 흉터는 지울 수 없다고 들었는데..


…하필 마약왕에게 그런 물건이 들어가다니.. 


최악이다.


악마와의 전투에서 입은 얼굴의 흉터 덕분에 그동안 험한 일을 당하진 않았었는데 그것도 여기서 끝인가보다.


”그래서.. 고블린 헌터는 어디있습니까?“


제이든이 질문하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이곳에서의 내 이미지는 ‘사연있지만 무능력한 낙오자’.


그런 이를 위해 마약왕과 척질 이유가 없는것이다.


”..휴식처에서의 폭력은 금지인데.. 경비병을 잊은거야?“


”..나도 이런말을 하기는 싫지만.. 아무도 너를 위해서 나서주지는 않을거다. 마약왕은 여러모로 강력하니 말이다.”


나는 그의 대답에 잠깐 입술을 깨물고는 비명을 지르려했다.


“아아아ㅇ!!—”


터업-


순식간에 어느 한 여자가 내게 다가와 입을 막았다.


반응하지도 못할 정도의 속도.


이게 25층 이상의 등반자인가.


“정말.. 미안해요. 우리를 원망하세요.“


”으으으읍!“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윽고, 내 입을 막은 여자가 하얀 가루를 내게 들이마시게 했다.


”수면제에요.. 미안해요.“


결국 이런 엔딩인가.


아니, 차라리..


언니..


못난 동생이라.. 미안해.


푸욱-


나는 속으로 언니에게 사과하며 빠르게 허리의 단검을 꺼내 내 목을 찔렀다.


그래도.. 더럽혀질 바에는 이게 나으리라.


“이런 미친!!”


당황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자도 마약왕 때문에 이런것이니.. 원망은 하지 말자.


의식이 멀어진다.


이제 나의 짧은 23년 인생이 끝나가고 있었다.


‘미안해..’


주르르륵-


죽음을 위해 눈을 감은 내게 액체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고 확인해보니 그건 붉은색의 액체, 포션이었다.


“하… 이런 사람들은.. 다 포션 하나쯤은 상비하는건가.“


허망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죽더라도 그 악마에게 죽을걸.


“…이러면 수면제의 약효도 없어질텐데..”


“정안단은..그냥 먹이죠.”


그들의 대화가 들린다.


정안단.. 그게 내 흉터를 없앨 물건인가.


나는 최대한 저항해보려 했지만 여자는 내 입에 억지로 갈색 단환을 밀어넣었다.


단환을 삼키게 되자 얼굴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으으으읍!!”


얼굴에 불을 붙힌것 같다.


아프다.


너무나 아프다!!


악마의 불에 타는 고통이 이럴까.


악마에게 산채로 먹히면 이럴까.


지옥의 형벌도 이만하지는 않으리라.


끝없는 고통이 나를 갉아먹었다.


”으으읍…“


몇분이나 지났을까.


드디어 고통이 사라졌다.


체감상 반시간은 지난 느낌이다.


고통은 막대했지만 그 결실도 컸다.


나는 본능적으로 염소에게 입은, 얼굴을 가로지르는 큰 흉터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와우… 미인이긴 하군..“


제이든이 내 얼굴을 보며 감탄했다.


현실에서도 저런 소리는 많이 들어왔는데.


그때는 기분좋게 들어왔지만.. 


지금은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리는 말일 뿐이다.


“…데런, 기절 시켜.”


”그래..“


기절한 다음에는 어디서 깨어날까.


그 마약왕을 보게 될까?


다… 끝이구나.


“미안하다.”


데런이라는 흑인의 손날이 나를 덮쳤다.


나는 앞으로 찾아올 고통에 대비해 눈을 질끈 감았다.


…..


…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거지?


’무..무슨..?‘


의아해하며 눈을 떴지만 보이는건 나를 기절시키려는 남자의 손날 뿐이었다.


나는 당황하며 몸을 움직이려 해보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그 악마를 마주했을 때 같은.


아니.. 그때와는 다르다.


두렵지 않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짤랑-


주점의 문이 열린다.


“흐음… 이건.. 무슨 상황일까요..?”


이윽고 어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급스러운 검은 장포를 입은 그 남자는 굳어버린 주점속에서 홀로 유유히 움직였다.


“호오…?“


그는 왠지모를 탄성을 내뱉은 후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너무 얇아 실처럼 보이는 눈과 긴 흑발.


그런 눈을 가진데다 마나로 공간을 장악할 정도의 실력의 사람이라면..


한명 밖에 없다.


10층의 악마, 나의 원수인 바포메트를 일검으로 죽였다는 악마 사냥꾼.


눈을 떠 금안을 드러내면 모든 이가 죽는다는 혈금안.


인상과 다르게 한없이 선하다 하여 성자.


그리고, 내가… 한없이 존경하고 선망하는 자.


그는 나를 납치하려던 사람들을 힐끗 쳐다보고는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는듯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런건가요..”


딱-


그가 손가락을 한번 튕기자 몸이 자유로워졌다.


“이게..대체..”


몸을 움직이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자유로워진건 자신 뿐이었다.


…얼마나 강하면 이런 기술이 가능한거지..?


내가 소름이 끼쳐 괜히 몸을 떨자 그는 안심하라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저 눈 때문일까?


그의 미소는.. 어딘가 비열해보였다.


‘아니.. 성자님한테 무슨 생각을..!’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생각을 정리한 다음, 눈 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본능적으로 드는 불쾌감.


성자께서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도..


젠장.. 상황때문일까.


혼란스러운게 가시질 않는다.


“..저들이 당신을 억지로 납치해가려 한 것 같은데.. 제가 이해한 것이 맞습니까..?”


성자께서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음색으로 내게 말했다.


“네…맞아요.“


”흐으음… 그렇다라..“


딱-


성자께서 다시한번 손가락을 튕기자 이번에는 나를 기절시키려 했던 남자가 풀려났다.


그는 몸이 움직이게 되자 두렵다는듯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혀…혈금안이 왜 여기에…!“


성자께서는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왜 저분을 납치하려고 한겁니까…?“


“..마약왕!! 마약왕 그놈이 저희에게 의뢰했습니다.”


남자의 두려움에 질린 표정을 보니 문득 한 생각이 들었다.


’나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도 성자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도 성자님처럼 되고 싶다.


어떻게하면 저렇게 될수 있을까.


“마약왕이라… 역시 오는길에 없애고 오길 잘했군요…”


“마…마약왕을…!!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희도 마약왕의 압박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유가 어떻다한들… 몹쓸 짓을 하려고 한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제..제발..!!”


남자가 성자께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마약왕이 죽었다고?‘


그 마약왕을 죽였다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다니.


…평생의 은혜를 입었구나.


“피해자는 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성자께서 그리말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나를 기절시키려 했던 남자가 이번에는 내게 무릎꿇고 빌었다.


”죄..죄송합니다!! 제발.. 목숨만은…!!“


어떻게 해야할까.


아까는 이들도 의뢰를 받아서 그런것이라며 용서하자고 생각했지만.


위치가 바뀌니 생각도 바뀌려고만 한다.


”성자님께서 원하는대로..해주세요.“


나보다는 성자께서 더 좋은 판단을 내려주시겠지.


”흐음… 뭐 저분도 굳이 죽이고 싶진 않은 것 같으니…“


역시나일까.


성자께서는 그 이름처럼 저들을 죽이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남자가 성자께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성자께서는 남자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팔 하나만 가지고 가지요.”


팔..하나?


“네?”


남자가 반사적으로 묻자 잘린 팔이 피를 흩뿌리며 내게 날아왔다.


어느샌가 이미 남자의 오른팔이 있어야할 곳이 비어있었다.


“끄아아악!!!!”


남자의 비명이 주점에 울려퍼졌다.


팔이 떨어져나간 절단면에서는 피가 끊임없이 쏟아져나왔고, 그 피는 내 신발을 적셨다.


“….미친.”


언제 팔을 벤거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팔을 벴다고?


“너무하다 생각하십니까?“


성자께서 당황하는 내게 물었다.


”만약 제가 없었다면 당신은 이들에게 납치당해 마약왕의 성노예로 쓰이다가 버려졌겠지요. 그런데도.. 동정심이 드십니까?”


사실이다.


그러나… 당연하다는 듯이 팔을 베버린 행동이 나를 섬뜩하게 했다.


’얼마나.. 사람을 죽여야 저렇게 할 수 있는거지.‘


순간, 그의 별명이 다시 한번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인상과 다르게 한없이 선하다 하여 성자.


다만, 자신을 적대한다면 가차없이 죽인다고 해, 부르는 이름.


피의 성자.


‘…아니다. 이게 맞는거야.’


잠깐 섬뜩하긴 했지만 결국 나를 납치하려고 한 자이다.


이게.. 당연한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성자께 대답했다.


”아닙니다.. 뭐가됐든 저를 납치하려고 한 놈이니까요.“


성자께서는 나를 구원해주시고 은혜를 베푼것이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자.

 

“끄으으…가..감사합니다..”


팔이 잘려버린 남자가 피와 땀을 뻘뻘 흘리며 읆조렸다.


“감사는 저 여성분께 하시길.”


서걱-


성자께서는 그리 내뱉은 후 팔을 한번 휘둘러 다른 납치미수범들의 팔을 각각 하나씩 베었다.


다시 한번 피가 흩뿌려졌고 그들도 마나의 압박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의 반응은 앞선 남자와는 달랐다.


“흐으윽!! 겨..경비대…!!!”


경비대를 부른 건, 앞서 내 입을 막았던 여자였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듯 경비대라는 단어를 크게 외쳤고, 이내 주점 밖에서 많은 이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경비대들은 항상 마나로 청력을 강화시켜 다닌다고 했나?’


평소에는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안타까운 사실일 뿐이었다.


’..성자님이 나 때문에 해를 입으시진 않겠지..?‘


만약 그리된다면 내가 어떻게 고개를 들겠는가.


그러지 않기를 빌 뿐이다.


콰앙-!


마침내 주점의 문이 부숴질듯이 열렸다.


경비대장을 위시한 경비대는 위풍당당하게 주점에 진입하더니 돌연 멈춰섰다.


그들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당황스런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은인께서..왜 이곳에..”


“하하.. 보시다시피 일이 이렇게 되어서요.. 잠시 제 말을 들어주실수 있겠습니까..?”


“무..물론입니다!”


경비대장, 넬튼은 성자님을 은인이라 칭하며 그가 상전이라도 되는듯 시종일관 공송한 태도를 보였다.


그 우직하고 냉정하기로 유명한 넬튼이 말이다.


‘은인….이라고?’


성자께서는.. 경비대에도 은혜를 입히신건가?


성자님이라면… 그래도 이상하지 않겠지.


지금도 오늘 처음 본 내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나.


”일단.. 제가 팔을 벤 이들은 모두 저 여성분을 납치하려고 했던 이들입니다. 그 마약왕의 의뢰를 받았다더군요.“


”마약왕.. 그 쳐죽일놈이..“


”아, 그 사람이라면 이미 죽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약왕이 말입니까!?“


npc들 이라고 마약왕 같은 거물을 모르지는 않다.


오히려 마약을 유통하는 놈인 만큼 경비대 입장에서는 더욱 악명이 높겠지.


…새삼스럽지만 성자님이 점점 존경스러워진다.


”으음… 역시 성자님이십니다. 그러면 일단 이놈들만 잡아가면 되겠군요.“


경비대장은 그렇게 잠깐 침음을 흘리더니 경비대원들에게 납치미수범들을 끌고가라 명령했다.


그러자 곧 어마어마한 원성의 목소리가 경비대원들 쪽에서 터져나왔다.


-대장님! 저희도 성자님과 인사라도 나누게 해주십쇼! 

-어머니께서도 성자님을 보고싶어하십니다!

-제 딸이 성자님을….

-…


”이놈들아! 성자님들은 방금 이놈들을 상대하느라 피곤하지 않겠느냐!“


넬튼이 일갈하자 순식간에 주점이 조용해졌다.


성자님은 그 상황속에서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화답했다.


”하하..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내려온겸, 모두 한번씩 들르겠습니다.“


-오오! 역시 성자님!

-감사합니다!

-…

-.


…역시 성자님은 대단하다.


***


성자께서는 상황을 정리하신 후 주점에 가해진 압박을 완전히 풀었다.


압박에서 자유로워진 다른 사람들은 곧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흐흠… 역시 성자님이시구만!

-저..정말 대단하십니다!

-하하.. 이름에 걸맞는 분이십니다!


그들은 괜히 책이 잡힐까 두려워 하며 성자님을 찬양했다.


“하하.. 그럼 저는 이만 가보지요…”


터벅- 터벅-


짤랑-


성자께서는 곧 미련없이 발을 떼어 주점을 나갔다.


문이 열리니 곧 환한 태양의 빛이 주점 안을 비췄다.


순간 유유히 걸어나가는 성자님과 마침 지고 있는 노을이 겹쳐보였다.


그 광경을 뭐라할까.


그래.


마치 한폭의 명화같았다.


그 그림같은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는 나는 문득 한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성자께 달려갔다.


타다다닥-


“서..성자님!!”


“음..? 무슨 일이지요?”


성자께서 나를 보고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지금 나는 성자님께 어떻게 보일까.


아무래도 좋다.


이 말을 전할 수 있다면.


“구해주셔셔… 정말 감사합니다!!“


내 감사를 들은 성자께서 환히 웃어주셨다.


그 인상때문에 어딘가 비웃는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성자께서 그럴리 없으리라.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힘이 있다면.. 누구라도 저처럼 행동했겠지요.”


“정말로 힘을 가진 이들이 모두 성자님처럼 살아간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겠죠. 정말…정말로 큰 은혜를 입었어요…“


“하하.. 그리 생각해주시니 다행이군요.. 그럼 저는 이만..”


나와의 짧은 대화를 마지막으로 성자께서는 또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정말 성자라는 칭호에 걸맞은 분이시다…..


…그런데 뭐지?


이 마음 한켠의 불안감은?


아, 기회를 놓쳐버릴까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했던건가.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아니, 은인에게 이런 부탁을 해도 되는걸까.


성자님 입장에서는 물에 빠진 사람을 도와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란 격이 아닐까.


…이기적이어도 좋다.


그 염소놈에게 수없이 절망하고 굴복했다…!


이게 어떻게 온 기회인데.


추하다고 욕해도 괜찮다.


더 이상, 이런 밑바닥 인생으로 살아갈수는 없다.


나를 위해 죽어간 이들에 걸맞은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


“..저도!!! ..저도 함께 데려가 주실수 없을까요..?”


내 추한 외침에 성자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내 쪽으로 다시금 걸어왔다.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강해져서..!! 저를 위해 죽음이 가치있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요!! 뭐든 할게요!!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


내 울부짖음에 성자께서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내 어처구니 없는 태도에 분개하고 계실까?


“..아무래도 사연이 있는것 같군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실수 있겠습니까..?”


다행히도 성자께서 내게 관심을 가지셨다.


[성좌 기피(S)가 사용되었습니다.]


[수락 하시겠습니까?]


“성죄들의 시선을 피하는 스킬입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웃음거리가 되는 건 피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아.. 감사합니다.”


역시 성자께서는.. 


나의..구세주시다.


나와 성자님은 내 숙소로 이동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지금까지의 사연을 모두 털어놓았고 성자께서는 내 말을 귀기울여 들어주셨다.


이야기 중 감정이 격해져도 성자께서는 그저 조용히 내 눈물을 닦아주셨다.


그렇게 어느새 노을이 완전히 지고 밤이 찾아왔다.


“….그래서 성자님께.. 그렇게 말씀드린겁니다.”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 성자님께서는 나를 슬픈 눈으로 쳐다보시며 말했다.


“…오늘은 마침 보름달이 떴군요. 잠시 밖에 나가시지 않겠습니까..?”


성자님을 따라 밖으로 나가니 검은 하늘에 화려하게 수놓인 별들이 보였다.


오늘따라.. 별이 유난히 반짝였다.


’…..‘


..어쩐지 눈물이 나올것만 같다.


…왜일까…?


나도..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감정에 잠기자 성자께서는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저는 가끔 천장으로 막힌 층에 왜 이런 밤하늘이 있을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어쩌면….아무 이유도 없을수도 있고 저희가 모르는 중요한 이유가 있을수도 있지요.”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이 탑에서 죽은 영혼들이 별이 되는게 아닐까.. 어쩌면 이 밤하늘은 죽은 이들을 기리기 위한게 아닐까 하고요.“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저 하늘에서 편히 지내고 있을겁니다.”


..왜 이런말을 하시는거지.


성자께서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울컥-


”…하지만!! 그들이..저를 위해 죽어갔는데도.. 저는 이 꼴, 이모양인데!! 어떻게..자책하지 않겠어요..“


그들이..


지금 내 모습을 보고도..


만족할리가 없잖아..!


“…그들은 당신을 구한것을 후회하지 않을겁니다.”


“어쩌면 마지막에 당신을 구했다며 만족하며 삶을 마무리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지요.”


…정말 그럴까..?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걸까..?


“그러니..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그들이 마지막에 원한건… 그저 당신이 사는 걸 겁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틀림없이… 그랬을겁니다.”


..그런가.


나는..


나는..


죄책감에만 얽매여 살지 않아도 되는건가.


조금은.. 더,


자유로워져도.


괜찮은걸까…?


나는 더이상 복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소리없이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성자께서는 포근히 안아주셨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나는 성자님의 품에서 잠에 들었다.


별이 환하게 빛나는 밤이었다.


***


다음날 나는 여느날 처럼 숙소에서 깨어났다.


다른 점이라 한다면..


그때의 참사 이후로 매일 매일 꾸었던 악몽을 꾸지 않았다는 것일까.


정말..


정말 오랜만의 편안한 숙면이었다.


나는 비몽사몽한 채로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니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성자님과 대화하다보면 유난히 감정의 제어가 잘 안되는 느낌이다.


…이거 성자님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쓰는거 아닌가?


성자님이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으으…”


”….그래도 나쁘진 않네.“


쪽팔림에 몸부림치던 나는 돌연 실소를 흘렸다.


‘..이런 일을 부끄러워 하는것도 오랜만인가.’


..그들이 죽고 난 다음에는 죄책감에 정신적인 휴식을 취하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이런 부끄럼조차도 내게는 신선하게 다가온다.


“..성자님은 일어나셨으려나.”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꼬질꼬질한 커튼을 열었다.


밝디 밝은 햇빛이 방을 비췄다.


“..햇빛..?”


늦잠이었다.


“..하하..”


얼마만일까.


“너무…좋네.”


이런 평화로운 아침은.


“오늘은.. 한번 쉬어볼까.”


그래, 오늘만.


한번만 편히 쉬어보자.


오늘은 낡아빠진 가죽갑옷을 입지 말자.


오늘은 검을 차지 말자.


오늘은 탑에 오기 전의 나처럼 살아보자.


나는 탑에 소환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사놓은 평상복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잔잔하나 힘찬 발걸음으로 시장이 있는 동쪽으로 향했다.


터벅. 터벅.


“…”


어색하다.


이런 평범한 일상이 어색하다.


평범함이 그리 느껴질 정도라니.


나도 완전히 미쳐 살았었나.


“하하..”


왜 그동안은 잠시 동안이라도 눈을 돌릴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왜 그들의 희생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였을까.


…어쩌면 이미 알고있었을 수도 있다.


그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나를 바라지 않았을 것을.


그럼에도.. 그저 죄책감이 너무나 커, 스스로를 부정했던 건 아닐까?


“정말 그렇다면..”


나를 일깨워주신 성자님께 감사할 뿐이다.


“후훗..”


어느새 시장에 도착했다.


‘고기라도 사서 성자님 대접할까..’


그쪽으로 가자.


터벅- 터벅-


시장을 걷다보니 눈에 익은 한 사람이 보였다.


그의 옷은 어제 본 것 과는 다른, 일층의 사람들이 입을만한 수수한 복장이었으나 특유의 인상이 그를 알 수 있게하였다.


“성..자님?”


바로 나의 은인, 성자님이였다.


성자님께서 채소와 고기를 구매하고 계셨다.


“오,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성자님은 나를 보고 반갑다는듯 손을 흔들었다.


성자님의 곁에는 어쩐지 표정이 굳은, 가게의 주인이 있었다.


인상 때문에 그런걸까..?


성자님은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인데..


“피곤하실까 밥이라도 해드릴까 했는데, 또 우연히도 마주치는군요.”


“은혜를 입은 건 저인데.. 이러시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힘드실텐데 그러지말고 편히 쉬시는게 좋을텐데요..”


이렇게나 남을 배려하시는 선한 분이신데.


그 인상 하나 때문에 이렇다니.


안타깝다.


”흠.. 뭐 살건 다 샀으니 같이 가시지요.“


”네?“


”도와달라고, 강해지고 싶다고하지 않았습니까? 도와드리지요.”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 말인데..


“따라오지 않고 뭐하십니까?”


“아, 네!”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은혜를 입어버린 것 같다.



***


치이이익-


식욕을 자극하는 고기의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강하게 해주시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약간 황당해 하는 기분으로 묻자 성자님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하하… 배가 불러야 수련도 하지요. 애초에 시장에서 고기를 사고있을 때 만난 거 아닙니까..? 점심 시간이기도 하고요.“


…맞는 말인데.


분명히 틀리지는 않았는데..


“하아..”


너무 흥분했었나.


“후훗.. 완성되었습니다.. 드셔보시지요.”


내가 한숨을 쉬자 곧 성자님이 스테이크를 접시에 담아 가져오셨다.


군침을 흘리게하는 냄새, 시각적인 즐거움까지 챙겨주는 비주얼.


마치 현대의 고급 식당에 온 기분이다.


“..요리도 정말 잘 하시네요.“


스테이크를 칼로 자르니 놀랍도록 쉽게 잘라졌다.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넣으니 그야말로 살살 녹았다.


요리 스킬이라도 가지고 계신건가..?


띠링-


[산군의 살을 섭취하셨습니다.]


[모든 스텟이 1 증가합니다.]


[24시간 동안 마나 회복력이 20% 증가합니다.]


조각을 모두 씹어 삼키니 시스템창이 나타났다.


”이건..!?“


경악하는 내게 성자님이 말했다.


”후후.. 요리가 잘 된 모양이군요.“


”..산군이라면 30층의 보스가 아닌가요..?”


산군.


무협 테마의 시작, 30층의 보스.


산의 지형 효과 때문에 공략이 어려웠다고 들었는데.


“하하.. 저도 그때 공략대에 참여했어서요..”


“..아니, 그런 산군의 고기를 왜 저한테..“


내가 말끝을 흐리자 성자님께서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도와드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저한테.. 이런 보물을….”


..고작 내게 이런 귀한 물건을 쓰다니.


도와달라고 말하긴 했지만..


내게 이런 가치가 있을까..?


“너무 부담갖지 마십시오.. 제 동생이 생각나서 그런것도 있으니..“


..성자님을 입양했다던 가족을 말하는건가?


”동생이요..?“


내가 되묻자 성자님은 씁쓸함이 묻어나오는 말투로 말했다.


“피는 섞이지 않았었지만.. 저를 잘 따랐던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10층이 열리고 탑이 통합되자 마자 수소문 해보았지만 찾을수가 없더군요…“


”..당신이 그 동생과 분위기가 닮아.. 유난히 마음에 걸리나봅니다.”


동생..


성자님도.. 소중한 이들을 잃었구나.


”그렇..군요….“


”…“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하지만 그 슬픔을 알기에.


그 고통을 알기에.


무어라 말할수도 없었다.


“하하. 괜히 궁상을 떨었군요.”


성자님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분위기를 환기시키고는 품에서 어떤 종이를 꺼냈다.


낡아빠져 잘못하면 찢어져버릴 것만 같은 낡은 종이.


어째선지 그 종이에서 섬찟함이 느껴졌다.


“…이건..?”


“계약서입니다. 서로를 해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긴. 한번 읽어 보시지요.“


’계약서…?‘


갑자기 계약서라는 말이 왜 나오는걸까.


내가 의문이 담긴 눈으로 성자님을 쳐다보자 그가 머쓱하다는 듯이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하하.. 딱히 해가 될 내용은 없습니다. 그저.. 사람을 믿지 않는 주의인지라.“


..사람에게 배신당한 과거가 있으신걸까..?


계약서를 들어 읽어보려고 했더니 돌연 정보창이 떠올랐다.


띠링.


[맹세의 계약서 (B+)

‘스틱스 강의 맹세’가 계약의 형태로 화한 아이템입니다.

계약 불이행시의 패널티를 지정할 수 있습니다.]


“…B+급!? 성자님 이건…?”


“우연히 얻게 된 아이템입니다.”


우연히 얻은 아이템?


이정도의 등급이라면 현재 공략중인 층에서나 나오지 않을까?


그런 등급을 가진 아이템이 고작 계약서라니.


나는 약간의 불안감을 품은 채, 그대로 계약서를 읽어내렸다.


   「이것은 손성윤 (이하 을)과          (이하 갑)의 계약이다.


    1.    갑과 을은 서로에게 해를 끼칠 의도를 가진 행동을 할 수 없다.

    2.    을은 갑이 25층 까지 올라가도록 돕는다.

    3.    을은 갑이……

    4.    …

    5.    …

    6.    ..

    7.    …

    8.    둘중 누구라도 계약을 어길시 그 즉시 계약이 파괴되며 계약 불이행자의 사지가 찢긴다.


계약서를 읽고 처음 든 감상은,


’내가 너무 유리한 것 아닌가?‘였다.


내가 대가를 지불해야하거나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조항은 제로.


오직 받기만 하는 계약이었다.


“다 읽어보셨습니까…?”


나는 성자님을 쳐다보았다.


평소와 한치의 다름도 없는 얼굴.


인상은 좀 그렇지만..


다른 기색이 보이지는 않는다.


왜 이런 자기에게 불리하기만 한 계약을..


애초에 이걸 계약이라고 부를수나 있을까?


“..이건 성자님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없지 않나요?”


내가 성자님께 의구심을 품으며 묻자 그는 너무나 태연히도 대답했다.


”이익을 얻고자 했다면 억지로 이름을 적게 했겠지요. 그냥 안전장치라고만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군요.“


정말.. 순수한 선의로 내게 이렇게까지 해준다고?


그저 선의로 상등급의 아이템까지 써가며 나를 돕는다고?


성자님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이건 단순한 호의라는 선을 넘지 않았나?


동생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쳐도..


외모가 닮은 것도 아니고 그저 ‘분위기’인데.


이렇게까지 되니.. 오히려 불안해진다.


내가 의심이 서린 눈을 하고 머뭇거리자 성자님이 내게 눈을 마주쳤다.


….뭐지..


…..?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아아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한거지.


나를 구원해주신 성자님께 어떤 불경한 생각을!


그토록 선하시고 자상하신 성자님께서 그럴리가 없는데!


아아아..


이 어떤 죄악이란 말인가!


나를 위해서 오직 올곧은 선의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성자님인데..


나는 곧장 망설임없이 계약서에 이름을 적었다.


이윽고, 낡은 종이가 빛을 발하며 사그라들었다.


[유아린과 손성윤 간의 스틱스 강의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계약을 어긴자는 그 즉시 사지가 찢깁니다.]


아아, 계약이 이루어졌다.


나같은 것이 성자님과 계약이라니..


정말 꿈만 같-


후욱-


갑자기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남은 이 느낌은..


허탈감?


어색함?


내가 방금의 감각을 곱씹고있자, 이전의 내가 한 행동이 불현듯 떠올랐다,


‘으음?’


방금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왜 그렇게 성급히..


’……‘


‘..그래도 문제는 없으려나.‘


그 성자님이 이상한 짓을 할리가 없지 않은가.


나쁜 조항도 없었고.


괜찮을거다.


그 선하시고 자상하신 성자님이라면.


“흐음.. 계약이 이루어졌군요.”


“아..네에.”


성자님은 잠시 허공을 바라보시더니 입을 열었다.


“유아린이라… 예쁜 이름입니다.”


..그러고보니 제대로된 통성명도 하지 않았었나.


“성자님도요.. 아무튼 유아린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간단히 인사를 하자, 성자님께서 웃으며 받아주셨다.


얇디 얇은 눈 때문에 비열하게 비웃는 것 처럼 보이긴 하지만..


성자님께서 그럴리 없으리라.


"그럼 마침 마나 회복률 버프도 있으니 바로 힘을 쌓으러 가보시죠.“


”지..지금요?“


”버프를 항시 유지할 수 있는것은 아니니 뽕을 뽑아야지요. 자, 따라오십시오!“


성자님은 나를 강하게 해주겠다며 남쪽의 몬스터 사냥터로 향했다.


나는 반신반의해면서도 쫄래쫄래 성자님을 따라갔다.


‘내가… 계약서에 적힌 것 처럼 25층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몇번을 시도해도 십층조차 돌파하지 못한 내가 정말 강해질수 있을까..?


나는 성자님을 따라 걸으며 내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띠링.


「이름: 유아린

나이: 22

레벨: 17


근력:21 민첩:26 체력:20 지력:8 마나:31

남은 스탯:0


직업: 배우는 자 (SS)

스킬: 고속 학습 (SSS), 실전검술(D-), 기초적인 의술(E+), 강타(E)

특성: 배움의 천재(+), 미녀(+), 낮은 자존감(-), 의존(-), 트라우마(-), 외강내유(=)」


상태창이 떠오르자 짧은 시간 사이에 많은 것들이 바뀐것을 알수 있었다.


염소놈에게 입은 흉터가 없어져 미인이라는 특성이 추가되었고, 성자님을 만나면서는 의존이라는 부정특성이 새로 생겨났다.


부정특성이 생긴것을 보니 어딘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저주받을 직업과 스킬은 바뀐게 없았지만 어느샌가 나의 나이가 바뀌었음을 나는 깨달았다.


‘스물둘…’


상태창의 나이는 만나이로 표시된다.


내 생일이 지나고 일주일뒤에 소환되었으니..


벌써 일년이나 지났나.


그만큼이나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난 이꼴인건가.


..괜찮다.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성자님이 있고, 이 쓸모없던 직업과 스킬도 쓸일이 생길테니.


그래, 이 스킬도 드디어..


***


배우는 자.


탑에 소환되었을 때부터 갖고있었던 나의 직업이다.


[배우는 자 (SS)]


「당신은 지금까지 수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때로는 남들보다 쉽게.


때로는 남들보다 빠르게.


그런 당신에게는 아직 밑천이 드러나지 않은 막대한 재능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것을 배우십시오.」


짤막한 설명.


볼때마다 지워버리고 싶은 직업이다.


[고속 학습 Lv2 (SSS)

학습과 관련된 모든 행위에 막대한 보정을 받습니다.]


스킬도 똑같다.


..현대에서 배우는 것을 잘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것을 받게 되다니..


왜.


왜!


나는 이딴 스킬을 가지고 있는거야.


“…하아..”


처음 상태창을 열어 확인했을때는 등급을 보고 정말 뛸듯이 기뻐했다.


무려 SSS급 스킬이니 그럴만도 했다.

그러나 이 스킬에는 너무나도 심각한 맹점이 있었다.


그 누가 알았을까.


이 스킬은 ‘배울 대상’이 없어 아무 의미없는 것이 되버릴거라는 걸.


그래, 이 탑에서는 배울 것이 없었다.


휴식층과 보스층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간이 나뉘며 혼자만이 있는 층으로 이동하게 되니 남들이 사용하는 스킬을 따라하거나 배울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나 혼자만이 있는 층에서 다른 생물체라 해봐야 싸워야 할 적인 몬스터들.


그들의 움직임을 배워보려 해본적도 있지만 아무 규칙도 없는, 그저 본능만을 따르는 움직임을 배우는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초공략 때 만명의 사람이 모여 전투하는 보스전때는 말할것도 없다.


10층 마다 존재하는 보스층.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겪은 보스는 한 마리 뿐이다.


탑의 비극, 대학살을 일으킨 괴이.


내 가족과 동료들을 죽인 역겨운 흉물.


몇번을 도전해도 이길 수 없던 벽.


염소의 형상을 한 악마.


바포메트.


옆에서 그런 학살극이 펼쳐지는데 어떻게 움직임을 모방하는데 시간을 쏟겠나.


…바포메트..


진정하자.


“후우..”


저벅- 저벅-


전에 한번.


돈으로 전투를 가르쳐주는 강사 같은 형식으로 사람을 고용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10층을 넘기지 못하는 이들은 모두 나보다 약했기에 그 이상의 등반자를 찾았었다.


그리고 모두에게 거절당했다.


새로운 테마에 진입한 이들은 굳이 그런 불편한 방식을 통해 돈을 벌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10층 부터 19층 까지 진행되는 악마 테마부터는 벌어들이는 재화의 단위가 바뀌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몇실버 정도만 있었어도..’


’고속 학습‘이라는 스킬의 덕을 마지막으로 본건 극초반, 사람들과 함께 휴식층이자 일층인 시작의 층의 몬스터를 사냥할 때.


그 때 다른 사람의 응급처치를 배우거나 어설픈 검술을 따라한 정도였다.


그래, 그게 끝이었다.


무얼 더 배웠어야 한단 말인가.


전투적인 능력을 배울 수 없으니 청소를 배울까, 장사를 배울까.


이 탑에서는 모두 의미없는 것들이다.


나는 스스로 발전하는 류의 천재가 아니다.


남의 것을 배우고, 훔치는 것의 천재이지.


하지만 이제는 기회가 생겼다.


성자님이란 동아줄이 내게 내려왔다.


드디어 이 저주받을 스킬도 빛을 발하리라.


‘..그래, 이제는 강해질 수 있어. 이제는..!’


마침 남쪽 사냥터에 막 도착했다.


“도착했군요… 이제 좀만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우리는 사냥터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어김없이 고블린들이 튀어나왔다.


”크롸라락!!“


..저 염산에 지진듯한 얼굴은 언제보아도 역겹다.


나는 사냥터로 간다는 말에 방에서 챙겨나온 장검을 쥐었다.


그렇게 칼을 뽑으려 하자 성자님이 손으로 나를 막으며 말했다.


”…가만히 있어주시지요.. 아린씨가 배우게 될 검술을 보여드릴테니.“


내가 배울 검술..!


나는 검에서 손을 떼곤 홀린듯이 성자님의 동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 꺼낸건지 모를 신비한 검을 꺼내더니 자세를 취했다.


곧 쓰러질것만 같은 자세.


하지만 나의 눈은 그 동작에서 떨어지지를 못했다.


이내, 그 검을 시작으로 꽃잎이 생겨났다.


어딘가 눈에 익은 꽃잎이었다.


“이건…매화?”


어느새 추가된 매화의 향과 이 공간을 가득채운 매화잎.


성자님께서 검식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매화의 향은 만리를 간다고 하지요..”


고블린들이 뛰어올라 성자님을 덮쳤고,


성자께서 검을 휘둘렀다.


매화신결 (梅花神結).


사뿐사뿐 떨어지던 매화잎이 그 기세를 봐꿔 고블린 무리에게 향했다.


종식.


곧 고블린들이 아름다운 매화잎에 감싸지니 그들의 온몸에 선이 그어졌다.


그들은 아름다운 전의 광경과는 반대로 온몸에서 피를 뿜어내며 처참하게 고깃조각이 되어갔다.


하지만 피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매화의 향이 피냄새를 지워버렸으니까.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한없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꽃잎속의 날카로움.


그 이후의 진한 여운.


잠시간의 적막 속에서 시스템만이 울려댔다.


띠링.


[경지에 이른 기술을 목격했습니다.]


[최초로 S급 이상의 기술을 목격했습니다.]


[매화신결(SS)에 대한 학습 효율이 대폭 증가합니다.]


[매화신결(SS)의 정보를 깨닫습니다.]


[매화신결 梅花神結 (SS)

화산파 최고의 검법. 난해하지만 고절하기가 이를 데 없다. 매화를 펼쳐내는 검결이며 8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화신검결 梅花神劒結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스템에 의해 강화되었다.]


‘SS등급 이라고…!?’


만신전주나 만신화신으로 불리는 자의 스킬이 SSS급.


용사나 베일에 싸인 천마도 마찬가지.


또한 나의 스킬도 SSS급이다.


그런데 겨우 그것의 한단계 밑이라니.


’성자님은 탑에 소환되었을 때 부터 이 스킬을 가지고 있으셨던 건가?‘


그게 아니라면 이 엄청난 스킬을 후천적으로 얻었다고?


경악하는 나를 뒤로하고 성자님은 태연히 내게 말했다.


“어떻게..잘 보셨습니까..?“


”하…하… 이게 제가 배울 검술인가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SS등급의 검술을..”


내가 등급을 거론하자 성자님은 의외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스킬에는 그런 것 까지 나옵니까..?”


”..네. 근데 제가 제 스킬에 대해서 말을 했었나요?“


”…스킬이 아니라면 이 검술의 등급을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하긴.


“제 선천 스킬은 고속학습이라는 SSS급 스킬이예요. 모든 학습에 보정을 준다고는 하는데.. 잘은 모르겠네요.”


스킬의 등급을 밝히자 성자님은 꽤나 놀란 눈치였다.


“..등급을 숨기셨었군요.”


“네. 스킬 등급이 높은게 알려지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다는 소문도 있고.. 그 등급에 이 모양인게 자랑도 아니여서..”


“..좋은 선택이셨습니다. 소문이 났다면 일전의 계약서와 비슷한 류의 것들에 묶여 노예처럼 살아가셨을테니.”


..이렇게 들으니 새삼 성자님이 참 좋은 분이란게 느껴진다.


“그런데 그런 좋은 스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뭘 어떻게 배울수가 없더라고요.”


내 말에 성자님은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으음.. 확실히.. 뭐, 그래도 배우는 건 빨라지겠네요.”


그리고 잠시간의 적막이 이어졌다.


..이런걸로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빨리 수련이라도 시작해보지요. 가부좌를 틀어주시겠습니까..?”


“네? 지금.. 여기서요?”


고블린들의 피가 낭자한 이곳에서 말인가?


“..몬스터가 죽으면 그 신체에 서려있던 마나가 빠져나가는 현상이 있답니다.. 마나 농도가 높아지니 수련에 도움이 되지요.”


나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런말은 듣도보도 못했는데.. …성자님이니까 틀린말은 아니겠지.’


그래, 성자님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나는 서있는 자리에서 그대로 내려앉고는 가부좌를 틀었다.


곧 성자님의 손바닥이 내 등에 닿았다.


“…?“


”이제부터 제가 마나를 아린씨의 몸에 끌어올 겁니다.“


마나를 끌어와?


..마나 회복속도를 높이려는 건가?


”제가 알려드리는대로 호흡하면서 마나를 잡아놓으세요.“


”그게..무슨..“


반문하려 하자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뭐지 이 느낌은?


잠시간 생각한 나는 곧 답을 도출해냈다.


‘마나스탯을 올릴 때와 같은 느낌..!’


내가 감탄하자 성자님이 소리쳤다.


“집중하십시오..! 물을 머금는다는 느낌으로 계속 호흡하시고……”


성자님은 계속해서 내게 호흡법을 가르치시며 마나를 내게 때려넣으셨다.


그 과정이 계속해서 진행되자 나도 어느샌가 몸 안의 마나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가지 사실도 알게되었다.


‘..이건 마나가 아닌데..?’


새로 내게 들어오는 물질은 마나가 아니라는 것.


그보다 질적으로.. 훨씬 깨끗한 느낌이었다.


“마나가 느껴지십니까!? 느껴진다면 호흡을 멈추지 마시고 고개만 끄덕이세요!”


그 외침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성자님이 다른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 마나를 움직이려고 시도해 보십시오! 강타 스킬을 쓸 때의 감각을 되살려보세요..!“


강타?


다행히 보유하고 있는 스킬이다.


‘강타를 쓸 때의 느낌..’


그 때를 다시 떠올려보자 곧 마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그대로 그 마나를 하단전으로 옮겨서 작은 구가 만들어질 때까지 회전시켜 보십시오..!!“


‘회전…‘


작은 구체가 만들어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나보다 순수한 기운이 계속해서 끊임없이 들어왔기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그 구를 기로 감싸세요..!“


나는 어느때보다도 집중하며 기를 끌어와 구체를 감쌌다.


뚝. 뚝.


식은땀이 떨어진다.


몸이 떨린다.


‘..조금만.. 조금만 더..!!!’


마지막 집중력을 쥐어짜내야 한다..!


그렇게 집중하길 몇십초.


마침내 시스템이 나의 성공을 알렸다.


띠링!


[단전(A)가 생성됩니다!]


“..후우..”


눈 앞에 보이는 새로운 스킬.


나는 성취감을 느끼며 스킬을 확인했다.


“…이건!?”


내가 제대로 보고있는게 맞는걸까?


이 등급은..


“후우.. 축하드립니다.”


얼떨떨하다.


이렇게 쉽게 이런 높은 등급의 스킬을 얻는다고?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자 땀에 흠뻑 젖은 성자님이 보였다.


누가보아도 힘든 작업을 마친 얼굴.


묻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그 모습을 보니 한가지의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소감이 어떠십니까…?“


역시나 성자님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웃어 넘겼다.


성자님..


아아..


“..솔직히 약간 허탈하네요. 이렇게 쉽게 스킬을 얻으니까 그동안 왜 그렇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때는 방법이 없었지만..“


”후훗.. 그렇군요.“


”…아까 했던대로 호흡을 해서 기를 단전에 밀어넣으면 내공이 쌓일겁니다. 마나의 상위 호환이라고 봐도 무방하지요.“


”마나의…상위 호환!“


나는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운기에 들어갔다.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단전에 내공을 쌓았고 눈을 뜨니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내공스탯이 생성되었습니다.]


「이름: 유아린

나이: 22

레벨: 17


근력:21 민첩:26 체력:21 지력:8 마나:31 내공:1

남은 스탯:0


직업: 배우는 자 (SS)

스킬: 고속 학습 (SSS), 실전검술(D-), 기초적인 의술(E+), 강타(E), 단전(A)

특성: 배움의 천재(+), 미녀(+), 낮은 자존감(-), 의존(-), 트라우마(-), 외강내유(=)」


 ‘..진짜야..!‘


“새로운 스탯이라니…”


“하하..제가 쓰는 스킬들은 대부분 내공을 써야만해서요..”


..아까의 검술에.


새로운 스탯까지..


성자님의 대외적인 강함은 천마나 만신전주의 밑으로 평가 될텐데..


정말 그게 맞는걸까?


“며칠간은 계속 이 내공을 다루는 연습을 하시면 됩니다. 적당히 능숙해진다면 몸을 가득 채운 마나를 정화하도록 하지요. 앞으로는 대략 이정도의 시간대에 이곳으로 나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에..”


“그럼 오늘은 피곤하실테니 이만 들어가보셔도 괜찮습니다. 휴식도 중요하니까요.”


“그…저녁은 제가 대접할게요..”


“하하..감사합니다.”


***


”성자님!! 이건 어떻게…“


***


“감사합니다, 성자님!!”


***


”..드디어 일류에..!! 모두 성자님 덕이예요!“


***


한달이 흘렀다.


“…일류의 극.”


지난 한달의 수련결과가 나의 검에 드러나 있었다.


절삭력을 극적으로 강화시키는 검기.


자하신공의 영향으로 자홍색으로 물든 검기가 검신을 감쌌다.


“..하하.. 정말.. 말도 안되는 성장속도군요..  벌써 절정이라니..”


성자께서 고개를 저으며 감탄하셨다.


“..절정은 아직 무리인 것 같네요.. 이건 그냥 무식하게 내공을 응집해서 만든 검기예요. 검술과 체술도 일류의 극에 머무니 아직은 일류예요.“


“..일류에서 검기를 만든다는게 더 대단하다는 건 알고서 하는 말이신지요.. 애초에 기술의 경지가 한달만에 그정도에 다다른 것도 말이 안되는거지만… 아무튼 정말 대단하군요.”


파앙-


마침 내공이 다해 검기가 사라졌다.


..뭔가 조금만..


약간만 더 가면..


‘벽을 부술수 있을 것 같은데..’


그 한 발자국이 떨어지지 않는다.


왜일까.


“..아무래도 곧 절정에 이르실 것 같군요.”


성자께서 나를 지긋이 바라보신 후 한 말씀이었다.


“..뭔가 이미 다다른 느낌이기도 한데.. 뭔가에 막힌 것 처럼.. 더 나아갈수가 없네요.. 왜.. 그럴까요..”


“그래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 악마에게 복수하기에는..”


..그래.


이 정도로 강해졌으니..


그 악마에게 되갚아줄 정도는 되리라.


원수를 갚기에는 부족함 없으리라.


..드디어.


드디어..


이제야 그 악마를 죽일 수 있다.


죽일 수 있을..것 이다.


“수련은 충분한 것 같군요. 내공을 회복하고 내일 도전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래야겠네요.“


"그러면 오늘은 이만 쉬시지요.“


“..정말로 감사해요.”


“..아린씨가 노력했기에 가능한 결과이지요. 그럼.. 편안한 밤 되시길.”


성자님은 그 말을 끝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조금만 더 같이 있어주시면 좋을텐데.


괜찮아.. 그래도 성자님은 나를 떠나시진 않으니까.


그러니까… 이정도는 참을 수 있어.


나를 버리시진 않으니까..


혼자가 되어버린 나는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하아.”


마음이 복잡하다.


어딘지 모를 두려움이 내 마음 한켠에 아직 남아있었다.


..직시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


분명 무력은 강해졌는데.


정신만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성자님께 애원하며 조금은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날이 되어도 마냥 내일이 기다려지기만 하지는 않는다.


“성자님.. 성자님.“


..지난 한달 동안 생긴 힘들때마다 성자님을 떠올리는 버릇.


이런 의존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하게된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그래.. 오늘 까지만이다.


“아아.. 성자님..”


제가.. 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이 정도로 강해졌으니까.. 분명히 이번에는 그놈을 죽일수 있을거야.’


믿자.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나를 가르쳐준 성자님을 믿자.


내가 못미덥다면, 


내 뒤의 성자님을 믿자.


…이건 언니에게 했던 생각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


아니, 그때보다 심하나..?


..나도 어지간히 시스콤이었나.


언니..


‘오늘따라 보고싶어..’


저벅. 저벅.


끼익.


방에 도착한 나는 풀썩거리며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평소라면 지쳐 쓰러졌을 시간인데도 어쩐지 힘들지 않았다.


왜일까.


힘들지가 않다.


그만큼이나 내일이 기다려지는 걸까.


아니면 두려운걸까.


오늘은 감성적인 날인가 보다.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걸 보면 말이다.


유난히 언니가 그리워지는 걸 보면..말이다.


”…언니.“


드디어 이런 날이 찾아왔어.


역겨운 악마에게 복수할 날이…


“..언니..”


나 좋은 사람도 만났다?


그 온전한, 최초의 악마를 죽인 분이야.


성자라고 불리시는 분인데 너무나 자상해.


나를 이해해주시고 도와주셔.


그래서 기대고만 싶어져.


“..언니….”


너무나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제발.


다시 돌아와서 나를…도와줄수는 없을까…?


나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는 고개를 숙였다.


“언니..!!”


그곳은 어때 언니?


거기서도 내가 보일까?


내가 그 악마를 죽인다면.. 언니는 어떨거 같아?


아직도 그 악마를 죽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그러니까..


“지켜봐줘..언니..”


부디 응원해줘.


내가 그 악마를 죽일수 있기를…


나는 소리죽여 울며 눈물을 훔쳤다.


때로는 악마에게 죽은 이들을 떠올리며 증오를 불태우기도 했지만.


때로는 다시 볼 수 없는 이들을 그리워하며 회상하기도 했다.


길고 길었던 밤은 오늘따라 짧았고.


이제는 아침이 밝았다.


하늘은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이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시작의 층을 비췄다.


나는 감았던 눈을 떠 하늘 위를 바라보았다.


”..오늘이네.“


하늘은 평소와 다름없이 맑았다.


결전의 날이 되었는데도 오히려 마음은 차분했다.


아침에는 고블린들에게 찾아가 몸을 풀었다.


점심에는 성자님을 만나 잘 벼려진 B 등급의 검 하나와 가죽 갑옷을 선물받았다.


저녁에는 마음을 다스렸고 나는 밤이 다 되어서야 고블린 숲의 중앙에 있는 워프게이트에 몸을 실었다.


바로 악마에게 도전할수도 있었으나 나는 2층을 찾아갔고 3층을 돌아보았다.


4층, 5층, 6층, 7층, 8층, 9층.


구층마저 돌아본 나는 십층으로 향하는 워프게이트에서 멈춰섰다.


“…악마.”


그토록 강해졌음에도 두렵다.


아직도 그 참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렇기에 바로 도전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해야만한다.


나는 혼자만이 아니기에.


나를 위해 죽어간 이들이 있기에.


그렇기에 나는 발을 옮겼다.


[10층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수십번, 어쩌면 수백번 보았을 문구.


이 문장을 보는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래야한다.


“도전한다.”


파앗-


넓은 초원이었던 풍경이 바뀐다.


붉은 하늘, 뜨거운 대지.


군데 군데 퍼져있는 용암.


세상의 종말을 연상시키는 광경이었다.


펄럭-


어디선가 들려오는 불쾌한 날갯질.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하늘위의 염소가 보였다.


[악마, 바포메트가 출현합니다.]


염소의 얼굴에 사람의 몸통, 그리고 시꺼멓게 물든 흑익의 날개.


언제보아도 역겹도 저주스러운 악마, 나의 원수 바포메트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것의 눈을 응시했다.


흰자 따위 없는 검은 눈이 과거의 지옥도를 떠올리게 했다.


[키키..키키킥.]


..또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악마에게 산 채로 뜯어먹힌 이들이 떠올려진다.


불에 타죽은 이들이, 용암에 빠져죽은 이들이.


악마의 손톱에 찢긴 이들이.


나의 소중했던 언니가.


그 때의 절대적이었던 악마가 내 앞에 강림한 것만 같다.


으드득-


입술을 짖씹었다.


이제는 달라져야만 한다.


공포를 이겨내야만 한다!


“..공포가 문제라면 그걸 잊어버리면 되겠지.”


강렬한 감정을 지워버리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고통.


이미 실패하기도 했으나 이번에는 다르리.


나는 숨을 내뱉고 검으로 나 자신을 찔렀다.


일전에 이미 한 번 시도해 보았던 방법.


그래도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공을 터트려 강제로 내상을 입혔다.


그럼에도..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키키키키킥..키킥!!]


악마가 저질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내게 빠르게 돌진했다.


이렇게나 강해졌음에도 두려움에 져 물러나야만 한다고?


헛소리 마라.


나는 달라졌다.


죄책감에 찌들어살던 그때와는 달라졌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언제까지 두려움에 떨며 살수는 없다고!!“


더욱 큰 고통.


일부의 내공으로는 부족하다면 단전에 담긴 모든 내공을 단번에 터트린다!


콰앙-!


내공을 터뜨리자 그런 소리가 날리 없음에도 폭발음이 들려오는 듯 했다.


쩌적-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단전에 금이 갔고, 이내 상상도 하지못할 만큼의 아찔한 고통이 나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나는 웃었다.


드디어 다리가 움직였으니까.


[키키킥!!!]


슈욱-!


악마가 내게 돌진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도 쉽게 그것을 피해냈다.


“하하..“


악마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날개를 펄럭여댔다.


“…드디어.”


드디어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였다.


공포를 잊었다.


악마가 다시 한번 내게 돌진했다.


이번에는 긴 손톱을 앞으로 내민 상태였다.


챙-!


바포메트의 그 긴 손톱과 나의 검이 맞부딪혔다.


기세 좋던 놈의 돌진이 순식간에 멈췄다.


쩌적.


어느새 악마의 손톱에 금이 가고 있었다.


그다지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고작 이런 공격에.


“..고작 이런놈에게 언니가… 친구들이..!!!!”


분노가 치솟았다.


이런 별 것도 아닌 놈에게..


그들이..


“….!!..하아.. 아니다.”


그래.


이놈이 강하고 약한게 무슨 상관이냐.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건데..!!


나는 마음을 다스리며 기수식을 취했다.


사라락.


잠시 집중하자 어느새 매화잎이 하나둘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키키킥..키키키!!]


악마가 웃었다.


그 참상때의 놈의 비웃음과 겹쳐들려 불쾌했다.


놈은 잠시 손을 휘적대더니 불덩이를 만들어냈다.


그 불덩이는 내게 날라왔지만 금세 사그라들고 말았다.


수십, 수백 송이의 매화가 불을 감쌌기에.


제 11초식.


[키키키킥!!?]


불을 꺼버린 매화는 멈추지 않았다.


매화송이들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악마에게 향했다.


이것은 겨울속에서 고통받던 나의 검.


또한 겨울에게 작별을 알리는 인사.


"매화인동(梅花忍冬)!!"


겨울을 이겨내 찬란하게 만개한 매화.


그것들이 악마를 덮쳤고,


서걱-! 서걱-!


이내 악마는 처참한 고기조각이 되었다.


형체는 알아볼수도 없게 뭉뚱그려 졌으며 사지중에 멀쩡한 부위가 없었다.


공중이 있던 몸뚱아리가 땅에 떨어졌고, 목과 분리된 머리는 나의 앞으로 굴러왔다.


[키..킥.]


”..목만 남았는데도 살아있다니.. 역겹네.“


하지만 이것이 이 놈에게 어울리는 결말.


나는 조용히 칼을 들었다.


푸욱-!


성자님이 주신 칼이 악마의 뇌를 파헤쳤고, 이내 시스템이 놈의 죽음을 알렸다.


띠링!


[바포메트를 처치하셨습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폭혈단을 획득합니다.]


[폭혈단 (C)

복용하면 일시적으로 모든 스텟이 50% 상승합니다. 복용 후 십분이 지나면 부작용이 찾아오며 모든 스텟이 영구적으로 5% 감소합니다.]


[10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11층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아니.”


털썩.


나는 겨우 대답하며 뜨거운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몸 상태가..말이 아니네.’


금이 가 부서질 듯한 단전.


역류할 것만 같은 내공.


바포메트와 싸울 때는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어찌어찌 몸을 움직였으나,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몸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몸 상태에도 나는 웃었다.


또한..울었다.


“…모두들..”


“내가 해냈어.. ..내가 드디어..”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던 날들.


죄책감에 찌들어살던 지난날.


나의 과거가 스쳐지나갔다.


나는 다시 볼수 없는 이들을 되새기며,


그들에게 전했다.


“..이젠.. 편히 쉬어.”


뚝. 뚜둑.


눈물이 바닥을 적셨고 곧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나는 악마의 시체를 바라보며,


소중했던 이들을 마음에 묻었다.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과거와 결별했다.


“잘 가, 모두들.“


붉은 하늘 속에서 달이 나를 비추었다.


”….하하..“


복수의, 작별의 여운에 잠겨 있을 무렵.


나의 몸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기의 마나가 요동친다.


단전이 흔들린다.


내공의 순환이 가속된다.


곧 나는 내게 일어나는 일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내면의 벽이 사라진다.


”그렇구나.“


다음 경지로 향하려던 나를 막았던 벽.


벽의 정체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였다.


바로 저 악마를 향한 두려움.


그저 과거를 향한 집착.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불안함.


그것들이 한데 모여 이룬 심마(心魔).


그게 나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던 것.


“심마라… 드디어 소멸하는 건가.”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심마가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악마는 내 손에 죽었고, 나는 과거에서 눈을 돌려 현재와 미래를 보기 시작했다.


설령 나 스스로가 불안하더라도, 지금은 성자님이 있다.


“…복수는 성공적이네.”


벽이 허물어졌다.


공중의 마나가 머리 위에 모여 점점 하나의 형상을 이뤘다.


단전의 금이 메워지며 더욱 견고해졌고 내공은 사지의 혈맥을 활보했다.


그리고, 그 내공이 다시 단전으로 돌아갔을 때,


머리 위의 형상이 완성되었고.


터엉-!


어떤 기파가 생겨나며 대기의 마나에 파도를 일으켰다.


만들어진 허공의 형상은 흐드러지게 피어난 세 개의 꽃봉오리.


절정의 상징이었다.


“절정..”


“이정도면.. 나도 성자님께 도움이 되려나.”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털썩-


***


“으윽.. 여기는..?”


나는 침음을 흘리며 깨어났다.


보이는 광경으로 보았을 때, 아직 십층인 것 같았다.


“..끄으으!?”


깬 상태 그대로 잠시 멍하게 누워있던 내게 돌연 고통이 찾아왔다.


몸이 타들어가는 느낌.


“..이런, 화상이..!”


몸을 일으키자 땅에 닿아있던 살이 화상을 입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뜨거운 대지에 오랫동안 살을 맞댔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아..하아.. 젠장.”


나는 비틀거리며 악마를 죽이고 나서 활성화된 워프 게이트로 향했다. 


워프 게이트에 발을 올리자 게이트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츠츠츳-


이내, 시공간이 비틀리며 어느새 나는 일층에 도착해 있었다.


시작의 층에 도착하자, 워프 게이트 앞에 서있는 성자님이 보였다.


”성자님..? 다행이다..“


성자님은 나를 바라보더니 내 화상에 화들짝 놀란 듯 허둥대며 물었다.


”아린씨..!? 왜 이런 부상을..!“


“..염치없지만.. 포션을.. 부탁드려요.”


“..물론입니다.”


성자님은 허공에서 붉은 액체가 담긴 고급스런 유리병을 꺼내, 마개를 따고 내 등에 부었다.


치이이익-


처음 겪어보는 포션의 느낌은 이상했다.


뜨거운 느낌이 들며 살이 원래대로 바뀌어가니 괴상하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후우.“


대략 몇분 동안 났던 살이 재생되는 소리가 사라졌다.


화상으로 인한 고통도 없어졌고 흉터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포션은 대단하네요..“


”..아린씨, 이거라도 걸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포션의 효능에 감탄하던 내게, 성자님이 옷을 하나 내밀었다.


그 행동에 나는 뒤늦게 넝마가 되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옷을 알아차렸다.


”…감사해요.“


성자님이라면 괜찮은데..


”..하루동안 나오지 않으셨어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하하..“


옷을 입고 있을 때, 성자님이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하루라니..


그렇게 오래 기절해 있었나?


‘..성자님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어버린거 아닌가..’


성자님께 너무 미안하다.


”그럼… 하루동안 저를 여기서 기다리신거예요?“


”..네. ..그래도 나름 제 제자인데 걱정이 되더군요.. 후훗.“


하루 동안 나를..


아아..


성자님..


나는 감격하며 성자님을 올려다 보았다.


그때, 계약서를 썼을 때와 같은 감각이 나를 찾아왔다.


성자님을 숭배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


아..


아아..


고작 나 같은 것에 성자님이.


고귀하신 성자님께서 친히 나를..


아아..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나 같은 것이 너무 폐를 끼치는 건 아닌가?


나 같은게 성자님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가져도 될까?


성자님께 받기만 하는 나 같은게 감히 위대하신 성자님께?


그런 나와 같이 다녀주시는 성자님은 얼마나 자비로우신가.


아아..


성자님.


나의 성자님..


위대하신 분 이시ㅇ—


후욱-


또 무언가가 나를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


‘..뭐지?’


왜 갑자기 이런 과잉된 감정을.


틀린 건 아니긴 하지만..


‘….’


뭐, 상관 없으려나.


이상한 생각도 아니고.


사실이기도 하니.


별 문제 없을 것이다.


“..아린씨?”


잠시 멍하게 있던 나를 성자님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괜찮아요.”


“….혹시라도 후유증 같은 게 있다면 언제라도 말하십시오..”


“아하하.. 정말 괜찮아요. 그냥 복수를 이룬 게 감격스러워서..”


성자님이 나를 잠시 지긋이 바라보셨다.


….변태같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 성자님의 시선이 너무나 좋았다.


그리 생각하며 나도 성자님을 응시하기를 잠시, 어떤 금색의 빛이 그의 눈에서 빛났다.


이내, 성자님의 얇은 눈이 아주 약간 떠졌고 나는 성자님의 눈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금안.


..분명 찬란한 금안(金眼)이었다.


“..흐음. 문제는 없군요.”


성자님의 말을 들어보면, 저 눈은 스킬인가?


눈을 완전히 뜬다면 어떨까.


왜 이런 멋진 눈을 가리시는 거지?


무수히 많은 의문들이 뒤따랐다.


‘..언젠가 성자님이 말해주시겠지.‘


그래,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괜히 궁금해하지 말자.


성자님이 일부러 가리는 건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성자님은 눈도 아름다우시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그 후, 우리는 자연스레 숙소로 걷기 시작했고, 성자님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저벅. 저벅.


“이번에 절정지경에 오르셨더군요. 축하드립니다. 정말..경악스러운 성장속도예요..“


”..악마를 죽이니까 자연스레 오르더라고요. 참.. 별 것도 아닌게.. 영향은 많이 끼치네요.”


“..다행히 복수는 잘 이루신 것 같습니다..”


“..네. 모두 성자님 덕이에요.. 다시한번 정말 감사드려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고맙군요..” 


“사실인걸요.. 성자님께는 감사한 마음 뿐이에요.”


나의 말에, 성자님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나는 그 미소에 왠지 모르게 머쓱해져, 급하게 말을 덛붙였다.


“진짜에요! 케묵은 과거를 모두 털어내는 건 성자님이 없었다면 하지 못했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하하..”


저벅. 저벅.


“…탑에 막 소환됐을 때, 성자님은 어떠셨어요..?”


“저는… 뭐, 평범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당황하고.. 스킬을 확인 했다가 또 한번 당황하고… 다른 사람들과 같았지요.”


“능력때문에 당황..하셨다고요?”


“음.. 제가 제 스킬을 말한 적이 없었나요?”


그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성자님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제 고유한 스킬은 [수명 상점]라고 합니다.”


수명 상점?


느낌이 좋지 않은 스킬명이다.


“…수명을 대가로 사용해 다양한 것들을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이지요.”


수명을 대가로…?


잠깐, 그럼 지금 성자님의 남은 수명은..?


“..그게 무슨..”


심장이 철렁했다.


그렇다면.


내가 배우고 있던 이 검법도, 심법도 성자님의 수명으로 구매한 무공일수도 있다는 거 아닌가.


“…다행히 능력의 효율은 좋아서 남은 수명은 많습니다. 수명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자님은 그렇게 말하며 웃어보이셨다.


그 웃음에 나는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너무 그런 표정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명을 늘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것도 꽤 좋은 스킬입니다.”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길래.


..울 것만 같은 표정이라도 지었나?


“..하지만..”


저보고는 스스로를 아끼라 하셨잖아요.


그러면서 제게 베풀어주신 게, 성자님의 살을 깎아 만들어 냈던 거라면..


저보고 무슨 낯으로 살아가라는 말이십니까.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보다 오늘은 즐거운 날이니 기쁨을 만끽하지요.“


..그런 사실을 듣고서 어떻게 그러겠어요.


성자님…


“…부디 성자님 스스로를.. 아껴주세요.”


“..하하! 알겠습니다.. 절정지경에………….”


“……”


성자님은 다른 이야기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했지만, 지금은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성자님.


성자님이 수명을 써가면서 강해지고 계셨다니.


..이런 사실을 마주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너무도 역겹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 사실을 외면할테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가겠지.


그런 내가 너무나 역겹다.


역겹다는 단어 하나가 나를 가장 잘 설명한다.


‘..20층의 보스가 수명을 10년 늘려주는 아이템을 드랍한다던데, 그거라도 드려야겠네.‘


..그렇게 많은 것을 받아놓고도 이정도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지금 이 상황이 저주스럽다.


우리는 계속 대화를 나누며 걸었고, 숙소에 도착하자 성자님께서 청천벽력 같은 정보를 말해주셨다.


“그나저나 절정이라면 적어도 30층 까지는 무난하게 오르겠군요.“


별 의도 없이 내뱉은 말.


그러나 그 말에 나의 심장이 철렁했다.


”30층 까지요…?“


”네, 30층의 보스까지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래층 까지는 충분히 공략하실 수 있을겁니다...“


30층.


당연히 두 번째 휴식의 층, 25층에도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내게만 좋은 계약서에 명시된 것도 25층 까지고 말이다.


..그렇다면 25층에 도달하면 나는..


성자님과 헤어져야 하는걸까….?


‘..49층이 공략되었다던 메시지가 뜬지도 꽤 되었으니 곧 50층 보스 공략대가 꾸려지겠지.’


당연히 성자님도 포함 될테고.


클리어 이후에 공략대는 51층, 세 번째 휴식층에 진입할 것이다.


그들은 그 층에서 생활할 것이고 자연스레 두 번째 휴식층에 있는 나는, 성자님을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 확실하다.


헤어지기 싫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같이 가고싶다.


버림받고 싶지 않다.


“..아린씨..?”


걱정스레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성자님.


이제는 저 실눈도 무서워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어리광을 부린다면.


더 나와 함께해달라고 떼를 쓴다면.


성자님은 어떤 반응이실까.


..내가 더 함께한다면 성자님은 더 많은 수명을 쓰게 되시진 않을까..?


“아무것도….아니예요.”


사실은 묻고 싶다.


정말 곧 나와 헤어질거냐고.


그러나 묻지 못했다.


그 답을 들을 용기가 없었다.


혹시라도 나올, 떨어져야 한다는 그 대답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가요.”


성자께서는 짧게 읊조린 후 말했다.


“..그럼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지요..”


“아.. 성자님 잠깐..!”


나는 불안한 마음에 성자님을 붙잡으려 해보았지만 그는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바람처럼.


 ‘..조금만 더 같이 있었으면 했는데..’


언제나 이런 식이다.


인사를 한 후에는 항상 이렇게 바람처럼 사라지신다.


조금만.


잠깐이라도.


더 곁에 계셔주신다면 참 좋을텐데.


..우리가 헤어질 때도 이럴까?


“..성자님..”


나는 묵묵히 숙소방으로 향했다.


불이 꺼진 방이 오늘따라 차가워 보였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풀썩거리며 침대에 쓰러졌다.


그리고 잠시동안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도저히.. 이 불안함이 진정되지를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두렵다.


과거를 극복해냈다.


그러나 이제는 다가올 미래가 두렵다.


악마 같은 강하고 흉포한 것이 아니다.


그저 한 사람과의 헤어짐이다.


그런데도..


그게 어찌나 두렵고 걱정되는지…


너무나 무서워…눈물이 흐른다.


성자님의 표정, 목소리, 냄새, 자상함,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될지도 모른다는.. 그 사실이 두려워 미칠 것만 같다.


어쩌면 그 훌룡하시고 선하시고 정 많으신 성자님이라면 나를 계속 데리고 다니실 수도 있다.


오늘은 나를 제자라고 말해주시기도 했고…..


“….나는 성자님께 뭐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자님께 어떤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첫 만남 때는 납치당하기 직전의 상황이었고, 그 후에는 내 사연을 털어놓았다.


그 다음에는 무공을 배웠고, 이로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


항상 받기만 해왔다.


그런데..나는 성자님께 무엇을 해주었지?


“..그렇구나.”


나는 성자님의 은혜를 받은 행인중 하나일 뿐이다.


그저 운이 좋은.


성자님께 아무 도움도 드리지 못하는.


언제든지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괜히 수명만 더 쓰게 많드는..


그런..짐짝.


꾸욱-


그럼에도..


나는 성자님과 함께하고 싶다.


이기적이다.


추악하다.


염치없다.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성자님과 함께하고 싶다.


“..하하.”


고작 한 달 남짓한 시간.


짧은 시간이었지만 더 이상, 성자님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다.


성자님은 내게 곧 이정표이며 또 가장 편안한 곳이 되었다.


불안함이 생기면 성자님을 떠올리게 되었고, 나는 믿지 못해도 그 분은 믿을 수 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에게, 성자님은 유일하게 남은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성자님마저 잃을 수는 없다.


영혼을 바쳐서라도 함께하고 싶다.


“성자님…”


..어쩌다 성자님께 나같은게 붙어서는.


죄송스럽기가 그지없다.


“성자님..”


벌써… 보고싶어요.


나의…성자님.


***


“…늦잠이네.”


다음날.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방의 커튼을 여니 환한 햇빛이 방안을 비췄다.


이곳에는 시계가 없어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으나, 해가 중천에 떠있는 것을 보면 늦잠을 자버렸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성자님이랑 만나는 시간도 지난 것 같은데….!”


성자님이 설마 기다리고 계시려나?


나는 황급히 성자님께 선물받은 가죽 갑옷을 걸치고 검을 대충 허리에 멘 뒤, 일층의 고블린 사냥터로 뛰어나갔다.


타닥- 타다닥-


“..이런.”


나무를 사이를 종횡무진 하다보니 언제나 그렇듯 고블린들이 습격해왔다.


사라락.


곧 나의 검에서 매화가 피어났고, 일순간 주변에 노을이 지는 듯 했다.


매화는 고블린들을 덮쳤고, 그것들은 순식간에 한 줌 핏덩이가 되었다.


일련의 과정은 십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일신우일신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었으나, 아린은 관심조차 주지 않고 그저 항상 성윤과 만나는 장소로 최대한 빠르게 뛰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잠시동안 달리기를 몇십초.


나의 눈에 나무에 기대있는 성자님이 들어왔다.


타악-


“..성자님!!”


내가 땅에 착지하며 외치자, 성자님은 고개를 돌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으셨다.


“정말 죄송해요. 늦잠을 자버려서 그만..“


”아닙니다. 그러실수도 있지요. 그럼 약간 늦었으니 바로 시작해볼까요?“


”…네.“


”그럼 절정에 오른 기념으로 대련이나 한 번 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대련이요? 저야… 너무 좋죠.“


..성자님과 검을 맞댈수 있다니.. 더없는 영광이다.


”내공은 일류의 수준으로, 무공은 칠매검만 쓰겠습니다. 어디 한번 저를 때려보십시오. 한대라도 맞는다면 선물을 하나 드리지요..“


”..선물이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성자님은 그리 말하며 칠매검의 기수식을 취하셨다.


선물이라니.. 수명을 팔아서 사신 건 아니겠지..?


..어쩐지 불안하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기수식을 취했다.


“선공은 양보하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검에서 매화를 피어올렸다.


검 끝에서 하나, 둘 줄줄이 피어나는 매화.


한 송이의 미약한 매화는 열 송이, 백 송이, 천 송이가 되며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매화신결 (梅花神結).


일류에 머물렀다면 쓰지 못했을 검초.


절정에 올라 간신히 펼쳐낼수 있게 되었으나…


‘..내공의 소모가 너무 커…!’


막 절정에 올라 겨우 한 갑자의 내공을 가진 내게는 삼할 이상의 내력을 써야만했다.


제 6초식.


매화신결은 고절한 무공.


결점이 보이지 않는 이미 완성된 무공이다.


하나, 그 무공이 내공이 부족한 ‘지금의 나’에겐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바꾼다!‘


그렇기에 나는 과감한 선택을 내렸다.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


그러나 성자님을 믿었다.


저 앞의 성자님이 있기에,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내, 계속해 늘어가던 매화송이가 증식을 멈췄다.


매화는 서서히 움직였다. 그리고 하나의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매화잎은 곧 한데 모여 또다시 매화의 형상을 이루었지만 변화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찌릿-!


[집중력이 극에 달합니다!]


[일시적으로 매화신결(SS)에 대한 재능이 상승합니다!]


어두운 곳에서 시들어갔던, 지금은 찬란하게 개화한 재능이 이 시도의 뒤를 받쳤다.


매화들이 모여 이룬 하나의 거대한 꽃 송이에 여러개의 겹이 추가되었고, 곧 다시 매화송이들이 흩어졌다.


마치, 신기루처럼.


만첩환매화(萬疊幻梅花).


흩어졌던 매화는 다시 한데모여 성자님을 덮쳤다.


“..허, 이게 무슨..청명이 본다면 좋아하겠군요. 하지만.. 그래도…질수는 없답니다?“


성자님의 검에서 소담한 백매화가 피어올랐다.


하나. 둘.


어느새 불어난 매화, 여전히 적었지만 그 매화는 넓게 퍼져 나의 매화를 막았다.


칠매검(七梅劍).


제 2초식.


매화수(梅花水).


성자님의 매화는 마치 물결처럼 벽을 만들었으나, 한 줌의 물이 총알을 막을 수는 없는 법.


금세 나의 매화가 그의 매화를 꿰뚫었다.


“벽(壁)!”


그때, 성자님이 한 단어를 외치셨고, 산산히 갈라지고 부서진 그의 매화는 다시 한데 모여 매화의 벽을 이루었다.


하지만, 나의 만첩매화는 그 벽마저 뚫고 성자님을 난도질했다.


서걱. 서걱.


“..성자님!!?”


그 광경에, 되레 내가 놀아고야 말았다.


성자님이라면 막으실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나는 급히 성자님께 달려나갔다.


매화가 사그러지고, 곧 성자님의 형체가 드러났다.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성자님은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다.


“…하…하. 호기롭게 질 수는 없다고 했는데 져버렸군요. 아까.. 그 초식은 뭐였습니까..? 처음에는 육초식, 매화류여하 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달라지더군요.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았다면 큰 상처를 입었겠습니다. 내력을 절정 수준까지 끌어올려도 완전히 막지 못할 공격이었어요.“


“…휴우.”


..무사하셔서 마음이 놓인다.


“그건.. 그냥 즉석에서 초식을 약간 변형시킨거에요. 육초식을 쓰려다가 내공의 소모가 너무 심해서..어쩌다보니..”


“..필요한 검기가 적으니 내공의 소모도 적을테고, 잠깐 흐릿하게 사라지는 건..설마. 아린씨 잠깐 검기를 만드실수 있겠습니까? 매화가 아니라 그냥 검기입니다.“


”..네. 그정도야 뭐…“


나는 검에 기를 모아 응축시켜 검기를 만들었다.


”..거기서 검기를 넓게 퍼트려 보시겠습니까..?“


”..넓게요?“


그게..될까..?


나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성자님이 하는 말이기에 따랐다.


파앙-


나는 조용히 집중하며 검기를 만들었다.


여기 까지는 쉽다.


이번에는 검기를 넓고 얇게 퍼트리려고 해보았다. 그러자 검기가 나뉘면서 얇은 실의 형태를 취했다.


“..이건..검사(劍絲)…?“


”하하..하..역시 얇은 실로 전해지는 내공을 일시적으로 끊어 잠시동안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거군요.. 무슨 생사가 걸린 싸움도 아니고 고작 대련에서 깨달음을 얻어서 절정 중기까지 오르다니 대단하단 말 밖에 할수가 없습니다.“


”..제가 절정 중기에 올랐다고요..?“


나는 그 순간 스스로의 재능에 전율했다.


무공을 배운지 고작 한 달 남짓.


그런데도 벌써 SS급 스킬을 마음대로 변형하고 절정 중기에도 올랐다.


이게 반년이 되고, 일년이 된다면, 어느정도로 강해질 수 있을까.


..성자님의 곁에도 당당히 설 수 있지 않을까?


”혹시 중기에 오를 때 무슨 일이 있지는 않았습니까?“


”..무슨 일이라면…그냥 집중력이 극에 달했다며 시스템 창이 뜨고, 머리가 잠깐 찌릿한 정도였어요.“


”…아마 임독양맥중 하나가 타통된 것 같군요.“


”..임독양맥..이요? 두개를 완전히 뚫으면 초절정에 닿는다는 그 임독양맥이요..?“


”네. 아마..맞을겁니다.“


“…”


..곧 초절정에도, 성자님의 경지에도 닿을 수 있는건가.


그렇게 된다면 나도 성자님을 도울 수 있겠지.


쓸모없는 짐짝만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약속대로 여기 선물입니다.”


성자님은 그리 말하며 내게 검집 하나를 내밀었다.


“보니 따로 쓰는 검집이 없으시더군요. 제가 하나 준비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것까지 신경써 주신건가.


감격스럽기 그지없다.


황금빛의 멋스러운 문양이 박힌 고급스러운 검집.


최고의 선물이다.


띠링.


[매우 뛰어난 검집 (B)

숙련된 장인이 한땀 한땀 제작한 검집. 매우 뛰어나 발검 속도가 40%, 착검 속도가 20% 증가한다.]


“…B급..?”


“하하.. 옵션을 조금 다르게 해보고 싶었는데, 이것 외에는 아는 제작법이 없다고 하더군요.”


“어제는 이걸 가지러 가신 거였나요..?”


“…뭐, 그런 걸로 하지요.”


…설마 수명으로 사신 건 아니겠지.


“모든게 갖춰졌으니 이제는 등반만 하면 되겠군요. 하하.. 감격스럽습니다.”


..그 모든 건 성자님이 주셨지요.


이 갑옷도, 검도, 검집도.


무공도, 용기도.


그리고 복수마저.


“전에도 말했다시피 삼십층까지 어려운 건 없을 겁니다. 행운을 빌지요.“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두 번째 휴식층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는 그 대화를 끝으로 성자님과 헤어지고, 조금 더 걸어 워프게이트에 몸을 실었다.


[11층에 입장하시겠습니까?]


‘그래.’


[11층에 입장합니다.]


츠츠츠츳-


 순식간에 주변의 환경이 바뀌었다.


십층과 같은 뜨거운 대지와 붉은 느낌의 공간.


띠링!


[악마, 임프가 등장합니다.]


[오십 마리의 임프를 처치하십시오.]


그 메시지가 떠오르자마자, 박쥐와 유령이 합쳐진 듯한 기괴한 괴물들이 소환됐다.


십층을 주기로 바뀌는 테마, 그 중에서도 10층의 바포메트로 시작되는 악마 테마의 몬스터였다.


나는 조용히 검을 뽑아 매화를 빚어냈다.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제 1초식.


매화노방(梅花路傍).


서걱. 서걱.


임프들의 몸에 순식간에 붉은 실선들이 그어졌고, 이내 그들은 고깃덩이가 되었다.


띠링!


[11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12층에 입장하시겠습니까?]


“그래.”


***


십이층도 그 전의 층과 다르지 않았다. 


악마들이 나왔고, 나는 매화를 피워 그들을 죽였다.


십삼층도, 십사층도, 그 이후의 층들도 모두 같았다.


십일층부터 십구층을 등반하는데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으니, 얼마나 쉬웠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십층.


과거의 인물들을 상태로 싸우는 영웅 테마의 시작이었다.


띠링!


[20층에 입장합니다.]


또다시 바뀌는 배경.


이번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넓은 평야였다.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적(項籍)이 출현합니다.]


히히힝-!


시스템의 메시지가 떠오르자, 동시에 말의 힘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하!! 이번의 도전자는 너로군!!”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흑색의 명마를 탄 거구의 사내가 보였다.


과거의 용장.


서초의 패왕.


만인지적이라는 칭호를 얻은 자.


역발산기개세의 항우였다.


“…만인지적.”


“그래!! 만인지적, 패왕, 그 모두 나를 칭하는 말이다!! 어디 한번 놀아보자꾸나!!“


”..장생과는 잘 받아가지.“


”하하!!“


항우는 호방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타고 내게로 질주했다.


검을 오른손에, 창을 왼손에 쥔 모습이 독특했다.


‘..절정에는 닿지 못했으나, 일류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정도.’


진중하고 무거운 기파가 뿜어져 나왔다.


일류로는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경지였으나,


나의 상대는 아니다.


나의 검에서 소담한 붉은 매화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항우는 그 매화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그 기세를 더욱 더 증폭시켰다.


“..강자로구나!!”


쩌저적-!


그의 기세가 바닥을 우그러트리고 공기를 무겁게 했다.


”강하긴 하지만…패(覇)는 유(柔)를 이기지 못하지.“


매화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어느새 매화는 하늘을 가득 메워, 붉은 하늘을 만들어냈다.


매화신결 (梅花神結).


제 1초식.


매화란구주(梅花亂九州)


새빨간 매화의 하늘이, 항우를 덮쳤다.


“..하늘이 나와 대적한다면 하늘마저 가르면 그만이다!!”


항우는 광포한 기세를 순식간에 갈무리했다.


마치 일반인처럼 느껴지는 그.


타다닥. 타닥.


그러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음에도, 어딘가에서는 위험함이 느껴졌다.


그에 내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치자, 그는 차가운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나의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세상을 덮을만하니.“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역발산기개세(力拔山兮蓋世)라 칭했노라.


항우가 창을 내질렀고,


매화의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


뒤이어 검을 휘두르니, 하늘이 갈라졌다.


그는 계속해 내게 달려와 검을 맞부딪혔다.


채앵-! 챙!


“..이게 무슨!”


검을 막은 나의 팔이 부들 부들 떨리고 있었다.


‘..평범하지 않다는건가.’


슈욱-!


찔러들어온 창을 몸을 비틀어 피했다.


동시에 매화의 검기로 그의 검을 쳐냈다. 


“하하!! 팽월보다도 낫구나! 더 나를 즐겁게 해보아라!!“


그는 사자후를 터뜨리며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그의 괴력에 나는 속절없이 뒤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챙! 채앵! 차캉!


정신없이 그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자, 더 이상은 무리라는 듯 팔이 후들거렸다.


”대단하네, 이 괴력은.“


그러나, 이 이상 압도당할 수는 없다.


느껴진다.


아직도 하늘에 존재하는 매화의 검기들이.


매화와 나를 잇는 나의 검사들이.


‘성자님은 부서진 매화들을 바로 다른 초식으로 바꾸셨지.’


따라해보자.


의지없이 나풀거리는 매화 검기.


그들에게 변화를 주었다.


비가 되어, 세상을 정화하도록.


매화신결 (梅花神結).


제 3초식.


“매화하폭우(梅花下暴雨).”


하늘을 활보하던 매화잎이 기세를 바꿨다.


그저 살랑거리던 매화는 세찬 비가 되었다.


그 비는, 


땅을.


대지를.


항우를.


세계를 적셨다.


콰아아아-!


“하하하!! 매화의 비라…만인지적이라 불렸건만 만 개의 매화조차 막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큰 수치겠느냐!!”


쿠궁..!


항우의 기세가 폭발했다.


절정에 올라도 저정도의 기파가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


그러나, 그 기세와는 달리 그의 입가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의 선천진기가 바닥나기 시작했다는 걸.


“..당신..!”


분명 처음에는 절정의 아래라 생각했으나, 그는 나를 몰아붙였다.


그저 역발산기개세의 항우이기 때문이라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그는 처음 나의 매화를 본 순간부터, 선천진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나의 강함을 알아보았기에.


후회없는 싸움을 위해.


챙.


항우의 검이 땅에 떨어졌다.


오직 창만을 든 그는, 조용히.


그러나 무겁게 창을 내질렀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兮蓋世).


곤천 (丨天).


퍼엉-!!


그의 창 끝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은 매화의 하늘에 구멍을 내었고, 푸른 하늘까지 올라가 구름을 부서트렸다.


“..흐으.. 쿨럭.. 젠장..”


하지만 그 공격과는 다르게, 항우는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죽어갔다.


“..이정도인가. 하하..!! 그래, 나는 저 구름까지인가!!“


”흙먼지 일으키며 돌아왔건만 변한 것 하나 없구나!!“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응시하더니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여검수여!! 그대가 나를 이겼으니 그대는 정점에 서거라!!“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마지막까지 의연한 그 모습은, 가히 패왕이라 칭할 만 했다.


이내, 조용히 시스템 메시지가 울려왔다.


[선천진기를 사용한 항적을 처치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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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이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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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된 장생과를 획득합니다.]


[강화된 장생과 (A)

복용 시, 수명을 이십년 늘린다.]


“누군가 정점에 선다면, 그건 성자님이겠지.” 


나 같은게 아닌.. 성자님일거다.


분명히..


폭풍같았던 보스층이었다.


나는 인벤토리 안의 장생과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다음 층으로 향하려했다.


“…잠깐. 강화된 장생과?”


….내가 아는 그 장생과가 아니다.


분명히 듣기로 장생과는 십년의 수명을 늘려준다고 했다.


그런데 이건 무려 이십년..


“..성자님께 드릴건데, 무슨 문제가 있진 않겠지…?”


…괜찮을거다.


왜 내가 아는 것과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안좋은 내용은 없다.


성자님께도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수명..그래도 이걸 드리면 좀 나아지려나.”


그러면..좋겠다.


나는 망설임없이 다음 층으로 향했다.


이십일층의 적은 장비와 관우였고 그들은 항우보다는 약했다.


이십이층은 백명의 병사와 여포였고, 이십삼층은 만명의 병사와 잔다르크였다.


이십사층은 기사왕 아서, 그를 따라 목숨까지 던지는 기사들은 꽤나 까다로웠다.


그리고 드디어 이십오층이다.


[휴식층에 진입합니다.]


동시에 바뀌는 풍경.


일층과 비슷했지만, 더욱 더 넓고 웅장했다.


저 멀리에 호화로운 큰 건물도 보였고 자그마한 호수도 보였다.


일층에는 없었던 시계기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고, 거리에는 활기기 넘쳤다.


낙오자들의 층이라 불리기도 했던, 암울한 분위기의 일층과는 달랐다.


“여기가.. 두 번째 휴식층.“


짝. 짝. 짝.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축하드립니다.“


성자님의 목소리. 


그 분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감사합니다..“


어째선지 조금 감격스럽다.


미소가 지어진다. 


”근데.. 그건 뭔가요..?“


어째선지 성자님께서 우스꽝스러운 광대의 가면을 쓰고계셨다. 


”아하하.. 여기서는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너무 많은지라 어쩔 수 없이 쓰게되었군요.. 일단 제 숙소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지요.“


“네에.”


터벅. 터벅.


잠시간 층을 둘러보며 숙소로 가니,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작은 숙소가 나왔다.


뜬금없는 작은 방과 낡은 나무 문.


이건… 그래.


마치 옛날의 뒷간 같은 모양새였다.


“…..?“


띠링!


[모험가의 목패가 갱신됩니다.]


[적응을 끝내신 걸 축하드립니다!]


“….숙소가 왜 이렇게 작은건가요?”


“들어가보시면 압니다.”


저벅. 저벅.


끼익.


의문을 품으면서 숙소의 문을 열자 시공간이 왜곡되었다.


츠츠츠츳-


“이건.. 층을 이동할 때의 느낌?”


잠시동안 시야가 푸르면서도 이질적인 무언가로 덮였고, 이내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 드러났다.


“어찌.. 놀랍지 않으십니까..?”


현대적인 복도가 드러났고, 아래에는 고급스러운 카펫이 깔려있었다.


규칙적으로 벽에 문이 있었고 그 옆에는 방의 넘버가 적혀있었다.


마치 현대의 호텔 같았다.


“…놀랍네요.”


현대적인 풍경을 보니 마음 한 구석에서 찡한 느낌이 올라왔다.


“후훗… 이곳은 현대의 모텔이나 호텔하고 다를 게 없습니다. 올라오는 순서대로 룸 넘버가 정해지고, 앞 넘버의 사람이 죽으면 그 뒤에 새로 올라오는 사람이 그 방을 채우는 식이지요.”


”그럼 제 넘버는… 8..이네요?“


”호오. 소드 킹이 천마신교에 죽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정말인가 보군요.“


“..그 소드 킹이 죽었다고요..?”


소드 킹.


모든 검사들의 목표이자 이 탑 최고의 검사.


현실에서는 유명한 펜싱 선수였으며, 탑에 들어와서는 펜싱의 세이버 검술과 마나를 접목시켜 새로운 검술을 탄생시켰다.


탑에서 강함을 따지자면 만신전주와 천마의 밑, 용사나 성자님보다도 밑에 속하지만 그래도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평가되는 자이다.


개인적으로도 존경했는데..


“소문..이었지만 이제는 진실이 되었지요.”


“..큰 별이 졌네요.”


“네.. 그렇긴 하지만.. 덕분에 아린씨가 제 옆 방으로 오셨으니 좋다고 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하하.”


”..제가 성자님의 옆 방이라고요?“


”저는 이 층에 일곱 번째로 들어왔답니다..?“


그렇다면 방의 넘버는 7.


나의 옆이다.


’…너무나도 좋은 우연이네.‘


마침 소드 킹이 죽고 덕분에 성자님의 옆에 살게되다니.


’천마신교에 감사해야 하나?‘


분명 소드 킹이라는, 검왕이라는 큰 별이 졌는데도.


나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진다.


”뭐, 저는 성자님의 곁에 있을수만 있으면 상관없어요.“


그래.


그것을 위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하하. 그럼 방 안으로 들어가보시지요.”


”네!“


우웅-


철컥.


목패를 꺼내 방 문에 같다대자, 우웅거리는 짧은 진동이 일어났다.


이내, 문이 열렸다.


”..와아, 진짜 호텔이네요.“


그 안을 둘러보자 넓고 푹신해보이는 침대 하나와 편한 의자,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 하나가 놓여있었다.


시계는 벽면에 걸려있었고 구석에는 무려 현대식 욕실까지 있었다.


“저 침대는 사람 두명이 누워도 크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성자님은 아직도 밖에서 서 있으셨다.


“성자님?”


띠링!


[방에 출입 가능한 인물을 설정해 주십시오.]


아, 이런 식인 건가.


“성자님.“


[본명을 말하십시오.]


”..손성윤.“


그러고보니 존칭을 붙이지 않고 이름을 부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괜히 죄송스럽다.


[등록되었습니다.]


[인물의 출입 가능 시간을 설정해 주십시오.]


”…그 어느 때라도 상관 없어.“


[설정 되었습니다.]


설정을 완료하자 성자님이 나의 방에 발을 내딛었다.


“후우.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아! 그리고 여기 장생과에요. 부디..드셔주세요.“


내가 강화된 장생과를 내밀자, 성자님은 눈에 이채를 띄우고 역시라는 듯 말했다.


“..이십층에서 꽤 고생하셨겠군요. 이건 감사히 받도록 하지요.”


성자님은 사과의 형태를 띈 장생과를 곧바로 먹어치웠다.


“..이십년… 팔십까지 살수는 있겠군요.”


그는 자신의 늘어난 수명을 확인하며 환히 웃었고, 나 또한 미소지었다.


밝은 그의 미소에 나의 가슴이 뛰었다.


두근-! 두근-!


‘성자님…’


그의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성자님께서 제게 베푸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요. 그저..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에요.”


“그래도 이 강화된 장생과를 얻으려면 꽤 힘들었을텐데요.. 혹시 원하는 게 있다면 편히 말하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성자님이 제게 해주신 게 얼마나 많은데요.. 제발 그냥 받아주세요…”


“…그렇다면 호의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그나저나 혹시 왜 일반적인 보상이 아닌, 강화된 장생과를 얻은 건지 아시는 건가요?”


나의 물음에 성자님은 나를 치켜세우는 투로 대답해주셨다.


“이십층을 공략할 때, 무력이 일정 수준 이상에 이르면 항우는 선천진기를 불태우며 등반자와 싸우게 된다고 하더군요. 그 때문에 공략의 난이도가 오르게 되고, 자연히 보상의 질도 높아지는 겁니다.“


”아아…그래서.“


”음.. 현재 오십층의 공략대로 모이는 이들 중에서 이십층 공략대에 없었던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각성한 항우를 상대했었지요.”


”..대단한 거 였네요..“


“네, 그렇지요. 그러나..그 중에서도 항우를 이긴 자는 구 할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항우에게 진다면 항우는 목숨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자멸하고, 일반적인 클리어 보상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져도 죽지 않는 거 였구나..‘


하긴, 자신만 다른 시련을 받아서 죽는다면 억울할 것 같기는 하다.


‘..그런 배려를 십층에도 넣어두었으면 좋았을텐데.’


..괜히 짜증난다.


“..이런.”


내가 속으로 불평하고 있자, 성자님이 돌연 침음을 흘렸다.


“왜 그러세요..?”


어딘가 복잡해보이는 성자님의 표정.


..예감이 좋지 않다.


“…이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오십층 공략대의 인원이 모두 채워졌다고 하는군요. 일주일 후에 출정이라고 합니다.”


“네…?”


..벌써?


이제 겨우 성자님과 같은 층에 들어왔는데 벌써?


..헤어져야 한다고?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그것만은 안 된다.


까드득.


나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짖씹었다.


‘..차라리 공략을 실패해서 돌아오시는 건..’


….아니야.


공략 실패가 얼마나 끔찍한지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젠장.


젠장!!


‘어떻게 해야하지?’


….젠장.


떠오르는 방법이 없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


‘…어떻게 하지?어떻게 하면 같이 있을 수 있지?방법이 없다.‘


…빌자.


무릎이라도 꿇고 애원하면서 빌자.


앞으로 얻는 것들은 모두 바치겠다고 빌자.


”..하하. 기껏 올라오셨는데 같이 있어주지 못해 아쉽군요..“


..그렇게 말하지 말아주세요.


저를 떠날 것 같이 말하지 말아주세요.


다른 사람들 처럼 제게서 멀어지지 말아주세요.


제발…


“..그러면.. 공략 이후에는 오,오십 층에서 사시는 건가요….?”


“아마.. 그렇게 될 것 같군요.”


쿵-


“..그,그러면 앞으로는… 자주 모,못보겠네요..?”


“…그렇겠지요.”


하아. 하아.


‘..하아…하.’


숨이 가빠진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어지럽다.


‘성자님…성자님.’


나의 성자님.


고개를 들어 성자님을 바라본다.


저 분이 나를 떠난다고?


“하아..하아..하.”


어지럽다.


어지럽다.


쓰러질 것만 같다.


성자님.


나의 성자님.


떠나지 말아줘요.


모든 것을 바칠게요.


그러니까 제발.


“조..조금만 더 저,저랑 같이 있어 주시면 안될까요..?”


”..저도 오십층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건 힘들 것 같군요.“


안 돼.


안 돼!!


“제..제발. 조금만 더..”


나는 주저 앉아 성자님의 바지가랑이를 붙잡았다.


“저는 이제 성자님이 없는 삶은 상상도 안가요.. 그러니까 제발..”


“..죄송합니다.”


제발.


제발.


나를 버리지 말아줘요.


내게서 떠나지 말아줘요.


“허억…허억..제발.. 제가 더 잘 할게요..”


숨이 막혀간다.


“제가 불편하시지 않으도록 수발을 들게요.. 원하신다면 밤시중이라도 할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절 버리지 말아주세요…”


툭. 투둑.


바닥에 눈물이 떨어진다.


“..왜 제게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요..?


”성자님은 제게 마지막으로 남은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제게 너무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으니까요.“


”성자님이 없는 삶은 상상도 가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나의 대답에 성자님은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하아… 뭐, 알겠습니다.. 그럼 당분간은 여기에 머무르는 것으로 하지요..“


”아아…!!“


나의 성자님..


한없이 감사드리고..


더없이 죄송합니다..


***


”그렇게 제 추악한 몸부림을 성자님께서 받아들여 주셔서, 저는 주군의 종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거군요.”


정말…


‘참으로..’


멍청하기가 그지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