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떠오른 가사가 있다. 밀물처럼 서서히 머릿속을 채우던 잡념 속에서, 눈을 통해 쉴 새 없이 받아들이던 정보들 틈새를 어찌 비집고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그것은 꽤 오래, 이유도 없이 오래간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지금의 나를 모자라다 여긴 까닭일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랜 시절부터 편력을 회고해 보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다. 어긋난 부분, 부끄러운 실수, 모난 사상들은 이미 오류와 수정의 과정을 거쳐 다듬어진 지 오래고, 지금의 나조차 앞으로의 빛나는 나를 이루는 귀중한 초석임을 아는 만큼 스스로를 불민(不憫)히 여기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는 이 한을 표하는 가사에 매료되어 그 사유를 찾고 있나. 이 또한 흥미로운 자문이다.


가사의 내용은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변화를 유도하는 자원은 지금도 소비되고, 내재된 세상인 나의 변화는 극적이지만 경험의 현장인 세상의 변화는 그렇지 않다는 데에서 오는 서정적 감상이 가사를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나는 변화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변화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혼자'라는 감상. 여기에서 '고독'이라는 단어를 붙잡아 살핀다.


고독. 아이러니하게도 먼저 연상하게 되는 단어는 외로움보다는 표독함이다. 아무래도 최근 읽은 무협의 영향일 것이다. 무협에서 쓰이는 고독이라는 말은 온갖 독을 지닌 생명체들을 좁은 곳에 가두어 놓았을 때 살아남은 단 하나의 개체를 칭하는 표현이다. 나는 이 묘사가 썩 낯설지 않다. 마치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살림을 위협하는 수없이 많은 위험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우리 개개인을 보는 듯하다.


고독을 검색하면 으레 나오는 기사들 중에는 '고독사'를 다루는 기사가 꼭 한둘은 섞여 있다. 내가 태어났던 시절에도 신문이나 뉴스에 종종 나왔을 단어지만, 경제적 조건을 넘어 경제적 여건마저 모두에게 어려운 도전으로 다가오는 지금 유독 이런 기사들이 많이 보인다. 우울감, 고립감. 대비와 자학이 이 감정들을 생존을 위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독소로 구별하고 수용하는 이 사회의 모습 속에서, 나는 독기를 미처 품지 못한 이들의 죽음이 당연시되는 세상이 어제와 같음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왜 '혼자'라는 단어에 자아를 욱여넣고 스스로를 고독하게, 고독으로 만드는 것일까. 타산지석이라는 말은 본디 남을 미루어 자신을 다듬는다는 의미이거늘, 어찌 남의 산에 있는 돌마저 기조(基調)가 되어 그마저 없는 자신을 깎아내리게 하는 것일까. 왜 그렇게 만들어진 틀이 나의 변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야 하고, 왜 그 세상이 변화하지 않음에 스스로 혼자가 된 감정을 느끼고 한을 품는 것일까. 나는 여기에서 소설 데미안에서 묘사한 쪽지의 내용을 떠올린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많은 이들이 데미안에서 이 내용을 차용하여 소설 데미안의 핵심이자 헤르만 헤세 철학의 정수라고 하지만, 이 쪽지의 뒷내용까지 포함해 이를 심도 있게 분석한 내용은 그리 많지 않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신을 논한다 하여 이에 굳이 거부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기독교에서 흔히 일컫는 '야훼'나 '전능하신 분', '창조주'의 개념과 달리 우리가 '앎'으로써 완성될 수 있는, 영지주의적 관점에서 파생된 단어니까. 물질적인 풍요나 개인의 욕구만이 행복으로 치환되고 이에 값이 매겨지는 세상에서, 정확히는 이를 상식과 규율, 규칙이라는 만들어진 개념의 관으로 짜내어 개개인을 담아 장례하는 이 세계에서 실로 변화하는 것은 나 자신뿐이라면, 하다못해 내면에서라도 그 답답한 세계를 깨고 보다 넓은 자아관을 누릴 가치는 충분히 있지 않을까. 흔히 말하듯, '보는 관점이 달라지면 사는 방식도 달라지는 법'이니까. 그렇게 세계를 깨고 나온 우리라면, 조금 더 여유를 누리며 넓어진 나의 안에 타자를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지하철에서도 물리적으로 서로 부대고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건만, 정작 스스로의 내면은 좁디좁은 관에 끼워진 채로 비관적인 시선을 통해 자신을 관조하는 이들에게 자그마한 계기를 주고 싶다. 세상은 비록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듯하고, 시간은 헛되이 소모되는 것 같지만 나는, 어쩌면 이 순간 숨을 쉬는 모든 '나'들은 지금도 혼자만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것을 '알고' 살아가는 우리는 이전보다 더욱 완전한 자기가 되어, 본디 소중했던 나를 찾고 '신'을 향해 날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