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수필이라기엔 느낀걸 마구잡이로 적어놓은 일기에 가깝지만, 말머리 중 그나마 가까운 것이 수필이기에 이리 써본다.


사흘 전 공부가 귀찮아 책상에 앉아서 커뮤니티나 sns 따위를 뒤적거리고 있을 때 고등학생 시절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이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곁에 몇 남지 않은 고등학교 친구이며, 하굣길 때마다 사람의 정의, 반지성주의의 위험성 등 퍽 나잇대에 맞지 않는, 애늙은이 같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친구이며, 옷과 비주류 문화에 빠져있던 나와 관심사가 겹쳐 고등학교 시절 가장 가깝게 지냈던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이 친구가 왜 갑자기 연락을 했는가 하니, 곧 자기가 출가하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종교와 사상의 차이.


친구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였다. 친구는 나에게 그 사실을 옛저녁에 털어놓아 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친구는 그 사실에 떳떳하지 못했다. 그 종교의 보수적인 분위기, 일부 이해할 수 없는 규율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렇기에 나에게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기도 하겠지만.


친구는 이런 불만을 이야기 하면서도 사랑을 많이 받으며 살아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비록 여호와의 증인을 믿는 신도들에게 둘러쌓여 있었지만, 믿음으로 모인 자들이기 때문에 같은 믿음을 하리라 믿는 자에겐 한없이 따뜻했기 때문이다.


친구는 비록 그들과 진실되게 함께하거나 신이라는 자를 믿고 있거나 하고 있진 않았지만 그들과 함께하고 성경을 읽으며 자랐다. 그 덕분에 친구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내가 쳐다보기만 했던 옷과 신발, 그리고 전자기기를 들고 다니기도 했다. 내 친구는 그들을 이용할 만큼 이용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종교의 품을 벗어나야 할 정도로 불만이 크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우리가 어른이라는 최소한의 책임감과 함께 사회로 튕겨나가지는 그 시기에 친구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이유는 많았다. 이해할 수 없는 교리와 신도들에 대한 싫증, 그리고 의문. 언젠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이 지인들에게 알려졌을 때 일어날 후폭풍. 뭐 그런 것들도 있었지만, 내가 보았을 때 친구의 불만은 크게 두 가지였던 것 같다.


첫번째로 대학교를 못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나야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대해 잘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친구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속세에 물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학원을 다니거나, 공부를 하거나 하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정보와 공부의 총집합체인 대학에 가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친구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상당히 극성인 여호와의 증인 신도였고, 그렇기에 학원 한 번 다녀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친구의 머리는 나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똑똑한 편에 가까웠다. 매해 모의고사에서 국어만큼은 1등급을 놓치지 않았으니 말이다. 친구는 자신이 노력해서 그 성적을 얻어낸 것인 만큼, 그 성취가 물거품이 될까 무서웠던 것 같다. 대학에 가지 못하고, 정장을 입고 교회 사람들과 함께 전도를 다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친구에겐 얼마나 비참하게 느껴졌을까.


두 번째는 교회에서 만난 전 여자친구와의 일화로부터 시작된 불만이었다. 이 일화는 아주 음울하고 사적이기에 자세히 적진 않겠다. 이 이야기를 듣기 전에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를 알아야 하는데, 그들은 혼전순결을 강조하며 젊은 남녀의 교제도 규제한다. 그러나 내 친구와 친구의 전 여자친구는 두 부모님이 종교인이라는 공통점, 종교에 대한 의심, 불안정한 사춘기라는 세 박자가 맞아 떨어져 서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둘은 교리를 위반하며 스릴을 즐겼고, 마구 섹스를 했으며, 청춘이라고도 불리는 지독한 꽃을 피웠다. 그러나 이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친구의 전 여자친구는 생각보다 독실한 종교인으로 커갔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국 종교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찾기보다는 불안정한 사춘기를 종교에게 위탁하는 길을 택했다. 친구는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하지만 절망했다. 종교로 시작된 인연이긴 하지만, 그깟 종교가 무엇이길래 헤어져야 하는지 괴로워했고, 그녀의 손을 이끌고 종교에서 뛰쳐나오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하는 것이 보였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내 친구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불만이 아닌 증오를 가지기 시작했던 거 같다.


하지만 어떻게든 대학 원서를 쓰고, 큰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난 친구가 그 고통을 꿋꿋이 참으며 살아가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어제 연락이 왔다. 출가하겠다고 말이다. 아니, 정확히는 출가 당하게 생긴 것이다.


친구는 자신이 부모에게 자신은 이 종교를 믿지 않고, 믿을 이유도 모르겠다고 했다 말했다. 그는 평소엔 아주 계산적이고 냉정이었지만, 이번에 그것은 반쯤 홧김에 말한 것 같았다. 친구의 어머니는 울었고, 친구의 아버지는 화를 내며 종교의 고위직과 뭐라 이야기를 하려는 거 같다고 했다.


친구는 다음날 자신이 준비한 철저히 검증된 자료들과 철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아버지에게 이 종교가 잘못되었다고 설득했다. 친구의 아버지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지만, 자신은 교리와 종교가 진리라고 믿기 때문에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한다. 이렇게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따라 내 친구는 아무런 사회적 지원도 없이 젊은 나이에 가족들과 의절을 해야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믿고 싶기 때문에 믿는다."


내 친구가 이 종교의 문제점을 털어놓을 때,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할 때 썼던 말이다. 이 말은 정말이지 뇌리에 남는다. 이것이 종교의 두려움, 아니, 믿음이라는 감정의 두려움일까.


종교라는 것은 믿음이라는 부정형의 감정이 거대한 정형의 문화적 덩어리로 굳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생각보다 더 단단하고 지독하다. 수많은 문화와 국가가 종교의 힘과 함께 생기고 망했다는 것만 봐도 이 믿음이 얼마나 지독한 힘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어쩌다 이리도 지독한 힘을 얻어버렸을까. 사실을 보여주어도 믿음이라는 것이 그 사실을 그대로 보지 않을 수 있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설령 그것이 자신들이 틀렸다는 증거라고 해도, 자신들이 믿는 것이 진리라고 여기고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을 멀리 하는 것. 이 얼마나 지독한가.


종교와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자신을 그 종교와 믿음에 위탁하고, 의지함으로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다만 믿기 때문에 믿는, 이런 지독한 힘으로 변해 휘둘러질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서워졌다. 아들이 개인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이성적인 사고로 다가가야 하고, 그의 아버지는 믿기 때문에 믿는, 지극히 감성적인 교리를 근거로 아들을 내쫓는 이런 지독한 믿음. 이런 믿음을 보니 숭고한 이들의 믿음, 다른 평범한 이들의 믿음, 심지어 나의 믿음도 무섭고 경계되기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보니 믿음이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것 중 가장 무서운 것으로도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자신을 믿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삶을 살아가라는 뜻은 아니지만, 자신이 믿으며 살아가는 믿음이 진짜 자신에게서 비롯된 믿음인지, 그리고 자신을 위한 믿음인지 의심해야 한다. 그렇게 믿음을 관철할 때야말로 믿음은 지독해지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또한 믿음에 대한 의심으로 인해 우리는 정체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만약 한 가지의 믿음을 두고, 그 믿음의 의심을 다른 무언가로 채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거나 그저 믿기 때문에 믿는다면 우린 그 믿음이라는 좁은 틀 안에서만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 안에서만 살아간다면, 영원히 틀 밖을 볼 수 없다. 진보하지 못한다. 그리고 아마 자식들도 그것을 되풀이하며, 틀 밖을 나갈 수 없게 되지 않을까. 자신들의 믿음을 믿는 것은 좋지만, 그 믿음에 매몰되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고 틀린 부분을 새로운 믿음으로 채우는 것도 좋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종교가 곧 도태될 것이라 하지만, 아니. 아마도 이 종교는 내 친구가 출가하여 어떻게든 살아가고, 아이를 낳고, 숨을 거두고, 그 아이가 아이를 낳을 때도 남아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실이 밝혀지고 교리가 깨어질 일이 있어도, 그들은 믿기 때문에. 믿기 때문에 믿으니까 말이다. 부디 이 친구의 비극을 듣고 믿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