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날개', 그 초반부는 가히 난해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소설의 화자가 작가 이상을 인용한 에피그래프라고 생각한다.


아래는 '멋진 신세계'의 에피그래프이다.

Les utopies apparaissent comme bien plus réalisables qu'on ne le croyait autrefois. Et nous nous trouvons actuellement devant une question bien autrement angoissante: Comment éviter leur realisation définitive? ...Les utopies sont réalisables. La vie marche vers les utopies. Et peut-être un siècle nouveau commence-t-il, un siècle où les intellectuels et la classe cultivée rêveront aux moyens d'éviter les utopies et de retourner à une société non utopique, moins "parfaite" et plus libre.

—NICHOLAS BERDIAEFF

유토피아의 실현은 과거에 사람들이 믿었던 것보다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진 듯싶다. 그리고 우리들은 현재 "유토피아의 확실한 실현을 어떻게 피하느냐"하는 무척 고민스러운 문제에 직면했음을 느낀다. 유토피아의 실현은 눈앞에 닥쳤다. 그리고 유토피아를 회피하는 길, '완벽'하면서 무척 자유로운 비이상향적인 사회로 되돌아갈 길을 지성인들과 교양인 계층이 모색하는 시대, 그런 새로운 한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니콜라이 베르댜예프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그가 20세기 초에 상상한 미래를 서술한 디스토피아 소설. 그 에피그래프는 모순적이게도 유토피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제시하는 세계상은 통상적으로 디스토피아로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 유토피아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즉, 멋진 신세계의 에피그래프는 이 소설이 서술하는 세계가 실현 가능하며, 그것을 회피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시작에 앞서 일깨우는 용도이다.


다음은 '위대한 개츠비'의 에피그래프이다.

Then wear the gold hat, if that will move her;

If you can bounce high, bounce for her too,

Till she cry "Lover, gold-hatted, high-bouncing lover,

I must have you!"

—THOMAS PARKE D'INVILLIERS

황금 모자를 써라, 그것으로 그녀를 움직일 수 있다면.

그녀를 위해 높이 뛰어라, 그럴 수만 있다면.

그녀가 이렇게 외칠 때까지.

"오, 내 사랑, 황금 모자를 쓴, 높이 뛰어오르는 내 사랑이여. 내가 당신을 차지하리라."

—토마스 파크 딘빌리어스

제1차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을 유려하면서도 적나라하게 그려낸 소설: 프랜시스 스콧 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이 에피그래프를 1차원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돈으로써 사랑을 쟁취하라는, 어떻게 보면 물질만능주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소설의 주연인 제이 개츠비의 행보와도 궤를 같이하니, 여기까지만 보면 평범한 에피그래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반전은, 이 시를 쓴 토마스 파크 딘빌리어스는 시인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시나 명언을 가짜로 붙여넣는 건 인터넷에서 꽤나 흔히 볼 수 있는 장난이다.

그리고 이 장난의 의도는 주로 무지에 대한 조롱이나 주제에 대한 비판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에피그래프는 후자의 경우, 그러니까 물질만능주의와 개츠비의 행보에 대한 비판이 아니었을까?


말이 길어졌지만 두 가지 예시에서 알 수 있듯, 에피그래프에는 때때로 단순히 인용을 넘어 소설의 본질이나 작가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날개의 초반부는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에피그래프가 아니다.

누군가를 인용하지도 않았고, 본문과 붙어 있다. 무엇보다도, 말의 어미가 극적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서로 다른 사람의 독백이라고 넘겨짚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상이 워낙에 아방가르드한 작가였다고 하니, 나는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싶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란 이상이 화자를 칭하는 말이며, 그 말로부터 비롯되는 독백은 인용이자 둘 사이의 구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