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상 한결같은 일상에서 한결같은 일들만 하다 보면, 너무나 질려서 도망가고픈 날들이 있다. 


그렇게 도망간 날에도 도망 따위가 더할나위 없는 진부함임을 알게 된다. 도피는 해결책이 되어주지 못하고, 그런 의식은 항상 박여있으니 어딘가로 멀리, 조금 더 새롭게 도피할 수 없다.


  어느날은 정말로 멀리 도망가 다시는 모두에게 모습 드러내곺지 않은 때가 온다. 


누군가는 그 때에 적절하게 도망갔더랬다.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는가? 


그는 도망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다. 도피 이후에 무엇을 할것인지는 누구도 정하지 않는다. 그저 도피 행위 자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뿐.


도피 이후에 삶이 지속된다면 그것은 그것으로 끝이다. 아무리 멀리 도망간다고 해도, 한결같은 삶이 이어지는 이상 도망은 지속될 수 없다.


  결국 진정한 도피는 죽음밖에 없단것이다. 도피 이후엔 끝없는 도피가 있어야 진정한 도피가 될텐데, 고로 스스로가 한결같은 세상에 염세를 느낀다면 지속적으로 도망치거나 죽어야만 마땅하다. 


그렇지만 지속적인 도망이 익숙해지면 그때는 어떠한가? 익숙해진 도피는 또한 도피가 아니다. 지속적인 도피도 대답이 되어주지 못한다. 그런 도피는 도피가 아니라 회피다.


  염세주의가 팽배하다. 아주 침침한 세상에 와이퍼를 달고 우산을 드리우니 마침내 역겨워진 것인가? 아니다. 그저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보든 아니든, 아니 애초에 본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자신을 사는것이고, 자신은 자신에게 익숙해진다. 익숙해짐은 질림을 유발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지속되면 아주 염세적으로 부패한다. 염세주의 철학자들이 세상에 안주하는 그저 그런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되려 보았기에 그런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팽배한 유행성 염세는 무엇인가? 그건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보지 못하여서, 어둠에 질린것이다. 


어둠 속에서의 상상력에 질린것니다. 상상력의 한계에, 한결같은 환각에 질린것이다.


  아주 염세적이어서 도망을 택하거나 그저 낙관하거나, 그 어느것이든 고통은 지속된다. 


일상은 한결같기에. 도망은 회피밖에 되지 않기에. 낙관하기엔 잘 모르기에. 낙관하기엔 잘 알기에. 적당히 모르고 적당히 알아야 적당히 받아들이고 적당히 피할 수 있는 법. 


그렇지 않으면 끝은 죽음뿐이다. 그리고 우린 적당히 모르고 적당히 알 권리를 빼앗겼다. 


  모르는것이 죄악인 세상이 당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한 모든것들이 유행한다. 이것은 적당한 중용이 아니다. 모두가 넘친다. 온수와 냉수를 섞은 미지근한 물이 아니라, 온수와 냉수를 동시에 들이붓는 홍수라고 봐야 한다. 


죽음은 두려움이고 회피는 비겁자라, 마침내 갈길을 잃었다. 해결책은 어디에도 없다. 진실된 도피는 없다. 진실된 낙관은 없다. 한결같은 한결같음만 한결같이 염세주의를 흩뿌릴뿐. 


우리는 번져나간 염세를 머금고 죽을것이다. 온수와 냉수가 가득한 홍수에서. 이런 경우에 죽음은 진실된 도피가 아니다. 스스로 선택치 못했으니까. 죽음을 원치 않았으니까.


  나는 그 전에 미리 완벽한 도피를 계획한다. 노아는 방주에 동물들을 실어서 완벽하게 새로운 세계를 계획했더랬다. 나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서 완벽하게 새로운 세계를 계획한다. 


홍수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물 위로 뜨거나 물 밑으로 뜨거나. 노아는 위로 갔다. 나는 기왕 반대의 방법으로 신세계를 계획하는 김에 이것 또한 반대로 가보길 결심했다. 


홍수를 헤엄쳐 건넌다. 염세와 온수 그리고 냉수를 모두 위로 올라 건넌다. 이것 또한 하나의 회피다. 그 안에 무엇이 남기는 했을지, 그것에 닿으면 어떻게 될지, 혹시 그걸 먹으면 어떻게 될지. 나는 이 모두를 시도하리다.


  염세와 온수와 냉수, 즉 받아들임과 회피와 비관 모두를 맛본다. 모두 익숙한 메뉴들이다. 새로울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