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혹은 어찌됐든, 나는 누군가에게 정을 붙이기가 어려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난데없이 드는 생각에 침잠해 있는 것은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이 성인 남성 하나 온전히 발 뻗고 앉으면 딱 들어차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자면 마음이 풀리어 버리곤 하는 까닭에, 문득 그 어떤 조건도 거치지 않고 날 것으로 던져지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문구 하나에 멋대로 본인을 대입하는 놀음을 즐기고 마는 것이다.

이 놀음에는 최소한의 통솔을 위한 어떠한 규칙도, 제반을 구성하는 기초적인 구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체온보다 높은 물의 밀도를 있는 그대로 즐기며, 따라 유영하듯 사고를 흘려내면 그만이다. 명상이 사고를 내리고 의미를 비워 '순용(純容)'하는 것에 치중된다면, 나의 이 놀음은 사고를 흘리고 의미를 건지며 '순유(順遊)'하는 것에 집중한다. 자연과 화(和)하여 모태의 감성으로 회귀함을 목적으로 하는 명상과 자연을 소재로 하여 본인의 사유로 취하는, 이른바 화(化)함을을 목적으로 하는 이 놀음은 완전한 대척점까지는 아니더라도 방향이 다름이다.

지금도 그런 느낌으로 나는 생각한다. 다시금 원제를 따라 입으로 굳이 뱉어낸다.


어쩌면, 혹은 어찌됐든, 나는 누군가에게 정을 붙이기 어려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참으로 바른 말로 다가온다. 적어도 내게는 그러하다. 살아오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내가 아픈 일과 싫은 일은 반드시 남을 향해 행하면 내게도 돌아오리라는 사고관을 주축으로 살아온 이의 성향은 으레 그리 되는 법이다. 그러나 이 사고관을 가지고 득을 얻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잘 보이고 싶은 이는 결국 모두에게 불편해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지당하다는 것이 금세 증명되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의 불편감을 떠안는 것은 나였고, 그로 인해 외부의 평가가 박해지는 것도 결국 이들을 미처 수용하지 못한 나의 실책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언제부터인가 방침을 바꾸었다. 가끔은 욕심대로 뻗대보기도 했으며, 말도 험하게 내보내되 남을 생각하고자 하는 마음은 유지하려 노력했다. 하나 이도 무용한 일이었다. 타인에게 비치는 나는 웃음 파는 광대, 가끔은 지적인 광대, 그러나 역시 이상한 광대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관계를 지속함에 따라 개선되는 부분은 무척 많았고, 나와 끊임없이 연을 유지한 이들은 차츰 나를 긍정적으로 인지하고 호감을 표했다. 나는 그렇게 차츰 그들과 섞이는가 싶었다.

그러나 나는 참으로 모순적인 사람이다. 나는 겉으로 포장한 나의 표상에 가린 '나'를 드러내기를 꺼려했다. 온전한 '나'가 외부의 접근에 노출되는 상황에 겁을 내는 아이는 끝내 껍질을 깨지 못한 것이다. 친분은 얕고 길게 이어지고, 나는 아직도 그들을 진정으로 마주하며 대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어쩌면, 혹은 어찌됐든 나는 누군가에게 정을 붙이기 어려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수미상관은 이루어지고, 사유의 거품은 젖은 머리칼에 찔려 터지고 만다. 나는 문득 든 이 사유를 품어 마음 속 개선 일지에 적고, 적잖이 물을 먹어 묵직해진 몸을 일으킨다.


이는 당연히 놀이로 귀결되기에 깊이 문제삼지 않을 것이다. 더 깊은 사유의 뿌리는 채 영글지도 않았기에. 새싹을 심고 뿌듯하게 하루를 마치는 농민의 일과를 더듬듯, 나는 만족스럽게 남은 사유의 거품을 씻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