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글에서, 비로소 우리는 무지의 장막을 한거풀 이나마 벗겨냈다.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그 감정의 정체를 명확하고 명징하게 정의했다. 그것은 고독의 탈을 쓴 외로움이었다. 

외로움. 

안다는 것은 괴로움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더 스스로를 괴롭게 하여야만 한다.

안다는 것은 괴로움이고, 세상의 모든 고통은 성장의 자양분이 되기 때문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순수하다. 순수하다는 것은 때묻지 않음. 세상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이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자 축복이다. 거대한 탁류의 위에서 요람으로 마냥 그것들을 신기하게 바라만 보는 것이다.

막연히 그리는 그리움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이로 되돌아가 어미의 젖내음을 맡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하지만, 요람 속의 아이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아이는 안전한 요람 밖으로 나와 기꺼이 탁류속에 몸을 던지기를 바라고, 소망하며, 꿈꾸다가, 마침내 이루고, 후회한다.

이것이 유전자부터 정해진 정언명령에 의한 것 인지, 부모의 기대와 바람 때문인지, 사회 때문인지는 모른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이미 스스로 몸을 던지거나, 혹은 내던져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어 갈 고통을 모르고, (혹은 각오하였거나) 앎의 길, '배워감'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모든 철학자들은 괴로워 했다.

그들은 인간의 한계에 괴로워 했고, 절망했고, 세상의 보편정의 (신이나 어떠한 보편진리) 를 거부했다. [나는 진리를 두가지로 나누는데, 보편진리와 절대진리가 그것이다. 보편진리는 그 시대에 보편적 다수에게 정답으로 받아들여지는 진리를 의미한다. 절대진리는 단 하나만 존재하는데, 이것은 진리는 없다라는 진리다. 절대진리는 보편진리에 포함되는 것 처럼 여겨지나 시간이 지나면 부정되는 보편진리와는 달리 절대진리의 명제는 언제나 옳았다.]

그들 철학자들은 고문당하거나, 모함당하거나, 스스로 절망에 가득차 목숨을 끊기도 했다. 

그들이 쓰고 간 시체들을 우리는 읽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체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남는다, 사인과 부패의 정도, 벌레 꼬임의 순서와 회귀. 

우리는 괴롭다. 이것은 우리가 '앎'을 선택했기 때문이오, 외롭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철학을 배워야한다. 그들의 시체를 부여잡고 그 썩은 살점 하나하나를 씹고뜯어야만 한다.

이미 죽은 그들의 외로움을 배워야만 우리의 외로움에 실체를 바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의 목을 부여잡고 통곡하였듯이, 우리는 니체의 목을 부여잡고 울어야만 할 것이다. 


본디 앎이란 그런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