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령부에서는 각 전투부대에 설을 보내기 위해 소를 한 마리씩 붙들어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설날 밤 전투병력과 비무장 후방부 요원들은 사령부를 텅텅 비워놓고 모두 보급 투쟁에 출동되었다.



일체의 소리를 내지 않고 각 지서에 접근하여 잠복하고 있고 특공대원들은 흰옷을 뒤집어 쓰고 눈밭을 포복하여 갔다. 토치카 바로 밑에까지 접근하여 기관총을 걸어놓은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촛불을 켜놓고 술상을 벌려놓은 채 화투를 치고 있는 곳에 수류탄을 집어넣고 그게 터지는 순간 전투병력은 돌격을 외치며 습격했고 비무장 인원은 부락에 개미떼같이 퍼져들어가 식량과 의류· 설날 음식들을 닥치는 대로 털어왔다.



전투병력이 그들을 엄호하고 있는 사이 비무장 인원은 이것들을 배낭에 잔뜩 담아 낑낑거리며 퇴각했다. 날이 새면서 마른 풀잎 위에, 나뭇가지 위에 하얀 눈꽃이 눈부시게 피어있는 눈쌓인 계곡에 배낭을 둘러멘 대원들이 올라가고 여기 저기에서 누런 소가 등에 짐을 매달고 끌려오고 있었다.



산봉우리에 올라앉아 잠깐 쉬면서 내려다보니 흰구름이 산봉우리 아래 바다처럼 끝없이 퍼져나가 깔려 있고 저 멀리 끝간데 없는 구름바다를 바라보니 어디선가 꿈속처럼 기적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는데 눈부신 해가 황금빛을 하얀 눈꽃위에 쏟아부으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끌려온 소는 아지트에 도착하자마자 큰돌을 머리에 맞고 힘없이 푹 쓰러졌다.



모두들 죽은 소에게 달려들어 목을 찔러 솟구치는 피를 받아 입이 벌겋게 퍼마시고 가죽을 벗기면서 연신 날고기를 잘라 먹어댔다. 


그날밤은 쇠고기국을 끓여 밥을 많이 먹고 사령부에서 가져온 털털한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면서 '고향 눈', '불효자는 웁니다'를 아지트 바깥에 새어나가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부르다가 그대로 쓰러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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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공작원 훈련소 강동정치학원 출1신으로 빨치산이 되었다가 귀순한 이영식 씨의 회고 중 일부입니다.


설날이랍시고 경찰서와 마을들을 습격해 소를 훔쳐와 즉석으로 고기를 먹고, 노략질해온 설날음식으로 하루를 보내는 장면입니다.



이런 인간들이 명분은 '남조선 인민들의 해방' 을 외쳐댔으니, 그만큼 기가 차는 일도 없을 겁니다.


진짜 이 빨치산들이 민심을 얻었다면 마을 사람들의 협조하에 설날 음식을 받아오거나 구매했을 텐데, 하도 횡포에 시달려서 협조를 안해주니 남은건 저런 마적떼 짓거리 뿐이었습니다.


정말 참된 해방군이었으면 언젠가 인민들과 함께할 풍족할 설날을 생각하며 당장의 명절은 참아야 하지 않았을까요?



출처: 이영식, '빨치산', 행림출판, 1988, p.160-161.



블로그 출처: 무수천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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