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책 ‘제국의 위안부’를 썼다가 형법상 명예훼손죄로 기소됐다. 제1심에서 무죄를 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유죄로 뒤집혀 벌금 1,000만 원을 선고받고 대법원에 상고했다. 지난해 대법원은 이 항소심 판결을 무죄 취지로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아마도 대중들은 박 전 교수가 ‘무죄판결을 받았다’라는 뉴스만 기억하고 있지, 그녀가 아직 ‘피고인’ 신분으로 형사재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박 전 교수의 페이스북에는 “나는 오늘도 재판준비를 해야 했다”로 시작되는 글을 비롯해, 끝나지 않는 재판으로 고통을 토로하는 여러 포스팅이 있다. 박 전 교수의 학문적 견해에 대한 공감 여부를 떠나,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의 판결을 받았음에도 여지껏 ‘피고인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에 연민이 느껴졌다.


박 전 교수와 같은 사례를 줄이려면, 대법원이 원심 판결을 파기하면서 직접 판결하는 ‘자판’을 활성화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형사소송법은 잘못된 공소기각이나 관할위반 등 법정 환송 및 이송사유(제393조 내지 제395조)를 제외하고, 원심 파기 때 대법원이 자판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제396조). 소송 기록과 하급심이 조사한 증거만으로 판결하기에 충분치 않을 경우에는 환송하지만(제397조), 채증법칙 위반이나 심리미진으로 파기하는 경우를 빼면, 자판이 불가능할 정도로 성숙하지 않은 사건은 오히려 드물 것이다. 민사소송법도 법리오해를 이유로 파기하는 경우 하급심의 인정사실을 바탕으로 대법원이 자판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므로(제437조), 상당수의 파기 사건에서 직접 판결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사법연감 통계에 따르면, 우리 대법원은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 사이에 전체 파기 사건의 약 5.5%만 자판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원심법원으로 환송했다. 2022년 민사사건 528건을 파기하였는데 그중 45건만 자판했고(8.5%), 483건은 환송 또는 이송했다. 형사의 경우에도 548건 중 21건만 자판하고 나머지는 환송 또는 이송하여 자판율은 3.8%에 그쳤다. 되돌려 보낸 사건 중에는 법정사유에 따른 것도 있으므로 법률상 자판이 가능했던 사건만 추린다면 실질 자판율은 더 낮아지게 된다. 이는 2021년과 2020년에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일본 최고재판소(이하 ‘최고재’)는 같은 3년 동안 전체 파기 사건(74건)의 절반 이상인 40건을 자판하여 파기 대비 자판율이 약 54%에 이르고 있다(자료: 일본 사법통계연보와 판결문 검색시스템 종합). 해마다 조금씩 편차는 있지만, 몇 해 치를 모아서 보면 민·형사를 막론하고 최고재가 자판하는 비율은 상당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한 해 처리건수(2022년 기준 6,617건)가 대법원(같은 해 43,356건)의 약 15%에 불과하고, 그중 파기하는 사건 역시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점은 감안해야 한다.


그렇지만 상고심에 관한 형사소송법과 민사소송법의 규정이 각각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본에서 몇 되지 않는 파기 사건을 가지고도 자판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추려내 자판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곳 법조인들에 따르면, 일본 역시 1980년대까지는 최고재의 자판율이 10%대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1990년대 이후 재판신속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자판율이 점차 증가해 지금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빠른 분쟁종식을 위해 상고심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과정에서 자판율이 늘었다는 점은 재판 지연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우리가 참고할 대목이다.


최고재가 자판을 하는 대표적인 사건 유형은 제1심과 항소심 법원의 결론이 상반되었던 사건이다. 구체적으로 민사나 행정은 제1심에서 원고 승소(일부 승소 포함) 판결을 한 것을 항소심에서 뒤집어 청구 기각한 사건이, 형사의 경우 제1심 무죄가 항소심에서 이른바 ‘역전유죄’로 뒤바뀌었던 사건이 꼽힌다. 이러한 케이스들에서 최고재는 “원판결을 파기한다”라는 주문을 냄과 동시에 “피상고인의 항소를 기각한다”는 판결을 한다. 위와 같이 간단한 판결 주문만으로 해당 사건은 제1심의 결론대로 원고 승소(민사, 행정) 또는 피고인 무죄(형사)로 확정된다.


상고심이 하는 이런 형식의 자판은 ‘제1심에 무게를 둔다’라는 심급 제도의 이상과도 맞아떨어지고, 최종심에서 유리한 판결을 받은 당사자의 ‘기다리는 고통’을 줄여주는 데도 효과적이다. 위와 같이 하는 것은 현 소송법하에서 우리 대법원도 크게 품을 들이지 않고 충분히 할 수 있다. 지금은 당사자들의 ‘재판받는 고통’을 줄여주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법령의 테두리 안에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에는 대법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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