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관들 ‘적산 불하’ 등 좌지우지
 

1945년 8월 15일 이후 남조선에서는 영어가 운명을 좌우했다. 연희전문학교 이묘묵(李卯默)의 삶이 그랬다. 그는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위협받자 재빨리 사상전향서를 제출하고 미나미(南次郞) 총독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리규 보우모쿠(李宮卯默)로 창씨개명하고 ‘미영격멸(美英擊滅)’을 주제로 시국강연을 다녔다. 그랬던 그가 해방이 되자 국내 실정을 알린다면서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즈(오늘날의 코리아타임즈와는 다르다)를 세우고 미군을 환영했다. 며칠 뒤 도착한 하지(J. R. Hodge) 군정청 사령관은 미국 박사인 그를 발견하고 자신의 통역관으로 임명했다. 역사학자 이묘묵은 그때부터 외교관의 길로 나섰다.
  

조선식산은행 행원 나익진(羅翼鎭, 훗날 한국산업은행 총재)은 전북 이리(오늘날의 익산)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날부터 라하라 유쿠친(羅原翼鎭)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지역 주민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쳤다. 미군을 영접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다가 트럭을 얻어 타고 서울로 올라와 중앙우체국에서 일자리를 잡았다. 패망 직전 조선총독부가 그랬듯이, 미 군정청도 우편물 검열을 통해 사상불순자를 색출했다. 나익진은 그 일을 지휘하는 미군 관리의 통역관으로 뽑힌 것이다. 얼마 뒤 연희전문학교 시절 은사인 이묘묵을 만났다. 이묘묵은 은행원 출신 나익진을 군정청의 은행검사역으로 추천했고, 그때부터 그는 중앙 무대에서 금융계 실력자의 반열에 올랐다.
  

해방 직후 미군 통역은 굉장한 권력이었다. 공장·기업체·주택·빌딩 등 과거 일본인 소유 재산 일체를 군정청이 압류(1945년 12월 15일, 군정법령 제33호)하자 통역관들이 실세로 부상한 것이다. 소위 ‘적산(敵産)’이니 ‘귀속재산’의 불하(拂下)를 바라는 사람들은 통역관들에게 뒷돈을 주고, 그것을 받은 통역관들은 미군 관리들을 설득하여 소유권이나 경영권을 넘겼다.
  

여기서 ‘통역정치’와 ‘모리배(謀利輩, 귀속재산을 차지하려는 사기꾼)’라는 말이 생겼다. ‘빽’, ‘사바사바(속닥속닥의 비속어)’, ‘새치기(일본어 요코도리(?取り)의 직역어, 원래 뜻은 횡령)’도 이때 나왔다. “흐지부지 재판소, 먹고보자 관재처, 다짜고짜 경찰서, 오락가락 면사무소, 내일 모레 배급소, 또 나왔다 세무서”처럼 국가기관을 조롱하는 유행어도 출현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이런 말들이 사라졌지만, 서글프게도 ‘빽’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신기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