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결은 착실한 아이였다. 선원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엄마의 권유 때문이었다. 자격증만 따면, 고되지만 오래 할 수 있는 일. 고3 때 아버지를 여읜 뒤,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박한결에게는 매력적인 직업이었던 것 같다. 그는 집에서 멀지 않은 해양대학교에 진학해 4년간 배를 탈 준비를 했다. 책임감이 강한 탓이었는지 졸업도, 취업도 동기들을 앞섰다.


2012년 11월, 박한결은 외항 여객선 선원으로 처음 뱃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12월, 제법 규모 있는 선사로 직장을 옮긴다. 본사가 있는 인천은 살아 본 적도 없는 도시였지만, 친한 친구가 그 선사의 기관사로 일했던 터라 든든했다. 그는 승객 956명과 화물 1,077톤을 실을 수 있는 카페리호의 3등 항해사를 맡았다. 청해진해운의 세월호였다.


스물다섯의 박한결은 착실한 선원이었다. 상사의 지시에 좀처럼 토를 달지 않았다. 그것이 위험하고 부당한 지시라도. 선배 항해사들은 그런 박한결에게 ‘출항 전 여객선 안전점검보고서’ 작성을 맡기며 당연한 듯 가르쳤다.


“거기 항목들 모두 ‘양호’로 체크하면 돼.”


보고서 작성은 원래 선장과 기관장이 해야 할 몫이었지만 박한결에게 맡겨졌다. 그는 제멋대로 서류를 꾸미는 일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2014년 4월 15일 저녁, 박한결은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는 자신의 40번째 항해에 나섰다. 이날도 그는 성실히 '범행'에 동참했다. 박한결은 출항 전 해운조합 운항관리실에 안전점검보고서를 제출했다. 배에 탄 승객과 컨테이너, 자동차 수 등을 적어야 할 칸이 비어 있었다. 운항관리실에는 아직 화물 등을 다 싣지 않았다는 이유를 댔다. 사실 청해진해운은 이번 항해에서 2,210톤의 짐을 실을 작정이었다. 배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 적재량을 배 이상 넘긴 무게였다. 점검을 책임진 운항관리사 전정윤은 눈으로 서류를 훑은 뒤 서명했다. 박한결은 빈칸 숫자들을 출항 뒤 무전으로 불러줬다. 엉터리 수치들이었다.


“아저씨, 140도요.”


출항 이튿날 오전 8시 45분, 당직 근무였던 박한결이 조타수 조준기에게 침로 변경을 지시했다. 조류가 무척 빨라 긴장했던 전남 진도 인근 맹골수도를 막 빠져나온 참이었다. 이 해역을 지날 때는 늘 선장이 직접 지휘했지만, 이날은 입사 4개월 차인 박한결에게 배의 운명이 맡겨졌다. 원래 선장인 신보식이 휴가 간 까닭에 전임 선장인 이준석이 대신 탔는데, 그는 선장실에서 사각팬티 차림으로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준기는 박한결의 지시를 복명복창하며 조타기를 돌렸다. 하지만 낯빛이 이내 어두워졌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박한결은 재차 변침을 지시했다.


“아저씨, 145도요.”

“어어, 안 돼. 안 돼.”

“뭐가 안 돼?”

“아, 조타기가 안 돼요.”


두 사람이 다급하게 문답을 끝내기 무섭게 뱃머리가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갔다. 반작용으로 제대로 고정시키지 않은 화물실의 승용차와 컨테이너 등이 왼쪽으로 쏠렸고, 배는 좌현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그렇게 침몰이 시작됐다. 박한결은 배를 다시 세워 보려 했지만 소용 없었다.


이후 당직사관인 박한결이 한 일은 조타실 한편에 쪼그려 앉아 운 것밖에 없었다. 자신이 해야 할 선내 방송도 우느라 하지 않았다. 선장 이준석이 책임자로서 역할을 포기한 까닭에 박한결 등 항해사 4명이 승객을 구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제 살 길을 궁리하기 바빴다. 오전 9시 45분쯤 승객을 구하러 온 해경 123정이 세월호 조타실에 배를 붙이자 선원들이 탈주하기 시작했다. 주저하던 박한결도 해경정에 올랐다. 파란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지만 해경 중 누구도 그가 선원인지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박한결과 선원들은 해경이 자신들을 구했듯 승객도 알아서 구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한결의 변호인은 '돈벌이에 혈안이 돼 배를 위험하게 개조한 선사 탓에 참사가 났다'고 주장했지만, 박한결의 죄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는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청주여자교도소에 수감됐다.


박한결은 수감 생활 내내 정체 모를 두통에 시달렸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고 호소하면 교도소에서 진통제를 줬다. 하지만 통증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나마 가족들과 면회하는 시간에는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2019년 4월, 형기를 다 채운 박한결이 교도소 문밖으로 나왔다. 출소 이후 두통은 더 심해져 병원을 찾았다. 정밀 검진을 받은 후에야 원인을 찾았다. 의사는 '뇌하수체 종양'이라는 낯선 병명을 말했다. 정확히 왜 발병하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질환이지만 20, 30대 젊은 환자는 드물다고 했다. 박한결은 급히 수술을 했다. 의사는 재발 가능성이 1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90%의 확률이 박한결을 피해 갔다. 그는 지난해 병이 재발해 다시 수술받았다. 마음 속에 수시로 교차한 죄책감과 억울함이 쌓여 병이 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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