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란 단어는 이 채널에서 다루는 주제에 대해서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많이 접해보았을 단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왜인지 모르게 '근로'라는 단어가 상당히 우리 눈에 많이 노출된다. 무언가 석연치 않다. 노동이라는 단어가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근로라는 단어를 쓰는 것일까?


 먼저, 역사적인 인과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외로 굉장히 작위적으로 보이는 단어인 '근로'는 사실 '노동'보다 더 일찍 한반도에서 사용되어왔던 단어이다. 신기하지 않은가? 



보시다시피, '勤勞者'라는 단어는 스물두번 쓰이는 등,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다수 노출된 바 있다.



그러나, '勞動者'라는 단어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勤勞'와 '勞動'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숫자 또한 굉장히 많이 차이가 있을 뿐 더러, 당시에는 '勞動'이라는 단어가 '힘쓰다'라는 지극히 단순한 의미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개인이 힘들여 일하다'라는 좁은 의미로서의 단어로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대부분이 '勤勞'로서 쓰였다고 분석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단편적인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자료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이며, 필자가 이것을 굳이 이 글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근로'라는 단어의 예속성에 대해 논하고, 그 반대로 '노동'이라는 단어의 창조성, 자율성, 그리고 더 나아가 옳음을 찬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근로란 무엇인가? 한자로 풀어서 설명해보자면, 부지런할 근 (勤), 일할 로 (勞) 로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근로라는 단어의 역사는 굉장히 길다. 특히 어용기록물이였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빈번히 '일함'을 표현하는 단어로서 등장한다는 것은 상당히 미심쩍은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이야기를 찾아보자, '근로'라는 단어는 흔히 영어로 'Worker'로서 번역된다, 즉 단순히 '일 하는 자'라는 것이다. Work라는 단어의 어원이 고대 게르만어의 단어인 Wyrcan, 즉 '일'에서 왔다는 것으로서 알 수 있다. 그저 단순히 일하는 자에서 끝나는 것이 '근로'라는 단어에서 오는 정확한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이란 무엇인가? 노동이라는 단어는 근로와 다르게 기본적으로 그 적극적인 사용의 역사가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과 노동자들의 각성이 시작됨과 궤를 같이 한다. 영어로 'Labor', 라틴어 'Labor', 즉 '수고하다'라는 의미로 흔히 번역되는, 노동과 그 숭고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는 한자로서 또한 일할 로 (勞), 움직일 동 (動)으로서 표현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본격적인 화두를 던져보자면, '근로'라는 단어에서 말하는 '부지런함'은 누구의 기준인가? 그것은 바로 노동자와 피지배계급들을 에속하고자 하였던 오랜 시간동안 이어져 온 지배계급의 뿌리깊은 의식과 이들을 하대하였던 관념으로부터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 자신의 더 많은 생산물을 위해 부지런히 일해줄, 생산성 높고 편리한 자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의 기준에서 '부지런하지 않은' 자들은 필요 없었다. 조정의 부당한 대우에 분연히 떨쳐 일어섰던 망이와 망소이는 그들의 눈에 참으로 '부지런하지 아니한' 불순분자들로 보였을 것이며, 왕후장상 영유종호를 외치며 개경 뒷산에서 투지를 불태웠던 만적은 더없이 '부지런하지 않게' 보였으리라. 결국, 배신감마저 느낄 정도로 '근로'라는 단어에서 달콤하게 유혹하는 '부지런함'이라는 미덕은 지극히도 지배 계급과 자본가들의 배를 채우기 위한 관점에서만 적용되는 개념이였음이 참으로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그러나, '노동'이라는 단어에서 말하고자 하는 '움직임', 더 나아가 '역동성'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무것도 없는 평원에서, 한 사람은 그 평원을 마음껏 뛰어다니며 역동적으로, 열정적으로, 사방팔방 움직일 수 있음이라. 움직인다는 단어 자체에는 아무런 틀도 요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시선으로 그 존재의 행동을 규정하지 않는다. 그저 새로운 앞날을 위해 움직일 뿐이다. 노동이라는 단어에 담겨있는 숭고한 가치는, 단순한 '움직임'이라는 단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닌, 세상을 변혁시킬, 잘못된 시대의 흐름에서 강요되는 지배계급을 위한 '부지런함'을 거부할 내재된 노동자들의 혁명의 씨앗 또한 시사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분명히 밝혔다, 생산양식이 산업화된 노동자-자본가 간의 관계가 이루어진 산업사회에서 생산관계에 있어서 노동자는 하나의 부품과 같이 그 자주성을 잃어버림에 따라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의지와 자신을 잃게 된다고 말이다. 이것을 '자기소외'라고 부르는데 - 물론 자기소외의 사유가 저러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종교로 인한 문제, 사회관념으로 인한 역할 강요 등과 같은 관념적 문제 또한 자기소외의 직간접적인 원인이 될 수 있음은 자명하다. - 그리고, '근로'라는 단어는 그러한 역할을 참으로 잘 수행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지배계급의 관점에서 말이다.


 이러한 피지배계급의 사고방식을 지배계급이 주도적으로 언어적인 면에서 바꾸어 특정한 사상을 주입시키거나 탄압하고자 하는 행동은 역사적으로 여러 번 존재하였다. 그리고 가장 대표적이면서 현대적인 예시는 나치 독일의 예시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문어학자 빅토르 클렘페러 (VIctor Klemperer)의 저작 Lingua Tertii Imperi - 라틴어로, '제3제국의 언어'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 의 견해를 인용하고자 한다. 



 본 이미지는 빅토르 클렘페러가 정리한 '나치언어'의 특수성을 카테고리 별로 정리한 것이다. 각각 '계층화', '생물화(우생학화)', '전체주의화', '인종화', '카테고리화', '병합화', '최대화', '영웅화', '감성화', '역사화', '신성화', '완곡화' 로서 정리하였다. 언어라는 것은 인간이 인식하는 무언가를 다른 인간에게 직간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인간의 생활양식에서 비롯된 참으로 중요한 전달매체임이 자명하다. 이를 아주 잘 깨달은 나치 독일은 자신들의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절대화하고 우상화하기 위하여 이러한 단어들의 사용을 통하여 그들이 탈취하였던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기저의식에 남아 있던 독일 민중의 자주성을 거세하고, 종국에는 그들을 거대한 그들의 침략전쟁의 기계로서 바꾸었다. 

 

 이러한 이전의 사례를 통하여, 필자는 감히 현대에 들어서 '근로'라는 단어의 사용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언어를 통한 기저의식의 변화'를 유도한다는 주장을 하고자 한다. 본질적으로 그 자주성과 노동자 계급의 역동성을 무시하는 '근로'라는 단어의 사용은, '노동운동'과 같은, 노동자 계급의 권익을 대표하는 행동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거부감과 위화감을 만들게 함과 동시에, 그러한 단어들을 생활에서 배제하게 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는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근본적인 자주성 있는 자신에 대한 의지를 잃게 하는 수순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대한민국의 분명히 노동절이라고 불려야 할 터인 근로자의 날 또한 날짜부터 그 명칭까지 노동운동을 제약하려는 파렴치한 독재자들에 의해서 제약받았음이 역사적으로 증명된다. 노동절은 본디 1886년 미국에서 벌어진 파업과 과잉진압까지의 일련의 사건을 총칭하는 "헤이마켓 사건"이 벌어진 5월 1일로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노동절이라는 개념은 1923년, 즉 일제강점기임에도 자의적인 노동의식과 계급적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이들에 의해서 한반도에 최초로 도입되어 여러 행사와 정보 공유를 통해 널리 퍼졌고, 빠르게 전국적인 기념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다분히 정치적인 의사와 노동조합 탄압의지로 인해서 5월 1일이라는 분명한 정해진 일자가 있음에도 그 의미를 변질, 그들의 노동조합에 대한 관제성과 정치적 노동조합을 타파하려는 악의적인 목적으로 노동절을 대한노총 창립일인 3월 10일로 강제로 바꾸었으며, 5월 1일 일명 "메이데이"를 선전도구라고 주장하는 망발을 일삼았다.


 그리고 박정희 집권기가 되자, 상술했던 노동이라는 단어의 자주성과 역동성을 삭제하고, 노동자를 물적 자원으로 격하하고 취급하였던 박정희와 그 아래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노동절이라는 명칭을 아예 "근로자의 날"이라는 수동적이고 애매모호한 명칭으로 바꾸었다. 이런 것을 보고도 근로자의 날이라는 명칭이 정상적이고 당당한 명칭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1994년에 법령이 개정되어 "근로자의 날"이 5월 1일로 다시 돌아왔지만 "노동절"이라는 명사는 아직도 공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 이러한 독재정과 노동탄압의 역사가 다분히 담겨있는 "근로자의 날"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게 재고해보아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