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끄으으으으......"


진궁은 진시가 되고 나서도 반 시진이 더 흘러갈 때쯤에야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 분위기에 휩쓸려 과음을 한 탓일까.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팔다리는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과음? 과음이라고? 분명 나는 죽으려고...... 아니, 그건 꿈인가?"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숙취에 쩐 몸을 일으켜 세우고 진궁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때, 방 밖에서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곧 시종 하나가 들어와 가벼이 절을 한 후 입을 떼었다.


"진 대인, 일어나셨습니까? 어제 탁주를 대접으로 서른 잔을 비우셨다고 하여 숙취에 좋은 탕약을 달여 왔습니다."


"아니... 그... 저...... 누구...십니까?"


"예? 진 대인, 왜 그러십니까?"


"진 대인...? 그건 또 누고... 뭔......."


"숙취 때문에 아직 정신이 제대로 들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냉수를 가져올 테니 잠깐 기다리십시오."


"음? 아니, 저기 이봐요, 젊은이! 대답을 해주고 가야지!!"


"질문은 정신부터 차린 다음에 해주십시오-"


라고 하며, 시종은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진궁은 할 말을 잃고 침상에 다시 주저앉았다.


'싸가지 없는 새끼... 아니, 그보다도 날 보고 진 대인이라고? 그게 누구야? 여긴 어디고? 끄으으... 난 대체 어제 뭘 했길래......'


미앙전에서 여포의 호통을 듣는 동탁보다도 훨씬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진궁은 앉은 자리에서 반 시진을 꼬박 생각만 하며 보냈다.


이윽고 사시가 되자 아까 왔었던 시종이 누런 사발을 들고 다시 진궁을 찾아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대인. 근처의 우물이 마르기 직전이라 물을 퍼올리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예예, 고맙습니다..."


곧 진궁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시종이 가져온 냉수로 세수를 시작했다. 광대뼈가 시리도록 차가운 물 덕분에, 진궁은 정신을 제대로 차린 듯 보였다.


"어휴, 좀 살겠네. 그래, 이제 뭣 좀 물어봅시다. 여긴 어디고, 당신은 누구요?"


"또 물어보시는군요. 진 대인, 이곳은 서주의 하비성입니다. 저는 대인의 시중을 드는 부곡인 고현입니다."


'서주...? 하비성...? 우리나라에 그런 데가 있었나...? 어디서 들어본 거 같기도...'


잠깐 생각하는 듯 싶더니, 이윽고 진궁은 다시 물었다.


"하비...성?이 서울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 곳입니까?"


"대략 1000리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천 리라니... 400km쯤 되나? 단위를 왜 리를 쓰지? 아무튼 그러면 서울에서 부산 정도 거리려나. 내가 모르는 곳이면 경남은 아닐 테고, 전남 어디 바닷가인가?'


의문스러워하는 표정을 띈 채, 진궁은 질문을 이어나갔다.


"내가 어제 과음을 했다 했는데, 누구랑 술자리에 있었습니까?"


"대인께서는 어제 하비성에 입성한 기념으로 열린 연회에서 여포 장군과 그 휘하 장수들과 함께 독한 탁주를 드셨습니다.

평소에는 많아야 열 잔 드시던 분이 서른 잔이나 드시고 거나하게 취하셔서는 곯아떨어지시니, 침상까지 모시느라 애먹었습죠."


"하하... 미안합니다. 일단 알겠으니까 돌아가 보세요."


"...예, 대인."


시종이 물러가자 진궁은 다시 표정을 잔뜩 찡그리고는 사색에 빠졌다.


'여포...? 내가 아는 그 여포? 삼국지의? 그렇다면 서주는 그 한나라 서주? 왜 여포가 서주에 있지? 하비성에 입성?'


진궁은 무심코 탁상에 놓여 있는 벼루에 아까 받은 냉수를 조금 붓고 먹을 갈아 먹물을 내었고, 거기에 붓을 찍은 뒤 상에 직접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동탁 살해... 이각ㆍ곽사의 난으로 방랑... 원술ㆍ원소 휘하에서 쫓겨남... 조조 휘하로 들어갔다가 반란 일으켰다 실패... 도망하여 서주 유비에게 귀의... 유비 배신 후 하비 차지... 이 시점인가. 여포 휘하의 진씨, 진씨, 진... 궁? 진궁! 그래, 내가 진궁이 되었단 말이구나!'


반 시진 동안 상에 글씨를 썼다가 소매로 지우기를 여러 번, 진궁은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 붓을 내려놓았다.


'왜 하필 진궁이지? 아니, 그보다도 어떻게 진궁이 된 거지? 미래의 사람도 아니고 한참 옛날의 사람으로 전생이 되다니... 말이 안 돼. 무명 작가의 3류 소설에나 쓰일 법한 설정인데. 돌아갈 방법은 없는 건가?'


진궁이 이토록 사색에 빠져있는 중에, 밖에서 둔탁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진궁은 생각에 깊이 빠져있는 나머지, 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선생, 앉아서 무엇 하시오? 해가 이미 중천인데 나와보지도 않고."


"음... 음? 어? 아, 아... 누구...?"


"내가 누구냐고 묻는 거요? 어제 먹은 술에 누가 극독이라도 탔나, 거 참. 나 봉선이요, 봉선. 선생, 왜 그러시오?"


"아, 봉선, 봉선... 그래, 봉선...... 크흠, 장군이 갑자기 나를 왜 찾아오셨소? 막 하비를 점령한 참이라 바쁠 터인데?"


"매일 진시에 나를 찾아와서 오늘 할 일이랑 간밤에 들어온 소식을 보고해주는 사람이 오늘은 갑자기 안 오길래 걱정돼서 와 봤소. 약간 상태가 오락가락 해보이는 거 같구려. 오늘은 좀 쉬시오."


"아, 아하하... 이것 참 면목 없게 됐소. 술이 약한데 분위기 때문에 서른 잔이나 마셔버려서... 허허."


"처자식 있는 남정네가 그래서야 쓰겠소? 하하하, 진궁 선생이 이런 면도 있는 줄은 처음 알았네그려. 아무튼, 앞으로의 거취는 내일 선생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해볼 테니 오늘은 편히 쉬면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계책 좀 생각해 주시오. 이만 가보겠소."


"예, 들어가십시오, 장군."


갑작스러운 여포의 방문에 적잖이 놀란 진궁은, 옷을 되는 대로 챙겨 입고 방을 나서 성벽으로 올라갔다.

그의 눈앞에 펼쳐지는 드넓은 서주 평야를 바라보며, 진궁은 다시 사색에 빠졌다.


'나는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 걸까. 시간을 역행해서 과거의 사람이 된다, 라. 그 시계를 받은 게 화근인가? 원래의 나는 어떻게 된 거지?

아니야. 지금 상황에서 원래의 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없어. 일단 당장은 진궁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여포의 하비성 입성... 3년 뒤면 조조의 공격을 받을 것인데,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이거나 저거나 모든 게 막막하기 짝이 없군...'


착잡한 표정으로 성벽에서 내려온 진궁은 곧 시종을 시켜 말 한 필을 내오게 한 뒤 여포에게 인근 파악을 위해 잠시 나갔다 온다고 이르라 하고 성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