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바리 전쟁 당시 해적 모가지 따는 해병의 기록화)






 결론부터 박으면




 1. 남북전쟁 당시 (북군)해병대는 여러 전투에 참전했지만 규모는 언제나 적었고, 총인원 3000명 이상을 유지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사령관의 계급은 대령이었을 뿐더러 정치 사회적으로 주목도 받지 못했음.




 2. 여러 '상륙작전'에 투입되었지만 상륙작전에서조차 주력은 육군이었고, 상륙에 투입된 해병대는 완편대대급 병력조차 가지지 못했음. 또한 그 상륙작전 대부분이 몇몇 무혈입성을 제외하면 당시 상륙작전 기술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적 한계로 성공적이지도 못했음.




 3. 그러나 남북전쟁은 미 해병대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였는데 비록 규모도 적었고 실패적이었다지만 해병대가 '상륙작전'에 투입되고, 해군의 해상 봉쇄를 보조하는 것 자체만으로 19세기 초 범선 시대까지의 '해군 보조인력으로서의 해병'에서 벗어나 '상륙전 병력으로서의 해병'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기 때문.




(데이비드 페러것 제독)






 우선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남북전쟁의 대체적인 이미지가 로버트 리의 미친 북진과 그에 맞서는 필사적인 북군의 항쟁, 게티즈버그 전투와 결정적인 역전, 셔먼의 육상 기동전으로 '마 미국 땅덩이 넓으니까 땅에서 다 싸웠겠지'하고 피상적으로 알기 쉽기도 하나




 남북전쟁 내내 해안과 해상은 매우 중요한 전장이었음. 미국 남부는 북부보다도 더 심각한 수출의존형 경제였고, 공업이 발달하지 못한 남부에서는 목화나 담배등 노예 플랜테이션 작물들을 유럽에 수출해 총기와 대포, 탄약 등 각종 전쟁 물자를 구매해야 했음. 심지어 농업 경제 주제에 식량조자 수입해야했는데, 북부의 농장이 농산물을 판매해 도시에 공급하는 일반적인 농촌 경제였던 반면 완전 플랜테이션 몰빵이었던 남부에서는 목화 말고 식량이 될 밀같은 작물을 심지도 않았기 때문.




 그랬기에 충성스러운 미 해군과 해병대의 대부분이 연방군, 북군에 복무하기로 했을 때, 연방 승리의 숨은 공신 패러것 제독이 이끄는 연방 해군에 의해 남부의 해안이 봉쇄되고 그들의 수출 의존형 경제가 작살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음.



연방 해군이 이른바 '연합 봉쇄(Union blockade)'를 개시해 남부의 모든 해안은 물론 강으로 운송되는 물자까지 차단하기 시작하자, 남부의 경제는 빠르게 말라죽어가기 시작했음. 




 이때부터 미 남부연합의 해상 작전은 크게 두 가지였는데 타 국적 선박등으로 위장해 최대한 빨리 봉쇄선을 빠져나와 유럽으로 달려가 목화를 팔고, 그 대금으로 산 식량, 총기, 탄약을 다시 필사적으로 연방 해군의 감시망을 피해 남부에 전달하는 밀항 수출 작전




 또 하나는 중요한 항구나 강의 입구까지 쳐들어와 포를 쏴대는 연방 해군에게 해안포대와 소형 포함으로 발악 비슷한 걸 하는 해상 거부 작전이었음.






 그러나 미 해군과 해안경비대는 바르바리 전쟁과 미국-멕시코 전쟁등을 통해 충분히 숙달된 상태였고, 수없이 많은 남부의 밀항선을 수장시키거나 나포했을뿐만 아니라



1862년 4월에는 포트 잭슨 및 세인트 필립 공방전(Battle of forts Jackson and St. Philip)에서 연합 포정들과 해안포대를 가볍게 제압, 남부의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였던 뉴올리언스에 상륙(거의 무혈입성) 하는데까지 성공했음.




 미 해병대가 마지막에 성조기를 뉴올리언스 청사에 꽂으러 갈 때 폭도들을 마주쳐 약간의 충돌이 있긴 했지만 미 해군, 해안경비대, 해병대는 성공적으로 뉴올리언스를 점령했고 이건 남부에게 매우 치명적인 정치적 타격이 되었음. 




 남부의 주요 항구이자 상징적인 도시가 함락됨으로서, 영국 프랑스등 많은 열강들이 남부와 북부 사이에서 간재기 모드를 중단하고 남부를 그저 반군 테러집단으로 여기기 시작했기 때문.





 이렇듯 미 해군과 해안경비대는 남북전쟁 내내 밥값 아니 그 이상을 했지만, 불행히도 해병대에는 그렇게 많은 영광이 돌아오지 못했음.



(불런 전투 직전 워싱턴에서 사열하는 해병대원들)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역사적으로 '해병대(Marine corps)' 혹은 '해군보병(Морская пехота)'이란 병과는 원래 범선 시대에 함선의 규율을 유지하거나 수병들을 통제하거나, 함상 백병전이 일어났을 때 머스킷을 쏘며 전투하기 위해 탄생했고




 19세기 중반에는 함상백병전이 모습을 감춘 후 가장 선구적이었던 프랑스 해병대를 시작으로 점진적으로 식민 열강들의 해군력 투사에 동원되는, 상륙전 병력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에 진입한 상황이었음.




 즉, 역할 구분과 병종 정체성이 모호했다는 것임. 때문에 정치적 입지의 부족으로 규모가 제한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음.






 남북전쟁 초기 해병대는 대대 단위라 쓰고 완편되지도 못해 실질적으론 1~2개 중대 정도 규모로, 상륙전과 같은 특수적작전이 아닌 일반적인 야전에 육군과 함께 투입되었고, 




 불런 전투등 북군의 연전 연패에 육군과 함께 별 특이점 없이 쓸려나가는 입장이었음. 뭐 전쟁 초기 로버트 리의 북진에 육군이고 해병대고 수 많은 장병이 포로로 잡히고, 장교들이 교체되며 혼란기를 맞이했지만, 뼈아픈 육군의 야전 패배에 끌려다니다가 숙련 해병 대부분이 전사/부상한 후에야 해병대는 해군으로 돌아와 해군 소속으로 해군의 작전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게 됨.



1차 포트 바그너 전투(First Battle of Fort Wagner)는 해병대에게 있어선 남북전쟁 당시 뉴올리언스에서 몇 시민 폭도들을 제압한 것 이후론, 첫 번째 상륙작전이었음. 그러나 이 전투에서도 북군의 주력을 맡은 건 육군과 해군이었는데, 해병대는 반편대대정도의 병력으로 육군을 보조하는 정도에 그쳤음.




 그리고 이 전투는 북군의 참패로 돌아감. 해상 전력의 우세와 남군의 열세에도, 이 당시 '상륙작전'이란 콘크리트 벽과 다량의 대포로 보호받는 해안요새에 나무보트타고 무지성으로 돌격 때려박는 것에 불과했고, 남군의 철통방어에 해병대를 포함한 북군은 수없이 사상자를 내며 격퇴 되었음.


(얄궃게도 이후 다시 북군의 집착으로 2차 포트 바그너 전투가 벌어지는데, 여기선 특이하게도 해병대 대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로 이루어진 메사추세츠 54 연대가 투입되었음. 이들도 결국 패배하지만 불굴의 집념으로 1차때보다 훨신 효과적으로 남군을 몰아붙여 찬사를 받았고 최초의 아프리카계 명예 훈장 수훈자(William Harvey Carney)도 이때 나오는데, 덕분에 언론에선 졌잘싸로 흑인 부대원들을 주목했음. 뭐가 얄굳냐면 이것때문에 1차 공격에서 실패한 해병대와 상륙 병력들은 '니들은 흑인보다도 못하냐?'라는 비아냥을 받아야했기 때문)



상륙전에 대한 연구부족과 그로인한 참상은 1863년 남부의 마지막 해상 거점이었던 포트 피셔를 점령하기 위한 포트 피셔 전투(Battle of Fort Fisher)에서도 반복되었고, 여기선 더 처참했음. 해병도 육군도 아닌 1600명의 수병들이 커틀러스(해상검문용 군도, 그러니까 검)를 들고 돌격하고, 그걸 400여명의 해병이 머스킷으로 지원사격하는 식으로 진행된 이 전투에서 다시 상륙 병력은 비참한 패배를 맛봐야했음.



(1862년에 찍힌 해병대원들의 사진)




 물론 해병대가 남북전쟁 내내 아무것도 못한 건 아니었음. 해병대는 비록 그 규모와 정치적 위상의 한계로 독립 군종으로서는 해안경비대보다도 존재감이 미미했지만, 해군의 동반자이자 남부 봉쇄 라인의 또 다른 수호자로 엄연히 활약했고 굵직하진 않아도 자잘한 미 남부 밀수선에 대한 검문, 남부 테러리스트나 밀수범에 대한 제압, 함선 보호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음.




특히 해병대는 1864년 이후 북군이 본격적으로 남부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수행하면서 강이나 해안에서의 밀수 봉쇄에서 해군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육군의 철도 파괴를 돕는 등 특수작전을 지휘하기도 했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조지 G. 스토다드(George G. Stoddard) 중위가 이끄는 157명의 해병대대(왜 보병 '대대'가 157명인지는 묻지 말자...)가 강을 따라 상륙해 찰스턴-사바나 철도(Charleston-Savannah Railroad) 파괴를 시도한 것인데, 근처에 있던 남부군 측 젊은 사관생도 343명에게 발각되고 맘. 총격전 끝에 남부군은 더더욱 증원되어 북군의 철도 파괴를 저지하려했고, 해병대는 육군 및 기타 병력 460명 가량과 합류해 600명까지 증원되어 전투를 벌였음. 결국 북군은 물러나고 철도 파괴는 다음으로 미루어지지만, 이 작전은 미 해병대가 전개한 첫 상륙이 포함된 특수작전이라는 데에 의의가 있음.





 아까 결론을 먼저 박고 시작했지만 다시 리바이벌 하자면, 미국 남북전쟁 당시 미 해병대는 작은 규모와 역할 정체성의 모호로 주도적인 하나의 군종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지는 못했고, 부족한 여건은 물론 상륙작전에 대한 연구 부족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며 여러 남부 해안 요새 공격 작전에서 쓴맛을 봐야 했지만, 미 해병대가 처음으로 '상륙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으로서 진화하는 터닝포인트가 되었다는 점에 의의를 둘 수 있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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