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45년 4월 1일, 미군이 오키나와 요미탄(讀谷)마을에 상륙했다. 일본군의 저항은 거의 없었으며, 활주로를 폭파한 뒤 퇴각했다.



2. 남은 건 민간인뿐. 이들은 마을에서 1km 떨어진 동굴인 '치비치리 가마(チビチリガマ)'에 숨었는데, 미군은 스피커와 통역을 동원해 이들의 항복을 호소했다. 


이 동굴은 45m 가량 되는 석회암 동굴이었는데, 마을 주민들은 미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단체로 들어가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다.



3. 하지만 25세 간호사 유키가 '일본제국 남자들이 이렇게 허둥대다니! 죽창을 들고 싸우지 못할까!' 라고 호소했고, 몇몇 남자들과 여자들까지 죽창을 들고 미군에게 돌격하다가 기관총 세례를 맞고 사망했다.


유키는 난징 대학살 현장에 종군한 간호사였는데, 그때 일본군이 중국인들에게 한 만행을 똑똑히 보고 미군 역시 일본인인 자신들에게 똑같이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4. 미군은 계속 항복을 독촉했으나, 주민들은 동굴 깊숙히 숨어들어갈 뿐 나오지 않았다. 미군은 사람이 아닌 귀축(鬼畜), 말 그대로 귀신과 짐승과 같은 존재라는 세뇌를 계속 받아왔기 때문이다.




5. 그 다음날, 사이판에서 돌아온 피난민들이 '사이판에선 불을 지펴 연기로 자결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하자' 라고 호소했고, 결국 동굴에 불이 피워졌다. 이불과 옷을 땔감 삼아 불은 계속 타올랐다. 



6. 몇몇 사람들은 살아 나가려고 발버둥쳤지만 죽으려는 자가 압도적 다수여서 이들 역시 동굴에서 나오지 못했고, 이를 못 버틴 젖먹이가 있는 4명의 어머니가 불을 끄려고 했다. 불을 완전히 끄는 데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연기를 어느정도 줄이는 데는 성공하여 다수가 생존하는 데는 성공했다.



7. 진정한 광기는 3일차에 일어났다. 연기로 죽는 게 실패하자 18세 여성 하루가 '어머니 손으로 아름다운 이대로의 나를 죽여주세요' 라고 호소했고, 결국 어머니가 딸을 부엌칼로 찔렀다.


이 어머니는 눈이 안보이는 아들과 큰아버지까지 찌르려 했으나, 미군이 나서서 겨우 말리는 데 성공했다.



8. 위에서 죽창으로 궐기하자고 호소한 간호사 유키도 가족에게 독을 주사했고, 자신도 독으로 목숨을 끊었다. 불 역시 계속 피워졌고, 미군 역시 연기가 너무 자욱해 동굴에 진입하는 것도 힘들었다. 도망치려는 사람도 연기 때문에 출구도 안보이고, 의식도 흐릿해져 결국 동굴 속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는 아예 미군의 총에 죽는 게 확실히 죽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끝내 동굴을 빠져나왔는데, 역설적으로 이들은 살아남았다.


집단자결의 현장 치비치리 가마(동굴)



동굴 앞에 놓인 죽은 자들을 위로하는 사당



9. 결국 치비치리가마로 숨어든 194명 중 82명이 자결로 생을 마감했으며, 이 중 절반 이상인 45명이 미성년자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광기밖에 배운 게 없는 청소년들이 어른의 선동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셈이었다.


성인 중 대부분은 어머니였으며, 역시 자신들의 자식이 죽어가자 자신도 죽은 경우였다.



10. 이 현장에서 살아남은 나머지 절반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는데, 오키나와 전통에서 사람이 천당에 완전히 정착했다고 여겨지는 33년 뒤에야 입을 열기 시작해 이 정황이 기록된 것이다.


비단 치비치리 가마뿐만이 아닌 다른 마을과 오지에서도 이런 집단자살 정황이 발견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일제의 최악의 군국주의 세뇌를 보여주는 현장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블로그 출처: 무수천의 공간.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minjune98&logNo=223439044725&navType=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