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몽골국 삼한등처행중서성 경상로 합천군 해인사.



이곳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90년)에 지어진 절로, 여몽전쟁 시기 고려가 몽골군에 불타버린 초조대장경을 대신해 만든 팔만대장경을 보관했던 장경판전이 지어진 곳이다.


이 장경판전은 임진왜란기에도 수난을 피해 갔고, 한국전쟁기에도 폭격에 휘말려 소실될 뻔한 위기를 넘기고 대한민국 시절까지 멀쩡하게 남았다.


그건 한국이 몽골의 한 행성으로 병합된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이 합천은 몽한전쟁 당시 별다른 교전을 겪지 않은 얼마 안 되는 지역들 중 하나였던 덕에 해인사는 간신히 파괴를 면했고,


몽골과의 전쟁을 거치며, 한국 내에 남아있던 유명한 문화재들이 거의 다 소실된 상태였던 것과는 반대로 팔만대장경은 구 대한민국 시절의 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합천 군내와 더불어, 이제는 거의 대부분이 전쟁으로 사라진 한국의 문화재들 중 거의 유일하게 온전히 보존된 옛 한국을 상징하는 것으로써 남아 있었다.


경복궁을 비롯한 옛 조선 왕조의 5대 궁궐은 일부가 복원되어 삼한등처행중서성 소재지로 사용되고 있는 경복궁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전각이 전쟁 중 몽골군에 의해 파괴되고 방화되어 이제는 검게 그을린 자국과 더불어 나무 파편들만이 가득히 있을 뿐이었고,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들은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 국군이 대패하며 유물을 챙길 틈도 없이 남쪽으로 패퇴하느라 정신없던 틈을 타 몽골군들에 의해 무자비한 약탈을 당해 이제 남은 것이 없었다.


물론 일부는 그나마 온존하는 데 성공했지만, 중요한 유물들은 이미 다 몽골군에게 파괴되거나 약탈당한 지 오래였다.(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들은 모두 불에 타 소실되었다.)


충주 고구려비는 몽골군이 충주를 점령할 때 벌어진 전투의 영향으로 총탄이 가득히 박혀 그 글자가 거의 깎여나갔고, 


국립부여박물관은 아예 건물 자체가 폭격에 의해 날아가 유물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그나마 아랫 부분만큼은 멀쩡하였으나, 윗 부분은 무거운 콘크리트 파편에 짓이겨 부서져버린 상태로 발견되었다.


경주의 박물관은 중앙박물관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고, 신라 왕릉들은 몽골군의 포탄에 능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이렇게 대부분의 유물들이 거의 소실되거나 몽골군에게 약탈당해 더는 이 땅에 남아있지 않으니, 거의 유일하다시피 멀쩡하게 남은 이 팔만대장경의 가치는 돈 따위로 매길 수조차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