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몽골국 중서성 대도로 황성(皇城).



몽골의 일본 원정 시도는 옛 원의 쿠빌라이 칸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세조 황제 쿠빌라이의 두 차례 원정 시도 중 첫 번째 원정은, 남송을 무너뜨리기 전인 1274년 원나라군 2만 5천명과 고려군 1만 4천여명을 태운 900여 척의 함선을 동원해 일본을 공격하였다.


대마도와 이키를 점령하고 일본 규슈의 하가타 만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거세게 밀어붙이던 고려 원나라 연합군은 갑자기 몰아닥친 태풍에 의해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그로 인해 전투를 이어가는 것이 불가능해져 결국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태풍에 의해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이 원정의 실패는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에 대한 열의를 달아오르게 했고, 마침내 1279년 남송을 무너뜨린 원은 이제 구 남송 출신 군사들까지 동원해 일본을 정복하고자 했다.


2차 원정의 규모는 1차 원정과는 차원이 달랐다, 우선 고려에서 출발하는 여원연합군은(동로군) 뱃사공까지 포함한 병력이 4만, 병선은 900척으로 1차 원정과 거의 비슷한 규모였고,


중국에서 출발해 이키 섬에서 동로군과 합류하기로 한 남송군 출신 병력은 3천 척의 배에 10만의 군사들이 태워져 출병하였다.


규모만 보면 이번엔 일본을 정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으나,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차 원정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한 일본군은 이번에는 끝까지 연합군에 저항하며 예상 외로 꽤 큰 피해를 안겼고, 거기에 연합군의 군중에 전염병까지 돌며 병사들의 전투력 또한 크게 감소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차 원정에서 연합군에게 큰 타격을 입힌 그 태풍이 다시 연합군을 덮쳤다.


태풍을 직격으로 맞은 데다 일본군의 반격을 받은 연합군의 피해는 그야말로 처참하다는 말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고려군은 2만 5천명 중 7천 500명이 전사하였고, 몽골군과 강남군들은 거의 전멸을 당해 사상자가 10만에 가까웠다.


쿠빌라이는 두 차례의 원정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강남군을 징발하고 고려에 군선 건조를 명하는 등 3차 일본 원정을 추진하였으나, 내부적으로 복잡한 정세와 신료들의 반대에 결국 그 뜻을 접어야 했다.


이후 쿠빌라이의 손자인 성종 황제 시기에 접어들어 성종이 대외 정벌전에 대한 관심을 내보이지 않으며, 일본 원정은 내부로 가라앉았고, 이후 혜종 대에 들어 원나라가 회수 이남 지역을 상실하는 등 그 국력이 흔들리며 일본 원정 논의는 완전히 끊어진 듯 했다.


적어도 이 날까지는 그런 듯 했다.


"천하의 모든 나라가 황제 폐하의 위엄에 두려워하며 조공을 바치며 고개를 숙이는데, 오로지 동쪽의 일본만이 감히 참람한 칭호(덴노)를 스스로 쓰며 조공을 바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칙사를 보내어 여러 번 시정할 것을 명하였음에도, 저들른 도리어 이에 앙심을 품고 군대를 다시 창설하여 우리 대몽골국에 맞서고자 하는 불온한 행보를 계속 드러내었으니, 


이들을 징치하여 그 국왕(덴노)과 그 식솔들을 사로잡아 황제 폐하의 앞에 무릎 꿇리고 그 죄를 징치해야 마땅한 줄 아옵니다."


몽골의 병부상서가 옥좌에 위엄 있게 앉은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며 다소 과격한 어투를 내뱉으며 일본의 정벌을 청하였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아국이 대황제 폐하의 영도 아래 다시금 중원을 수복하고, 태조 황제(칭기즈 칸) 시절의 성세를 다시 되찾아 국세가 강성하니 이것은 무리한 원정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서쪽 중동 지역의 정벌도 완료되었으며, 삼한 지역에서 발생한 민란도 이제는 모두 정리되었으니 가히 군사를 일으켜 일본을 징벌할 만 합니다."


중서우승상도 병부상서의 말을 거들으며, 황제에게 일본 원정을 부추기고 있었다.


선선대 황제 시절만 해도 단지 지나간 영광의 기간 중 이루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던 일본의 원정이, 이제는 이룰 수 있는 현실로 다가왔다.


대몽골국은 지금 중원과 삼한을 다시 수복하고, 서쪽의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 중동 지역으로 뻗어나가며 몽골 제국이 옛 성세를 회복했음을 만방에 알리고 있었다.


미국이 내전으로 무너져 온 천하가 각자도생하는 사이, 대몽골국은 선대 황제가 화려하게 중흥시킨 몽골의 국력과, 마치 태조 황제가 재림한 듯한 현 황제의 뛰어난 군략으로 다시금 예전의 성세를 회복해가며 예케 몽골 울루스를 다시 부활시키며 천하의 나라들을 다시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당장 중국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수복한 후에는 부탄과 진랍(캄보디아), 태국, 말레이시아, 베트남, 네팔, 라오스,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으며, 그중 부탄, 태국, 진랍, 말레이시아 등은 아예 군주들이 황제에게 친조를 하며 직접 조공을 바치고 있다.


저항하는 자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였다, 중앙아시아 5개국과 아프가니스탄을 무너뜨린 후에는 먼저 이란이 몽골에 저항하였고, 그 다음에는 대다수 중동 국가들이 그에 동조하였으나, 그들에게는 바이바르스가 없었다.


이란은 옛 호라즘이 그러했듯이 전토가 불타오르며 일방적으로 대패했고, 


바그다드는 다시금 칼리프가 밟혀 죽은 그 시절로 되돌아갔다.


이스탄불은 처참하게 파괴되어 성 소피아 성당을 비롯한 옛 아름다움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때 화사한 빌딩숲으로 가득 찼던 산유국들의 도시는, 몽골군의 약탈과 파괴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 이제는 사람이 살지도 않는다.


내전으로 나라가 피폐해졌던 예멘은, 정부군과 반군 가릴 것 없이 모두 몽골군에게 평등하게 궤멸당하며 강제로 내전이 종결되었다.


"일본이 그동안 우리 나라가 요구했던 '당연한' 요구들을 모두 거부하였음에도 우리 대몽골국이 그들을 징치하지 않는다면, 천하의 모든 나라들이 우리를 우습게 볼 것입니다."


이렇듯 몽골에 반항한 자들이 어찌 되는지를 떡하니 보면서도, 일본은 '당연한' 요구조차 거부하며 숙이지 않았으니, 그 괘씸한 심정은 배가 된 터였다.


일본이 거절한 '당연한' 요구들은 셀 수조차 없었다.


국왕이 칙사에게 절하고 숙이는 것도 거부하고, 참람한 호칭인 천황, 황태자, 황후, 황태자비 등을 모두 폐기하고 국왕, 왕세자, 왕비, 왕세자비로 낮추라 하는 요구도 거부했으며, 


몽골이 오로지 선의로써 제안한, 일본이 근본 없는 국가와 교류하는 것을 방지케 하고자 하는 선량한 목적으로써 대몽골국에 일본이 외국과 통교하는 권리를 양도케 하는 것도 거부하고,


일본의 강역을 보호하고자 대몽골국의 정예한 군사 20만을 일본에 주둔케 하는 것도 거부했으며, 


정치를 관장하는 자들이 잘못된 정책을 펴 일본 인민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을 방지코자 우리 관료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의 설치조차 거부하였다.


이런데, 이들을 징치하지 아니한다면 이전에 저항하여 박살이 난 중동 국가들이 섭섭하지 않겠는가.


"폐하,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정전 내의 신하들은 모두 무릎을 꿇으며 한  치에 어긋나지 않게 합창하였다. 신료들의 그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황제는 자세를 고쳐잡더니, 이내 옥음을 내렸다.


"경들의 의견이 이리도 일치하니, 어찌 짐이 이를 따르지 아니하겠는가? 그동안 짐이 일본에게 베푼 은혜가 적지 아니한데, 그들은 그것을 모두 잊고 오히려 상국에 이빨을 드러내었으니, 이를 징치하지 아니할 수가 없도다.


즉시 삼한행성(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과 호광행성(원나라 대 행정구역, 구이저우, 광시, 후이난과 광둥 서부를 관할하였음), 강서행성(원대 행정구역, 광둥 동부, 강서를 관할), 강절행성(원대 존재한 행정구역, 현대엔 절강, 복건에 이어 대만을 관할함) 등에 징집령을 내리고, 요양행성(만주)의 군대를 삼한행성에 내려보내 원정 준비를 보조하게 하라!


또한 각지의 해군을 내려보내 대만로(타이완 섬), 탐라부(제주도), 부산부(부산), 창원부(창원) 등에 이동시켜 상륙 훈련을 시행케 하라!"


""""황명을 삼가 받들겠나이다!!""""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신료들은 우렁찬 합창을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