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민족주의는 서양에서 발흥한 민족주의와 구분된다. 한국의 민족주의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란 범주가 없다. 한국의 민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집단이며, 하나의 권위이며, 하나의 신분이다. 그래서 차라리 종족이라 함이 옳다.”

 위의 글은 <반일종족주의>의 소개이다. 이 소개는 마치 한국의 민족주의가 서양의 개인적이고 선진적인 서구형 민족주의와 다르게 후진적이고 종족적인 것처럼 서술한다. 마찬가지로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2019419일 자 <조선일보> 칼럼 감성적 민족주의가 국가대전략을 해친다에서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를 비판한다. “감성적 종족 민족주의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존립 근거를 위협하고 있으며 한·일 관계 경색의 근원이 편향된 종족 민족주의에 있는 주장이다. 과연 한국을 포함한 동구형 민족주의는 종족적 성격만 가지고 있는 것일까?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2차적 이데올로기이다. 자유주의와 결합하면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는 서구형 민족주의가 되고, 낭만주의와 결합하면 독일 통일을 이끄는 낭만적 민족주의가 되고, 제국주의와 결합하면 제국주의를 지탱하는 논리가 되고, 식민지 민중과 결합하면 3.1운동을 이끄는 반항의 민족주의가 된다. 일부 보수들은 이러한 특징을 교묘히 결합하여 낭만적 민족주의가 나치를 불렀다고 주장하고, 한국의 민족주의가 이러한 낭만적 민족주의와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한다. 반대측에서 그러면 서구의 민족주의는 뭐냐고 물어보면 서구의 민족주의는 동구의 낭만주의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맞는 말일까?

개인적이고 선진적인 서구형 민족주의로 여겨지는 영국 민족주의에서도 보어 전쟁 시기(1899~1902)에 등장한 맹목적 애국주의, 징고이즘(jingoism)이 있었다. 반면에 독일의 낭만주의적 민족주의에서도 자유주의적인 민족 자결권의 권리가 있었으며 칸트의 세계 시민주의와 평화주의를 추구했다. 데모스와 에트노스는 본질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민족주의가 나쁘다는 주장은 한국의 민족주의를 종족적 민족주의로 프레임화하여 에트노스의 논리에 지배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민족주의에 내장된 강한 평등주의가 민주주의를 진전시켰으며, 동양의 민족들도 민주주의를 민족 운동에 이용할 수 있는 최적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부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종족적 민족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서유럽에도 여전히 에트노스적 성향이 강한 민족주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시가 축구이다. 영국에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잉글랜드 별로 따로 경기가 열리고 있으며, 지역별로 국가대표팀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였을 때 축구가 매우 민족주의적인, 정확히는 하위 민족주의의 수준에서 작동하는 스포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동양의 종족적 민족주의와 서양의 공민적 민족주의는 날조된 이야기이며 영국과 프랑스의 공민적 민족주의에도 에트노스에 입각한 종족적 민족주의 요소가 잠재되어있기 때문에 데모스와 에트노스를 구별하는 것은 과장되었다. 서양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민족국가를 형성시켜 세계 각지에 민족주의를 씨 뿌렸으면서 다른 이들의 종족적 민족주의를 비판하고는 자신들에게는 민족주의가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자유롭고 공민적인 성격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의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그러한 서양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종족적 민족주의가 국가의 존립 자체를 해친다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다. 물론 한국의 민족주의는 영국과 프랑스의 민족주의보다 에트노스의 논리가 더 강하다. 하지만 한국의 민족주의에 에트노스적 논리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국의 민족주의와 감정적 종족 민족주의 간에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서양 민족주의의 사례를 보았을 때 민족주의를 하나의 질병으로 보면서 이러한 '종족적 민족주의'를 버리고 서양의 '세계주의'로 나가야 한다는 일부 세력의 주장은 웃기지 않은가. 그들이 그렇게 부르짓는 서구에서도 여전히 종족적 성격의 민족주의가 남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