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베트남 정권 자체의 부정부패로 국민들의 지지는 사라지고 내부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북베트남은 이를 기회로 보고 수많은 간첩들을 침투시켜 사회혼란을 부추겼다.


대통령 비서실장과 법무부 장관,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과 관료들이 공산 프락치였음이 드러난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캄보디아 국경선 근처 빈룽성 내(內)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 정부의 각 부처,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진행된 극비 회의 내용이 하루만 지나면 통째로 입수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부에 공산 간첩들이 대대적으로 침투해 있었다.


1967년 9월 3일에 벌어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티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2위 득표를 한 야당 지도자 쭝딘주(張廷裕)는 선거 유세에서 민족 감정을 자극하며 반미(反美), 반전(反戰)을 선동했다. 변호사 출신인 쭝딘주는 용공(容共)주의자라는 공격을 받자 “나는 용공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이며 진실한 불교도”라고 주장했다.


그는 유세 때마다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가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외세(外勢)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라면서 반전(反戰) 여론을 자극했다. 개표 결과 그는 17.3%의 지지를 얻어 2위를 얻었다. 그의 아들은 사회주의 베트남 정부를 위해 외교관으로 복무하다 1978년 공작원 행위가 들통나 추방당했다.


좌익 종교인들은 월남 군인들을 향해 “동족인 월맹군을 향해 총을 쏘지 말고, 미군을 향해 쏘라”고 선동했다.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지꽝 승려 등 종교인들은 ‘구국(救國) 평화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을 벌였다. 이 조직에 공산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 세력으로 변질되었다.



얘들아. 진한글씨로 표시된거. 어디 대한민국 이야기같다는 생각 안 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