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히틀러는 전쟁을 일으키기전

 

영국과 프랑스한테 협정을 맺다고 통보했다.

 

 

그것이 바로 뮌헨 협정

 

 

1938년 3월,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논리로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이 국민 투표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여 양국이 하나가 되자, 게르만 민족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대두했다. 폴란드[11], 리투아니아[12],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등에 나뉘어진 게르만인들은 강력한 하나된 독일이라는 히틀러의 구호에 열광하며 독일로의 합류를 강력히 희망했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한테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

 

" 독일 주민이 과반수인 지역을 모두 할양하도록 , 아니면 전쟁이다 "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침공·합병한 히틀러가 다시 발톱을 세워 1938년 9월 초 체코령 주데텐란트를 요구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였다. 비록 주데텐란트에 독일계 주민 300만명이 거주하고 있긴 하지만 체코로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주요 공업지대였던 터라 체코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했다. 히틀러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데텐란트에 “완전한 자결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며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머뭇거렸다. 히틀러에게 평화적으로 주데텐란트를 넘겨준다면 전쟁이라는 파국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한가닥 희망 때문이었다. 영국은 조그만 나라 체코때문에 대영제국이 전쟁에 휩쓸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프랑스는 외국의 침략이 있을 경우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켜주기로 체코와 조약을 맺은 상태였는데도 전쟁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주데텐란트를 넘겨주는 것에 내심 찬성하고 있었다.

 

 

체임벌린은 즉답을 하지 않고 영국으로 돌아가 9월 18일 프랑스의 양해를 구한 뒤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독일계 지역를 포기하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결국

 

  • 9월 22일, 체임벌린이 직접 히틀러를 찾아가 영국과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가 영토 포기에 동의한다며 앞서 15일 히틀러가 제시한 요구에 대한 답변을 전했는데, 처음부터 수데테란트 사태를 트집잡아 전쟁을 일으켜 체코슬로바키아의 완전 해체를 노렸던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정말로 독일계 지역을 포기해 버리자 이번에는 그 할양을 단계적으로가 아니라 즉각적이고 신속하게 할 것과 해당 지역을 독일군이 즉시 점령할 것,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와 영토분쟁이 있었던 폴란드와 헝가리의 영토 문제까지 조정할 것 등 고의적으로 조건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 이에 체임벌린은  모두 오케이를 했다.
  • 그리고는
  • 회담을 통해 다음과 같은 합의안이 도출되었다.

    • 수데테란트는 독일에게 양도된다.

    • 톄신 지방은 폴란드에게 양도된다.

    • 루테니아와 남슬로바키아는 헝가리에게 양도된다.[17]

    • 회담 참여국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한다.

 

결국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는

 

당시 국제연맹의 협약을 무시하고

 

히틀러의 모든 요구를 수락했다. 그리고 그는 영국으로 돌아와 이렇게 외쳤다.

 

이날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로 돌아온 체임벌린은 이렇게 말했다.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믿습니다.”

이 장면은 BBC방송을 통해 영국 전역에 중계됐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기억하고 있던 체임벌린은 두 번 다시 영국과 유럽을 전쟁으로 몰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굴욕적인 양보와 신생국의 희생을 포함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평화를 지키고 싶어했다. 그래서 “최후의 영토적 요구”라는 히틀러의 말을 굳게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을 것이다. 역사는 이를 유화정책이라고 부른다. 이에 앞서 1938년 3월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에서 금지한 오스트리아 병합을 강행했을 때도 체임벌린은 외교적 항의만 했을 뿐 행동을 전혀 취하지 않았다. ‘말만 할 뿐 행동이 따르지 않는 정책(only talk, no action)’은 영국의 군사 개입을 두려워하던 히틀러의 야욕만 키워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 당시 영국은 전쟁이 아닌 평화를 가져왔다는 소식에 모두 축제 분위기였으나,

 

오로지 처칠만이 이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처칠은 뮌헨 협정을 이렇게 평가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불명예전쟁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그들은 불명예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체임벌린은 처칠의 의견을 완벽히 무시했고  처칠을 전쟁충이라고 몰아세우며 여론을 이용해서 처칠을 배척했다.

 

처칠은 끝까지 협정을 반대했으나, 대다수의 영국인들은 체임벌린의 쇼맨십에 속아서 처칠을 욕했다.

 

그로부터  6개월후 히틀러는 영국 프랑스를 통수치며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문재인 = 네빌 체임벌린

 

홍준표 = 윈스턴 처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