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한국전쟁 이후,

급속도로 산업화를 맞이했다.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수도권 집중화와 첨예한 세대간 대립은 필연이었다.


1. 수도권 집중화 

이전에도 말했지만,

대한민국의 출발점이나 마찬가지인 대한제국은 수도인 한양에서 근대화를 시작했고,

그마나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오픈한 인천 및 부산 그리고 원산이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발전했다.

이는 훗날 분단선이 그어지고 각 항구에서 산업화의 꽃을 피우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뒤늦게 호남에 목포나 군산항을 개항했지만,

식민지 시절 번성기를 제외하고 세 항구처럼 커지진 못했다.


대한제국은 근대화를 어찌저찌 이뤄내려고 했다.

그로인해서 경공업이나 서비스 및 금융 부문에서 기업이 탄생하고 개항장에는 해외상인이 자리잡으며 상업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대한제국 역량의 한계와 일본제국에게 식민지화 당하면서 산업화의 꽃이라 불리는 중공업 메타는 노무현을 따라갔고,

제식갤 뇌피셜대로 근대화를 추진하기는 커녕 한반도 자원수탈에 관심만 있던 일제는 농본체제를 유지시켰다.

결국 게이조가 되어버린 한양과 개항장을 빼면 한반도 전역은 소똥내가 풀풀나는 똥세권이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호남은 이 때 발전할 수 있었다.

호남평야와 나주평야는 대한민국 최대곡창지역이었고,

일본은 쌀을 본토로 나르기 위해 목포 및 군산을 공출항으로 지정하여 항구를 발전시켰다.

기업인은 호남에 풍부한 작물을 베이스로 제분기업을 설립했다.

실제로 민족기업 효시를 보면 농장베이스로 출발한 효성이나 삼양사가 호남에도 출발했다.


아, 이때 나머지 항구는 어땠냐고?

원산항은 러시아가 운지하면서 쓰임새가 별로 없었고 인천항은 경성의 연계항구라는 이점은 여전했지만,

지리적 문제점과 경부선 개통으로 인해 경쟁령이 밀렸다.

부산항이야 본토와 한반도를 잇는 최적의 코스니까 당연히 한반도내 최고 항구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


여기서 재밌는 건 경부선 개통은 의외의 장점을 보여줬는데,

호남선과 연계되면서 대전이 항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통코인으로 떡상하는 결과를 보여줬다.

이건 나중에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문제는 해방 이후였다.

일제는 중국과 전쟁을 일으키면서 군수물자를 빠르게 나르길 원했고,

한반도 북부에는 중공업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개 어촌에 불과했던 흥남권역은 현재 부산 싸다구 날리는 한반도 최대 공업단지로 부흥했고,

잠깐 잊혀졌던 원산항도 크게 발전한다.

해방직전만 하여도 전국 대도시엔 한반도 북부 지방 다수가 랭크되는 기염을 보였다.


분단선 안 그였으면 서울이나 경기도 천만은 솔직히 어려웠을 가능성이 크다.

서울과 비견되는 서비스업 도시 평양 그리고 한반도 최대 공업단지인 흥남벨트 등 지역균형 발전 요소는 충분했다.

그러나 한반도는 분단선이 그였고,

그나마 쓸모있는 시설은 전부 북으로 날라갔다.

대한민국은 농본국가로 다시 회귀한 셈이었다.


뭐,

북진해서 통일했으면 몰랐을까.

북괴가 일으킨 한국전쟁은 그나마 있던 산업시설도 싸그리 매장시켰다.

한반도 최대 공업단지였던 흥남벨트는 문자 그대로 잿더미가 되었고,

북부 중심도시 평양은 멀쩡한 가옥이 두채였다.

대한민국도 국토가 잿더미가 되긴 했지만,

근간시설이 날라간 건 아니었다.

석기시대 매니아 커티스 르-메이가 다행이 아군이었고,

북괴와 원팀을 이뤘던 소련은 국제사회 눈치를 보고 있었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던 중공은 제공력이 쓰레기였다.

짧게 말하면 북쪽보단 나름 국토가 멀쩡했단 이야기다.

제일 먼저 모가지 따인 서울도 도쿄핫을 떠올리는 평양보단 사정이 훨씬 나았고,

부산이야 임시수도 버프에다 원래 큰 도시였기 때문에 잠깐동안 산업력을 모조리 차지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부산으로 피난갔던 기업은 다시 서울로 되돌아왔다.

말했다시피 서울은 평양과 비교하면 멀쩡한 수준이었고,

이는 대한민국 초기 공업이 발전하는데 도움이 된다.

부산은 대한민국 임시수도로써 전후 기업이 태동하였고,

훗날 삼성, 현대 등 유수의 대기업을 배출한다.


호남은 어땠냐고?

전후 일본인이 버리고 간 정미기업을 적산출하하였다.

까고 말해서 여전히 농본메타였다는 이야기다.


전쟁이 끝나고,

대한민국은 복구를 시작했다.

장성한 농촌지역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전통적인 서비스업 도시 서울과 새로 뜨는 부산으로 몰려들었고,

베이비붐 세대와 맞물려 수도권과 영남권은 크게 성장하지만 기반시설이 없던 충청도 및 전라도와 강원도는 그대로 꼴박하기 시작한다.


정희왕이 등극한 대한민국은 산업화를 준비했다.

서울이야 근대화부터 유지한 경공업메타로 런승만 시절부터 거대한 섬유산업단지를 구축한 상태였고,

문제는 중공업이었다.


중공업을 보자하니 솔직히 영남만한 필지가 없었다.

강원권은 한국전쟁때 원산을 날려버린데다가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서 서울과 교통연계가 영 좋지 않았다.

호남은 정희왕이 보기엔 괜히 꼴보기 싫었다는 좌파의 뇌피셜이고,

하필이면 접경국이 공산진영 넘버 투인 짱깨에다가 대한민국 주요 무역국은 자유세계인 태평양권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문제,

그리고 조수간만차라는 지역특성 콜라보로 인해 선택이 어려웠다.

게다가 호남이 날라가면 곡창지대가 운지한다는 문제점도 있었다.

그래도 만약 중국남부가 원조 따거 중화민국이었다면 호남의 운명은 바뀌었을 지 모른다.


결국에 선택지는 딱 하나였다.

영남 하나 밖에 없었다.

충청도를 거론하자면 서해와 내륙 콜라보라 중화민국이 살아남았다는 이세계여도 호남에 밀릴 운명이었다.


영남에는 거대한 중공업단지가 설립되었고,

일자리가 늘어난 영향으로 베이비붐 세대 영남지역 인구유출은 농촌에 머물러있던 지역에 비해 크지 않았다.


영남을 제외한 전 지역의 대규모 인구유출은 수도권 중심화를 일궈냈다.

그 와중에 중국이 좋은 자본주의 받아들이자라며 문호 개방을 했지만,

런승만 시대부터 서울 경공업 메타로 인해 공업화를 이룬 인천이 존재하여 호남은 발전의 기회를 놓쳤다.

오히려 제조업조차 최대시장이 중국으로 변하면서 수도권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제조업조차 빨아들였고,

경기도 서비스업 성장으로 인해 공장은 충청도로 한 번 더 밀려나면서 충청도 또하 발전하게 된다.


누군가는 그런다.

정희왕이 수도 이전을 했으면 바뀌었을 거다.

아쉽지만,

정희왕이 계획한 수도이전은 건설까지 따지면 못해도 몇 십년이 걸릴 대계적인 사업이고,

대한민국 수도권중심이 마스터된 시기를 고려하면 꿈에 불과한 이야기다.

모든 것은 필연이었다.



2. 세대적 갈등

아까도 말했지만,

대한민국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정희왕이 등극하기 전까지 서울 및 부산을 제외하면 똥세권에 불과했다.

평범한 똥세권이었다면 별일 없겠지만,

문화적으로 유교권에 속했다는 게 대규모 세대갈등의 원인이 된다.

대한민국은 산업화 이전까지 농촌국가였고,

농업을 일구려면 당연히 남자 선호되는 남아선호현상이 일어난다.

이건 대한민국 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공통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극심한 남존여비 현상은 식민지 떄 본격적으로 가동된다.

사실 대한민국 이전 조선때만 해도 평민사이에 남존여비는 극심하지 않았다.

좀 더 생각해보면 평민사회에선 오히려 일제보다 조선시대때 여성의 진출이 좀 더 컸다.

농업이야 남자가 우세하지만,

같이 하는 식이었고 따지고 보면 맞벌이가 더 많았던 시대였다.

반대로 여성진출이 확연하게 막혀있는 사대부에선 남존여비 사상이 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식민지 시절 정책은 여성의 환경을 제한적으로 막아놨다.

그나마도 공부한 신식여성만 사회진출이 허락되었으나,

양반댁네 모던 걸 조차 좋지 않은 시선을 받았으니 일하는 여성이 썩 좋은 취급을 받은 건 아니었다.

일말의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평민여성은 그저 가정을 가꾸는 보모에 지나지 않았다.

가뜩이나 별로 먹지 못하던 시대에 여성이 중공업이나 석탄을 캐는 일은 만무했고,

서비스업조차 밀려나 가정만 바라보는 아낙네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몰락한 양반네들이 사대정신을 못버리니 극심한 남존여비 사상이 자리잡기 딱 좋은 시대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 국토가 황폐화가 되어버렸고,

사람은 가난에 찌든다.


이때,

사람은 선택한다.

아이들 중 공부 하나 잘 시켜 개천용 만드면 집안이 살 것이다.

정말 공부 잘하는 자식이었다면 다행이지만,

불행하게도 이는 모조리 첫째에게 돌아가고 만다.


시골 조차 비슷했다.

땅이 있어도 상속받는 이는 별 일이 없다면 첫째였고,

나머지는 각자도생을 준비해야했다.


이들은 서로 삶을 위해 일자리가 있던 서울로 향했다.

그에 비하여 서울 식자계층은 전개가 달랐다.

여자도 배워야한다며 여성의 학력이 끌어올려지고 있었다.

산업화 대한민국은 조선시대와 정 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울로 정착한 이들은 남존여비 그리고 장자상속문화를 가지고 가정을 꾸려나갔다.

그들도 자신의 부모님처럼 자식을 가르치려했지만,

소위 운동권이라 불리는 서울 식자계층은 구태된 문화에 대응했다.

더군다나 식자계층이 노동계까지 접근하면서 학력이 높아진 2차 베이비부머 세대나 X세대는 자신의 가정은 다르게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1차 베이비부머 세대?

소위 58개띠라 불린 이들은 오팔육보다 보수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벌새가 이야기하듯 90년대 초, 중반 학생들이 여전히 남자우위사회에서 처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제공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58개띠와 N86은 성질이 좀 다르다고 말했다.

찢재명 같이 눈물나는 초졸 개천용 스토리는 58개띠 쪽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N86즈음 가면 후반부엔 아무리 어려운 집이라도 자식들 고졸은 시키고 봤다.

58개띠는 세상이 너무 어려웠지만,

N86은 전후복구가 어느 정도 된 후에다가  

이는 어려워도 나처럼 배우지 못한 사람되지 말고 자식은 고등학교라도 끝내자라는 부모의 마음이었다.


다만, 고졸즈음 되면 소위 먹물 먹은 대학생과 꽤 접촉이 강해졌고,

붉은 물 쿨 돌기 시작한 대학생은 기존 기성 사상에 대하여 부정적인 설파를 한다.

장자상속과 남존여비에 대한 가정적인 PTSD.

서로 다른 배경에서 자란 세대가 한데 뒤엉킨 환장의 콜라보.

N86은 이에 대항하는 세대였다.

자유주의적 페미가 고개를 들었다.

N86의 일하는 여성은 "저를 믿어주세요! 나도 할 수 있어요!"라는 지금과 다른 존재였다.

그리고 동생인 X세대에게 그들은 멋진 신세대 여성이었다.

전후세대 자식인 X세댄 여전히 변질된 유교적 가정에서 자랐고,

이는 N86이 자리잡는 2000년대까지 여전했다.


"아니 90년대에 성차별이 있었어?"


90년대 중후반 중/고등학생은 82년생 김지영이 아니라 76년생 김지영이었고,

82년생 김지영도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가정내 차별을 겪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들은 마음 먹는다.

내 자식은 이렇게 키우지 않겠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역대급 젠더갈등에 시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