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서독, 일본, 미국, 프랑스, 영국까지 총 5개 국가의 경제수장이 플라자 호텔에서 모였다. 당시 1세계의 다섯 수장이 모인 플라자 호텔에서 역사적인 합의가 도출된다. 바로 그 유명한 플라자 합의다. 여기서 일본과 서독은 양보를 강요받았다.


1984년 엔화와 달러의 환율은 1달러당 240엔으로 엔안 정책 기조를 유지했다. 60년대부터 지속되었던 엔안 정책 덕분에 일본의 경제는 72년 독일의 GDP를 따라잡았고, 79년엔 1조 달러를 돌파하면서 불과 30년 전과 비교하면 몰라볼 정도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특히 일본은 1, 2차 오일 쇼크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기술에 적극적으로 투자했고, 이러한 신기술들이 적용된 제품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국제시장에 풀리자, 미국과 서유럽의 제조업들은 경쟁이 되지 않아 퇴출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경제침공이 시작된 셈이다. 


이러한 침공에 직접적으로 강타를 맞은 곳은 당연히 자동차 산업이었다. 미국의 자동차는 크고, 저연비인 탓에 오일쇼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은 고연비, 작은 차를 대량으로 생산했다. 미국의 자동차는 5년 만에 50%나 생산량이 감소했고, 빠르게 일본산 자동차들로 대체되었다. 자동차만 그런 것이 아니였다. 전자 산업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라디오, TV, 트랜지스터 등 핵심 산업도 미국은 일본산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부분은 미국의 경상수지와 재정의 적자로 이어졌다. 


폴 볼커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 그에게 인플레이션 파이터란 별명이 있다.


사실 이러한 미국 제조업의 몰락은 미국이 자기 손으로 이룬 것이나 다름 없다. 닉슨쇼크로 달러에 1차 충격이 가해졌고, 제 2차 오일쇼크로 유가가 급격하게 상승하면서 미국 달러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게 된다. 연방준비제도 의장이었던 G. 윌리엄 밀러는 제대로된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미국은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지미 카터 행정부는 급하게 이 불을 끄기 위해서 폴 볼커를 임명했다. 그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선 고금리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금리를 무려 20%까지 올리는 초강수를 두게 된다.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보다 2배를 올린 것이다. 이러한 초고금리 정책으로 미국으로 투자가 몰리게 되었다. 원금의 20% 수익을 보장한다는데 누가 투자를 안 하겠는가? 미국의 내수는 다시 골디락스 존으로 안착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반대로 미국의 외수 즉, 무역은 스태그플레이션 시절 이상으로 악화되었다. 달러가 고평가되자 미국의 상품들은 경쟁력을 잃었다. 더 쉽게 말하자면, 물건 값이 비싸진 것이다. 당연히 물건 값이 비싸지니 살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서독과 일본의 상품들이 고평가된 달러를 이용하여 저마르크 정책, 엔안 정책으로 미국 상품을 밀어냈다. 가격경쟁력을 얻으니 수익이 향상되고, 이러한 수익은 고스란히 기술과 품질에 재투자되었다. 미국의 제조업은 기술과 품질, 가격 모두 밀리면서 더이상 소비자들이 구매하지 않게 되었다. 수익이 악화되니 투자를 꺼려한다. 그럼 경쟁력은 더더욱 떨어진다. 전형적인 악순환이 온 것이다. 결국, 재정악화와 경상수지의 악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쌍둥이 적자가 발생한다. 

미국은 레이건 당선 이후부터 일본과 통상갈등을 겪었다. 81년에 대일 자동차 자율 규제를 시작으로 84년까지 다양한 갈등을 겪었다. 그런데 경상수지는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쌍둥이 적자를 두고볼 수만 없었던, 미국의 제조업 몰락을 막기 위해, 달러화 강세를 막기 위해 1985년 플라자 호텔로 5개 국가의 경제수장을 불러 모은다. 플라자 합의는 단 20분만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20년의 세계 경제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합의였다.

여담으로 제 2차 오일쇼크와 폴 볼커의 초고금리 정책은 개발도상국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다. 중남미와 동유럽, 그리고 소련이 대표적이다. 소련은 엄밀히 말하자면 제 2차 오일쇼크로 다시 부흥하나 싶었지만 초고금리 정책과 경제체제 개선 실패 등 여러가지 복합적인 문제가 겹치면서 80년 대 소련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985년 플라자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변화는 매우 갑작스럽게 이어졌다. 합의 이후 6주 동안 엔화는 14% 하락했으며 1달러당 240~250엔이었던 엔화는 200엔으로 조정되었다. 그런데 경상수지는 적자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미국은 87년 루브르 합의로 달러 기조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달러 가치는 계속 하락했다. 하지만, 덕분에 미국의 제조업은 다시 가격경쟁력을 얻었다.


(사진 확대 필수)

결국 일본의 엔화는 87년에 이르러 150엔까지 하락하게 되었으며 89년엔 아예 100엔까지 주저 앉게 되었다. 일본은 미국에게 시장을 개방했고 미국산 제품이 쏟아져왔다. 일본은 더이상 외부가 아닌 내부를 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수 진작을 위해 탄생한 것이 저금리, 규제 완화, 공공부분 활성화, 소비자금융 및 주택금융시장 활성화 등이었다. 

1970년부터 1980년까지 일본의 1인당 GDP는 7,500달러 성장했다. 하지만 1980년부터 1990년까지 일본의 1인당 GDP는 15,000달러나 성장했다. 그리고 다음 5년동안 20,000달러나 올라갔다. 1995년 일본의 1인당 GDP는 44,000달러까지 성장했다. 내수 진작의 측면에서 보면 완벽하게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전체 GDP도 1980년 대비 1995년에 5조 달러를 달성하면서 5배나 상승했다. 미국의 전체 GDP가 7조 달러였으니 진짜 거의 따라 잡은 셈이었다.

이는 실물경제에도 영향을 그대로 미쳤다. 1989년에 무려 FHD 방송이 실시되었으며, 온갖 명품이 일본으로 들어왔다. 이는 예술품도 마찬가지라서 지금도 수많은 예술품이 일본에 있어 관광하기 편하다. 역시 해외여행 급증으로 명품들이 일본인이 쓸어갔다.


하지만 이러한 대출 정책은 시행때부터 부작용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1988년 주택 공시가는 88%, 상업구역은 61%나 상승했다. 단 한 해동안 이루어진 가격 상승이었다. 89년에 조금 주춤하나 싶었더니 90년에 다시 급격한 상승 기미가 보이자 90년 8월, 그 이름도 유명한 대출총량규제가 이루어진다. 금리는 5번 연속 상승했다. 퍼센트지로 보면 2.5%에서 6%로 상승했다. 

1990년 연초부터 주식 시장에서 첫 신호탄이 터졌다. 90년에 4만 포인트에 근접했던 니케이 지수는 단 1년 만에 반토막이 나버렸다. 87년 검은 월요일 사태를 계기로 실물 경제가 안정적이었다는 점, 금융완화정책을 계속 실시한 탓에 금융긴축정책을 실시하지 못했다. 주식 시장이 먼저 난타를 당하자 부동산 시장도 대출총량규제와 더불어 징벌적 세재, 지가감시구역 신설 등 다양한 규제가 한꺼번에 쏟아지자 연쇄적으로 붕괴되었다. 자산가격의 몰락은 실물 경제에 당장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지만, 92년부터 점점 실물 경제에도 버블 붕괴라는 쓰나미가 몰아치고 있었다. 일본의 GDP는 1992년부터 94년까지 저성장에 빠졌다. 겨우 95~6년동안 복구하나 싶었더니 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해서 일본 경제는 영원히 복구하지 못하는 잃어버린 10년에 빠지게 된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아시아 금융위기 상황에서의 일본은 한국이 위험할 때 매몰차게 거절한 나쁜 놈으로 인식되지만 만 사실은 일본은 자신도 살아남을 수 없었으며, 마지막 어퍼컷을 날린 중요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버블 붕괴와 아시아 금융위기로 일본은 완전히 세계 경제의 주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세계 경제의 주축은 EU와 미국으로 다시 재편되었다. 여전히 일본산 상품은 좋은 물건이었지만 그 뿐이었다. 일본이 비실비실대는 동안 옆 나라인 한국과 중국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일본산 상품은 압도적으로 저렴한 중국 상품, 밸런스 있는 한국 제품으로 대체되어갔다. 특히 현대 산업의 꽃인 반도체는 완전히 상실했다. 2000년대 일본의 반도체들은 해외로 유출되었다. 유출된 인원, 기업들은 한국과 대만, 중국의 반도체 산업을 키워냈다. 일본은 완전히 반도체 주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불과 2000년대 기준으로 20년 전엔 반도체의 미래를 이끌었던 과거와 비교하면 처참했다.

그 뿐만 아니다. 일본은 소프트웨어에서도 완벽하게 밀렸다. 새천년 당시 일본은 IT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지했고, 이러한 격차는 2010년대에 본격적으로 두드러진다. 도장 문화가 여전히 이어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계의 변화는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고 있었지만 일본은 여기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결국 일본은 세계적으로 먹히는 소프트웨어 업체를 만들지 못 했다. 뒤늦게 소프트웨어 산업을 키우기 시작했지만 결국 한국처럼 관료주의적 정책으로 인해서 양만 많고, 질적으론 나아지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을 낳고 말았다.

2011년 중국이 일본의 총 GDP를 뛰어넘으면서 일본은 엄청난 충격을 받기도 했다. 이젠 구매력 기준 PPP는 한국에게 밀릴 정도로 역대급 저성장의 늪에 빠져있다.


사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전세계가 성장국면일 때는 확실하게 일본도 성장을 했다. 그리고 미국의 양적완화와 아베노믹스라는 극단적인 처방전 덕분에 일본 경제는 그래도 저성장이라도 할 수 있었다. 특히 2011년 이후로 제조업은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 엔안 정책으로 일본산 제품들이 다시 저렴해졌다. 얼어붙었던 내수는 잠시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한국은 3고불황으로 엄청나게 손해를 보고 있지만 일본은 그런 면에선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1인당 GDP도 35,000~40,000달러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2020년이 되면서 일본은 역대급으로 묵직한 펀치를 맞고 있다. 코로나-19의 등장이다. 아베노믹스는 결국 2020년을 기점으로 실패했다. 초기 방역의 실패로 경제 성장률이 엄청 깎였다. 최근에 감염자 수가 줄었다곤 하지만 언제 다시 늘어날 지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경제체질을 개선하고 새로운 경제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좋은 기회기도 하다. 과연 일본은 코로나-19를 기회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잃어버린 x0년이라는 별명을 유지하게 될 것인가?






이건 아무도 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