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몹 2004-05-17] 보도특집 : 이제는 말해보련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일본개입"

권력에 눈이 먼 소수에 의해 많은 그리고 무고한 희생자들이 발생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오늘 헤딩라인뉴스에서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특집보도를 전해드립니다. 헤딩라인 리포트 조민준 기자입니다.
 
[헤딩라인 보도특집 - 이제는 말해 보련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발단에) 일본이 개입했다!!]
 
1980년 5월 18일 우리는 그날을 여러 형태로 기억합니다.
 
신문으로, 뉴스로, 영화로 또 드라마로 보여지는 그날의 참상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신군부는 권력찬탈자들이 쿠데타로 찬탈한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5.18을 일으켰습니다.
 
살인 강도가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뒤 자신의 죄를 희생자에게 뒤집어 씌운 셈입니다.
분노한 민중들은 미군이 광주학살을 용인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대적인 반미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신군부가 5.18을 일으키는데 일본이 개입했다는 주장은 많은 분들에게 생소할 것입니다.
 
1979년 이란에서는 팔레비 왕조가 호메이니옹이 중심이 된 회교혁명에 의해 정권을 잃게 되고, 이란 혁명 세력들은 결국 미국대사관까지 공격하게 됩니다. 대사관까지 공격 받은 미국은 초긴장상태에 돌입하게 되고, 일본에 기항 해있던 미 해군 항공모함까지 이란 근해에 배치하는 등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일 각오로 총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2차 대전 이후, 국방의 대부분을 미국에 맡겨왔던 일본 정부로서는 이러한 상황 전개에 대단한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한국의 쿠데타 상황 역시 일본 정부의 위기감을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80년대 극동은 북한과 소련, 중국이 한국 일본과 대치하고 있던 냉전의 최전선이었습니다.
 
일본은 일단 신군부를 지원해서 한국을 안정화 시키는 것이 일본의 국익에 가장 도움이 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신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여 한국 전역을 장악한 다음 신군부가 차기 정권을 차지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북한까지 잠잠한 상황에서 신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할 만한 특별한 사건이 없었습니다. 결국 일본 정보기관인 내각조사실은 북한이 휴전선 부근으로 병력을 증강한다는 거짓 정보보고를 발표합니다.
 
세계의 그 어떤 정보기관도 발표하지 않고 오직 일본의 내각조사실만이 발표한 이 정보를 한국의 신군부는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계엄령을 선포합니다. 5월 광주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의 무고한 피로 정권을 잡아, 소위 체육관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국내외적으로 그 입지가 상당히 약했습니다.
 
그 때 제일먼저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해준 사람은 바로 일본 총리 나까소네 야스히로였습니다.
 
자신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방한한 나까소네 총리를 당시 대통령이였던 전두환은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폭력으로 권력을 잡은 대통령이라는 한계에 고심하던 전두환은 나까소네 총리로부터 앞으로의 정치행보에 대한 조언을 구합니다.
 
나까소네 총리가 제시한 해답은 바로 ‘올림픽 유치’였습니다. 올림픽이라는 국제적인 행사를 유치함으로써 국민들을 축제분위기로 몰아 갈수 있고, 사회 불순 세력들의 난동 역시 올림픽을 명분으로 국민들의 저항 없이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 나까소네 총리의 논리였던 것입니다.
 
결국 전두환은 8년간 대한민국의 제 11대 그리고 12대 대통령으로 집권하면서 수많은 인권탄압과 비리를 저지릅니다. 그리고 나까소네 일본총리는 한일 언론에 의해 한일우호증진에 힘쓴 정치인으로 포장되면서 지속적으로 한국 정치에 개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나까소네 총리는 정치인 자격으로는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인물이었습니다. 5.18은 일차적으로는 신군부의 집권야욕에 의해 일어난 비극이었지만 그 전개상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했습니다.
 
1980년대 미국과 일본같은 강대국의 우익정부들은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남미와 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군부의 독재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민주주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위선을 가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군부독재에 맞선 광주의 그날을 가슴으로 되새기는 동시에 위선에 가려진 당시의 복잡한 국제역학 관계에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