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노하우 통째 中에 넘기는 自害 산안법"

조선일보 
  • 최현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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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19.04.29 01:30

    기업이 쓰는 모든 화학물질 정보 제출하는 '산안법' 입법예고




    "삼성전자가 반도체 공정에 사용하는 화학물질이 뭔지 알면, 중국 업체들은 추격 속도를 10년에서 한 달로 줄일 수 있습니다."(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국내 기업이 사용하는 화학물질 정보를 의무적으로 정부에 제출토록 하는 규제 입법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반도체·정밀화학 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와 삼성전자 백혈병 사망 사태 등으로 환경 물질 관리를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기업의 기밀 정보까지 공개될 수 있다는 게 업계의 우려다. 경총 관계자는 28일 "정부가 추진하는 화학물질 규제를 기업이 대놓고 반대하지는 못하지만, '한국 산업 경쟁력을 갉아먹는 입법'이란 불만이 크다"며 "화학물질 정보 제출과 산업재해 관련 법규 강화에 대해 '자해 정부'란 말까지 나온다"고 했다.

    "반도체 굴기 나선 중국에 우리 핵심 기밀 넘어갈 것"

    고용노동부는 지난 22일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시행령·시행규칙 전부개정안을 입법예고했고, 환경부는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산안법 관련 조항은 2021년부터 시행된다.

    이들은 국내에서 제조했거나 수입한 모든 화학물질의 성분과 함유량을 정부에 제출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경총 관계자는 "연구·개발(R&D)에 쓰이는 물질 등 사용량에 관계없이 모든 물질을 제출토록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라며 "정보공개 청구 등을 통해 한국 기업들의 산업 기밀이 유출될 위험이 크다"고 했다.

    산안법과 화관법 개정안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삼성디스플레이, LG화학 등 '국가 대표' 기업들의 경쟁력에 타격을 줄 수 있다. 반도체 업체들은 웨이퍼 가공 등 핵심 공정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습득한 최적의 화학물질을 사용해 최고의 공정을 구현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비결도 어떤 화학물질을 어떤 배합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갈린다. 최근 한 경제단체가 주최한 간담회에선 화학물질 정보 제출을 의무화하는 입법 움직임에 대한 불만이 쏟아졌다. 한 업계 관계자는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내걸고 한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앞선 기술을 베끼려고 혈안인데 정부가 너무 안이하게 보고 있다"고 했다.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도 "핵심 화학물질 중엔 우리 기술로 만들 수 없어서 외국에서 수입하는 경우도 많다"며 "화학물질 제출이 의무화돼 외국 업체들에 '한국에 수출하는 화학물질의 성분명을 알려달라'고 하게 되면 이들은 아예 우리 기업에는 핵심 촉매 등을 판매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미 무역대표부(USTR)는 최근 발간한 '무역장벽보고서'에서 "한국 환경부가 추진 중인 화관법 개정안에 따라 화학물질 혼합물의 수입, 제조 시 전 성분이 공개될 경우 미국 기업의 영업 비밀을 보호받지 못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고용노동부와 환경부 관계자는 본지 통화에서 “기업들의 우려를 감안하고 전문가들의 충분한 의견 수렴을 거쳐 법안이 마련됐다”며 “우리 기업의 영업기밀이 유출될 우려는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상호 팀장은 “정부가 정보를 다 갖고 있게 되는데 아무리 비공개를 원칙으로 한다 해도 화학물질 관련 사고 등이 발생하면 민감한 물질정보가 일반에게 공개될 위험이 크다”고 말했다.

    산업계에선 “산안법도 버거운데 환경부마저 같은 권한을 갖게 되면 영업기밀 유출 통로가 훨씬 넓어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협회 상무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화학물질 관리법들이 시행되면, 정부의 의도와 달리 산업기밀이 유출될 위험은 매우 커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상법, 공정거래법 개정안도 기업 옥좨

    정부·여당은 화학물질 관련 법규 외에도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 등 기업활동을 옥죄는 규제 법안들을 줄줄이 입법 추진 중이다. 상법 개정안은 감사위원 분리 선출, 집중투표제 의무화,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등 경영권을 흔들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감사위원 분리선임제는 감사위원을 뽑을 때 대주주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제도이고, 집중투표제는 주총에서 두 명 이상 이사를 선임할 때 주식 1주마다 선임할 총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준 뒤, 이를 특정 후보에게 몰아줄 수 있게 한 제도다.

    다중대표소송제란 모(母)회사 주주가 불법행위를 한 자(子)회사·손자회사 임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그동안 공정위만 행사하던 고발권을 검찰에까지 확대하는 안을 포함해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 확대, 기업집단 순환출자 의결권 제한 등 강력한 규제들이 포함돼 있다.

    한 대기업 고위 관계자는 “검찰이 공정거래법 위반 사안에 대해 수사하다 혐의 입증이 어려우면 저인망식으로 기업의 문제점을 훑는 별건(別件) 수사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