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보도했을까?


르몽드를 유료 구독하면 1944년부터 현재까지 게재된 모든 기사를 읽을 수 있다. 덕분에 한국전쟁 관련 기사도 쭉 볼 수 있었는데, 흥미롭게도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의 보도양상과 무척 유사하다. 처음 전쟁이 발발했을 때의 충격이 고스란히 나타나며, 전쟁이 계속되면서 수시로 바뀌는 전황의 양상도 자세히 보도하고 있고 또 한국전쟁의 파장과 교훈 관련 유명인사들이 기고한 칼럼도 있다. 


전쟁 발발 직후 유럽의 분위기는 충격과 공포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럽은 한국전쟁을 들어보지도 못한 극동의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유럽에서도 당장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보았다. 스탈린과 소련의 의도가 무엇인지, 유럽에서도 도발을 할 것인지 등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으며 미국이 한국(남한)을 지원하기 시작하자 미국의 관심이 유럽에서 멀어질까봐 노심초사했다. 


요즘 중국을 냅두고 우크라이나와 동유럽에 대한 지원을 부쩍 늘리는 것을 비판하는 미국 쪽 전문가들이 많은 것처럼, 당시 유럽에서는 미국이 한국처럼 멀리 떨어져있는 나라를 지원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유럽인들은 특히 1948년 베를린 봉쇄의 기억이 생생했던 만큼 북한의 남한 침공이 일종의 미끼이며 진짜 무대는 다시 유럽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서독의 재무장(나아가 유럽전체의 재무장), 유럽의 통합, 나토의 구체화 등이 속속 진행되었는데 각 사안을 다룬 당대 언론기사에서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이 일종의 배경음악처럼 계속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한편 딘 애치슨은 한국전쟁을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 나아가 서구의 운명이 달린 전쟁이라고 계속 선전했으며 영국의 앤서니 이든 또한 르몽드에 별도의 기고문을 게재하면서 같은 맥락의 주장을 이어나갔다. 요컨대 미국과 영국은 한국의 운명이 유럽과 무관하지 않으며 유럽이 한국전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한국을 지원하려고 했던 나라는 많지 않았다. 프랑스는 물론 영국도 처음에는 최소한의 지원만 하려고 했다. 프랑스는 애초에 전투인원을 파병할 생각이 없었으며, 영국도 해군지원만 하려고 했다. 그런데 전황이 계속 악화되고 미국 측의 피해가 가중되는 상황에 다다르자 영국과 프랑스는 실제로 피를 흘리는 일을 감수해야만 했다. 미국은 유럽의 실질적인 지원을 강력히 요구했고, 또 유럽도 미국의 힘이 약화되면 유럽의 방위공약이 흔들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예컨대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베트남 등)를 한국전쟁과 연계시키면서, 프랑스가 싸우는 것은 베트남 민족운동이 아닌 공산주의라고 설파했다. 1950~53년 인도차이나 관련 각종 언론보도에서 한국전쟁이 등장하며 프랑스가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이유는 인도차이나 때문이며, 마찬가지로 인도차이나에서 싸우는 이유는 한국에서와 같이 자유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선전했다. 


1950년말~1951년 초 전황이 극도로 악화되자 르몽드에서는 한국을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기사들이 올라온다. 또 전쟁으로 인해 각종 원자재 가격도 오르고 있다는 기사도 등장하는데, 왠지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보도를 보는 거 같은 느낌을 받는다. 


다른 한편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 중공군을 교전국, 침략국으로 규정할 것인가를 두고 동맹국들 간에 의견이 분분했다. 중국을 제재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는데, 이것도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과 유사한 느낌이 있다. 


특히 영국은 중국이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계속 감싸고 돌았는데, 그 배경에는 홍콩의 이권이 있었다. 1951년 4월 11일 르몽드에 <홍콩의 영국인들은 중국보다 미국의 대중국 경제제재를 더 무서워한다>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을 정도다. 중국의 참전과 이에 대한 대응 관련 영국과 미국은 무려 1년 가까이 갈등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유세계를 지탱하는 두 축이었던 미국과 영국이 중국을 두고 갈등하는 것을 보는 한국인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리고 전쟁 기간 내내 핵무기를 사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지양해야 하는가를 두고도 계속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관련해서 수많은 기사가 작성되었는데 특히 전황이 어려워질 때마다 미국 의회 안에서는 핵무기 사용을 거론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전선이 상대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지자 르몽드는 소련 측 관계자, 중국 측 관계자(주로 주은래), 그리고 미국 측 관계자의 인터뷰 내지 협상내용 등을 보도했는데 언론기사만 차분히 따라가도 주요 쟁점을 파악할 수 있다. 


1953년 4월에 이르면 휴전협상이 거의 마무리 되기 시작하는데 관련 뉴스기사는 꽤나 낙관적이고 안도의 분위기이다. 기나긴 전쟁이 드디어 끝나고 있다는 안도감일까?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날 때에도 비슷한 논조의 기사가 여럿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이가 이승만이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을 감행했다. 앞서 중국과 북한은 연합국이 제시한 휴전 합의문을 받아들였는데, 이승만이 이를 훼방놓은 것이다. 르몽드는 당시 처칠의 반응을 생생하게 보도했는데, 처칠은 이승만을 "Traitor" 배신자라고 힐난했다. 서방국가들은 어렵게 성사된 휴전이 수포로 돌아갈 것을 우려했다. 


그런데 반대로 르몽드는 <내가 이승만 입장이었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필리핀 대통령의 발언도 인용했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양자 안보협정, bilateral security agreement>를 약속했지만 그 내용은 모호했다. 미국은 한국에서 다시 전쟁이 발발하면 이를 국제위기(international crisis)로 규정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했으나 이는 미국의 자동참전을 보장하는 구속력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이 바랐던 것은 <확실하고 구속력이 있는 동맹조약>이었다. 


르몽드의 한 기사는 당시 미국의 초조한 입장을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으로 표현했다. 


<미국은 이제 이승만을 설득하거나 기도하는 일밖에 할 수 없다>

르몽드 1953.6.27


결과적으로 이승만은 원하는 것을 얻었으며, 휴전은 성사됐다. 


한편 르몽드는 이승만을 독재자라고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서방국가들보다 더한 고단수 체스플레이어라고 평가하면서, 좋으나 싫으나 이승만과 같이 갈 수밖에 없다는 논설을 실었다. 


그밖에도 휴전 불과 일주일 만에 르몽드는 다음과 같은 논설을 실었다.


<한국전쟁 없이 미국은 군사를 재정비할 수 없었을 것이며, 일본과 독일의 재무장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나토는 실체가 있는 정치군사 조직이 아닌 종잇조각에 불과했을 것이다. 공산군의 침략은 소련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으며 미국은 이를 십분 활용할 수 있었다. 어쩌면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도 한국전쟁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르몽드 1953.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