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는 거대한 허상이다.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대한민국 과거사, 특히 근대사는 결코 바로 잡을 수 없다. 역사를 살아간, 그리고 따뜻한 피를 가진 사람들의 구체적 삶을 배제한 채 괴이한 허구의 이론으로 위안부라는 관념의 박제를 만들어 그녀들을 납치당해 강간이나 당하다 돌아온 성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사악한 시도들이 도처에서 자라나고 있고 또 성공하고 있는 현실이 무서워진다.


그녀들은 기생의 딸, 가난한 소작농의 딸, 첩의 딸, 노비의 딸, 영락한 농촌 소농의 딸들이었다. 이중 삼중으로 차폐된 업압적 봉건 사회 속에서 오로지 착쥐만 당하며 살아왔던 밑바닥 인생들이었던 것이다. 그녀들에게 희망이라고는 존재할 수 없었고 부모에게는 짐이 되었고 그녀들은 어디든 벗어나 나 자신의 입 하나라도 덜어주어야 했던,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면 지옥 끝이라도 찾아 떠날 작정이었던 그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이었다. 심청이도 그런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의 하나일 뿐이다. 소설이야 심청이 하나 죽여버리면 그만일 뿐이었지만 우리의 위안부 누나들은 끈질기게 삶을 이어갔다.


그런 구체적 삶의 조건은 도외시한 채 일제 관헌에 의해 총칼의 위협을 받아, 위안부로 끌려갔고, 댓가도 못받고, 거친 군 부대 수용소에서, 강간이나 당하다 왔다는 악마의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데 그들은 성공하고 있다. 간단한 질문조차 스스로 해내지 못하는 바보들에게 위안부는 너무도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 되어 기어이는 일본을 용서할 수 없다는 굳은 결심이 번져가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사악한 자들은 그들을 이용한다. 보수진영에도 위안부 문제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희생으로 부모에게 논밭을 사다주었고, 남자형제들를 대처에 나가 공부할 수있도록 해주었고, 돌아와서는 억측스런 이 땅의 여인들이 되어 각자의 삶을 개척해 나갔다. 나는 위안부를 생각할 때마다 억측스런 한국의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고, 가난한 농촌의 억압받는 계급을 생각하게 되고, 전쟁터에까지 진출해 자신의 삶을 열어나갔던 불굴의 여인들의 억측스런 삶에의 의지같은 것을 깊은 이해와 존경심으로 느끼게 된다.


그녀들은 가난하고 더구나 식민지였던 나라에 태어나, 그리고 더 가난하고 재산이라고는 땅 한뙤기 없었던 무능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을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녀들은 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개척해 나갔다. 나는 우리들 모두의 누님들일 수밖에 없는, 그리고 버거웠던 그녀들에의 구체적 삶들에 경외심을 갖는다. 제발 그녀들을 가공의 공간 속에 미이라처럼 차폐시키지 말아달라. 그 누이들을 역사속 강간센터로 몰아넣는 사악한 자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