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랜만에 부대 마크가 찍힌 편지를 받았다.


비상하는 흰머리수리가 번개를 낚아채는 엠블럼…, 우리 공군 예하 17항공사단 전우회의 인장이었다. 


전쟁 내내 본토의 방공임무를 담당하던 2선급 부대였지만, 본토 항공전이 1년 넘게 이어지고 종전시기까지 등화관제가 실시됐던 걸 생각하면 그들의 공로는 절대 작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런 17항공사단에서 복무한 분에게 편지를 다 받다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시간 나신다면 언제 한 번 놀러 오세요.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칠게 휘갈겨 쓴 필체가 인상적인 편지였다.


발송란에 적혀있던 이름은 한나 카친스키 예비역 대위.


편지에 적힌 주소가 같은 카운티인 걸 생각하면, 운 좋게도 대위님은 현재 이 지역에서 거주 중인 것 같았다.


마침 이번 주 토요일도 맥주병이나 빨면서 철지난 드라마 시청 따위로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는데,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


나로선 처음맡게 되는 항공부대 출신 참전자의 인터뷰였으니 말이다. 


늦털매미 울던 초가을의 일이었다.




2.


유난히 기다림이 길었던 이번 주말은 선선하면서도 화창한, 외출하기에 더할나위 없는 날씨였다. 


배터리 충전을 끝낸 캠코더를 챙기고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으니, 오렌지 향이 섞인 상쾌한 바람이 코 끝을 스쳐 지나갔다.


그 향기는 대위님의 집이 가까워질수록 짙어져 갔고, 얼마 안 가 빽빽하게 심어진 오렌지 나무들 사이로 허름한 오두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카친스키·레드필드 오렌지 농원'


그리고 그 오두막으로 이어지는 길의 시작점엔 어디서 본 듯한 이름이 적힌 농장의 팻말이 서 있었다.


그건 편지의 뒷면에 나열됐던 우리 카운티 출신 17항공사단 전우회 회원들의 이름들 중 일부였다.


한나 카친스키 대위와 리네트 레드필드 소위.


보통이라면 대위와 소위는 이렇게 나란히 적혀있을 계급이 아니었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건 이 바닥에서 눈칫밥 좀 얻어먹은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꽤 일찍 왔네, 젊은이. 아침 잠이 적은 편인가?"


뒤에서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작업복 차림을 한 초로의 여인이 오렌지 바구니를 든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고대하던 일이라 좀 부지런히 움직여 봤습니다."

"그래. 오늘은 잘 부탁하지."


어색한 인사를 건네는 내게 먼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여인의 모습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훤칠하고 당당한 풍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 손을 맞잡으며 악수를 받아들이자, 카친스키 대위님은 장난스레 손아귀에 힘을 한 번 쥐었는데 나이에 걸맞지 않은 악력이 인상적이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일단 안으로 들지."


털털한 태도로 먼저 오두막의 문을 열어젖힌 대위님은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안으로 들어섰고, 그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니 바로 정면에 걸려있는 커다란 액자가 눈에 띄었다.


낯익은 항공기를 가운데에 두고 비행복 차림의 장교 수십명이 3열로 서 있는 흑백사진.


그 중에는 젊었을 적의 대위님을 연상케 하는 앳된 인상의 소녀도 서 있었다.


"왜, 누군지 못 알아보겠나?"

"그런 거 아닙니다. 그저…"

"그저 뭐?"

"대위님께서 오렌지 농장을 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자기 딴에는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고 여겼겠지만, 나도 여성을 상대로 나이나 외모를 가지고 말하는 게 실례라는 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런 부분보단 전쟁 영웅에 군인 연금도 넉넉하게 받고 있을 사람이, 농사 같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을 하는 이유가 더 궁금했다.


"내 친구가 전역 후엔 오렌지 농장을 하고 싶어했었거든."


나의 물음에 창밖을 바라보며 그리 답한 대위님은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처음 농장에 들어오면서 봤던 팻말과 편지에 적혀있던 이름을 생각하니, 지금껏 속으로 하고 있던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걸 여쭤봤네요."

"아냐. 그런 거로 불편해 할 거면 애초에 편지도 안 보냈겠지."


여전히 어딘지 모르게 아련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대위님은 액자 아래에 걸린 낡은 항공 점퍼의 이름표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죽이 갈라진 오래된 항공 점퍼만큼이나 세월의 풍파를 정면에서 맞이했을 연장자의 모습에선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나라가 종전을 맞이한 지도 50년. 


부모님 세대를 넘어 완전히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린 그 전쟁을 정면에서 목도했던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나로선 매번 인터뷰에 나갈 때마다 고민하게 되는 문제였다. 


"그게 아마, 개전하고 1년차 쯤 됐을 무렵의 일이었을 거야." 


그런 상념에 잠겨있는 것도 잠시, 갑작스레 이야기를 시작한 대위님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동공에 비쳤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당시의 본토 항공전은 책에 적힌 활자 너머로도 그 처절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격렬한 전투였다.


하물며 그 때 그 일을 직접 몸으로 겪었을 당사자라면 그걸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몸서리 칠 만한 일이었겠지.


그러니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조용히 대위님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겠지. 




3.


4042년, 7월. 토르니아 주 노르드 카운티, 공군  제17 항공사단 172 전투기 연대 3대대 주둔지


유스토니아와의 전쟁이 발발한 지도 어언 1년이 넘는 기간이 지났다.


전쟁 초반의 열전도 잠시, 국운을 건 철퇴전이 끝나고 긴 소강상태가 이어지는 상황이었지만, 그런 시간을 벌기 위해 하늘과 바다에선 여전히 촌각을 다투는 전투가 계속됐다.


수백, 수천리터의 피를 흘려야만이 주어지는 잠시 동안의 말미. 


그 시간벌이의 수단에는 친구들과 함께 고등학교 재학 중 징집되어 16주 간의 훈련을 마친 뒤 조종사관으로 임관된 한나 카친스키 소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위! 한나 카친스키 외 21명은 금일 부로 172 전투기 연대 3대대로 전입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부대 열중쉬어."

"열중~! 쉬어!"


전입오는 신임 장교들과 하사관, 병을 대표하여 우렁찬 목소리로 전입신고를 마친 한나는 대대장의 구령에 복명복창하고, 등 뒤로 양 손을 교차하여 자세를 바꾸었다.


서른 둘 젊은 나이에 대대장 직무를 수행 중인 3대대의 마일즈 중령은 눈앞의 젊은이들을 쓱 둘러보곤 '각자 본분에 맞는 직무 수행에 최선을 다하라.'는 짧은 훈시를 끝으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전쟁 중인만큼 조금의 시간도 허투로 쓰고 싶지 않은 발상에서 나온 태도였지만, 한나를 포함한 병사들에겐 이렇게 짧은 신고식이 익숙하지 않을 따름이었다.


"자자, 전입신고 끝났으면 조종사관들은 이쪽으로 모여!"


그러나 그 잠깐의 여유를 만끽하는 것도 잠시, 대대장이 단상에서 내려가기가 무섭게 그 아래에 서 있던 선임 장교로 보이는 중위 계급의 여성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늘 3대대로 전입온 조종사관은 두 명.


한나와 그녀의 동기생인 리네트 소위였다.


자신을 부르는 걸 자각한 둘은 곧바로 선임 장교가 서 있는 자리로 향했고, 그건 둘 뿐만이 아니라 각자 계급과 직별에 맞는 선임자들이 인솔을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방공, 헌병, 무장, 정비, 관제…, 전입온 인원만큼이나 다양한 보직의 인원들이 제 자리를 찾아갔고, 한나와 리네트도 선임 장교의 인솔에 따라 격납고로 향했다. 


"둘 다, 고등훈련은 뭐로 받았어?"

"T-16고등훈련기로 받았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네."


한나보다 조금 더 빨랐던 리네트의 대답에 선임 장교는 그나마 안심이라는 듯 작게 읊조렸다.


둘 모두 그녀가 그리 답한 이유가 궁금했으나, 그 궁금증은 머지 않아 풀릴 수 있었다.


"F-37…."

"아마 얘가 너희보다 더 나이 많을걸?"

"그거 듣던 중 안 반가운 얘기네요."

"사실 나도 그래."


양쪽 모두 웃자고 한 말이었겠지만, 사실 전혀 웃기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막 복엽기에서 벗어난 투박한 설계와 캔버스 천과 목재 구조물을 섞은 동체, 시야가 나쁜 새장형 캐노피까지. 


이미 한 세대 뒤쳐져 물자를 공여해준 우방국에선 지상공격기로 돌려지고 그나마도 퇴역 중인 상황인데, 이곳에선 2선급이라곤 하나 여전히 제공전투기로 쓰이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나마 위안거리 삼을 수 있는건, 본래 같은 설계였던 T-16고등훈련기와 조종특성이 같아 신임 조종장교들도 쉽게 적응할 수 있다는 것 정도일까.


"아, 다음 주 까지는 실전 투입 없이 훈련 비행만 할 거니까 너무 긴장 안 해도 돼."

""예! 알겠습니다!""

"너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

""…아닙니다!""


당장은 실전 투입이 없을 거라는 말에 무심코 긴장을 풀어버린 둘을 지적하며, 장난스레 웃어 보인 선임 장교는 농담이라는 말과 함께 한나와 리네트의 등짝을 두드렸다.


이에 어색하게 웃는 둘이었으나, 그 지적대로 적어도 보름 동안은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을 연마할 수 있다는 사실은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감사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다른 일선급 부대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정유소가 가까워 항공유 수급이 용이하고 사단의 작계부터가 제공권 장악보단 지역 내 다른 항공사단을 지원하는 것이었던만큼, 상대적으로 초임 장교의 기량 향상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보름 간 이어진 건 주말과 공휴일을 가리지 않는 맹훈련의 연속.


식사 시간과 취침 시간 외엔 좁은 조종석에 몸을 우겨 넣은 채 하늘로 날아올라 다방면에서 가해지는 중력가속도를 견뎌야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당분간 죽을 일은 없겠다며 안도했던 것도 처음 며칠이었지, 조종장교 후보생 시절 받았던 비행 훈련과는 궤를 달리 하는 매일이 이어지자, 한나와 리네트로선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있지, 한나. 넌 왜 조종장교를 지원했어?"


그런 바쁜 나날 중, 어느 날은 취침 전 개인정비 시간에 둘 사이에서 굉장히 원론적인 화제가 올랐다. 


입대는 물론 전입 동기였던만큼 둘은 같은 숙소를 사용하고 있었고, 바쁜 일과 때문에 한동안은 이런 얘기를 주고 받을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큰오빠의 꿈이었거든." 

"아…."


쓴웃음을 지은 채 그리 대답한 한나의 모습에 리네트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었다.


며칠 전, 보병 중대장이었던 한나의 큰오빠가 토르니아 산맥 357 고지 전투 중 전사했다는 통보를 받았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지금과 같이 애써 쓴웃음을 지은 채로 일과를 이어나가던 한나였지만, 리네트 입장에선 본의 아니게 친구의 아픈 곳을 건드린 게 됐다. 


"전쟁 끝나면 같이 비행기로 대륙횡단 하기로 약속했었는데, 그 바보가 먼저 약속 어긴 거지."


바보라고 큰오빠를 지칭한 것과는 달리, 우수에 젖은 한나의 눈가는 이미 언제 눈물이 흘러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너는 조종장교에 지원한 이유, 있어?"

"아, 나는…."


하지만 한나는 리네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싹싹한 성격이었고, 눈물을 흘리기 전, 애써 고개를 쳐든 채로 질문을 그녀에게 돌렸다.


"난 말야, 오렌지 농장을 차리고 싶어서 지원했어."

"그게 조종장교하고 무슨 상관인데."

"일단 끝까지 들어봐!"


진지하게 그지 없는 얼굴로 한 말 치고는 조금 주제에서 벗어난 것 같아 딴지를 건 한나였지만, 두 팔을 흔들어가며 자신의 말에 집중해 달라는 리네트의 모습은 전형적인 꿈 많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내 계획은 말이지, 오렌지 나무를 한 5천 그루 정도 심은 농장을 만드는 거야." 

"그렇게 큰 농장이면 비료하고 농약 치는 것도 일이겠…, 잠깐, 그럼 설마."

"정답! 지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 설마야."


뭐가 그리 좋은지 배시시 웃어보인 리네트는 그대로 침대에 누운 채로 말을 이어갔다.


"아아,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이 전쟁."

"근데 왜 하필 오렌지야?"

"오렌지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잖아."


전혀 근거도 설득력도 없는 그 말에 한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었지만, 친구의 이 잘못된 상식을 고쳐주겠다는 일념으로 애써 입을 열었다.


"그랬었나? 분명 오렌지 꽃말이-"

"아무튼 오렌지는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구!"

"지금 안자고 뭐하냐."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이 대화는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선임 장교, 앤슨 중위의 방문에 의해 끝을 맞이했다.


아니, 굳이 그녀가 아니어도 방음이 안되는 숙소 바깥으로 울려퍼지던 소음은 이미 임계치를 넘고 있었으니, 참으로 적절한 대처라고 할 수 있었다.


"내일 아침부터 기동훈련 있으니까 빨리 자고, 준비 잘 해서 나와."

""알겠습니다!""


다음 날의 일정을 고지한 선임 장교는 둘의 대답을 듣는 대로 발걸음을 돌렸고, 그렇게 또 야전에서의 하루가 지나갔다.




4. 


편대장인 루브너 대위가 주도하는 기동 훈련은 실전과 같은 상황을 상정하길 좋아하는 그녀의 특성상, 연료와 탄약을 만재한 사태에서 진행되어 왔다.


그건 오늘도 다를 게 없었고, 위와 같은 부수적인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훈련 자체가 편대원 전원이 이륙한 상태에서 합을 맞추는 중요한 훈련인 터라 둘은 항상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기체 점검 시작하겠습니다."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그 훈련의 시작을 알리듯 상병 계급의 정비병이 막 전투기 앞에 선 한나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기종은 당연히 지난 보름 동안 몰았던 드와이트 사(社)의 F-37. 그것도 주익 양쪽으로 2쌍의 기총 총신이 돌출된 중기관총 탑재 모델이었다. 


정비병이 랜딩 기어에 끼워뒀던 고임목을 치우는 동안 한나는 전투기의 시동을 걸었고, 계기판을 통해 연료와 탄약 잔량을 확인한 뒤 본격적인 기체 점검에 나섰다.


플랩과 러더, 엘리베이터 작동 여부 확인, 엔진 온도 체크 및 믹스쳐값 수정, 매니폴드 압력 확인, 프롭피치 조정 순으로 진행하고,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한나는 정비병의 안내에 따라 격납고에서 주 활주로로 기체를 이동시켰다.


이미 활주로에는 선임 장교와 리네트의 전투기가 앞서서 이륙을 준비 중이었으며, 자신의 앞으로는 동체에 편대장임을 의미하는 노란색의 사선이 그어진 전투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패로우 B1, 통신 확인, 각 편대원 회신 바람."]


이윽고 헬맷의 헤드셋 너머로 잡음 섞엔 편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한나는 무전기의 주파수를 조정하며 자신의 회신 순서를 기다렸다.


["스패로우 B4, 이상 없음."]

["전 편대원 이상 없음, 고도 3000, 포메이션 핑거 팁."]


편대 선임 장교와 리네트의 뒤를 이어 한나가 답신하자, 편대장은 지체 없이 다음 지시를 내렸다.


전형적인 편대비행 대형에 먼저 이륙한 선임 장교와 리네트가 좌익을 형성했고, 한나도 막 이륙한 편대장을 따라 스로틀을 밀어 가속하자 머지 않아 온 몸에 부하가 걸리며 익숙한 부유감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대로 랜딩기어를 수납하고 편대장이 지시한 대형을 이루기 위해 그녀의 뒤를 쫓다 보니, 어느새 비행장 주변의 풍경이 멀어지는 것이 한나의 동공에 비쳤다.


활주로를 떠나 지상에서 멀어지는 것은 지난 훈련에서 이미 수도 없이 봐온 광경이었으나, 이제 겨우 열 일곱살 먹은 한나에겐 볼 때마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풍경이기도 했다.


["스패로우 B2, B4 연료량 확인 바람."]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것도 잠시, 편대원 전체가 지정된 고도 3000미터를 확보하는 대로 편대장은 자신과 리네트를 향해 연료 잔량을 확인할 것을 지시했다.


선임 장교야 이미 짬을 먹을 대로 먹은 터라 신경쓰지 않아도 될 사항이었지만, 편대장 입장에선 비행시간이 이미 100시간도 더 됐다고는 하나 신입 딱지를 떼지 못한 한나와 리네트가 신경쓰일 수 밖에 없었다.



["스패로우 B2, 425리터."]

["스패로우 B4, 430리터."] 

["스패로우 B1, 전 편대원 코스 D, 공중전, 31번 매트릭스"]


연료 잔량 확인이 끝나는 대로 편대장이 지시한 것은 지난 보름 간 해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기동 전 도상훈련에서 가르쳤던 내용을 바탕으로 한 모의전이었다.


코스 D라 함은 비행장 북쪽으로 뻗어 있는 항로를 의미했으며, 31번 매트릭스는 2인 편대를 기준으로 한 일격이탈 전투를 뜻했다. 


편대장인 루브너 대위는 이 신출내기 조종사들에게 개인의 기량을 많이 타는 근접격투전보단 기체가 감당할 수 있는 고속영역에서 한 순간 공격을 가하고 빠져나가는 비교적 안전한 전술을 가르쳐 왔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 한나와 리네트는 능숙하게 스로틀을 최대한 밀어올리고 주익의 러더를 들어 고도를 확보했다.


["스패로우 B4, 1시 방향 적기 포착, 표적 확인했는지."]

["스패로우 B2, 표적 확인. 진입하겠다."]


지정된 고도 6000미터를 확보하는 대로 다음 행동에 나선 한나는 매트릭스의 시나리오 대로 우하방 3000미터 거리에 위치한 선임 장교의 3번기를 임의의 표적으로 지정했고, 선도기 역할을 맡은 리네트가 선공에 나섰다.


'씨우웅-!'


리네트의 2번기가 엘리베이터와 러더를 틀어 1시 방향으로 파고들자, 캐노피 너머로 대기를 찢는 소리가 흘러들어와 한나의 귓전을 때렸다.


그대로 3번기의 후방을 잡는가 싶었지만, 그 잠깐 사이에 선임 장교는 주익의 플랩을 들어 에어 브레이크를 펼치고 선회를 해 2번기의 6시 방향을 확보했다.


["이런 씨-"]

["스패로우 B2, 아웃."]


분을 삭히지 못한 리네트가 미처 욕지거리를 다 내뱉기도 전에 편대장의 격추 판정이 이어졌다.


실탄을 만재하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모의전인 만큼 격추 판정은 상대의 후방을 3초 이상 잡을 경우 주어졌는데, 리네트로선 고도와 속도가 우위인 상황에서 먼저 뒤를 잡았음에도 역으로 당했다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선임 장교가 구사한 임멜만 턴은 아주 기본적인 전술기동이었지만, 그것을 방금과 같이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은 또 조종사 개개인의 기량에 따른 문제였다. 


["스패로우 B4, 사격. 사격. 사격."]

["스패로우 B3, 아웃."]


물론 그러는 동안 가만히 있을 한나가 아니었고, 그대로 3번기의 뒤를 향해 급강하 하며 따라붙어 어렵지 않게 격추 판정을 따냈다.


편대 단위 전투라는 것 자체가 상기한 기량 차이를 상호 간의 유기적인 협동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었기에, 한나가 보인 행동은 지극히 교과서적인 대응이었다.


그런만큼 선임 장교도 편대장의 격추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매트릭스 종료 후 핑거 팁 포메이션으로 돌아온 한나는 건너편의 리네트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한나의 반응이 조금 더 빨랐더라면 선임 장교에서 격추 스코어를 내주지 않고 이길 수 있었겠지만, 아무 말 없이 엄지를 치켜세우는 리네트의 모습에선 그런 좀스런 분석에 입각한 섭섭함이 옅보이진 않았다.


["스패로우 B1, 탱고 폭스트롯에서 임무 하달. 현 시간 부로 블루 라인 서포트. 확인 했는지."]


그렇게 막 비행 대형을 재편하고 지정된 항로에 오른 찰나, 헤드셋 너머로 전혀 반갑지 않은 소식이 전혀재 왔다.


관제소와 통신이 가능한 무전기가 탑재된 기체는 편대장이 유일했기에 이상할 건 없는 통신이었으나, 이륙 당시만 해도 별 일 없을거라던 관제소의 예상은 보기 좋기 빗나간 셈이었다.


블루 라인이라 함은 공군의 영공 방어 구분선 중 3번째에 해당하는 단계로, 이를 지원하라는 건 17항공사단 작계에 명시된 사항, 사실상의 교전을 의미했다. 


[스패로우 B2, 확인."]

[스패로우 B4, 확인."]


그걸 이해한 한나는 편대장의 임무내용  확인에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억눌러가며 답했고, 그런 반응은 리네트도 크게 다를 것 없었다.


["B1, B2가 알파 섹션,  B3, B4는 베이커 섹션. 파악 했는지."]

["B3, OK."]


반면 편대장과 선임 장교는 지금의 상황이 이골이 났다는 듯, 심드렁한 목소리로 지시사항을 주고받았다.


이 전쟁이 시작되고, 그녀들이 얼마나 많은 이들과 하늘에서 작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한나에겐 그저 베테랑들의 여유로 비추어질 뿐이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2선급 부대라지만 작계부터가 아군 지원에 주력하는 부대라면 이미 비행중인 편대 외에도 그들이 속한 비행대대 내지는 연대 차원에서 스크램블이 걸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대장의 무전기는 그녀가 지휘하는 스패로우 B 플라이트 인원들이 공격을 위한 고도 6000미터를 확보할 때까지 침묵하기만 할 뿐이었다.


["스패로우 B3, 현재 탱고 폭스트롯에서 추가 지시사항 있었는지."]

["스패로우 B1, 없다고 알림."]


결국 보다못한 선임 장교가 편대장을 채근해 봐도 돌아오는 소식은 없었고, 이것이 의미하는 건 둘 중 하나였다.


아군 관제소 측에서 이번 접촉을 단순한 적 잔류세력 요격으로 보고 있거나, 그들이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전자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후자일 경우 상황에 따라 편대 전체가 궤멸을 각오하고 전투에 나서도 시간벌이조차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스패로우 B4, 북북서 기준 우하방 2시 방향! 적 항공집단 발견!"]


그리고 다음 순간, 한나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듯 몇 번이나 깜빡인 후에야 두 눈을 동그렇게 뜨고 다급한 말투로 그리 보고했다.


불안한 예측은 항상 들어맞는 법이라고, 사주경계 중이던 한나의 시선에 들어왔던 건, 못해도 100대가 넘는 중폭격기와 호위기 무리였다.


그것도 동산 위를 스쳐 지나가듯 떠 있는 저공비행 상태로 말이다.


["스패로우 B1, 확인. 탱고 폭스트롯 보고 후 교전, 이상."]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답하는 편대장의 모습이 애처로울 정도로, 현 상황은 절망적이기만 했다.


현 상황은 아군 지원, 더 자세히 말하자면 블루 라인 서포트도 아닐 뿐더러, 적군은 최전선의 아군 방공망과 초계기의 눈을 피해 진입한 덕분에 전력을 완벽하게 온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뒤늦게 편대장이 관제소로 보고를 한다고 한들 당장의 도움은 바랄 수조차 없었고, 목숨 걸고 싸워봐야 시간벌이조차 되지 못할 판이었다.


["스패로우 B1, 알파 섹션 진입, 베이커 섹션 엄호."]


하지만 편대장이 내린 선택은 그 시간벌이조차 되지 못할 싸움이었다.


["지금."]


편대장의 지시에 미처 반론할 새도 없이 리네트는 몸에 밴 대로 선두에 선 폭격기를 향해 기수를 아래로 돌렸고, 머지 않아 그녀와 편대장의 존재를 알아챈 적 호위기들이 6시 방향으로 따라붙었다.


이에 한나와 선임 장교도 기수를 기울여 그들의 후방을 확보했고, 꼬리에 꼬리를 문 치열한 싸움이 이어졌다. 


["스패로우 B3, 후방 적 확인."] 

["스패로우 B4, 마크."]


선임 장교의 뒤로 따라붙은 두 대의 적 전투기는 잡힐 듯 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6시 방향을 내주지 않는 그녀의 기민한 움직임에 상당히 고전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그냥 이어지는 건 아니었고, 평상시의 몇 배에 달하는 중력에 짓눌리면서도 이성을 유지한 채 조종간을 붙잡고 있는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부우웅-'


서로의 후방을 잡기 위한 신경전은 그동안 완만한 하강으로 충분한 운동에너지를 축적한 선임 장교의 재빠른 대처로 비교적 싱겁게 끝이 났다.


러더와 엘리베이터를 젖혀 임멜만 턴으로 고도를 확보함과 동시에 후방을 잡는 데에 성공한 선임 장교는 그대로 건사이트에 비친 적기가 리드 거리로 들어오자마자 조종간의 방아쇠를 당겼다.


'투타타타!'

'펑-!'


4정의 15밀리 중기관총에서 발사된 철갑소이탄은 건사이트의 자이로 조준경 너머로 주황색 꼬리를 그리며 나아갔고, 그대로 적기의 좌측 주익에 꽃히더니, 큰 폭발을 일으키며 날개를 뜯어냈다. 


애초에 장거리 호위기로 설계된 적군의 M-24 테르시오 전투기는 덩치가 크고 굼뜬 쌍발기인 탓에 2선급이라고는 하나, 경쾌한 기동성을 갖춘 아군의 전투기를 상대로 이렇다 할 회피기동을 하는 것부터가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투타타타타!'


그리고 그 전투기가 단순히 격투전에만 능한 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가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한 직선기동으로 한나는 별 어려움 없이 선임 장교가 놓친 적기의 뒤를 잡아낼 수 있었다.


'퍼엉!'


적기의 후방 동체에 명중한 기총탄은 동체 내부의 연료탱크에서 작렬하여 큰 폭발을 일으켰고, 적기는 두 동강이 난 채로 소용돌이를 그리며 아래로 추락했다. 


그대로 기세를 몰아 넉 대의 호위기를 추가로 격추해 낸 둘은 다시 고도를 회복하여 폭격기 요격에 집중하고 있는 편대장과 리네트의 후방 엄호에 나섰다. 


폭격기 대열로 시선을 돌렸던 한나는 그 광경을 보고 한동안 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긴 꼬리를 그리며 날아드는 오랜지색 예광탄과 검게 피어오른 포탄의 잔향, 빗줄기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 폭격기의 기관총탄은 지금도 어지럽게 뒤섞여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그 총탄을 피해 대형을 깨뜨리고 사방으로 몸을 비트는, 엔진이 4개나 달린 둔중한 폭격기들의 몸부림은 썩 볼 만한 구경거리였다. 


["스패로우 B3, 현재 탱고 폭스트롯으로부터 RTB 지시 있었는지."]

["B1, 없다고 알림."] 


그러나 지금도 지평선 너머로 꾸역꾸역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거대한 폭격기들과 그걸 엄호하는 호위기들의 무리는 누가 봐도 그녀들에게 있어 중과부적인 상황으로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한나와 그녀가 속한 항공사단의 작계는 지정된 구역의 초계 및 아군 지원으로, 애초에 사단이 운용하는 항공기부터가 2선급 기체였다.


지금이야 적이 동원한 전투기가 폭격기 호위에 매여있고 기종부터가 중전투기로 설계된 둔중한 쌍발기인 덕에 어느정도 싸움이 됐지만, 앞으로의 전투도 지금까지와 같은 양상으로 이어질 거란 보장은 없었다.


아무리 낙관적인 가정을 한다 해도, 전황 전체를 놓고 보면 폭격기의 대형을 흐트려 놓아 아주 잠깐의 시간을 버는 것이 고작인 상황.


절망은 항상 이런 절박한 순간에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스패로우 B1, 피탄. 통제 불-"]

'콰직!'


그 중과부적인 상황에서도 다섯 대의 폭격기를 떨어뜨렸던 편대장이 격추당했다.


그것도 조종석에 총탄을 직격당해 미처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절명했고, 그녀의 뒤를 따르던 리네트도 보고만 하지 않았지 좌측추익을 피탄당해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단급이 넘는 항공집단을 상대로 꽤나 선방한 편이었지만, 고작 넉 대의 전투기로 전황을 뒤집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시금 그 사실을 체감한 한나는 그동안 나서기 좋아하고 작기만 했던 자신의 전우가 무슨 행동에 나서는지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리네트, 지금 뭐해!"]

["행운을 빈다, B3, B4."]


콜사인을 붙이는 걸 잊을 정도로 얼이 나간 한나를 향해 리네트는 그리 대답하며 엄지를 치켜세우고는, 그대로 스로틀을 끝까지 젖히고 근처를 비행하던 폭격기의 조종석을 향해 들이받았다.


'쿵!'


둔탁한 충돌음과 함께 우그러든 폭격기의 기수에서 별안간 큰 폭발이 일었고, 그 폭격기의 파편은 바로 아래를 비행하던 또다른 폭격기 무리를 덮쳤다.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스패로우 B3, 귀환한다."]


전우의 죽음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이어진 지시에 한나는 대답 대신 침묵으로 항의의 의사를 내비쳤다. 


눈앞에서 직속상관과 전우를 잃은 마당에 돌아가긴 어디를 돌아간단 말인가.


나는 아직 싸울 수 있다. 


방금 전 목숨을 던져가면서까지 최후의 공격을 감행한 리네트처럼 기체에 큰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었고, 탄약도 넉넉한 상황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한나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먼저 말을 가로챈 건 선임 장교였다.


["명령이다, B4. 당장 기수 돌려."]


평소 보였던 모습들과는 달리, 단호한 어조로 명령하는 선임 장교의 목소리는 몹시 떨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이 돌발 상황의 연속이었던 만큼, 닳을 대로 닳은 숙련된 장교였던 그녀도 작금의 상황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것이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선임 장교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방금 전과는 달리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한나를 설득하려 했다.


그제야 선임 장교의 전투기가 눈에 들어온 한나는 그녀가 왜 자신의 귀환에 그토록 집착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걸레짝이 되어 뼈대만 남은 러더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했으며, 커다란 구멍이 뚫린 우측 주익은 언제 떨어져 나가도 이상할 게 없었다.


결정적으로 깨진 캐노피의 유리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실루엣은 한손으로 복부를 움켜잡은 채,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는 중이었다.


요기였던 자신과 달리, 선행해서 전투를 주도해 온 선임 장교의 입장상 1차적으로 적의 화망을 뒤집어 썼던만큼 그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던 것.


["스패로우 B4, …현장 지휘관 지시 확인."]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울분을 집어삼키며, 선임 장교의 지시대로 기수를 자신들이 이륙했던 방향을 향해 돌렸다. 


["B3, 통신 종료."]


반대로 그녀는 그 말과 함께 무전기의 전원을 내리고 한나를 추격하는 적 호위기들의 무리를 향해 파고들었다.


자신의 반대편을 향해 스쳐 지나갔던 순간부터 백 미러 너머로 선임 장교의 모습을 살피던 한나는, 결국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목놓아 울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동안 무뚝뚝하긴 했어도, 자신들에게 뭐라도 하나 더 가르쳐 주기 위해 혈안이었던 편대장을 잃어 서글퍼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소꿉친구이자 항상 주변을 먼저 살펴왔던 상냥한 전우를 먼저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분해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것은 자기 목숨 하나 챙겨 도망치는 것 마저도, 마지막 남은 상관의 희생 없이는 이룰 수조차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미안, 미안합니다…. 저 혼자 도망쳐서… 미안합니다…."


갈 길을 잃은 사죄를 되내며, 한나는 절대로 그들을 잊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니까.




5.


"파르스 항공전이었군요."


나의 말에 카친스키 대위님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르스 항공전. 


수도 아우구스타의 관문 역할을 하는 파르스 백작령에서 벌어졌던, 그야말로 양국의 공군력이 대충돌한 전투.


이 전투로 리에넨 군은 본토의 제공권을 확보함과 동시에 유스토니아 동부 지역에 대한 제공 우위를 점했고, 이는 그 전쟁에서 우리 군이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그리고 난 오늘까지, 그런 중요한 전투의 서장에 이런 이면이 있을 줄은 전혀 모르고 살아왔다. 


"지금까지 이 사실을 숨긴 이유가 있으신가요?"

"…두려웠지."


나의 조심스런 질문에 대위님은 작게 몸을 떨며 겨우 입을 떼었다. 


두려웠다. 


그게 무얼 의미하냐고 되물을만큼 나는 눈치가 없는 놈은 아니었다.


전시라고는 하나 비행 훈련 중 발생한 우발사태,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싸웠었지만 시간벌이조차 되지 못했던 전투, 그 속에서 스러져간 전우들…. 정말 많은 뜻이 함축된 한마디였다. 


이미 세 명이나 되는 전우들에게 목숨을 빚진 상황인데, 자칫 잘못 말했다간 그들의 명예에 무슨 멍에를 안기게 될지 걱정이었던 거겠지.


그 어린 나이에 조국을 위해 피흘리다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하고 하늘에서 스러져간 이들과 남겨진 이들. 


나로선 그 감정의 압박감이 얼마나 무거울 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대위님께서 원하신다면 이번 일은 신문사에 투고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아니야."


다시 힘겹게 입을 뗀 대위님을 마주보자,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미 굳은 결심을 한 의지가 어려있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전쟁 중이었다는 이유 하나로 그사람들 죽음이 이렇게 묻히고 잊혀져선 안돼."

"일단 신문에 올라가고 나면 당분간은 좀 피곤하실 겁니다."

"그건 이미 각오하고 있네."


나의 되물음에 대위님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처음 내가 들어왔을 때 눈길이 갔던 액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선 여전히 젊은 그대로인 대위님과 그 전우 분들이 미소짓고 있었다.


50년. 


그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분들의 명예를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지 않으면 영영 역사의 틈바구니 속에 묻힌 채로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걸 위한 인터뷰이기도 했다. 


"앞으로도 종종 연락하게."


그 말과 함께 나를 배웅하러 나온 대위님은 내 손에 묵직한 종이봉투 하나를 들려주셨다.


봉투 안을 보니, 거기엔 오늘 막 딴 것 같이 싱싱한 오렌지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걸 공짜로 받아도 될까 싶어 난감했으나, '나의 작은 성의라네.'하며 미소짓는 대위님의 얼굴을 보면 여기선 받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미소로 화답한 나는 그대로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밟았고, 도중에 몇 번 뒤를 돌아보니 대위님은 내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되새기며, 나는 반드시 이 분들의 명예만큼은 세상에 밝혀주겠노라고 다시금 되새겼다. 


아니, 비단 이 분들 뿐만이 아니었다.


조국을 위해 피 흘리고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이들의 명예는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그게 지금 이 시대에서 이 일을 하며 살아가는 나의 사명이자 의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