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옷깃 사이로 찬바람이 스며드는 것이 부쩍 추위가 다가왔다는 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오늘 내가 들른 곳은 인근 카운티 부도심의 어느 전원주택. 


녹슨 철제 울타리와 거기에 엉켜 있는 시들어버린 장미 넝쿨들이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나는 그곳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든 에버필드'


울타리와 같이 빨갛게 녹이 슨 우체통에 적힌 이름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 외할아버지의 이름이었으니 말이다. 


작년에 외할머니를 먼저 보내셨음에도 고집스럽게 고향 집에 남아계시는 외할아버지의 속내를 알 길은 없었으나, 거동도 불편하신 분이 혼자서 월동 준비를 하기는 어려우실 테니 이런 소일거리들은 그나마 시간이 남아도는 내 몫이었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그래, 어서 와라." 


현관문을 열며 건넨 나의 인사에 거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던 외할아버지는 그런 짧은 인사와 함께 나를 맞이하러 나오셨다.


"이거, 어머니께서 전해주래요."

"고맙구나. 오느라 고생했을 텐데, 차라도 한잔하겠니?"

"베란다에 놔두시면 일하면서 마실게요."


집에서 출발할 때 어머니께 받은 다과 세트를 건네 드리니 옅은 미소와 함께 차 한잔을 권하셨지만, 지금 급한 건 차를 마시는 게 아니었다.


"늙은이 뒤치다꺼리하느라 네가 고생하는구나."

"저도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미안한 얼굴을 한 외할아버지를 뒤로하고, 신발장 아래 놓인 공구 상자와 함께 가방에 끼워뒀던 단열재 다발을 들고나오니 다시금 찬바람이 옷깃을 에워쌌다.


이 집도 지어진 지 50년을 넘어가서 그런지 손봐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심한 건 덧바른 공구리마저 다 깨진 벽면 모서리와 습기를 먹어 비틀린 나무 샷시였다.


뭐, 공구리야 외가댁 창고에 쌓여있는 시멘트 제품을 물에 개어 펴 바르면 그만이고, 샷시도 안팎으로 단열재를 붙여두면 당장은 괜찮을 것이다. 


실제로도 외할아버지가 내준 차가 다 식기도 전에 일을 끝낼 수 있었으니, 월동 준비라고 거창하게 말하긴 했어도 일단은 건장한 청년이라 할 수 있는 내가 일을 도맡았던 이상 그리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집 안에서 내일 아침까지 그동안 인터뷰한 기록들을 정리하며 지역 신문사에 투고할 원고를 작성하는 거였다.


이런 시골 촌 동네에서 시간을 보내는 데에 불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여기까지 들어오는 교통편 자체도 드물거니와 내일 아침에 어머니가 자가용으로 데리러 온다고 하셨으니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오늘 하루는 외가댁에서 묵어야 할 입장이었다.

 

일단 당장 급한 건 저번 달에 인터뷰한 17 항공사단의 한나 카친스키 대위님. 


인터뷰 당시에는 몰랐었는데, 이미 지병인 심근경색이 많이 진행돼 입원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들었다.


병 자체야 약물치료부터 스텐트 시술까지 치유하지 못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 연로하셔서 마냥 안심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하루라도 빨리 그분의 이야기를 신문에 투고하는 것이 올해의 마지막 목표였다.


"바깥에서 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안 쉬니?"

"급한 일이 있어서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예전에 어머니가 쓰던 방에서 작업을 진행하는 것도 잠시, 옆방에서 TV를 보던 외할아버지가 다시 얼굴을 비추었다.


"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내 말이 무색하게 외할아버지는 책상에 흩어진 원고들을 말없이 훑어보시더니, 별안간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이거, 제대로 돈벌이도 안 될 거 같은데."

"요즘 펜으로 하는 일거리가 다 그렇죠, 뭐."

"너도 곧 서른인데, 빨리 취직해서 자리 잡아야지."

"취직 준비도 같이하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어지는 잔소리에 적당히 둘러대고 다시 원고 작성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외할아버지는 좀처럼 방에서 나가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일 자체야 나도 돈 보고 시작했던 게 아니었던 만큼 외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든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분이 굳이 자리 잡고 남았다는 점에선 나도 사람인지라 못내 불편하다는 감상이 남았다.


"할아버지도 혹시 남기실 이야기 같은 거 있으신가요?"

"내가 남길 이야기라…."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그냥 던져본 말이었는데, 외할아버지는 의외로 진중한 얼굴을 한 채로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너 혹시 '세인트 메리'라는 전함, 알고 있니?"

"이름은 알고 있죠."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난 애써 무덤덤하게 대답했던 것과는 달리 속으론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인트 메리'


다른 불침함들과 비교하면 그리 유명한 편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우리 해군 역사에서 지금까지 회자 되는 수훈함이자 화려하게 전함 시대의 막을 내린 주인공.


듣기론 지금도 모항이었던 폴바타 주의 포트 레논에 기념함으로 남아 해상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고 하는데, 당시의 전함들이 전후에 대부분 고철로 팔려나간 걸 생각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조치였다. 


"내가 거기 탔었지. 4041년부터 4045년까지, 5년간."


벌써 두 눈을 감고 옛일을 회고하기 시작하신 외할아버지의 어조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전쟁 당시 세인트 메리가 참여했던 전투들과 거의 전쟁 전 기간에 걸쳐 복무한 외할아버지의 이력을 생각하면, 그때 그 일을 차분하게 풀어낸다는 것 자체가 보통 담력으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 아가씨를 좋아했던 건 아니었어."


그런데 지금 외할아버지는 그걸 하고 계신 중인 거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오늘 철야를 하는 한이 있어도 카친스키 대위님의 원고를 완성하는 것과 동시에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초고 형태로 남겨 정리하는 것이었다.


아마 오늘은, 긴 밤이 될 것 같다.




2.


4041년, 6월. 적해 인근, 해군 1 기동함대 전함 세인트 메리 


유스토니아 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국경선을 넘어온 지 4개월이 지났다. 


총력전의 거센 바람은 20년 넘게 자신의 자매함들과 함께 조국의 해안선을 지켜왔던 노령함 세인트 메리까지 에워쌌고, 그녀들은 몇 가지 간단한 개수만을 받은 채로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 


주력함 한 척, 한 척이 아쉬운 상황에서 그녀들의 존재는 해군 입장에선 든든한 버팀목이었지만, 일선 수병들 입장에선 언제 가라앉아도 이상할 게 없다고 여겨지던 노령함들에게 목숨을 맡기고 전쟁에 나서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불만이었다.


그리고 그건 개전 직후, 평생을 내륙 지방에서 살아 바다 구경을 해보겠다는 단순한 이유로 해군에 지원했던 스무 살의 이든 에버필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훈련상황, 1 통제반 관측 보고, 적 뇌격기 편대, 6방향 12km 지점에서 아함 서편으로 접근 중."]

"FCT 제원 수신, 사수 표적 확인했는지."


스피커 너머로 들리는 통제반의 심드렁한 목소리에 거함의 측면에 붙은 무수히 많은 대공포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 대공포탑들 중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이든은 FCT의 점멸 신호를 통해 중앙의 레이더 사이트에서 할당받은 표적을 확인하는 대로 다이얼을 돌려 선도각을 장입시켰다.


"사수 표적 확인, 탄종 알파 알파."


그가 장입한 선도각에 맞게 대공포탑이 방열 되고, 사수 석에 앉아있던 병사가 탄종을 복명복창하는 것과 동시에 포탑 아래의 탄약수들이 양탄기에 포탄을 적재한 뒤 레버를 당겨 장전을 끝냈다.


"표적 사거리 내 진입 확인, 사수 사격."

"사수 사격."

'쿵!'


이어지는 포반장의 지시에 사수 석의 병사가 발판을 밟자, 그대로 격발된 두 발의 포탄이 연녹색 꼬리를 그리며 나아가 허공에 시커먼 포연을 수놓는다.


그런 광경은 다른 대공포탑과 기총들도 마찬가지여서, 훈련상황이 부여되자마자 순식간에 전함의 우측으로 짙은 대공화망이 펼쳐졌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3분.


정확히 구분하자면 15밀리 대공기총 1분, 35밀리 대공포 1분 51초, 그리고 이든이 속한 130밀리 대공포탑이 3분이었다.


몇몇 인원들이 본래 다른 직무를 수행한다는 걸 감안하면 상당히 빠른 속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인트 메리의 함장인 풀먼 대령 입장에선 출항 첫날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미덥지 못한 수준이었다. 


["상황 해제."]

"상황 해제랍니다."

"에휴, 씨발."


그걸 알 길이 없는 이든을 포함한 대공포탑의 병사들은 그저 당장 부여됐던 훈련상황이 풀린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함장님은 뭐가 불만이길래 1주일 내내 대공 상황만 건답니까?"

"내가 그걸 알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냐."


이든의 물음에 병장 계급장을 달고 있는 포반장 파웰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게 전부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10년 전, 최초로 항공모함에서 뜬 항공기가 폭탄과 어뢰를 던져 표적함을 격침 시켰던 그 순간부터, 해전의 중심축이 포격전에서 항공전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그들과 같은 말단 병사들이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러나 그것은 병사들의 사정이었고, 해군 입장에선 하루라도 빨리 방공 능력이 강화된 전함이 전력화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 3주밖에 안 남았잖아. 우린 훈련 끝나면 정기 휴가도 있고."

"그런가?"


그런 복잡한 상황은 상관없다는 듯, 이든의 동기 군번이자 대공포탑 사수인 밀러 일병은 그저 회항 이후의 휴가 생각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거 좋아할 일 아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

"고작 한 달 훈련하고 실전 뛰게 된 건데, 좋아할 일 아니라고."


반대로 파웰은 그 말투에서부터 지금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석연치 않다는 감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윗사람들 생각이 어떤지까진 알 수 없었던 그였지만, 병장 짬밥에서 나오는 감이라는 게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세 번 배를 갈아탄 경험이 있는 파웰의 입장에선 보통 2개월에서 길게는 3개월 정도 이어지는 훈련 기간이 고작 한 달 뿐이라는 것부터가 비정상적인 사항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어쩌겠습니까, 함장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그럼 넌 씨발, …하, 아니다."


당연히 그 깊은 뜻을 알 리가 없는 밀러는 당장 이번 휴가 때 나가서 뭘 하고 놀지 정신이 팔려있었고, 더 이야기해봐야 그가 들어먹을 것 같지도 않다고 여긴 파웰은 복잡한 심경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한 번 정해진 훈련 일정이 늘어나는 일은 없을 테고, 좋든 싫든 3주 후에는 이들과 함께 전쟁을 수행해야만 하는 처지였다.


그리고 그 3주라는 시간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 세인트 메리가 소속된 1 기동함대는 모항인 폴바타의 포트 레논으로 들어와 홋줄을 묶었다. 


포반장인 파웰은 배가 정박한 후에도 자신의 대공포탑 소속 인원들을 관리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휴가를 떠난 밀러는 훈련 내내 공언했던 것처럼 술과 여자에 빠진 채 시간을 낭비했다.


언제 또 가족의 얼굴을 보게 될지 뒷날을 기약할 수 없었던 이든은 휴가 동안 고향 집으로 내려가 해후를 나누었으며, 그런 풍경은 비단 대공포탑의 인원들뿐만 아니라 세인트 메리, 더 나아가 1 기동함대에 소속된 군인들 모두에게서 엿볼 수 있었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전쟁은 진행 중이었고, 그들이 잠깐의 휴식을 즐기기 위한 말미를 위해 수많은 이들이 하늘에서, 들판에서, 그리고 바다에서 수백, 수천 리터의 피를 흘려가며 전선을 사수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희생이 무색하게 그 잠깐의 휴식은 너무나도 쉽게 끝을 고했다.


적 측이 적해의 전략적 요충지인 오케아노스 제도 근처로 다수의 주력함을 포함한 해군 전력을 결집 중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는데, 이 소식이 애당초 2주를 바라보던 함대의 정박기간을 그 절반으로 줄여버린 것이었다. 

 

휴가를 나갔던 이들에겐 긴급 소집령이 떨어졌고, 이런 뒷사정을 알 길이 없는 일선 병사들과 하사관들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급하게 짐을 꾸려 다시 배에 올랐다. 


그리고 출항 사흘 뒤, 왕국 해군성에서 보낸 비문 하나가 항공편으로 1 기동함대의 기함인 항공모함 '아우구스타'에 도착했다.




3.


오케아노스 제도는 적해를 통해 유스토니아 본토로 향하는 해역의 중앙에 자리한 섬이다.


특히 제도의 중심지인 캐넌 섬은 적해 내에서 항만, 활주로와 같은 기반시설을 준설 할 수 있는 유일한 섬이었던 만큼, 제해권 확보를 위해선 반드시 수중에 두고 있어야 하는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왕국 입장에서 다행인 점은 그런 오케아노스 제도가 본래 자신들의 영토였던 덕에 제도 전체를 군의 통제하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섬에 주둔 중이던 왕국 공군의 정찰기가 유스토니아 해군의 활동을 감지한 시점에서 그들은 운신의 폭을 좁힐 수밖에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아예 공격을 포기하거나 단기속결전으로 밀어붙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놈들은 공격으로 가닥을 잡겠지."

"지금 무슨 함대 지휘하냐? 네가 제독이야?"


대공포탑의 포반원들과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이든은 자신의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취합해 나름 진지하게 앞일을 점쳐봤지만, 이렇다 할 반응은 파웰의 비아냥거림이 고작이었다.


"삼촌께서 해군 중령이십니다. 지금은 순양함 노스엔드의 함장이시고요."

"근데 넌 왜 여기 있냐?"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러나 이든은 그런 반응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간에, 머지않아 벌어질 일들이 자신이 예견했던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을 거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전투에 유스토니아 해군이 동원한 전력은 해군 전체 전력의 절반이었고, 그중에서도 주력함의 숫자는 북해함대에서 빼 온 순양전함과 항공모함까지 더하면 왕국 해군 전력의 두 배가 넘어갔다.


기습에서 오는 전략적 이점을 상실했어도 첩보망을 통해 출항 전 1 기동함대의 전력을 확인했다면 그들은 수 시간 내에 공격해올 것이 자명했다. 


["총원 전투배치."]

""총원 전투배치!""


그리고 그런 이든의 의견을 긍정하듯 때마침 떨어진 전투배치 명령에 대공포탑 안에서 잡담을 나누던 포반원들은 방탄모를 쓰고 자기 자리에 앉아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제가 말했죠? 공격하러 올 거라고."

"그래, 네 똥자루 굵다."


견시수 자리에 앉은 채로 파웰을 향해 이죽거린 이든은 못 이기겠다는 얼굴로 대충 얼버무리는 그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가 어찌 됐든 간에 결국은 자신의 군사적 식견이 들어맞은 셈이니 말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퀸 알트리아를 기함으로 하는 21 전함전단이 적 선두와 너무 빨리 조우했다는 것.


본 작전에서 1 기동함대는 전력을 크게 2개 전단으로 나누어, 함대 총 기함인 아우구스타를 필두로 하는 11 항모전단이 주공을 맡고, 퀸 알트리아가 기함인 21 전함전단은 미끼 역할을 수행하기로 되어있었다.


이러다 보니 21 전함전단의 제공지원은 캐넌 섬에 주둔 중이던 공군 5 항공사단의 몫이었는데, 그들이 제대로 항공 전력을 전개하기도 전에 전투가 시작된 건 악재라고 봐도 무방했다. 


["1 통제반 관측 보고! 적 항공 집단, 3방향 37km 지점에서 아함 동편으로 접근 중!"]


훈련 때와는 다른 긴박한 목소리로 표적의 위치를 알린 통제반의 말에 사이트의 줌을 당기자, 새까맣게 하늘을 메운 항공기들이 이든의 눈에 들어왔다.


둘, 넷, 여덟, 열여섯…. 폭탄과 어뢰를 매단 항공기들의 대오가 끝없이 몰려오는 그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른침을 삼키게 했고, 그걸 지켜보는 사람이 직접 대공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 당사자였으니, 그 위압감은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탐 접촉! 적함 방위 97도, 거리 41km!"]


이어서 들어온 정보는 적들이 바다에서도 접근 중이라는 소식이었고, 수평선 너머로 하나, 둘 그 모습을 드러내는 유스토니아 해군 군함들의 실루엣은 거리를 감안했을 때, 최소 전함 급의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쟤네 아주 작정하고 들어오는 것 같은데요?"

"알아, 나도 지금 보고 있어."


이든의 물음에 포탑 바깥에서 쌍안경으로 수평선을 주시하던 파웰은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 답했다. 


현재 21 전함전단은 대공 전투를 위해 진형을 원형진으로 잡은 상태였는데, 그 상태에서 포격전을 시작하면 같은 화력이라도 적 함대에게 밀릴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전략에 관심이 없는 파웰이라도 병장 짬밥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으니 그 정도는 알고 있었고, 그걸 제외하더라도 현 상황에서 저런 대규모 공습 이후 이어질 해상전력의 파상공세가 가져올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FCT 제원 떴습니다."

"선도각 장입 확인, 탄종 알파 알파."


슬슬 적 항공 집단이 대공포의 사거리 내로 들어온 걸 확인한 이든은 FCT의 점멸 신호를 확인하는 대로 사통 장치의 다이얼을 돌려 선도각을 장입시켰고, 밀러도 곧바로 사격 제원을 확인하고 탄약수들에게 장전을 지시했다.


"준비되는 대로 쏴."

"사격 개시."


조금 전과는 달리 파웰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격을 지시했고, 이에 밀러도 곧바로 발판을 밟아 포탄을 격발시켰다.


'쿵!'


그와 동시에 오렌지색 화염 너머로 쏘아 올려진 포탄들은 예광제가 타들어 가며 공중에 연녹색 선을 그어낸 끝에 작렬하여 검은색 구름을 수놓았다.


"차탄 장전 완료!"

"내 지시 기다리지 말고 계속 쏴."

"알겠습니다." 


대공포탑 내부로 밀려 들어오는 포연의 매캐한 화약 지린내에도 개의치 않고 포반원들은 묵묵히 자신의 직무를 수행했고, 그렇게 막 쏘아 올려진 열두 번째 포탄이 어뢰를 투하하기 위해 고도를 낮추던 뇌격기의 동체에 직격하여 큰 폭발을 일으켰다.


'…펑!'

"방금 쏜 거 봤습니까?!"

"좋아할 시간에 한 발이라도 더 쏴, 이 새끼야."


반 박자 늦게 들려온 폭음에 격추를 확인한 밀러는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환호했지만, 파웰은 그런 밀러의 방탄모를 후려치는 것으로 응수했다.


밀러가 그런 반응을 보일 만도 했던 것이, 동쪽으로 진입하던 적 항공 집단 앞에 펼쳐진 대공탄막은 문자 그대로 검은 장막을 형성했고, 여기에 말려든 항공기들은 얼마 안 가 동체에서 검은 매연을 토해내며 수면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중이었다. 


그 검은 장막의 파편 너머로 파고든 항공기들도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35밀리 대공포의 십자포화를 피해갈 순 없었고, 산산조각난 편대기를 뒤로 한 채 어뢰를 투하한 소수의 뇌격기들은 이탈하는 과정에서 15밀리 대공기총의 탄막을 뒤집어쓰고 추락하는 꼴을 면하지 못했다.


그렇게 물 샐 틈 없이 펼쳐진 방공망은 일견 적의 공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것처럼 보였으나, 공습에 동원된 적 항공 집단은 그 규모가 2개 항공사단에 육박했던 탓에 그것들을 모두 막아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쿠궁-!'

["좌현 선수부 어뢰 피탄!"]


별안간 묵직한 중저음의 폭음과 함께 강렬한 진동이 포반원들을 덮쳤고, 뒤이어 함내 방송을 통해 아함의 상황이 통보됐다.


위치상 그들이 있던 대공포탑은 함체 중앙에 자리한 덕에 큰 피해는 면했지만, 자신들이 몸을 실은 배가 어뢰에 맞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기에 심적인 동요가 생기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이거 퇴함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이딴 거로 안 가라앉으니까 호들갑 떨지 마, 이새끼야."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밀러는 대공포탑 바깥을 가리키며 그리 말했으나, 돌아온 건 자신의 방탄모를 후려치는 파웰의 거친 손길이었다.


세 번의 승함 근무 중 두 번을 전함에서 보낸 파웰이었던 만큼 그는 전함의 맷집이 어떤지를 잘 알고 있었고, 고작 항공어뢰 한 발로는 유의미한 수준의 타격을 주지 못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기에 별 어려움 없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뭐 해, 다들 일 안 하고."

"…선도각 장입, 1방향 12km 64밀." 

"탄약 이송 및 약실 폐쇄 확인!"

"사수 사격."


이어지는 파웰의 지시에 다시 대공포탑의 내부는 마치 공장과도 같이 주어진 일을 착실히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광경은 세인트 메리를 비롯한 21 전함전단에 소속된 함선들 전체에서 엿볼 수 있었으며, 그것에 더해 이 지긋지긋하기 그지없는 공습을 분쇄하는 데에 쐐기를 박는 존재가 있었다.


'부우웅-'


지금까지 들려온 항공기들과는 다른 톤의 엔진음.


시선을 돌린 이든과 파웰은 각자 사통 장치의 페리스코프와 쌍안경을 통해 그 소리의 정체를 직접 확인했다.


"F-37…."

"5 항공사단 이 새끼들, 늦었다고!"


캐넌 섬에서 이륙한 5 항공사단 소속 전투기들이었다.


저익단엽기라는 구조를 빼면 장점을 찾을 수 없는 투박한 설계에 캔버스 천과 목재 구조물로 만든 동체, 시야가 나쁜 새장형 캐노피를 자랑하는 2선급 제공전투기, F-37 수십 대가 격추된 적 항공기들의 파편을 배경 삼아 하강 중인 광경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어지간해선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파웰도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고, 그 분위기에 편승한 이든은 아예 대공포탑 바깥으로 몸을 내밀어 아군 전투기들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어쩐지 급강하 폭격기가 안 내려온다 했다."

"그럼 저희 이제 다 끝난 겁니까?"

"거의 다 끝났다고 봐야지."


파웰의 대답에 이든은 허리를 숙여 FCT의 상황등을 살펴봤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곳에는 여전히 불이 들어와 있었다. 


"아, 씨! 사격제원 계속 내려오잖습니까!"

"저거 어차피 곧 정리 돼. 좀 느긋하게 가자고."

"……"


이든의 입장에선 태연하기 그지없는 파웰의 태도가 어이없는 것을 넘어 화딱지가 날 지경이었지만, 지금도 유연하게 사격을 지속하고 있는 밀러와 빠른 속도로 적기를 격추해 나가는 아군 전투기들의 모습을 보고 마지못해 그의 말을 긍정했다.


2선급이니 뭐니 해도 전투기는 전투기였고, 그들을 피해 회피기동을 펼치다 아군의 대공사격에 격추당하는 경우가 속출했으니, 파웰의 말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잘 타네."


아군 전투기가 뒤를 잡은 상태에서 몇 초 정도가 지나면 적 항공기들은 금세 주익이 두 동강 나거나 동체에 불이 붙은 채로 바다를 향해 곤두박질쳤고, 이를 눈앞에서 지켜보던 이든이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할 정도로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고 있었다.

 

일단 제공권을 아군이 가져온 이상, 전투의 주도권도 같이 넘어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전탐실! 적함 방위 97도, 거리 32km, 지속 이동 중!"]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도 없었던 것이, 적의 수상함 전력은 여전히 건재했고, 그들이 가진 주력함의 숫자는 21 전함전단의 2배에 육박했다.


"아, 쟤네를 잊고 있었네."

"곧 주포 사거리 안쪽입니다."

"알면 너도 대가리 숙이고 들어와라. 뒤지기 싫으면."


파웰의 말에 수평선 너머를 주시하던 이든은 별수 없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대공포탑 안으로 몸을 우겨넣었다. 


"근데 뭐가 켕기는 게 있길래 지금까지 돌입하지 않았던 걸까요?"

"내가 그걸 알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냐고."


처음부터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자기 기분대로 말하고 보는 파웰을 두고, 이든이 보인 반응은 그냥 입을 다무는 거였다.


그래도 적이 보인 기민하지 못한 움직임은 21 전함전단이 전투 진형을 기존의 원형진에서 포격전을 위한 단종진으로 바꿀 시간을 벌 수 있게 해줬고, 항공 전력과 수상함 전력 간의 불협화음은 그들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피해를 주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각 전단의 전단장들과 1 기동함대 사령관이 이번 전투가 충분히 해볼만 하다는 판단을 내리는 데에 일조했다. 


'쾅!'


가장 먼저 포문을 연 것은 기함인 퀸 알트리아였다.


대공포를 발사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굉음과 함께 4만 톤이 넘는 거함의 선체가 요동쳤고, 움푹 패인 해수면 위로는 오렌지색 구름이 피어올랐다.


400밀리가 넘는 주포 8문이 동시에 불을 뿜는 광경이 퀸 알트리아는 물론 자매함인 세인트 메리와 어드미럴 샘슨에서도 펼쳐졌고, 착탄 하기까지 걸리는 수십 초의 시간 동안 그걸 지켜보는 이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첨벙-!'

["전탐실, 초탄 착탄 및 협차 확인!"]


그러나 그런 기대와는 달리, 적함을 향해 날아든 스물네 발의 철갑탄들은 얄궂게도 선두에서 전속으로 항행 중이던 순양전함 너머로 착탄해 거대한 물기둥을 만드는 데에서 그쳤다.


물론 초탄으로 협차를 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지만, 그걸 지켜보던 이들의 입장에선 빗맞은 건 결국 빗맞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제1파, 옵니다!"

"지금 나도 보고 있으니까 너도 앉아서 기도나 해."


당연하게도 적함이 주포 사거리 내에 들어왔다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라는 얘기였고, 그걸 증명하듯 쏘아 올려진 적 전함의 포탄들은 세인트 메리와 그 자매함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기본적으로 전함의 대응방어라 함은 주포탑과 바벳, 현측, 그리고 사령탑에만 적용되는데, 그 말은 즉 이든을 포함한 포반원들이 앉아있는 대공포탑에 적탄이 작렬할 경우 생존을 장담하지 못한다는 걸 의미했다.


이든의 보고에 파웰이 한 기도 타령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


'쿠-웅!'


……


"야, 살아있냐?"

"일병, 이든 에버필드, 괜찮습니다."

"일병, 밀러 제퍼슨, 살아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기도가 먹혀들기라도 한 건지, 대공포탑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간 포탄은 사령탑 측면과 주포탑 전면에 명중하여 그대로 두꺼운 장갑에 파묻히는 데에 그쳤다.


문제는 그다음 순간이었다.


'후두둑!'


레이더로 보정 값을 먹인 아군 전함들의 포탄 세례가 선행하던 순양전함에 적중했고, 캡이 벗겨진 채 주포탑 아래로 파고 들어간 철갑탄은 탄약고의 정 중앙에 작렬했다.


'콰광-!'


주포탑의 탄약고가 유폭 됨과 동시에 전방 갑판이 크게 들썩이더니, 세인트 메리 못지않게 큰 덩치를 자랑하던 거함은 완전히 두 동강이 난 채 해수면에 소용돌이를 그리며 빨려 들어갔다. 


말 그대로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 새끼들 저거 다 뒈졌겠네!"

"누가 아니랍니까! 내 속이 다 시원하네!"

"완전히 두 동강 난 거 보셨습니까?!"


이 광경을 대공포탑 안에서 숨죽이고 지켜보던 포반원들은 지금도 빠르게 가라앉고 있는 적함의 잔해를 바라보며,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건 정도의 차이만 있지, 함교를 포함한 함내 승조원들도 마찬가지였고, 더 나아가 21 전함전단 전체에서 엿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 환호성을 기점으로 서로의 사거리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온 전함들은 각자 할당받은 표적을 향해 포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순양전함 한 척을 잃긴 했어도 적 함대는 여전히 주력함 전력에서 숫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거기에 수반함들까지 더하면 전력차는 더 크게 벌어졌다. 


다만 적 함대는 아군의 단종진에 완전히 말려든 상황이었으며, 특히 전함의 경우 노령함이긴 해도 공방능력 면에서 근소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는 퀸 알트리아와 그 자매함들이 전투를 주도하고 있었다. 


"적 전함, 대공포 사거리 내 진입 확인."

"43에 630, 탄종 호텔 에코." 

"사격 값 장입, 탄종 호텔 에코 확인."


주포의 포문을 열기 시작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대공포탑의 포반원들도 부쩍 바빠진 모습을 보였다.


기본적으로 130밀리 대공포는 부포를 겸하고 있었기에 사거리 내로 들어온 대수상 표적도 대응 상대였고, 사격 제원을 수신하는 대로 포격 준비를 마쳤다.


적 전함들은 지금도 거리를 좁히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공방능력에서 밀리는 전함들이 대응방어를 뚫고 유효타를 날리기 위해선 그것 말곤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쏴."

"사수 사격."

'쿵!'


파웰의 지시에 밀러가 발판을 밟는 대로 격발된 포탄은 이번엔 공중이 아닌 수평선을 향해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나아갔고, 막 세인트 메리를 향해 측면을 드러내고 전 포문을 지향한 적 전함의 부포곽에 명중했다.


"표적 효력사, 제원 40에 624로 잡고 재사격."

"제원 수정, 40에 624."


움직이는 전함 위에서 실시간으로 사격 값을 수정해 유효타를 이끌어 내고 있는 파웰의 모습을 보면, 병장 짬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는 걸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걸 가능하게 했던 건 통제반으로부터 전달받은 제원을 사통장치를 통해 중계하는 이든과 파웰의 지시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밀러, 그리고 대공포탑 아래에서 탄약을 나르고 있는 포반원들이었다.


출항 전, 함장인 풀먼 대령이 우려했던 훈련 부족 문제는 기우였던 셈이었고, 지금도 막 불을 뿜은 대공포 중 하나가 포화를 주고받던 적 전함의 부포곽을 유폭시켜 검은 매연을 토해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오히려 미숙한 움직임을 보여주던 것은 적 함대였는데, 뇌격전을 통해 점감 요격에 나서야 할 적 구축함들은 아군 순양함들의 아웃레인지 전법에 당해 접근조차 하지 못했고, 이들을 받쳐줘야 할 적 순양함들도 5 항공사단의 견제에 말려들어 회피기동과 대공사격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투쾅-!'


그러는 사이, 세인트 메리는 또 한 척의 전함에 치명타를 가했다.


조금 전 부포곽이 유폭됐던 그 전함이었고, 전방 주포탑을 관통당해 전투력을 상실한 그것은 아군 구축함의 뇌격으로 완전히 선체가 기울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었다.


대응 방어를 뚫기 위해 거리를 좁힌다는 건, 반대로 이쪽의 사격 정확도와 수반함들의 뇌격 성공률도 올라간다는 말이 됐으니, 함대 전체가 단종진에 말려든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내린 것은 그들의 패착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게임 끝났네."

"벌써 말입니까?"


이든의 물음에 파웰은 대답 대신 사이트 너머를 가리켰고, 왕국 해군 라운델이 새겨진 뇌격기와 급강하 폭격기들이 적 잔존 함대에 공습을 가하는 광경이 사이트의 렌즈에 비쳤다.


그들은 진입 순간부터 지금까지 함대 진형을 단종진으로 유지했고, 부실한 대공화기와 레이더의 부재가 맞물려 이미 한 번 공습을 수행해 상대적으로 그 숫자가 적은 아 해군 항공대의 공격에도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갔다.


급강하 폭격기의 폭격에 갑판과 포탑 상부를 관통당한 전함들은 전투력을 상실한 채 단순한 이동 표적으로 전락했고, 순양함급 함선들은 일격에 대파당해 배를 버리기 바쁜 모습을 보여줬다.


뇌격기들은 그렇게 저항 능력을 상실한 전함들을 한 척씩 정리해 나갔고, 개중에 몇몇은 항공어뢰를 피해 회피기동을 하다 마찬가지로 공습을 피해던 수반함과 부딪혀 가라앉기도 했다. 


"진짜 끝났네요."


후련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든은 시선을 돌려 대공포탑 내부를 둘러봤다.


밀러는 아직도 자신들이 살아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 멍한 얼굴로 바닥만을 쳐다보고 있었고, 파웰은 방탄모 안쪽에 끼워뒀던 입담배 캔을 꺼내 한 줌 입에 털어 넣은 뒤 우물거리고 있었으며, 탄약수들은 수통을 꺼내 목을 축였다.


아직은 가능성 없는 전투를 이겼다는 감상이 더 강한 이든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승리를 쟁취해 냈고 그 사실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지금도 가라앉고 있는 셀 수없이 많은 적함에 몸을 싣고 싸웠던 저들은 패배하여 목숨으로서 그 값을 치루는 중이었으며, 전투에서 이긴 그들은 살아남아 저마다의 내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간단한 사실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4.


"이 일이 끝나고, 풀먼 그 양반은 제독 소리를 듣게 됐지."

"풀먼이라면, 그 해군 명예원수 클램슨 풀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나의 물음에 외할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못 이길 싸움을 이겨놓은데다 함장으로서  현대 해전사에 다시 없을 전공을 세웠으니, 이후 출세가도를 달린 것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었다.


그 때 영관급 장교였던 사람들은 나중에 최소 별 두 세개 씩은 달았고, 풀먼 명예원수는 그 중에서도 이후 커리어가 특출나게 잘 풀린 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외할아버지가 그런 거물 아래에서 군 복무를 하셨다는 것 자체가 의외였지만.


"어머니께선 별 말씀 없으셨어요. 외할아버지 군생활 관련해서요."

"뭘 자랑이라고 그런걸 얘기하고 다녀. 내 또래 애들은 그 때 다 그러고 살았는데."


담담하게 대답한 외할아버지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번져나갔다.


참전세대.


내가 비록 혈육이긴 해도 50년을 앞서 살아간 그들의 삶을 헤아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


비단 외할아버지 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까지 인터뷰 해온 적지않은 이들이 모두 그랬다.


이 일을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생과 사를 오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들과 나 사이에는 나 따위가 감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시대의 벽이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그래도 굳이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는 건, 외할아버지께서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계셨다는 거 아닌가요?"

"그럼, 당연하지."


그런 무겁기 그지없는 상념에 잠겼던 것도 잠시, 내 질문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시원스레 그리 답하신 외할아버지는 어금니의 금니를 드러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려보이셨다.


그래, 이래야 우리 외할아버지지.


"신문사에 투고해도 돼죠?"

"물론이지. 어디 신문인데?"

"가디언 타임즈요. 3면 하단부 보시면 있을건데, 지금 원고가 밀려서 아마 다음달 쯤에 나올 거에요."

"너도 고생이구나."


그 시절 외할아버지께서 하셨던 일과 비교하면 이런 건 고생 축에도 못끼죠.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었지만, 지금 자리에서 굳이 그런 말을 덧붙이는 건 그리 적절한 언사가 아닌 것 같아 도로 집어삼켰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해준 당사자의 동의를 얻었다는 것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한 층 누그러들었다는 거였다.


처음엔 잔소리까지 해가며 못마땅하다는 태도만을 보여주셨는데, 고생한다는 말까지 해주실 줄은 몰랐다.


"너무 늦게까지 깨어있진 말고."


방 문을 닫고 나가시며 덧붙인 외할아버지 말에 나는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떠올랐다.


영웅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그 말대로 영웅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