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연 안개마저 숨죽인 광장의 하늘. 플랫폼은 손님을 기다린다.

 

어머니 조국의 용사들을 실은 차편이 요란한 기적을 울리며 돌아오자, 덩달아 숨죽여 지켜보던 군중이 환호성을 질렀다. 악단이 빠른 곡조의 행진곡을 연주하고, 붉은 기는 물결처럼 휘날렸다. 뭇 사람들이 딱하게 여길 용사들의 상처는 이날 더없이 영광스러운 승리의 훈장이었다. 붉은 광장을 수놓는 핏발같이 붉은 물결 가운데로는 상급병사 이반이 다리를 절며 나왔다. 일렁이는 붉은 물결과 우레같은 환호 속에, 그의 가슴팍에는 또 다른 금색의 훈장이 달렸다. 젊은 병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상을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요란한 군가와 합창단의 노래가 배웅하였지만, 유례없는 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속 어딘가가 쓰려왔다.

 

이반은 아직 젊은 피가 마르지 않은, 녹갈색의 병사들과 함께 열차에 몸을 실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물을 틈조차도 없었다. 신문 기사 하나 때문에 이 열차에 몸을 실은 이반은 전쟁에 대한 그 무엇도 알지 못했다. 단 하나 아는 것이라면, 파쇼들이 그의 고향을 덮치고야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반은 구태여 물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고향을 짓밟은 파쇼 놈들을 죽이는 것. 가족의 원수를 갚는 것. 그것을 위해 그는 이 군복을 받아 입은 것이었다. 그렇게 열차를 수차례 바꿔 타고, 트럭의 짐칸에서 며칠을 더 가서야 그들은 땅을 밟아볼 수 있었다.

 

이반 레반도프스키. 변방 시골에 사는 가족을 먹이려는 의지 하나로 동쪽으로 떠났던 그는, 늦게서야 전쟁의 불길이 그의 조국에 닥쳤다는 것을 알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신문을 받아들고, 그는 부아가 치밀어 이 열차에 올라탔다. 고향으로 가는 열차. 이반은 눈을 감고 떠올렸다. 아직 셈조차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어린 여동생. 제법 머리통이 굵어진 남동생 일리야. 그리고 어머니. 이반은 고향을, 그리고 가족을, 어머니를 앗아간 파쇼 놈들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 그 복수심이 그를 열차에 태웠고, 철없이 웃고 떠드는 젊은이들 틈에서도 그의 눈에는 독기가 어렸다.

 

대열을 갖춰 서고도 노닥거리며 웃음 짓던 그들은 한 트럭 가득 실린 병사들의 시체를 보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반은 꼿꼿이 서서 단상 위의 적기를 바라보았다. 긴장한 신병들 가운데로 대위가 적막을 깨며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러분은 잘 들어라! 어머니 조국의 군대가 맹공을 가한 결과, 우리는 이 근방에서 파쇼 놈들을 무찔러내는 데에 거의 성공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그리고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살아남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파쇼의 잔당들과 비겁한 부역자 놈들을 모조리 처리하는 일이다. 여러분은 지령이 하달되는 대로 놈들을 지체하지 않고 처리하기 바란다. 이상!” 대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의 손에 소총 한 정과 탄환이 쥐어졌다. 깡마른 병사 한 명이 이반에게, “이, 이반, 우리, 이 총으로 사람을 죽여야 하는 거야?”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지만, 이반은 무뚝뚝하게, 그러나 목에 핏발이 선 채로 답할 뿐이었다. “파쇼 놈들은 내 가족을 죽였다. 쥐새끼 같은 놈들의 피로 부모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그들은 지령대로 마을을 돌며 파시스트들을 찾아내었다. 이반은 지급된 파쇼들의 명부를 보며, 총을 받쳐 들고 이름을 물었다. “당신이 아무개 맞소?”하고, 방아쇠를 매만지며 이반이 차갑게 물으면, 더러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 자리에서 총을 맞고 거꾸러졌다. 수상한 낌새를 느껴 발뺌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반이 분노가 치밀어 그들의 멱살을 쥐고 “쥐새끼 같은 놈, 어디서 거짓말이야!”하고 소리치며 부하들을 향해 고갯짓을 하면, 부하들이 들이닥쳐 집을 샅샅이 뒤졌다. 그렇게 이 잡듯 뒤져 나치의 증거물을 찾으면, 이반이 포승줄로 파쇼와 그의 가족을 묶고, 부하들은 마을 사람들을 공터로 불러모았다. “이것 보시오! 이놈은 파쇼의 부역자 놈이오! 우리 어머니 조국을 배신한 놈이란 말요! 여러분은 조국을 배신한 쥐새끼의 최후가 어떠한지 똑똑히 보시오!” 그러고는 마을 사람들의 눈앞에서 그들을 숲속으로 치웠다. 들리는 것은 총성뿐이었지만, 마을 사람들도 무엇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떠나는 그들의 뒤편에는 잿더미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반 일행은 쉴 틈도 없이 다음 지령에 따라 마을을 찾다가, 지치면 그 자리에서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날짜도 모르는, 그러나 함박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칼바람이 심하게 불어닥쳐 이리저리로 눈발이 흩날렸다. 이반 일행은 다음 지령이 떨어진 마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 마을에만 파쇼 부역자의 집이 여러 곳이나 되었다. 꽤 큰 마을이며, 나치가 가장 끈질기게 저항하다 물러간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샛길 앞에서, 그들은 배불뚝이 남자 한 명을 발견했다.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모자를 까딱이는 남자. 그의 옆에는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 하나가 손을 붙들고 서 있었다. 이반이 웃으며 앞으로 다가서자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이의 허리춤에 매인 칼집, 그리고 남자의 팔뚝에 자랑스레 감긴 붉은 완장이었다. 완장의 흰 동그라미 안으로 철십자가 자랑스레 얼굴을 디밀고 있었다. 빳빳이 선 부대원들과 이상한 듯 이반을 쳐다보는 남자 사이의 정적을 깨는 것은 ‘빠악’ 하고, 개머리판이 남자의 머리통을 내리치는 소리였다. 남자가 머리를 싸매고 거꾸러지자, 흰 땅바닥이 붉어졌다. “이 더러운 파쇼 새끼! 죽여버리겠다! 파쇼 새끼들은 죽어야 해!” 이반이 미친 듯이 소리치며 남자를 짓밟았다. 부대원들이 이반을 말리려고 다가선 그때, 가냘픈 비명이 들리는 쪽에는 아이가 단검을 뽑은 채로 서 있었다. ‘피와 명예.’ 단검의 칼날에 자랑스럽게 글씨가 쓰여 있었다. “파쇼의 자식 놈이! 너도 아비와 죽여 주마!” 눈이 뒤집힌 이반이 아이를 내리치자,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아이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분이 가시지 않은 채로 이반이 뒤를 돌아보고는, 다리를 덜덜 떠는 깡마른 병사를 불렀다. “가서 처리하고 와.” 얼굴이 파랗게 된 채, 병사는 찬찬히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이놈들을 죽여야 하느냐고 물었지? 파쇼 놈들은 죽어도 싸. 알았으면 가서 시키는 대로 해.” 이반이 그의 등을 떠밀자, 병사는 초주검이 된 둘을 끌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병사가 떠나자, 이반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눈을 퍼다 후끈거리는 얼굴에 문질렀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냐고, 이렇게까지 악독하게 파시스트를 죽여야만 하느냐고 누군가 물어오기를 이반은 기대했지만, 누구도 그에게 선뜻 말을 건네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 순간, 그의 머리에는 불안감이 엄습해오고 있었다. 오늘 아침 받은 무전에서 들려오는 마을의 이름은 너무도 익숙했다. 그가 전에 알았던 그곳과 꼭 같은 이름이었다. 지금 도착한 이곳이 그가 아는 그곳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지만, 그럼에도 그 마음 한켠의 불안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병사가 수십 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이반은 홀로 총을 메고 숲으로 들어갔다. 얼마쯤 걸어 들어가자, 가슴팍에 총상을 입고 나무에 기대어 쓰러진 남자와 그 옆에 쓰러져 있는 아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병사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아이를 쏘려다 실패한 모양이다. 아이의 몸에 있어야 할 총상은 그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그의 머리 주변이 붉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흘리던 눈물까지도 얼어붙었는지, 그의 눈가에는 뭔가가 반짝였다. 놀랍지도 않다는 듯 그는 병사의 목에 걸린 군번줄을 낚아챘다.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병사의 이름이었다. 이반은 병사의 반대편에 누운 소년의 허리춤에서 증거품 삼아 단검을 빼 자기 허리에 찔러넣었다. “겁쟁이 자식.” 하고 혀를 끌끌 차며 그는 가래침을 탁 뱉고 돌아섰다.

 

“죽었어. 자살이야.” 이반은 덤덤하게 전몰자의 소식을 전했다. 유달리 마음이 여렸던  알렉세이였기에, 부대원들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모두가 잠들었다 싶은 새벽, 알렉세이는 밤마다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면 이반 역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더는 그의 울음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었다. 마음이 여려서 총도 제대로 잡지 못했던 그였지만, 스스로를 향해 총구를 들이미는 건 너무도 쉬웠던 모양이다.

 

마을로 들어서자, 한 아낙네가 이반의 무리에게 다가왔다. 안절부절못하고 떠들어대는 그녀의 입에서는 웬 남자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아까 마주쳤던 그 남자의 아내인 모양이다. 이반은 대충 둘러대고는 그녀를 지나쳐 마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죽은  알렉세이의 시체도 그냥 버려두고 온 그였다. 땅거미가 지기 전에 이반 부대의 위치로 수송대가 올 것이다. 그 전에 모든 과제를 완수해야만 한다. 이반은 지령대로 마을 가운데에 난 큰길 왼쪽 집의 문을 두드렸다. “여기에 표도르 바리노프가 있소?” 이반 일행을 반갑게 맞아들인 젊은 여자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그녀가 물었다. “그, 그이는 무슨 일로 찾으시는지요, 군인 나리?” 이반이 여자를 밀쳐내려 할 때, 나치군 군복을 걸친 장정이 걸어 나왔다. “당신이 표도르요?” 쏘아붙이는 이반의 물음에 표도르가 고개를 슬쩍 내리자 그를 마주보는 것은 총알 세례였다. 표도르가 “악” 하고 바닥에 쓰러지자, 이반은 빨간 펜으로 명부에 줄을 긋고는 여자를 부대원 쪽으로 밀쳤다.

 

다음은 숲 옆의 지붕이 반듯한 집이었다. 이반이 문을 두드릴 틈도 없이, 웬 늙은이가 권총을 들이밀며 윽박질렀다. “이 빨갱이 놈! 나를 죽이러 온 게냐? 어디, 이 늙은이 머리에 총알을 박을 테면 박아 봐라!” 그의 호전적인 태도를 쏙 빼닮은 노욕의 훈장들이 그의 정복 어깨와 가슴팍을 장식하고 있었다. “나는 늙은이라고 봐주지 않소.” 이반이 노인의 배를 군홧발로 떠밀고, 노인의 훈장에 총알을 한 발 박아넣었다. 빳빳이 들려 있던 노인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이반은 또 빨간 줄을 긋고 무심한 듯 홱 돌아섰다.

 

“개새끼들에게 자비는 없다! 그놈들에게는 구원도 없다….” 이반은 그 행실에 맞는, 사뭇 경쾌한 노랫가락을 흥얼대며 다음 목적지로 발길을 재촉했다. 이번에 그들의 희생양은 숲속에 있었다. 죽은 알렉세이와는 멀리 떨어진 숲속에. 이반은 발을 떼었다.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군홧발로 눈을 짓밟으며 걷는 이반의 뒤로는 피 묻은 발자국이 남았다.

 

얼마쯤이나 걸었을까, 그의 눈앞에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작은 출렁다리가 냇물을 가로질러 놓여 있다. 옛날에 그가 첨벙대던 그 냇물과 같았다. 멀찍이 보이는 대문 너머의 저 허름한 통나무집은, 그의 복수심을 불태운 그 통나무집과 너무도 흡사했다. 아니, 그 통나무집이었다. 이반은 별안간 문을 두드리려던 손을 덜덜 떨며 부대원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무슨 일이야, 이반? 가서 문을 두드리지 않고?” 드미트리가 물었다. 이반은 그런 그의 등을 말없이 대문으로 떠밀었다. 그가 문을 두드리자, 땅딸막하고 살집 있는 늙은 여자와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그들의 앞으로 나왔다. 이반은 얼굴을 땅에 푹 파묻었다. 그의 손은 갈 데 없어 그의 바지만을 벅벅 긁을 따름이었다.

여자의 동공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이 흔들렸다. 혈색이 돌아 붉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어린 딸은 녹갈색 군복과 소총이 마냥 신기한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가 일리야 레반도프스키의 집이 맞습니까?” 드미트리가 묻자 그 여자는 떨리는 굵은 손으로 성호를 그으며 군인 무리를 집에 들였다. “저, 군, 군인 나리, 일리야는 제 아들놈인데, 요저번에 군대에 끌려갔다가 죽, 죽었습니다. 맏아들 놈은 돈 번다고 나갔다가 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답니다.” 죄책감이 이반을 찾아오자 그는 고개를 더욱 내리꽂을 수밖에는 없었다. 일리야. 여기는 일리야의 집이다. 이반의 집이다. 그를 전쟁에 뛰어들게 한 그 집이다. 이 집이 불타 없어졌다는, 그 복수심 하나로 이반은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알렉세이가 죽게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여기까지 걸어오며, 사실 그는 이 집이 없기를 바랐던지도 모른다. 오늘 이런 일이 없을 것을 확신하며, 아니, 없기를 바라며 그는 파쇼 척결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의 복수심의 원동력이 없어진 지금, 그를 찾아오는 것은 두려움과 죄책감이었다. 이반이 드미트리에게 떨리는 손을 뻗으며 말을 꺼냈다. “드, 드미트리, 아들들이 다들 죽었다고 하잖나. 이, 이번에는 그냥 가지….” 그러나 이 비극을 무마해보려는 이반의 발버둥은 흰 입김이 되어 묻혔다. 드미트리의 발걸음이 헛간을 향했고, 문을 부수자 그 앞에는 눈물을 흘리며 벌벌 떠는 한 청년이 있었다. 몰라보게 해쓱해진 청년. 총 든 장정 무리를 보더니 그는 그대로 발작하며 오줌을 지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서도 볼품없이 물이 흘렀다. “오, 주여!” 여자가 가슴팍을 쥐어뜯더니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이 모든 것이 재미있는 듯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여자의 앞치마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반의 숨도 턱턱 막혀왔다. 그는 캑캑거리며 기침을 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반, 너 오늘 상태가 안 좋은가 보네. 나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와.” 이번에는 드미트리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이반은 담배를 한 개비 꺼내어 꼬나물었다. 대문 밖을 나서는 그의 뒤로 몇 발 총성이 울렸다. ‘탕, 탕, 탕’하고 총알이 한 발 튀어나갈 때마다 그는 움찔하고 놀랐다. 성냥을 두 개비 떨어뜨리고 나서야 그는 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러나 담배를 피워도 그의 손떨림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이반은 그 옆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한숨을 크게 내쉬자 연기인지 입김인지 모를 것이 그의 입으로 조금씩 새어 나왔다. 그는 자기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냉혈한 이반이 계집처럼 울고 있었다. 새어 나오는 울음을 누르며 이반은 끅끅대면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훔쳤다. 그동안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고 지금 이렇게 우는 것은 왜일까. 셋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 스스로가 이반은 원망스러웠다.

 

동료들의 발소리가 대문 밖으로 들려오자, 그는 잽싸게 눈물을 훔치고 그들의 뒤에 붙었다. 여느 때처럼, 어스름이 짙게 내린 숲속이었지만, 그들의 뒷모습만은 발갛게 빛나고 있었다.

 

1945년 5월 9일.

 

낡은 라디오에서 뉴스를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곧이어 아나운서는 차분한 목소리로 속보를 전하고, 창밖 거리 곳곳에서는 “우라!” 하는 함성이 쏟아진다. 그러나 이반만이 다만 광분하지 않고 나갈 채비를 하며 코트를 챙겨입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코는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보드카를 몇 잔 걸친 탓인가보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 이반은 소스라치게 놀라 권총을 잡고 문으로 다가간다. 현관을 발칵 열어젖히자, 문 앞의 남자가 뒤로 물러선다. “누구야.” 이반이 권총을 들이밀자, “나야. 진정하게.” 남자는 대위였다. “자네도 방금 들었지? 우리가 이긴 거야! 파쇼 놈들을 때려잡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야! 위대한 소비에트 연방이여! 주여, 감사… 아, 아무튼, 이반, 네가 큰 공을 세운 거야! 그 번쩍이는 훈장을 가슴팍에 달아주는데 코끝이 찡….” 대위가 승리니, 전공이니, 이반이 무슨 일을 했느니 하며 입에 침이 마르게 떠드는 것은 본체만체 이반은 다시 짐가방을 들고 계단을 잰걸음으로 뛰어 내려가 버렸다. “이반, 이반!” 대위는 몇 번 소리쳐 부르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갔다.

 

이반이 향한 곳은 기차역의 매표소. 호주머니에 꽂아 놓은 지폐 몇 장을 꺼내 푯값을 내고는, 기차표를 받아들고 잔돈도 받지 않은 채로 플랫폼으로 떠난다. 고향으로 떠나는 표를 안주머니에 꼬깃꼬깃 집어넣은 채로, 이반은 마치 몇 년 전처럼 또 열차에 올랐다. 다시 며칠을 달려, 다시 걸어 찾아간 그의 고향. 그러나 그곳은 이반의 고향이라기엔 너무도 황량했다. 사람들은 이반의 눈을 피했고, 의식도 하지 않고 그를 지나쳐 갔다. 아무도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반도 마찬가지였다. 이반은 도저히 그들의 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저 짐가방을 옆구리에 매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쉴 틈 없이 총성이 울리던 그날의 기억을 고스란히 묻힌 채로 집들은 남아 있었다. 문앞에는 간혹 꽃이 한 다발씩 놓여 있었다. 그러나 싱그러운 선물을 받으러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간혹, 곳곳에 총탄이 박힌 집에서 사람이 불쑥 튀어나오면 이반은 이따금씩 놀랐다. 마을 앞에서 그들에게 실종자의 기별을 묻던 아낙네. 표트르의 아내. 그들 역시도 이반을 보고는 예정에 없는 손님을 만난 듯 놀라 홱 돌아섰다.

 

숲길을 가로질러, 이반은 기억을 더듬었다. 조금 남은 기억을 더듬어 가는 그의 발길이 이끈 곳은 그의 집터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곳에는 다만 단단한 대리석 조각 세 개가 그를 반길 뿐이었다. 땅속 깊은 곳에, 그가 사랑했던 것들을 고이 묻어둔 채로.

 

‘나 왔어요.’ 이반은 속으로 되뇌었다. 대리석은 5월의 햇볕을 받아 제법 따뜻했다. 짐가방을 끌러 뒤적거리다가 이반은 몰래 챙겨온 보드카 몇 병을 꺼내 묘비 옆에 붓는다. 눈밭 대신 잔디가 무성하게 자라 그의 무릎께를 감쌌다. 이반은 묘비를 부둥켜안았다. ‘타티아나 레반도프스키. 1886~1943’, ‘일리야 레반도프스키. 1927~1943.’, ‘마리야 레반도프스키. 1935~1943,’ 따위의 음각으로 패인 글자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묘비 위로 쏟아지는 햇볕, 그리고 차가우면서도 따스운 대리석의 감촉이 그의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이반은 냇가로 다가갔다. 며칠 밤낮을 달려온 탓인지, 갈증이 쏟아져 그는 가방 깊숙이 손을 뻗었다. 차가운 유리병의 감촉이 그의 손에 닿았다. 이반은 보드카 몇 병을 또 꺼내어 목을 축였다. 취기가 그의 얼굴에 확 뻗쳤다. 이반은 신발을 벗어 놓고 냇가에 발을 담그기로 한다.

 

봄이 되어 날이 제법 풀리면 냇물이 얼추 녹는다. “물이 다시 흘러요, 엄마!” 이맘때면 이반과 일리야는 어머니에게 물이 다시 흐르는 것을 시시때때로 보고하고는 했다. 실은 수영을 하게 해달라고 보채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마지못해 허락하면, 그들은 맨몸으로 냇물에 뛰어들고는 했다. 그렇게 큰 시내는 아니었지만 물은 꽤나 깊었다. 이 형제는 냇물을 들이마시고 기침을 하면서도 그렇게 헤엄하며 노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조금 지나고는 마리야도 합세해서 함께 물가에서 장난하며 놀고는 했다. 그렇게 헤엄치다 보면, 어머니는 햇살같이 온화한 목소리로 식탁으로 형제들을 부르곤 했다.

 

‘참 좋은 시절이었다.’ 이반은 연거푸 술병을 기울였다.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니 슬픔은 배가 되었다. 이미 지난 일인데, 왜 옛일을 생각하면 항상 슬픈 것인지, 이반은 그저 하염없이 무색의 슬픔을 들이킬 뿐이었다.

별안간 바람 한 줄기가 그의 뺨을 스쳤다. 따스한 바람이었다. 이반은 발을 담근 냇가를 들여다보았다. 일리야가 웃으며 헤엄치고 있는 냇물이었다. 마리야의 미소가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활짝 열린 웃음이었다. “거기에 있었구나….” 이반의 손에서 술병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이반도 그에 질세라 미소를 짓기로 하였다. 웃음 짓는 법조차 잊은 그가 입꼬리를 한껏 올리려니 왜인지 얼굴이 당겼다. 그러자 어느새 이반도 웃음짓고 있었다. 슬픔도 잊은 채로, 흐르는 눈물 속의 미소를 한껏 내보이고 있었다.

 

5월 봄의 냇물은 조용히 흘렀다. 가지런히 놓인 구두 한 켤레, 그와 반대로 너저분하게 놓인 술 몇 병이 조용히 흘러가는 냇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짧다면 짧은 비극을 씻어내며 냇물은 조용히, 그리고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