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부석



해풍에 날리는 옷자락을 손에 꼭 쥐고, 수평선 너머를 나는 가만히 내다봅니다. 미광이 밝고 구름 걷히어 멀리의 타향이 보일 적에는 눈가에 희망의 웃음도 감돕니다.

마음 속에 메아리쳐 굽이도는 사랑의 그 말 한마디와 함께 나의 입은 굳어 버렸는가 봅니다. 손끝은 가만히 그대 계시는지 모를 타향을 향하건만, 주름진 옷소매만 소리쳐 그 이름 부르는가 팔딱입니다.

살빛이 바라며 굳어가는, 뻗쳐나간 사지에는 백갈매기 울음도 실려와 기별을 묻습니다. 낮의 일광도, 밤의 월광도 모여 와 임을 조상합니다. 그러나 내심 희망을 꾸미어 내는 마음은 아직 굳지 않았는가 봅니다.

소복이 쌓여 오는 눈을 맞고, 봄날 동풍에 눈 녹아 이 몸뚱이에 스밉니다. 여름의 미친 뙤약볕은 이제 가슴팍까지 다가온 저 석화의 물결을 달구고, 찬 해풍에 이 몸을 식힙니다.

허공에 맴을 돌던 그 이름도 함께 굳어 바위에 뿌리내렸나 봅니다. 해가 가도록 굳건한 치술령과 다만 한몸이 되어 나는 그대의 이름을 바람에 실어 날립니다.

바닷새는 하염없이 하늘을 활공합니다. 그 샛노란 부리를 놀리며 울음을 울며, 먼 길 가는 전령처럼 이 굳어버린 어깨에 몸을 누입니다. 한참을 몸 데우던 바닷새도 후사를 기약하며 떠갑니다. 백갈매기 앉는 데마다 당신 손길 닿은 줄 알렵니다.

오소서. 새가 되어 오소서. 치술령 고개에 우뚝 솟은 이 바위, 나에게로 날갯짓해 오소서. 심중에 고이 접어 묵혀둔 나의 고백은 굳어 댓 척짜리 돌이 되었습니다. 바람에 깎이어 모래로 날리고, 검푸른 현해탄에 녹아들어 바다에 출렁이는 이 나를 찾아 오소서. 


백갈매기



서해 노을 붉게 탄 자리에

피었던 백련화는 지고 말았나


어스름 옅게 깔린 수평선에는

임 계신 이역만리 비쳐 보이는데


타오르는 정염의 그 불꽃 못 이기어

회백의 진눈깨비만 흩날리누나


임 계신 그곳에

발 딛은 그 자리에


그대는 아직도

치술령 그 바위섬에 섰는가


뻗친 손끝에 恨이 맺히고

못다한 말은 응어리 되어


화석ㅡ

영구히 굳은 그 盟誓


다만 백구 한 마리 닿거든

나인 줄 아옵소서



위 두 편의 시는 '망부석 설화'를 바탕으로 한 연작시이다. '망부석'에는 박제상의 부인, '백갈매기'에는 박제상이 각각 시적 화자로 등장해서, 설화에 얽힌 각자의 상황을 노래한다.


[배경지식 - 망부석 설화]

옛날. 신라의 박제상이 왜국의 볼모로 잡힌 왕의 동생을 구하기 위해 왜로 떠난다. 박제상의 부인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치술령 고개에서 박제상을 기다렸지만, 돌아온 것은 그가 끝까지 왜국의 핍박을 견디다 죽었다는 비보였고, 그 자리에서 통곡하던 박제상의 부인은 돌이 되었다. 이를 사람들은 '지아비를 바라보는 돌'이라는 뜻에서 망부석이라고 불렀고, 이것이 오늘날 망부석의 기원이 된다.


산문시인 '망부석'에서, 박제상의 부인은 이역만리 왜국으로 떠난 남편 박제상을 한없이 기다린다. '타향 땅'을 보며 웃음 짓고, '낮에는 일광이, 밤에는 월광이 모여 와 조상'하는 가운데에도 남편의 죽음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는 희망적인, 한편으로 현실부정적이고 가련한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4연에서는 가슴께까지 돌로 변하게 되어, 5연에서는 완전히 '치술령과 한몸', 곧 설화 속 망부석이 되는 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의 마지막 연에서 그녀는 '백갈매기 닿는 데마다 당신인 줄 알렵니다'라며, 또 남편 박제상이 새가 되어 날아오기를 빌며, 비극적인 현실에 체념하고 박제상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백갈매기'는 그렇게 죽음을 택한 박제상의 시점에서 시상이 전개된다. 산문시인 '망부석'과 달리 이 시는 어느 정도의 운율을 보여주는데, 1 -3연에서 3음보 율격이 나타나며, 이는 6연과 8연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여진다. 1연에서의 '서해 노을'과 '피었던 백련화가 지'는 장면에서는 박제상의 죽음을 연상할 수 있다. '백련화'는 신라의 국교인 불교의 상징이며, 여기서는 꺾이지 않는 박제상의 절개를 상징하는 시어이다. 2연과 3연에서는 화형당하는 박제상의 모습이 연상되는데, '임 계신 이역만리'는 마치 '망부석'이 된 부인을 연상케 한다. 결국 부인의 소원이 무색하게 박제상은 '정염의 그 불꽃'을 이기지 못하고 '회백색의 진눈깨비'가 된다. 


4연에서는 운율의 변화를 보여주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형식을 띤다. 불타 죽은 박제상은 부인이 서 있는 '치술령'을 찾는다. 6연에서는 굳어 망부석이 된 아내의 모습을 노래하는데, 이는 '망부석'의 마지막 연에서 아내의 외침대로 박제상이 '백갈매기'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결국 7연에서 '백구 한 마리 닿거든/나인 줄 아옵소서'라는 구절을 삽입함으로써 박제상 부부의 비극적인 조우로 시가 마무리되는 모습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