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중대 운영비나 훈련 비품이 없는 것보다 더 문제가 되는건 촉박한 훈련 일정이었다.


당장 중대 전술훈련 평가가 시작되는 건 다음 주 화요일.


그게 그냥 훈련도 아니고 무려 사단장이 직접 참관에 나서는 훈련인 걸 생각하면, 빈말로라도 시간이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중대 운영비가, 분기 지급이었죠?”

“예, 중대장님. 원래라면 저번 주에 들어왔어야 했는데,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행보관님 잘못 아닙니다. …이번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일단 훈련 준비는 이거로 좀 부탁드립니다.”


내가 건넨 종이봉투를 열어본 챈들러 상사는 대답 대신 미안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300 리에넨 파운드.


1 리에넨 파운드 지폐 300장이 담긴 그 종이봉투에는 왕국 육군 대위 한 달 치 급여에 해당하는 금액을 담아뒀었다.


그건 결코 적은 돈도 아니었거니와 나라고 금전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봐야지 뭐 어쩌겠나.


“그리고 이번 일은 저희하고 부중대장 선에서 끝내도록 합시다. 더 얘기 나와봐야 좋을 거 없어요.”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챈들러 상사는 내게 거수경례를 붙이며 중대장실을 빠져나갔다.


“에휴 씨발….”


솔직한 심정으론 머리가 아팠다.


생각해 보면 중대 운영비 문제도 이렇게까지 복잡해질 일이 아니었는데. 


한국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중대 운영비라는 게 원래 이거저거 다 합해도 나오는 돈은 한 달에 30만 원 남짓.


이쪽으로 넘어오기 전의 대략적인 국제 금값과 리에넨의 물가 차이를 감안해도 30 리에넨 파운드가 안 되는 푼돈이었다.


문제는 지금 그게 분기 단위로 쌓이고, 훈련 때 병사들에게 나눠줄 털장갑 한 켤레도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네, 2중대 행정반입니다.]

“어, 나 3중대장인데, 2중대장 연결해줘.”

[지금 바로 연결해드리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2중대장에게 연락을 넣는 것이었다.


중대 운영비가 지급되지 않은 게 우리 중대만이 아니라면 중대장들끼리 연대를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게 아니면 그냥 나 혼자 들이받으면 되는 문제였고. 


[2중대장입니다.]

“아, 2중대장님.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아뇨, 이 시간엔 업무도 별로 없어서 괜찮습니다.]


두어 번 신호음이 이어지고 들려오는 2중대장의 목소리가 워낙 느긋하다 보니, 화제거리는 자연스레 내가 제시하게 됐다.


“다른 게 아니고, 이번 분기 중대 단합은 어떻게 하실 계획이시죠?”


그리고 돈 문제를 대놓고 물어볼 정도로 나는 눈치 없는 놈이 아니었다.


까놓고 말해서 리에넨 사람도 아닌 나를 두고 뒤에서 타 중대 간부들끼리 무슨 얘기가 오고 갈지는 아무도 모를 일 아닌가.


[그거야 당연히 중대 운영비에서 빼야죠. 부족하면 중대 간부들 선에서 각출하고요.]

“아, 그리고 지금 저희가 중대 물자 창고 정리 중인데, 참고자료로 쓰게 보급 품목 리스트 좀 받아 갈 수 있을까요?”

[네, 뭐. 어려울 건 없죠. 근데,]


중요했던 부분에 대해선 별 의심 없이 흔쾌히 답을 받아냈지만, 끝에 와서 의문문이 붙은 걸 보면 아직 긴장을 풀기엔 일렀다.


웰링턴 중위의 말대로 2중대장이 날개 없는 천사인지 아닌지는 제쳐두더라도, 지금 당장의 문제는 이쪽의 의도를 숨겨두는 것.


말 한마디 잘못하면 처음부터 빌드업을 다시 짜야 했다.


[보통 그런 일은 행보관이 하지 않나요?]

“행보관은 행보관대로 바빠서요. 일 배울 겸 제가 직접 뛰고 있습니다.”

[대단하시네요. 나이도 있으신데.]

“나이 먹었다고 짬 대우해주는 것도 아닌데, 알아서 잘해야죠.”

[중대원들이 의지가 되겠네요.]

“그렇게 생각해주면 다행이고요.”


그리고 다행히도, 나의 그런 걱정은 기우였는지 2중대장은 평범한 질문과 감상만을 이어갔다.


‘그것보다, 내가 나이 운운하는 소리 들을 정도로 늙어 보였나?’


괜히 그 말이 신경 쓰여 무심코 중대장실 책상 구석에 놓인 손바닥만 한 거울을 들여다보니, 추레한 몰골을 한 성인 남성의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매일같이 수염 깎고 머리를 정리한들, 10년 넘게 야전에서 뙤약볕 쏘여가며 구르던 서른다섯 먹은 중늙은이가 어디 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가뜩이나 리에넨 사람들은 곱상한 외모에 잘 늙지 않는 경향이 강했는데, 그런 가운데 있는 내 액면가가 어떨지는 안 봐도 뻔했다.


거기에 아예 생애주기 자체가 다른 엘프나 수인족 같은 아인종들까지 나오면 얘기는 더 복잡해지겠지.


[3중대장님?]

“네, 듣고 있습니다.”

[용무는 더 없으신가요?]

“일단 급한 건 그 정도입니다.”


그런 자조 섞인 잡념을 털어내고 2중대장과의 통화에 다시 집중하니, 얘기는 슬슬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


[필요한 거 생기시면 언제든 연락 주시고요.]

“네, 오늘은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2중대장이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를 들은 뒤에야 전화를 끊은 나는 행동에 앞서 우선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본부중대를 포함해서 대대 내 4개 중대 중, 중대 운영비가 들어오지 않은 중대는 아마 우리 중대뿐일 것이다.


던포드 백작 가의 영애인 2중대장을 필두로 본부중대장과 1중대장은 모두 육군사관학교 출신에 집안은 리에넨 상류사회에서 한 자리씩 해 먹고 있는 인간들이었다.


그러니 그런 긁어서 부스럼 날 것 같은 대상들 제하고, 적당히 털어먹어도 문제 없을 놈으로 가닥을 잡다 보면 귀결되는 결과는 하나.


바로 중대장부터가 외지 출신에 이렇다 할 빽 하나 없는 나의 3중대만 남는다.


‘이걸 어떻게 들이받을까.’


하지만 누군진 몰라도 그놈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주취 폭행 사건 때도 그랬지만 내가 빽 하나 없는 외지인이라는 건, 뒤집어 말하면 리에넨 주류사회 눈치 봐 가며 설설 기어 줄 필요도 없다는 걸 의미했다.


내 앞길이야 어차피 리에넨 출신 장교들 평가 점수 깔창이나 하다 계약서에 적힌 시기에 맞춰 진급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상대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건, 그쪽도 그만한 반발과 손해를 감수할 각오를 하고 움직였다는 거겠지.


“행정병아, 2중대 행정반 가서 서류 하나 받아오자.”

“예, 알겠습니다.”


중대장실을 나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병사에게 그리 지시하니, 마침 자리에 앉아있던 웨이드 상병이 내 뒤를 따랐다.


그 외에 행정반에 남은 간부와 병사들은 조금 전 내가 챈들러 상사에게 건넨 자금을 바탕으로 어떻게 훈련을 대비할지를 논하느라 바빠 보였다.


다만 이전과 같이 나와 눈을 마주친 클라크 소위가 이쪽을 향해 두어 번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 반가울 뿐이었다.


“중대장님도 2중대에 볼 일 있으십니까?”

“아니, 난 대대본부 가보려고.”

“그럼 서류 수령한 다음에는 뭐 하면 되겠습니까.”

“행보관 갖다줘.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알겠습니다.”


짧은 질의였지만, 핵심은 전부 담긴 얘기였다.


가뜩이나 남은 시간도 촉박한데, 가이드 라인도 없이 훈련을 준비하면 아무리 베테랑인 챈들러 상사라 해도 힘에 부칠 것이 자명했다.


중대 보급 품목 리스트를 확보한 건 그런 챈들러 상사를 위한 조치였고, 내가 직접 처리할 일은 좀 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중대장님, 무슨 좋은 일 있으십니까?”

“지금 있는 건 아니고, …조만간 생길 예정이야.”

“그렇습니까.”


내 말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웨이드 상병은 옅게 미소 지은 채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럼 전 여기서 실례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해라.”

“네, 중대장님도 수고하십시오.”


웨이드 상병과 헤어지고 중앙계단을 통해 1층의 대대본부로 내려가자, 왼편 복도 끝의 인사과 사무실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실례 좀 하겠습니다.”


노크와 함께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니, 인사과 사무실에 앉아 작업 중이던 간부, 병사할 거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수경례를 붙였다.


대위 하나에 중사 하나, 일병 계급의 병사가 둘.


과급 참모부 일을 보기엔 충분하다고 할 수 없는 인원이었지만, 사무실이 워낙 좁다 보니 내가 들어간 것만으로도 안이 꽉 찬 것 같은 감상을 줬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3중대장님.”


경례를 받아주며 자연스럽게 책상에 걸터앉자, 대대 인사과장인 밀번 대위가 그리 물어왔다.


올해 초에 대위로 진급한 밀번 대위는 노력 하나로 그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 쉽게 말해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인사과장도 알겠지만, 이번 분기 우리 중대 운영비가 안들어와서요.”

“그래서, 확인차 직접 오신겁니까?”


그런 밀번 대위의 말에는 마치 '고작 그런 일로'라는 무언의 압박이 더해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이런 일은 아무리 높아봐야 행보관 선에서 해결할 만한 일이었는데, 중대장이, 그것도 리에넨 사람도 아닌 나이든 대위가 직접 찾아 올 것이라고는 아마 예상하지 못했겠지.


“아뇨, 온 김에 직접 확인하고 싶은게 좀 있어서요.”

“무얼 말입니까?”

“3중대 앞으로 배정된 최근 3개월 분의 예산 처리내역을 확인하려고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나의 요구를 칼같이 거절한 밀번 대위는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자기업무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꼴에 대대 참모라고 재고 있는 그 모습에 욕지거리가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올라왔지만, 지금은 내가 부탁하고 있는 입장이었기에 좀 더 유화적인 방법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2중대장한테 다 듣고 왔습니다. 일 커지기 전에 협조하시는 게 좋을텐데요?”

“그렇게 나와 봤자 좋으실 거 하나 없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고, 뭘 그리 비협조적으로 굽니까? 부대 운영비 삥땅쳐서 대대장 술이라도 사줬어요?”

“지금 말 다했습니까?!”

“아니, 아니면 아닌거지, 뭘 그렇게 소리를 질러요. 사람 무안하게.”


한 번 떠보듯 던져본 나의 그 말에 밀번 대위는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의미심장했던 건 순간적이었지만 중사 계급의 인사계장이 거기에 동조하기는 커녕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려보인 거였고, 거기서 난 한가지 확신이 들었다.


밀번 대위는 학벌도 출신도 별 볼일 없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인물이 리에넨에서 계속 성공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건 단 하나.


바로 돈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억측의 영역이었으나, 몇 가지 정황 증거들로 미루어 보아 아주 가능성이 없는 얘기도 아니었다.


그걸 확증으로 만들어 이 놈을 나가리 시키는게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이었고.


“아무튼 뭐,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대충 인사치레를 건네고 인사과 사무실을 나가려고 하니, 밀번 대위는 한 대라도 칠 기세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물론 이제 와서 그런 걸 신경 쓸 생각도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으며, 지금도 그저 앉은 채로 눈알만 부라리고 있는 걸 보면 어차피 이 인간에겐 그럴 배짱 따윈 없는 게 확실했다. 


“인사계원아, 둘째 줄 행간 설정 잘못됐다.”

“…감사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감사할 것 까진 없-”

“중대장이 참모부 일엔 뭐하러 간섭합니까!”


사무실을 나가던 도중, 입구 근처 자리에서 타이프라이터를 두드리던 인사계원의 서류를 보고 가벼운 지적을 하자, 밀번 대위는 건수 하나 잘 잡았다는 듯 내 말을 끊어먹으며 다시금 소리를 질러왔다.


이에 영혼 없는 손사레를 치고 바로 사무실을 빠져나오니, 그 안에서는 밀번 대위가 마치 화풀이라도 하듯 방금 내게 서류 작업을 지적당한 인사계원을 향해 온갖 욕설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저렇게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아랫사람을 다루면 지금 당장이야 어떨지 몰라도 나중에 어떻게 업보가 돌아올 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뭐, 지금 같은 경우는 그게 내가 바랬던 결과이긴 했지만 말이다.


밀번 대위 저 인간도 이번 기회를 통해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를 알게 되겠지.


---


이른 저녁. 영내 인원들 저녁 식사도 끝나고, 한창 막사 내부가 떠들썩할 시간대.


나는 혼란을 틈 타 적당히 인적이 드문 옥상 빨래 건조장 구석에서 사병용 활동복 차림으로 모포를 너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내게 이목이 집중되는 일은 없었지만, 상황이 상황인만큼 가급적 빨리 일을 끝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여기에 오래 있어봐야 좋을 건 없는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본부중대 저녁식사 차례는 끝났을 텐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3중대장님.”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을 걸어온 인사계원, 찰스 도노반 상병은 내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목소리 낮춰. 직책도 생략하고.”

“예? 그렇지만 장교에겐-”

“체면치레 할 필요 없으니까, 그냥 편하게 얘기해.”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고, 상황을 이해한 도노반 상병도 나의 지시대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지금부터 나누게 될 대화의 내용을 생각하면 크게 얘기해서 좋을 건 없을 테니까.


“어차피, 우리 이제 같은 편이잖아.”


적어도 누군가에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