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430]: 백제와 대막루의 반격, 그리고 고구려 내전


412년, 광개토대왕이 급사하고 거련이 태왕을 물려받으면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대대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광개토대왕이 죽자 가장 먼저 준동한 쪽은 백제로, 하북위례성에 있던 백제의 어라하 전지왕은 8천의 대병을 일으켜, 호로고루를 통해 임진강을 넘어서 고구려의 칠중성을 쳐 빼앗고, 수군을 일으켜 각미성(관미성)을 공격한다. 그러자 거련의 태자 시절 스승이자 재상인 고익은 비사성 해군과 서안평성 해군을 동원하여 각미성을 지원했고, 동아시아 최강으로 떠오른 고구려 해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전지왕은 각미성을 포기하고 물러난다.


한편, 장수왕은 사로가 돌아서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사로를 확실하게 자신의 손에 넣기 위해 당시 마립간 실성왕에게 보해 간자(왕자)를 인질로 보내도록 한다. 장수왕은 딴에는 잘 했다고 생각하며 자기위안을 하지만, 고익은 "뒷감당할 자신 있으시냐"며 걱정한다. 장수왕은 고구려를 다스리면서 딱 세 가지의 실수밖에 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첫 번째였다. 이로 인해 후일 보해의 형 눌지가 마립간의 자리에 오르자 그는 고구려를 척지고 나제동맹을 맺게 된다.


백제가 남쪽에서 소요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대막루(광개토대왕이 멸망시킨 부여의 후계 국가)의 임금 청령왕은 빠르게 군대를 일으켜 본래 부여의 도읍이었던 부여성을 탈환하고 주변으로 확대하여 전성기 부여의 영토를 거의 수복해버린다. 전지왕에게는 칠중성을 빼앗기고, 청령왕에게는 부여성과 용수성, 용담성을 빼앗기는 등, 광개토대왕의 위엄을 기대하던 대신들에게 어린 장수왕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전지왕은 "어찌 나에게는 책사가 없는가"라고 불평하다가, 가야 지역에서 근초고왕 때부터 군림했던 목라씨 가문의 소년 장수 목라만치를 등용한다. 목라만치는 백제의 힘을 빠르게 재정비하고, 근초고왕 시절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야심 하에 일본과의 관계 호전에도 힘을 쏟는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 생전에 미리 지어 뒀던 태왕릉의 건설을 마무리짓고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운다. 그는 태왕릉의 방향은 광개토대왕이 생전에 꼭 나가고자 했던 대륙(중원)으로 향하게 하고, 광개토대왕릉비의 방향은 광개토대왕이 생전에 꼭 멸망시키고자 했던 백제(남쪽)으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사후 아버지 옆에 묻히고 싶다는 생각으로 태왕릉과 광개토대왕릉비의 근방에 자신의 무덤 장군총을 가묘로 세운다.


장수왕이 공사에 바쁘던 기간, 청령왕에게 지원을 약속받은 유무지와 을계수 등 30여 인의 고구려 귀족들이 결국 국내성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장수왕의 어머니이자 광개토대왕의 아내 예류부인을 인질로 잡고 장수왕의 7가지 죄를 물어 예류부인의 이름으로 폐위 교서를 발표한다.


그러자 고익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장수왕을 평양의 청암리성으로 피신시키고, 광개토대왕이 건설한 평양의 구제사(9개 절)에서 근왕파를 모아 오골성, 가응성, 용골성, 각미성, 서안평성, 장수산성, 옹천산성, 학성산성, 온정리성 등 압록수(압록강)와 홍토수(두만강) 이남으로 국내성파 반란군의 세력이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당시 국내성파 반란군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 영역을 확장하여 졸본성과 신성을 끌어들여서 요동으로 나아가는 한편, 여성, 염주성, 살기성, 맥성을 끌어들이거나 함락시키는 등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내전 2년차경 겨울에 엄청난 폭설로 육상 교통이 마비되자, 고익은 서안평성을 통해 해로로 비사성을 연결하고 요동의 성들까지 모두 근왕파로 규합한 뒤, 용수성과 용담성을 쳐서 수복하고 청령왕과 반란군의 연계를 끊어 버린다. 이어서 이른바 요패 해연선과 온응 연선진이라는 두 개의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고 요동장성 네트워크를 구축해 국내성파 반군을 에워싸 버린다.



압록수 해전에서 그나마 국내성파가 보유하고 있던 해군을 궤멸시키며 국내성파의 한 팔을 끊어 놓은 고익은 장수왕에게 병법, 정치, 경제 등을 필사적으로 가르친다.


그러던 중, 서안평 벌판을 끼고 벌어진 대회전에서 고익은 독화살을 맞고 죽는다. 근왕파의 실질적인 섭정이자 최고의 충신이자 브레인이었던 고익을 잃어버린 장수왕은 멘붕에 빠져 있다가, 꿈에서 광개토대왕을 만나고 마침내 각성하여 그동안 한직을 전전하던 10여 명의 장수를 더 등용하고 그동안 공부해온 것들을 총동원해서 반란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장수왕은 총공격으로 내전 7년차인 419년에는 홍수를 틈타 국내성도 함락시키고 사실상의 반군 리더였던 유무지의 목을 친다. 뒤이어 백두산 일대에서 수군과 육군을 합동으로 움직여 반란군 주력을 섬멸한다. 마침내 내전 12년차에는 반군의 주력이었던 안거골말갈을 박살내고 맥성까지 함락시키며 내전을 종식시킨다.


이어서 내전으로 완전히 쑥대밭이 된 국내성에서 금새를 들고 백성들을 이끌어 평양성으로 옮겨 간 장수왕은 청암리토성을 석성으로 다시 쌓고, 광개토대왕이 건설을 준비했던 안학궁을 완성한다. 그리고 군 체제와 제도를 정비하고 내전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국가를 회복하고 북방을 케어하는 데 힘을 쏟는다.


뒤이어 힘이 축적되자, 장수왕은 그동안 고구려를 계속해서 위협해왔고, 전지왕이 죽고 나서는 전권을 장악한 백제의 장군 목라만치가 지키던 칠중성을 함락시킨다. 목라만치는 이를 갈며 임진강 일대에서 다시 한 번 장수왕과 맞붙었지만 대단히 공격적이고 저돌적인 장수왕의 공격에 다시 한 번 참패한 뒤, 그의 권력을 견제한 구이신왕에 의해 일본으로 좌천된다.


430년, 장수왕은 4만의 대군을 일으켜 그동안 북방을 위협해온 대막루를 부여성에서 몰아내버린다. 그리고 기병 5천 기로 패려를 치고, 군선 200척을 일으켜서 그동안 요서백제 진평군에서 비밀리에 건설되어 온 백제 수군을 격멸시킨다. 주변국은 장수왕을 두고 광개토대왕의 재림이라며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고증 및 설정>

1. 고구려 내전에 대해서는 이설이 매우 많으며 실존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단순히 "귀족들에 대한 장수왕의 숙청"이었는지, 아니면 "국내성파와 평양성파의 당쟁"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기존 세력과 장수왕의 내전"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해당 작품에서는 임용한이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주장했던 대규모 내전 설을 채택했다.


2. 고려는 수군을 해군이라 불렀는데, 여기서 착안해서 작중 고구려는 수군을 해군이라 부르고 있다.


3. 고익은 실존인물이다. 413년 동진에서 장수왕을 책봉하는 문서를 동진에서 받아간 인물로서 기록되었는데, 구체적인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아서 장수왕의 측근 겸 스승으로 설정하였다.


4. 실제로 광개토대왕의 능으로 비정되는 태왕릉은 만주를 보고 있고, 광개토대왕릉비는 한반도를 보고 있다.


5. 목라만치는 일본서기에만 기록된 인물으로, 삼국사기에서는 근초고왕 시절 가야를 평정한 목라근자의 아들로 기록된 목협만치이다. 일단 백제의 대성팔족 기준 목라씨가 맞으므로 목협은 오기로 보았다. 또한 전지왕 시절 등용되어 전지왕 사후에는 권신으로 변모하는 모습도 사실이다.


6. 고구려에서는 옥새로 금새(金璽)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7.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성 유적보다 약간 동쪽에 있는 청암리토성으로 비정된다. 고려~조선기에 불리던 평양성은 고구려 시대에는 장안성이라고 불렸고, 552년에 양원왕이 지은 것이다.


8. "내전 2년차"는 이른바 414년인데, 이때 눈이 5척 내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내전 7년차"인 419년에는 나라 동쪽에 큰 홍수가 났다는 기록이 있다.


9. 작중에서는 백제를 각각 백제(백제 스스로), 쿠다라(일본), 응유(신라), 백잔(고구려)이라고 부르고, 신라를 각각 서라(신라 스스로), 사로(고구려), 계림(백제)이라고 부른다. 고구려는 예외로 모든 국가가 고구려라고 부르며, 장수왕이 천도 후 국호를 고려라고 바꾸지만 고구려 본인과 일본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그대로 고구려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