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이 이끄는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혁명당은 1938년 10월 10일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창설 당시 인원은 100여 명으로 출발하여 최대 314명까지 늘어났다.


하지만 이 부대 창설의 주인공은 김원봉이 아니었다. 장제스(蔣介石) 정부가 김원봉에게 일본군을 상대로 한 정치 선전 목적의 한국인 부대 창설을 요청했고, 김원봉이 이 요청에 의해 만든 부대였다. 김원봉이 대장을 맡았고, 최창익, 김성숙, 유자명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장제스 국민정부군 첩보기관인 남의사(藍衣社·Blue Shirts Society·BSS) 산하에서 일본어 교육, 정보 수집, 선전 활동, 포로 심문 등 각종 심리전과 특수작전을 수행했다(권성욱, 『중일전쟁-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2015, 745쪽).


그런데 1941년, 김원봉의 라이벌이었던 공산주의자 최창익이 중국공산당 프락치들의 공작에 넘어가 조선의용대 주력의 80%를 이끌고 옌안으로 탈출하여 중국 공산당 팔로군 산하로 들어가 버렸다. 이들의 탈출 이유는 이념적 성향이 공산주의를 추종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옌안으로 탈출한 또 하나 이유는 김원봉이 장제스 정부의 지원을 받는 데 대해 대다수 대원들이 반발했기 때문이다. 조선의용대는 장제스 정부로부터 매월 식비 20원과 공작비 10원씩을 지급받는 중국 국민당군 산하 부대였던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김원봉이 팔로군 근거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김원봉은 테러, 암살, 파괴 등을 자행하는 아나키스트였다. 때문에 조직과 단체의 힘을 무시하고 단독행동을 주로 하기 때문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분자로 간주했다. 중국공산당 활동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물이라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조선의용대의 주력들이 옌안으로 탈출해 오자 중국 공산당은 김무정, 김두봉 등을 내세워 화북지방의 조선의용대 통제권을 장악했다. 1942년 7월 10일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개편되었고, 팔로군 포병사령관 무정이 사령관을 맡았다. 그들은 화북과 만주의 조선인들을 상대로 세력을 확대, 규모가 500여 명에 달했다. 이 부대의 지도급 인물이 한글학자 출신의 김두봉, 최창익 등이었다.


조선의용대의 통제권을 상실하고 왕따 신세가 된 김원봉에게 손을 내민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였다. 김원봉은 1942년 7월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무부장을 맡았다. 연안으로 탈출하지 않고 남아 있던 조선의용대의 일부 대원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다. 김원봉은 과거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의 지휘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예하 부대에 독자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하려 했다. 김원봉의 이러한 항명 행위로 인해 지청천은 광복군을 온전히 운용할 수 없었고, 지청천과 광복군이 수행한 대부분의 작전은 김원봉의 예하 병력이 제외된 채 전개되었다.


김일성이 남침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병력이 필요했다. 이때 마오쩌둥은 1948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중국·북한 3개국 전략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에 따라 1949년 중국 인민해방군 내에 조선의용군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164·166사단을 편성하여 북한으로 보냈다. 그냥 몸만 보낸 것이 아니라 병기와 장비까지 휴대하여 보냈다.


중국 인민해방군에 소속됐던 이들 2개 사단은 1949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입북했다. 선양에 주둔해 있던 166사단(병력 1만여 명)은 사단 정치위원 방호산이 인솔하여 7월 25일 신의주에 도착, 인민군 6사단(사단장 방호산)으로 개편되어 사리원으로 이동했다. 이 부대는 한국군과 대치하던 옹진반도에서 38선을 넘어가 한국군 2개 중대를 전멸시켰다.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에 의하면 김원봉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직한 조선의용대는 80%가 연안으로 탈출했고, 그들이 북한에 들어와 6·25 남침의 주역이 되었다. 김원봉은 임정 요인들과 함께 귀환하여 남한에서 했던 활동은 신탁통치지지, 즉 찬탁운동이었고,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 좌익 공산주의자들의 결성했던 민전지지, 좌우합작 등이었다. 그의 주장대로 갔다면 대한민국의 귀결점은 공산화였을 것이다.


그는 1948년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월북하여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에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북한 정부 수립 후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에 해당하는 국가검열상,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당시 그의 위상은 북한 정권 내 서열 7위로 정말 잘 나가가는 시절이었다.


6·25 남침전쟁 때는 북한군 군량미 생산, 남파간첩 침투 등을 담당했다. 1954년 1월 26일 경향신문 보도에 의하면 “평양에 본적을 둔 간첩 김춘옥 외 4명을 체포해 이들을 취조한 결과, 김춘옥은 6·25 전쟁 당시 김원봉의 직접 지휘 하에 대한민국의 경제 혼란, 선거 방해, 모 정당 와해를 목적으로 남파되었다고 진술했다”고 보도했다. 기사에 의하면 이들은 6·25 전쟁 발발 이전부터 김원봉으로부터 간첩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결론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는 독립운동으로써 대단하게 한 것도 없는데, 남침에 앞장선 공산주의의 앞잡이들이자 민족의 적이었다.


이런 빨갱이들을 무슨 독립운동가니 하는 건 말도 안 된다. 빨갱이들이 말하는 독립은 바로 한반도 공산화요, 온 민족이 공산주의의 노예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