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되었건 옛날에는 유무형의 남녀차별이 "진짜로" 많았으니까 ㅇㅇ 

요건 진심이지, 그러니 기성세대들이 열심히 여자 표를 꾸러 다니지




(요기서 나온 게 훌라훌라 엉덩이춤)

보수주의 페미도 있긴 함.


김활란


이화여대 설립자



(대한민국 국부 트루먼과 함께 인증샷 :) )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서대문구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그해 8월 조병옥(趙炳玉)과 함께 대통령 구미특사에 임명되었다. 1950년 1월 한국여학사협회(韓國女學士協會)를 창설하고 회장을 역임했다. 8월부터 11월까지 제1공화국 전시내각의 공보처장을 지냈다.


반인반신과 함께 인증샷 :)


김필례, 김활란, 유각경 3인의 선구적 신여성을 주축으로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조선YWCA) 창설 이후 1924년 세계 YWCA 가입함으로서 
식민시대, 또 다른 차원의 민족개화운동이자 남성지배의 구습에 맞선 여권운동의 출발점이었던 한국 YWCA.


이 분의 여성 사상에 감명받은 분으로...



이희호 여사가 있네 ㅎㅎ


이희호는 친구와 함께 인사하러 김활란을 찾아갔다. 학교를 떠나는 마당에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지 스승에게 물어보려는 것이었다. 김활란은 1939년부터 이화여전 교장으로 있었다. 일제는 기독교 학교인 이화여전을 무슨 핑계를 붙여서든 폐교시키려고 했다. 이화를 지키는 것이 목숨만큼이나 중요했던 김활란은 친일단체에 가입해 활동하는 오욕도 감수했다. 그런 사정을 아는 까닭에 학생들은 여전히 김활란에 대한 신망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그때 김활란 박사가 ‘백인백승’(百忍百勝)이라는 글씨를 붓으로 써서 주셨어요. 백번 참으면 백번 승리하리라는 뜻이었지요. 이 말 속에 말 못할 고뇌가 담겨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활란은 이희호의 이화여전 스승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막 세상을 알아가던 시절의 이희호에게 삶의 좌표가 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스승이 일제의 압박 아래 황국신민 교육과 군국주의 시책을 선전하는 활동을 하는 걸 제자들은 지켜보았다. 일제가 조선인 징병제를 실시하자 김활란은 <매일신보>(1943년 8월7일치)에 “나라를 위하여 불덩이같이 끓는 피와 몸을 통틀어 바쳐 성은에 보답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렸으며 반도 남아의 의기를 보일 기회가 드디어 왔다”고 썼다.

또 이화여전을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바꾸는 조처가 내려진 1943년 12월에는 <매일신보>에 이렇게 썼다.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 여성으로서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김활란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학교가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바뀌자 수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떠났고, 남은 학생들도 마지못해 학업을 계속했다. 나중에 김활란은 자서전에서 그 시절의 심경을 이렇게 기술했다. “나는 그렇게 질질 끌려다니면서 그때까지 이화를 지켜보겠다고 버둥거리며 남아 있다가 이러한 일마저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나의 처사를 거의 후회하기까지 했다.”

이희호가 기억하는 김활란은 일본어를 잘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철없는 학생들이 김활란의 서툰 일본어를 들으며 히죽거리기도 했다. “영어를 그렇게 잘했던 사람인데, 마음에서 우러난 친일파였다면 일본어를 영어처럼 유창하게 하지 못할 리가 없었을 거예요. 그런 점을 생각하면 김활란을 자발적 친일파와 똑같이 보기는 어렵습니다.” 일본에 자진 협력하여 영달을 하고 재산을 불리고 동족을 괴롭힌 사람들을 단죄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김활란을 그런 부류의 친일파와 함께 묶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승만 박사의 가장 큰 잘못이 친일파를 불러들여 자신의 취약한 정치기반을 다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친일파를 단죄하기는커녕 오히려 중용한 것 때문에 대한민국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했고 불의가 득세하게 됐습니다.” ‘친일파의 죄를 물어야 한다. 동시에 그 시대의 어둠도 함께 보아야 한다.’ 이것이 친일 문제를 보는 이희호의 태도다. 그러나 이희호는 김활란이 5·16 쿠데타 직후 미국 정부에 쿠데타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고 박정희 군사정권을 지지한 데 대해서는 딱 잘라 비판했다.

이희호는 자신의 일제 말기 선택을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스무 살이 넘는 성인이었지만 전혀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 양성 과정을 마쳤어요. 학업을 중단하고 싶지 않았고, 또 학교를 그만두면 서산의 집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희호는 농촌계몽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그 과정을 견뎠다. 그런 선택 때문에 훗날 남편에게서 “당신은 친일파요”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성숙한 이희호를 만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흘러야 한다. 스물두 살 이희호의 마음은 아직 확고하지 못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688558.html#csidx4f64410f3dac0ea9e9bfb3f42f0dc49 



배은 망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