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대공습이 치명타였음


반상회 조직은 살아남아서 식량조달과 임시거처 마련을 위해 힘썼다. 군대가 파견되어서 시체들을 수습했다.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시체는 100구씩 모아서 커다란 공동무덤에 매장하였다. 3월 10일 아침부터 수십만 명 규모의 대탈출이 시작되었다. 철도는 빠른 속도로 복구되어 이들을 실어날랐다. 그제서야 히로히토 덴노는 방공호에서 기어나와 2시간 동안 폭격지역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신의 화신'이라는 덴노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흘겨봤다고.[출처 필요] 폭격 단 한 차례로 대략 가옥 25만 동이 파괴되었고 180만 명이 집을 잃었으며 도심 약 40 ㎢가 잿더미로 변했다. 사망자 숫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하게 집계하지 못했다. 정부는 12만 명이 사망했다는 신문보도도 발표하지 못하게 막았는데, 프랑스인 기자 로베르 기얭(Robert Guillain)은 사망자로 간주되는 피해자 수가 19만 7천 명이라고 보고된 문서를 접했다고 한다.

일본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민간인 83,793명이 목숨을 잃었고 40,918명이 중상, 이재민이 100만 명 이상 발생했다. 조선인은 약 1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합치면, 피해자가 약 20만 명에 달하여 피해가 원폭 이상이다. 공습 피해 및 소개[32]로 인하여, 종전 직후 도쿄 인구수는 진주만 공습이 발발하기 직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2시간 폭격에 도쿄불바다 여기서 공포심이 뼛속 깊숙하게 새겨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