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허스트의 '박제 상어'라는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구상했지만 이것을 직접 설치한 것은 그의 보조작가들과 고용노동인들이었다.

 대부분의 현대미술, 그 중에도 설치미술의 경우 현실에 그 작품을 구현하는 사람은 작가 본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들의 가치는 다른 미술 작품과 우열비교에 놓여지지 않는다. 누구도 그 노동을 다른 사람이 대신 했다 하여 그 아이디어를 폄훼하거나, 작품의 가치를 거부하지 않았다. 설사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미학계에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둘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김수정 작가는 어시스턴스, 보조작가를 5명 이상 두었었다. 그림을 종이에 그리는 행위가 매우 많은 노동력을 소모했음으로 때로는 작가의 감독아래 어시스턴스가 그림에서 채색까지 몇 컷을 도맡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 그림은 김수정 작가의 직접적인 펜길이 단 하나 들어가지 않았어도 절대적으로 소유권은 김수정 작가의 것이었고 이것은 예술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데 있어 '아이디어'가 가지는 가치가 얼마나 극단적이고도 절대적인지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지금에서야 이 보조작가의 노동력 절감을 컴퓨터들이 대신해주는 시대가 되었다지만, 그것으로도 시간에 쫒기는 사람들은 보조작가를 고용하고 있다.




 미술계의 흐름과 발전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 대중과 기존의 '인간의 육체적 노동력'이 미술에 무조건적으로 필요하다는 기성 미술계의 합작품이 만들어낸 조영남 화투 대작 논란. 본디 이런것에 관심없는 대중이 '조영남'이라는 대중 가수의 예술행위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논란이 커졌다.

이 사건의 결말은 미학적 인식이 부족한 절대 다수의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2심 재판부가 조영남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대법원이 2심 결정을 받아들이면서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재판부의 결정은 아래와 같았다.


- 화투를 소재로 한 해당 작품은 조영남의 고유한 아이디어였다.
- 대작 화가 송모씨 등은 조영남의 아이디어를 작품으로 구현하기 위한 기술보조에 불과했다. (모든 그림을 대작작가가 그렸음에도) 
- 구매자들에게 조영남이 일일히 직접 다 그렸는지의 여부는 반드시 필요하거나 중요한 정보라고 볼 수 없다.

 인간의 노동력과 손기술이 예술을 창작하는 행위에서 가지는 가치가 얼마나 옅어지고 있는지 우리는 그동안 인식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AI 그림 기술의 탄생은 창작자로서의 재능적 특권을 전혀 그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왔던 일반인의 영역으로 끌어내릴 정도로 '손기술, 노동력, 학습시간'의 단축을 이뤄냈다. 일반인들은 눈 앞에 예술이 놓이자 비로소 관심도 없었던 예술의 창작 가치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가장 처음 나타난 반응은 '인간 노동력의 부재' 그리고 그에 따른 '성의'의 부족을 지적했고, 그로인한 예술가치의 하락을 주장하는 사람이 더러 등장했다. 그들은 왜 캔버스에 그리는 작가에 비해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에겐 성의가 없다고 지적하지 않았는가? 음영과 채색을 자동으로 입혀주는 AI가 나왔을땐 어째서 입을 열지 않았는가? 쉽게 그리는 작품은 그만큼 가치가 떨어지는 예술이라 규정 할 수 있는가?

 타인의 그림을 멋대로 학습한다는 저작권과 윤리의식의 문제 또한 제고되었으나 AI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만을 학습시킬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일러스트레이터들 사이에선 AI에게 자신의 많은 그림들을 학습시켜 그것을 자신의 보조작가로 사용하는 움직임이 이미 시작됐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의식변화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지체라는 것이 발생한다. 

예술 창작에 있어 '노동력의 유무와 방식 따라' 예술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인식은 일종의 대중이 가진 문화지체 현상이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