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의 내용은 대체역사로 실제 역사와는 무관함.





제1장: 1865년, 역사적 분기점

1865년은 삼한 땅의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광무제 고조(光武帝 高祖) 이형을 연구한 대부분의 제국기, 공화국기 학자들이 입을 맞추어 짚는 역사적인 분기점이다. 이전까지 흥선대원군이 하자 하는 것에는 모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던 조선의 임금 이형이 이때 흥선대원군이 강력하게 밀어붙이던 사업에 제동을 걸고 막아섰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복궁의 중건이었다. 임금은 경복궁을 중건하겠다는 흥선대원군의 의사에 대단히 강력한 반대를 표명했다. 흥선대원군과 임금이 당시 논쟁을 벌일 당시, 임금은 아직 열다섯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자나 스승의 도움 없이 다섯 가지 반대 논거를 들어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을 막아섰으니, 이 다섯 가지 논거를 오대잔론(五大殘論), 즉 다섯 가지 큰 잔행(= 의를 해치는 행동)에 대한 논거라고 부른다. 오대잔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고는 지난 반백년간 비었다가 이제야 거미줄을 치웠는데 그것을 다시 탕진하고야 말 것이고,

둘째, 궐을 짓기 위하여 온 나라 장정들이 모이면 온 나라에 김을 맬 장정이 없어지고 말 것이고,

셋째, 궐의 들보를 올리기 위하여 무수한 나무를 벨 것이니 풍수의 근간인 청산이 무너지고 말 것이고,

넷째, 왜군에 의하여 불살라진 것을 덮어버리니 이는 곧 왜군에 의한 수치를 후대에 잊게 만들 것이고,

다섯째, 이미 창덕, 창경, 덕수, 경희 등 궐이 많음에도 새로운 궐을 지음은 검소의 덕을 잃고 사치하게 만들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이에 맞서서 경복궁 중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상소를 올렸다.



...(전략)...이에, 다시 태산처럼 선 군주의 위엄을 만천하에 공표하고, 또한 결국은 작금의 전하께오서 그 궐에 앉아 지내실 것이니 반드시 모든 백관이 결코 전하의 앞에 등을 보이지 아니하고 충과 의를 다할 것이옵니다. 높고도 높은 대궐의 용마루는 곧 백성들로 하여금 강인한 군왕이 그들을 보듬고 있음을 알게 하니, 이를 높게 세우는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고초하게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풀어 주는 것이옵니다...(후략)...



그러나 절대적인 논거 면에서 임금은 흥선대원군을 거의 분명하게 압도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도 왕실에서도 중건 반대 여론이 거셌다. 대신들이 보기에 명분은 임금에게 있었다. 초기 팽팽하게 대립하는 듯하던 논쟁은 점점 임금의 의견으로 기울어갔다. 임금은 15일간 아버지와 논쟁을 벌인 끝에, 논리만으로 흥선대원군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깨닫고 다음과 같은 강수를 둔다.



...(전략)...과인이 감히 친부의 뜻을 거역하고 그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여 근심을 안기었는데, 비록 한 마리 개나 쥐라 하여도 그 혈육의 뜻을 헤아리는 법이거늘, 내가 부덕하고 또 불초하여 친부에게 폐를 끼쳤다. 이는 불효이고 곧 인을 잃어버린 채 적이 된 것이니, 내 어찌 이 어지럽도록 높은 용상에 앉아 버틸 수 있겠는가? 왕실을 위하는 대원군의 뜻을 이제야 헤아려 법궁의 중건을 허가할지대, 이를 여지껏 헤아리지 못한 불초한 나는 곧 대통을 덕망 있는 다른 왕손에게 넘기겠으니 경들은 덕망 있는 자를 찾으라...(후략)...



제아무리 아들과 아버지라도, 임금 노릇 그만두겠다는 군주의 뜻에 신하가 동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흥선대원군은 이틀 정도 이를 두고 논쟁하다가 마침내 경복궁 중건을 포기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일으로 당시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예산은 추산치가 740만 냥에서 760만 냥 사이였는데, 해당 시점 조선의 1년 예산은 22만 냥, 통화량은 1,080만 냥에 불과하였다. 근대화 후 수백만 대군을 동원하면서 세계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패권을 유지해온 식민제국의 이미지를 연상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이질적이겠지만, 1860년대 조선의 재정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3배 가까이 재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파탄에 준하는 상태였다.


실록에서는 이 논쟁에서 임금의 승리를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상(임금)께서는 이 날 이기시고 그 이후로 패하지 않으셨다.




제2장: 제너럴셔먼호 사건

1866년 7월, 박규수 휘하 조선군이 미국의 상선이었던 제너럴셔먼호를 불사르고 그 선원들을 모두 나포했다. 임금은 박규수에게 그 선원들을 결코 죽이지 말고 모두 도성으로 송환하도록 명했다. 중간에 백성들이 던진 돌로 인해 두 명의 중국인 선원이 맞아 죽었으나 박규수는 무사히 이들을 모두 잡아들여 도성으로 송환시켰다.


임금은 이들을 문초하여 국적과 정보를 캐냈다. 그리고 이들이 미국에서 왔으며,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아시아에 대한 개항을 앞다투어 진행하고 있다는 이야기 또한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당시의 조선이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멍청이는 아니었지만, 단순히 중국이나 일본의 일을 주워 듣는 것은 이양선과 직접 교전하고 그들을 나포한 뒤 듣는 것과 체감이 달랐다.


흥선대원군은 제너럴셔먼호의 잔해를 건져 올리는 동시에, 동시기 청에서 유입된 서적인 [해국도지]와 [화륜신도설] 등을 통해 증기기관을 복제하는 것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얼치기로나마 3척의 증기선이 완성되었고 운행은 비교적 성공적이었으나, 운용에 익숙한 수군이 없어 곧 폐선되었다.


곧 임금은 이들이 조선에서 벌인 분탕질에 대해 세세하게 조사토록 했고, 민가에 포를 쏘고 약탈을 자행했다는 점을 들어 이들을 구금시켰다. 서양인 선원 다섯 중 교전으로 크게 다쳤던 하나는 구금 다음날 사망했고, 비슷하게 중국인 선원 네 명과 말라카 선원 두 명도 얼마 못 가 죽었다.


미국은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보고 청나라에게 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및 책임을 요구했으나, 청나라는 "조선은 속령이 아닌 독립국이며 이에 따라 해당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의 의무도 책임질 이유도 우리 청 조정에게는 없다"고 받아쳤다. 이에 미국은 조선을 "청나라조차 어쩌지 못하는 상당한 힘을 가진 지역강국"이라고 오해하게 된다. 그리고 청이 이와 같이 미국에 대답했다는 사실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임금은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적극적인 세력 투사를 원하지 않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후 병인박해와 병인양요가 있었으나, 흥선대원군이 추구하는 외교의 방향이 쇄국으로 격변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조선 내 정치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금은 지속적으로 대신들에게 밀서를 보내며 자신의 사람을 곳곳에 포진시켰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에서 활약한 박규수, 그리고 박규수의 참모 역할을 수행했던 문관 홍성익도 그중 하나였다. 동시에 임금은 중전 민씨를 맞아들이고, 영보당 궁인 이씨를 후궁으로 삼는 등, 아버지와 상관없는 가족들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임금의 입지는 알게 모르게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제3장: 신미전쟁의 시작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조선이 지속적으로 청나라를 통해 서양 문물을 조금씩 조금씩 유입시키면서 어깨너머나마 세계 정세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어질 때쯤, 조선 앞바다에 이양선 다섯 척이 나타났다. 수원 지역에서 문정관이 나가 이들과 교섭을 시도했는데, 이들은 미군이었으며 "고위 관리 혹은 국가 원수와 만나서 협상케 해 달라"는 입장을 고수하며 지속적으로 북상했으니 1871년, 신미년의 일이었다.


이들의 공식적인 입장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이었는데, 문제는 당시 조선의 병인박해로 인해 숨어 지내던 조선의 천주교도들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점이었다.



...(전략)...헌데 이와 같이 미 선원들을 크게 환대한 조선인들은 그들에게 술을 먹이고 재운 후, 갑작스레 신의를 배반하고 모두 베어 죽이니 살아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모르는 야만인들의 만행과 악적이 이와 같으니 포로 위협해서라도 그들을 징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후략)...



미군 총책임자였던 프레드릭 로우는 조선 조정의 공식적인 입장(미군 포로들은 억류되어 있으며, 제너럴셔먼호는 강으로 들어와 좌초되었기에 선원들을 퇴거시킨 뒤 불살랐다)보다 이들의 증언이 더 신빙성이 높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정황을 모르는 조정은 "미군이 동료들을 데려가려고 왔으니, 우선 동료들을 돌려보내고 그 뒤로도 패악하면 그때 싸우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주류였다. 특히 임금은 억류된 미국인들을 돌려보내고 그들이 가져온 무기를 교환하는 협상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고 박규수 등도 동의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은 지난날 이미 프랑스군을 물리쳤는데 어찌 이번에는 싸워 보지도 않고 두려워 떠느냐고 반대했다. 동시에 "미군 동료들을 돌려보내고 나면 저들은 입장을 바꿀 것이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나왔다.


미군은 한강까지 진입하여 하구 수심을 측정하였고, 이에 강화도의 조선군이 경고포격을 가하며 교전이 시작되었다. 미군은 당시 다섯 척의 전투함과 두 척의 지원함, 1,587명의 병력을 보냈다. 양측 도합 410여 문의 화포가 손돌목 일대에서 무차별적인 화력 난사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양측 모두 사정거리 밖에서 경고성으로만 쏘았기 때문에 사망자는 조선군 측 2명, 미군 측 1명에 불과했고 부상자는 조선군 측 15명, 미군 2명에 그쳤다.


곧 미국은 이 포격에 대한 책임을 주장했으나 조선은 무시했다. 이에 미군은 즉시 덕진진과 초지진을 공격해 점거하고, 어재연 이하 오백 명의 조선군이 지키는 광성보를 공격했다. 조선군은 필사적으로 맞섰으나 미군의 화력, 전투력, 그리고 무엇보다 사기가 비교되지 않았다. 미군은 조선군을 거의 전멸시키고 광성보를 점령했으며, 다시 한 번 조선 조정에 개항을 요구했다.


조선이 다시 한 번 묵살하자 이 전쟁의 총책임자였던 프레드릭 로우는 선택의 기로에 들어섰다. 고작 일곱 척의 선박과 1천 명의 병력. 이만 철수하든지, 아니면 이대로 조선 본토에 상륙하여 강제적으로 개항시키든지.


그의 선택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조선을 개항시키는 것이었다.




제4장: 한강 전역, 홍성익, 그리고 김포대첩

미군의 전력은 수가 적다고 무시할 만한 궤도를 까마득하게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 자체만으로 중소형 국가 하나를 능가하는 강력한 전력이었다. 미군은 보구곶, 용강, 용화산 일대를 휘몰아치면서 한강 하류에 진입했다. 판옥선 두 척이 요격에 나서자 포격하여 글자 그대로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뒤이어 용화산과 애기봉 사이로 진입한 조선군 3,500여 명이 미 함대를 향하여 포를 쏘아 10며 명을 죽이자, 미군은 우회하여 상륙한 뒤 조선군의 후미로 700여 명의 전투병을 투입했다. 이어서 조선군을 철저하게 기만하면서 수상 포격과 지상 기동을 병행했다. 남북전쟁으로 단련된 태평양 최강 미군과, 늙을 대로 늙어 빠진 아시아의 한 변방 약소국은 수적 우세로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정도의 격차가 아니었다.


미군은 용화산을 우회하여 3,500여 명의 조선군의 덜미를 붙잡고 뒤통수를 두들겨 팼다. 조선군은 1,875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고 제대 단위가 붕괴되면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때부터는 전투가 아니라 사냥이었다. 토붕와해되어 사방으로 흩어진 조선군은 많아야 대여섯 명씩 뭉쳐 있었고, 미군은 이들을 추격하면서 닥치는 대로 사살했다. 퇴로도 막혔고, 사방으로 미군함이 발포하는 포탄이 쏟아져 내렸다. 지휘관이었던 김유는 어찌 임금의 얼굴을 다시 보겠느냐며 한강에 투신했다. 조선 군인 50여 명도 그를 따랐다.


미군은 끝까지 포로가 되기는커녕 자결을 택하는 조선군의 모습에 놀랐지만 그냥 놀란 것에 그쳤다. 그것이 전황에 어떤 변화를 주지는 못했다. 조선군 3,500여 명은 고작 두 시간 만에 없어져 버렸으나 미군 희생자는 4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연이은 대참패에 조정에서는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흥선대원군에 대한 책임론이 대두되었다.


미군은 고란태 일대에 막사와 진영을 구축하고, 철저한 방비 하에 휴식했다. 민가에서 식량이나 물자를 약탈하기는 했으나, 프랑스군에 비하면 노략질과 학살은 덜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확인한 조정에서는 즉시 오군영 병력과 5,000여 근왕병을 끌어모았으며 보유하고 있는 모든 화기를 동원했다. 이어서 김포 일대에 독전장을 내려보내 1,000여 명의 민병들을 결집시켰다. 임금은 흥선대원군의 책임을 물어 군령권 일부를 환수하고, 앞으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자신이 책임진다고 밝혔다.


근왕병의 총사령관으로는 제너럴셔먼호 사건 당시 박규수의 참모이자 해당 시점 복원된 삼군부의 신무시위사였던 홍성익이 부임하였다. 당시 홍성익은 겨우 22세의 젊은 문신이었다. 그는 이 병력을 나누어서 일부는 한양도성 앞에 배치하고, 미군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 때, 와해되어 민가 사이로 달아난 병사들과, 김포 일대에 살던 어민들이 합심하여 밤에 미군을 공격했다. 병사들은 조총이나 총통을 격발하기 위한 화약을 한데 모았고, 이것에 긴 심지를 붙인 뒤 유포로 싸서 항아리에 담았다. 어민들은 이 항아리 3개를 들고 잠수하여, 한밤중에 미 해군의 3천 톤급 콜로라도 함(USS Colorado)의 아래에 가져다 붙였다.


3개 중 1개는 불발되었으나 나머지 2개는 그대로 유폭했고, 난데없이 흘수 아래에 구멍이 난 콜로라도 함은 무게중심의 붕괴로 격렬하게 선회하면서 바로 옆에 정박하고 있던 400톤급 모노카시 함(USS Monocacy)과 충돌까지 일으키면서 한강 하류 김포 일대에 좌초했다.


이 사태를 목격한 홍성익은 곧바로 전후좌우에서 조선 근왕병과 민간 포수들을 동원해 미군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이때 조선이 쏟아부은 포탄은 단 하룻밤 만에 병인양요 때 쓴 포탄의 총합보다 많았다. 미군은 질서정연하게 조선군에 맞섰고, 휘영청 둥근 보름달 아래서 미군 240여 명과 조선군 1,800여 명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동이 트기 직전, 뒤늦게 도성에서 출발한 기병들이 도착했고 홍성익은 이들을 즉시 투입했다. 미군은 탄약의 절반 이상을 적재했던 실질적 기함인 콜로라도 함을 잃었기 때문에 새벽 4시경을 넘어가면서부터 탄약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 때 조선의 기병 300여 기가 급히 미군의 진영을 향해 돌격했다. 조선 민병 1,000여 명은 무기가 변변치 않았기 때문에 미군의 화망 안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 미군의 탄약이 고갈되고 기병이 들어가 헤집고 다니기 시작하자 이들은 창칼을 들고 후장식 소총 앞에 돌진했다.


조선군의 피해는 무려 2,500여 명을 넘어섰으나, 그 대가로 받아낸 것은 결코 작지 않았다. 미군은 400여 명이 포로가 되거나 곳곳으로 도주했고, 600명 이상의 사상자를 감수했다. 홍성익은 이 전투를 [고란태파미병장]이라는 장계를 올려 보고하고, 미군을 궤멸시켰음을 조정에 알렸다. 사관들은 이 전투를 [김포 대첩]이라고 기록했다.



삼가 적을 무찌른 일로 아뢰나이다. ...(중략)... 그리하여 사방에서 옥죄며 북을 치고 포를 쏘며 적들을 깨뜨리고 막사는 불태웠으며, 말을 타고 들어가 짓밟아 죽인 적이 기백을 넘었사옵니다. 사로잡은 적은 421명이오, 목베고 밟아 죽인 적은 608명이니, 남은 적들은 남은 병선 한 척을 몰아 급히 한강 하류로 나갔사오나 모래톱에 걸려 현재 그 포를 내밀고 대치하고 있사옵니다. ...(중략)... 일전에 법국(프랑스)이 남만에서 행하기를 그곳 (사람들)에게 불공정한 조약을 강요하여 종국에는 속령으로 하였다고 하였는데, 과연 이들 또한 그와 같은 목적으로 왔을 것이고 또한 탐오하므로 앞으로 이 같은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지금 즉시 이들의 높은 군관이나 중국을 통하여 교섭하여 실로 공정한 조약을 선수쳐서 맺어버리고 뒷말이 없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사려되옵니다.


- 고란태파미병장 -



물론 광성보 일대에서 1,000여 명, 용화산에서 3,500여 명을 잃었고 김포에서도 2,500여 명이 죽었기 때문에 이 전투를 "대첩"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느냐에 대한 논쟁은 사관들 사이에서 많이 일어났다. 그러나 사관 한 명이 "이와 같이 맹위를 크게 떨쳐, 앞으로는 비록 우리를 지도에서 찾지 못할 아둔한 나라라도 조선 두 글자를 업수이 여기지는 못할 것인데 이를 대첩이라 칭하지 않으면 무엇을 대첩이라 하겠느냐"고 우겼기 때문에 대첩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몰랐지만 이것은 서구 열강 국가의 정규군이 비열강 국가를 상대로 얻은 치욕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 전쟁을 패배하는 1895년까지 서구 열강 최대의 치욕으로 남았다. 동시에 유럽 열강들이 미국을 크게 우습게 여기는 까닭 중 하나가 되었고, 거대한 잠재력을 가진 미국이 팽창정책에서 크게 위축되며 인류 역사에 큰 변곡점을 일으키는 사건으로 작용했다.


동시에 조정 내에서는 흥선대원군이 군령권을 임금에게 넘겨주자마자 임금이 미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으므로, 흥선대원군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고 임금의 입지가 확대되었다. 임금은 홍성익의 의견이 옳다는 판단을 내리고, "앞으로 양이들이 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양이들이 득 볼 것 없는 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논거로 미국과 통교를 결정했다. 임금은 당시 붙잡힌 미군 지휘관 존 로저스를 자신의 앞에 데려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상이 말하기를,


"그대들은 다른 나라와 통교하자고 할 때 항상 이와 같이 병선과 포를 끌고 와서 화의를 제의하는가?"


하니, 미관(米官. 미국 군관: 여기서는 존 로저스를 뜻함)이 대답하기를,


"병선과 포를 끌고 오지 않고 보통의 배를 끌고 오면, 야만적인 국가들에서는 교섭조차 하지 아니하고 단지 쏘아 부술 뿐이니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하였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그대들은 다른 나라와 통교하고자 할 때 문관이 아닌 무관을 보내어 교섭하는가?"


하니, 미관이 대답하기를,


"병선과 포를 거느리고 나아가야 하니 무관이 교섭의 주체가 되는 것 뿐입니다."


하였다. 하니 상이 다시 묻기를,


"허면 만약 그대들이 우리를 크게 깨뜨리고 도성을 향하여 포를 쏘아, 마침내 과인을 밖으로 잡아 끌어내어 굴욕스러운 문서에 어보를 찍게 하려 한다면, 그대가 승인한 그 문서를 그대들의 백리새천덕이라는 국장(國長: 당시 조선은 President를 무엇이라 번역할지 몰랐기 때문에 "백리새천덕"으로 음역하고, 이를 국가의 장이라는 뜻으로 국장으로 뭉뚱그림)이 승인한 것과 같이 하는가?"


하니, 미관이 대답하기를,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니, 상이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높은 관리를 보내라 함은 무슨 이유였는가?"


하니, 미관이 대답하기를,


"다만 청에 있는 공사를 통하여 본토와 교섭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크게 기뻐하며 무릎을 치고 미관에게 명하기를,


"그렇다면 참으로 잘 되었다. 오늘 과인은 미국과 통교하기로 결정하였으므로, 조약의 초안은 우리가 잡을 것이니, 그대들은 단지 수정을 요구한 후 서명하면 될 것이다."


하였다.



패전에 기겁한 청나라 주재 미국 공사 프레드릭 로우는 허겁지겁 조선으로 달려와 교섭을 시작했다. 미국이 불평등 조약이나 이권 등을 요구하면 조선은 그럼 포로들을 꿀꺽할 테니 꺼지라는 식으로 나왔다. 이로서 조선은 미국과의 통상조약, 이른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된다. 조문은 12가지이며 매우 길지만 핵심적인 내용만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1, 조선국은 자주국이며 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함.

2. 무역을 할 때는 서로의 세관조치에 의한 관세를 부여할 수 있음.

3. 두 국가가 서로의 해역에서 표류할 경우 도울 의무가 있음.

4. 조선은 부산, 원산, 인천을 개항하되, 미국은 해당 항구에 군함을 보낼 수 없으며 오직 상선만 보낼 수 있음.

5. 개항된 항구에서 치외법권은 인정하지 않으나, 각 항구에 미국인 고문을 두고 재판에 있어 부분적인 개입을 허용함.


1번에서 조선은 "자주국" 조항에 있어 작은 불만이 있었는데, 조선 일부 관리들은 "여전히 청에게 조공 중이다"는 점을 들어 "자주국에 준하는 상태"로 애매하게 규정하기를 원했다. 그러자 임금은 "이것을 명분으로 조공을 폐해버릴 것"이라는 폭탄발언을 해서 조정을 한바탕 뒤집어 놓았다.


2번은 관세 이야기로서, 처음에는 관세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조선이었지만 설마하니 조선이 관세를 아예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한 프레드릭 로우가 관세 조항을 협상할 당시 주저리주저리 떠든 것을 통해 그 원리에 대해 감을 잡고 넣은 조항이었다.


5번은 앞뒤가 모순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치외법권의 허용을 절대 인정하지 않겠다는 조선의 강경한 입장과, 법 집행의 공정성과 근대성에 강렬한 불신을 표하는 미국의 입장이 동시에 반영된 결과였다. 특히 고문에 대한 부분이 큰 논쟁거리였는데, 임금은 오히려 "그대들의 나라에서는 사람을 때리지 않고도 법 집행이 공정하다 하니, 참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조선 또한 그 방식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장기적인 법의 근대화를 위해 고문을 들이는 선택을 했던 것이다.


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통하여 조선은 마침내 거대한 세계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후 세계 최악의 침략자이자 식민 제국으로 급부상하는 대한제국이라는 결과론적인 해석을 통해 이를 두고 "아시아 세계정세의 격변", "악마가 눈을 뜬 것"이라는 식으로 표현하곤 했지만, 처음 조선이 세계에 발을 들였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때의 조선은 단지 당장 제국주의 앞에 그 스스로의 앞가림조차도 할 수 있을지 미심쩍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가난한 약소국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