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은 역사적 불안 때문에 전쟁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러시아의 전면침공 첫날, 크리스티안 린트너(Christian Lindner) 독일 재무장관은 당시 독일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 안드리 멜닉을 만났다. 멜닉이 나중에 이야기했듯, 린트너는 단순히 우크라이나의 주권이 불과 "몇 시간(few hours)” 남았다는 이유로 무기지원을 거부하거나 러시아의 SWIFT 퇴출을 거부한 게 아니었다.


린트너가 러시아 점령하의 우크라이나 괴뢰정부라는 미래를 논할 준비를 하고 있었음이 명백해졌다. 이는 당시 서방의 일반적인 태도를 반영한 것이다. 당시 서방은 우크라이나가 그냥 항복하면 일이 더 쉽게 풀릴 것이라 생각했다. 러시아의 제노사이드 전쟁에 있어 사람들이 보통 간과하는, 명백하고도 불편한 진실이 있다. 단순히 침략자가 계획하고 저지른 게 아니라, 구경꾼들이 방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이다.


세계 민주주의에 있어 가장 큰 타격은 전쟁 자체가 아니다. 그렇게나 "다시는 안 된다(never again)"라는 구호를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및 서방국가 대부분이 다른 유럽국가가 주권, 자유 및 독립을 박탈당하고 점령당하는 걸 미리 동의하고 받아들였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게 사실이 아니었다면 키이우에 위치한 대사관에서 철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방은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좋은 전쟁(good war)을 벌이고 있다. 무엇보다 현재 전쟁의 경과를 봤을 때, 서방은 여전히 자신의 전쟁이 아닌 것마냥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전 및 도발 방지라는 상아탑(ivory tower : 속세의 근심 걱정과 격리된 장소나 상황) 언어로 합리화된 서방의 정치적 담론은 여전히 기본적으로 어떻게 하면 침략과 죽음의 위협이 우크라이나에 제한되도록 할지에 대한 얘기다. 기본적으로 서방은 항상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우려했다.


이러한 두려움에는 핵심적인 이유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서방의 심오한 비혁명주의(non-revolutionsim)다. 우크라이나는 이제 독일이 그토록 축하했던,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소위 평화혁명(Friedliche Revolution, Peaceful Revolution)에 대해 상상도 못할 대가를 치르고 있다.


평화혁명은 독일에서 사실상 국가철학자 수준인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에 의해 "따라잡기 혁명(Die Nachholende Revolution, catch-up revolution)”이라고 불렸는데, 이 용어는 공산주의  블록 붕괴 이후 근본적으로 서방측이 보는 동유럽의 역할을 드러내는 징후다.


동유럽에 할당된 유일한 임무는 실제 역사적 경험과 관계없이, 단순히 서방을 따라잡는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따라잡기 혁명”이 "역사의 종말(프랜시스 후쿠야마 Francis Fukuyama, 1989)" 선포 후 서방의 일반적인 행보를 답습한 끝에 결국 “따라잡기 퇴보(regression)”가 되어버렸음을 단적으로 시사한다.


러시아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승리는 서방에게 있어 진정한 혁명을 의미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럽내에서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EU과 NATO의 확대가 필요하지만, 지금은 표면적인 것에 그친다. EU가 2014년 유로마이단의 정치적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과 같은 이유다.


시민들이 아고라를 되찾았다는 점에서 유로마이단 혁명은 유럽을 민주주의, 정의, 반과두정치, 자유의 뿌리로 되돌렸다. 유로마이단은 혁명의 성격으로 볼 때 근본적으로 유럽적이었고, 오늘날의 EU에 비해서도 너무나 유럽스러웠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이 통과하지 못한 시험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로마이단은 단지 흥미진진한 혁명적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로마이단은 오늘날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잔인한 침략전쟁에 맞서 생존하고 효과적으로 저항하도록 만든 이야기다. 우크라이나는 사실 세 번에 걸쳐 유로마이단을 경험했다. 내용은 다르지만 모두 동일한 정치적 지향점을 가지고 일어났다.


2014 년 일어난 첫 번째 유로마이단은 사회에 대한 권위주의적이고 유혈이 낭자하는 공격에 성공적으로 저항하는 혁명적 유로마이단이었다. 2019 년 일어난 두 번째는 선거 유로마이단이다. 실존적으로 중요한 순간 국가유지가 가능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이다.


세 번째는 2022년 2월 러시아 침략에 반대하는 전국이 하나의 무장혁명이 된 전쟁 유로마이단이다. 특히 첫 번째(2014년)와 마지막(2022년)을 나란히 놓고 보는 게 핵심이다. 2014년 유로마이단은 내부의 압제자, 즉 범죄적 독재자에게 장악된 국가의 억압기구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반면 2022년의 유로마이단은 외부의 군사적 압제자에 저항하기 위해 통합된 나라의 모습이다. 따라서 유로마이단의 역사는 혁명이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진보적인 방향으로 국가를 개선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이게 바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절멸전쟁을 시작한 이유다.


서방이 러시아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승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그 자신의 식민주의적 유산과 현재의 탈식민주의적 입지 때문이다. 서방은 식민주의의 역사를 과거로 밀어내 버렸고, 유럽 내 다른 지역에서의 식민주의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양심이 없는 걸수도 있지만, 자기 인식(self-recognition) 때문일 수도 있고 서방 자신도 현재진행중인 이러한 억압에 직접 연루돼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 동부는 서방의 탈식민주의 담론에서 잘 보이질 않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 담론이 매우 서방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유럽은 서방과 러시아 대도시 사이의 주변부로 여겨졌고, 최소 수십년간, 때론 수세기 에 걸쳐 러시아 제국주의와 투쟁해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은 동유럽을 상대로 지배적인 접근 방식을 취해왔으며, 독일의 (표현부터 잘못된)동방정책(Ostpolitik)이 그 예다.


독일의 동방 정책은 모스크바 제국주의를 적극적으로 다루지 않고 기피했다. 그리고 EU가 소위 동부 파트너십이라고 부르는 동유럽 정책을 수립했을 당시, 변경의 "이웃(neighborhoods)"에 대한 정책이라는 말을 썼다.


탈소련 시대 동유럽 국가들은 다양한 공급 및 자원 측면에서 EU에 막대한 이익을 제공하는 국경 지대 내지 완충지대 역할을 부여받았음에도, 동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고토회복주의(revanchism : 범슬라브주의, 범게르만주의, 하나의 중국 등이 해당됨)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EU는 유럽의 역사적 분단과 동유럽의 정치적 고립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억눌려 있는(repressed) 식민주의 사고방식에 매몰돼 소위 덜 문명화됐다는(under-civilized) 동유럽의 모습과 자신들을 분리했다.


그러나 유럽에는 참 이상한 점이 있다. 바로 그 중심이 동쪽에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대륙 전체와 그 너머의 운명이 전장에서 결정되고 있는 그곳 말이다. 구 서방 대도시, 그 중에서도 특히 베를린과 파리가 탈식민지 시대에 하던 것마냥 탈소련 유럽국들의 본격적인 참여를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문제로 시간을 질질 끌고 무기 배달이 지연되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무력(또는 폭력, violence)을 휘두를 권한과 그 권한이 누구에게 있냐는 것이다. 이는 식민주의 역사에 있어 항상 결정적이었다. 헤게모니적 관점에서 볼 때, 피식민지인들은 무력을 휘두를 권한이 없었고, 따라서 이길 수도 없었다. 자신의 재량에 따라 권한을 완전히 소유하든 포기하든 할 수있는 것은 오로지 식민주의자들 뿐이었다.


서방이 우크라이나의 승리가 의미하는 바를 두려워하는 세 번째 이유는, 시간(time) 및 전쟁 자체와 관련이 있다. EU의 이념적 공통분모인 "다시는 안 된다(never again)" 슬로건은 왜곡된 의미를 가지고 자기 실현적 예언이 되어버렸다.


실제로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라는 원칙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전쟁은 현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절대 상상도 못할 일이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EU는 평화의 개념을 페티쉬화하면서 전쟁의 현실을 완전히 억눌렀지만, 억압받는 존재들이 다시 나타났을 때에는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차이텐벤데(Zeitenwende : 시대전환)라고 불렀던 바로 그 순간, 즉 문자 그대로 시대전환이라고 할만큼 준비가 안 돼 있었고 이는 획기적인 변화였다. 사실 특히 독일의 경우, 차이텐벤데 선언은 오히려 그 반대의 의도를 숨기고 있다.


즉 일단 현상태에 머무르다 보면 결국 상황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그러니 차이텐벤데의 진짜 정치적 이름은 오히려 차이트페어슈벤둥(Zeitverschwendung), 즉 시간낭비라고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지금 서방을 위해 시간을, 벌고 매일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서방의 계속된 지연 및 행동 불능을 햄릿(Hamlet, William Shakespeare)을 인용해 설명하자면 “Time out of Joint(시간 또는 타이밍이 맞지 않음 : 무질서, 혼란 등)”라고 할 수 있다. 또다시 수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피를 흘린 후에야 침략자에게 필요한 제재를 가하고, 무기가 절실히 필요한 우크라이나에 최소한의 무기를 전달한다는 심오하고도 사악한 논리다.


지난 70년간 EU에서는 유럽이 역사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나 그 역사의 교훈이란 게 결국 시간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결국 제때 행동한다는 교훈이 아니라면 역사를 얘기해봤자 대체 무슨 소용일까?


역사에 대해 그렇게나 많이 떠들어대면서 행동이 굼뜨다면, 아마 담론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일수도 있다. 차이텐벤데는 사실 서방이 진정으로 현대적(contemporary)이기도 어렵고, 시대적 요구에 보조를 맞추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정치적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때와 장소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해야 비로소 적절한 정치적 행동을 취할 수 있다. 혁명이나 전쟁 같은 폭력적 사건은 특히 시간이 중요한 문제다. 필요할 때 행동하지 않으면 상황은 악화되고, 더 폭력적으로 악화될 것이다. 불행히도 유럽은 이미 전쟁중이니, 서방은 더 단호하고 직접적으로 행동해야 할 것이다.


서방은 현재로서는 서방이 전쟁에 말려들지 않고 지금의 형태로 계속될 것이라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서방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실제 선택이란 러시아 침략자를 물리치고 우크라이나의 영토 수복을 위해 지체없이 모든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수단을 동원하던지, 아니면 침략이 다른 곳에서 확산되고 동유럽이 다시 전쟁터가 되었을 때에야 개입하던지, 둘 중 하나뿐이다.


- 이 칼럼은 키이우 시각문화센터연구장 바실 체레파닌이 포린폴리시에 기고한 칼럼임.


요약)

1) 서방은 초기에 우크라이나가 항복하면 그냥 일이 더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2) 탈냉전 이후 서방은 동유럽을 서방과 러시아 사이, EU의 주변부 취급하며 단순히 자신들을 따라오게 만드는 데 집중했다.


3) 서방의 "역사" 담론은 단순히 "전쟁은 있을수 없다"라는 데 치중됐을 뿐, 전쟁을 막기위해 시의적절하게 행동하는 법은 논하지 않았다.


4) 서방에게 선택지란 키이우를 지원해 침략에 승리하던지, 아니면 동유럽으로 불길이 번진 뒤에야 부랴부랴 대응하던지밖에 없다.



사실상 유고슬라비아 내전 때 수수방관하던 유엔하고 서유럽의 태도랑 별 다를 게 없다는 건데...


그 실수를 반복하는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