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광명천지(光明天地)

조선은 스스로의 국호를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Great Kingdom of Korea라고 명시했다. 대신 중 일부는 "Korea는 고려에서 유래하였으니 고려를 무너뜨리고 수립된 조선이 이를 쓰는 것은 맞지 않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임금은 "왕씨의 고려가 아니라, 고구려의 별칭인 고려를 따라 한때 삼한 가운데 막강했던 고구려의 역사를 다시 쓰겠다는 의미"라고 밝혔지만, 핑계일 뿐이었고 실상은 대외적으로 잘 알려진 명칭을 쓰기 위함이었다.


동시에 이에 맞추어 국호를 조선에서 대조선국(大朝鮮國)으로 공식적으로 바꾼다. 동시에 임금의 호칭 또한 "대군주 폐하"로 격상한다. 자주국인데 제후의 예를 따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청나라에 대한 조공 또한 사절로 바꾸었으며, 외왕내제에 가까운 방향성으로 시스템을 전환해 나갔다. 국가 제례 때 사용하는 모자 또한 9류 면류관에서 12류 면류관으로 바꾸었으며, 용포에 붙이는 용보 또한 육조룡으로 바꾸었다.


이에 맞추어 대군주는 국가 제도에도 메스를 댔다. 가장 먼저 칼을 댄 것은 조세제도로, 대군주는 세율을 올리고 무명잡세를 혁파하였다. 동시에 모든 종류의 노역을 폐하고 모든 조세를 금납형으로 일원화했다. 기존에 세금의 일환이었던 군역은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군포제로 전환되고 직업군인을 양성하는 방향성으로 움직였는데, 대군주는 서구식 징병제를 급속도로 도입시켜 상비군과 속오군(예비군)으로 나뉘는 조선군의 시스템을 구축하도록 했다.


특히 군제는 당시 대군주가 언급하고 논한 것이 실록의 사초에서 하루에 두 기사 이상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확인될 정도로 집중하던 부분이었다. 대단히 빠른 속도로 서양식 군제를 흡수한 조선은 기존 사용하던 편제를 서구식으로 뜯어고쳤다. 다만 용어 자체는 바꾸지 않아서, 현재 사용되는 용어 가운데 사단은 기존 조선군의 영(營), 연대는 부(部), 대대는 사(司), 중대는 초(哨)와 같은 식이다. 사단, 연대, 대대, 중대와 같은 편제 용어는 원래 일본식 번역이며, 후일 만주에서 창설되는 민병 조직이자 대한제국 역사에 가장 거대한 영향을 끼친 군사집단 "사포대"에서 차별화 명목으로 도입하게 된다.


모든 남성이 19세에서 20세까지 2년간 의무복무를 하고, 20세부터 60세까지는 예비군으로 두는 대한제국식 징병제는 이때 확립되었다. 물론 시행 초기였던 동시에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각 항구가 자리잡은 도시와 경기도에서만 제한적으로 시행, 1만 5천의 상비군만으로 일단 만족했고, 이것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10만이 넘는 상비군과 30여만의 예비군을 갖추게 되는 것은 1879년, 극동대전 직전에서야 마무리되었다.


세폐 개혁으로 조세제도가 확립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땅에서 나는 지세에 불과했고 당시 성업하던 상인들에 대한 세금제도는 미비한 상태였는데, 대군주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이것에 대한 법령도 논의하도록 했다. 물론 논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 설득 끝에 미국으로부터 두 명의 경제 고문을 불러들였다.


동시에 군사 교육을 위한 교관을 불러들여야 했으며 이를 위해 미군 교관 24명이 조선에 불러들여졌다. 이들은 각지에서 조선 상비군을 훈련하는 동시에, 예비군 계층의 확대를 위해 예비군 대상에 대한 군사 교련 또한 맡았다.


이와 같이 조선이 급속도로 군대를 확충하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미국 총기회사들은 곧 조선군이 수만 단위로 늘어날 것이라고 여겼다. 이에 따라 당시로서는 상당한 최신형이었던 레밍턴 암즈의 레밍턴 롤링블럭 소총 1,000정과 탄약 5천 발이 조선에 헐값에 공여되었는데, 레밍턴 암즈는 당시 조선의 제식소총으로 이것이 채용되기를 바랐던 듯하다.


대군주는 레밍턴 암즈의 속내를 꿰뚫어봤고 이것은 실록에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증명된다.


...(전략)...


하니, 병조판서가 아뢰기를,


"서로 포를 쏘고 적으로 대하던 것이 언제인데, 벌써부터 이와 같이 많은 병장기를 선뜻 내어주는 것에는 틀림없이 어떤 속내가 있어서일 것이옵니다. 청컨대 허하지 마소서."


하였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저들의 병장기는 나라의 병창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인들이 상인들과 뜻을 모아 세운 상전(商廛. 본래 company의 번역이었으나, 후일 대한제국의 경제가 거대해지면서 "재벌"을 가리키는 단어로 변질됨)에서 만들어, 본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 판다고 하는데, 본디 상인들이란 나라 사정보다는 자신의 주머니 사정을 살피게 마련이다. 일전에 듣기로는 저들의 총에는 아무 탄환이나 들어갈 수 없고 오직 그것에 맞추어 따로 만든 환(丸. 탄환)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니, 우리에게 총을 주고 나면 지속적으로 우리가 그 환을 구매할 수밖에 없을 것임을 분명 알고 하는 일이다."


하고, 또 상이 말하기를,


"또한 이 총을 쓴 후에 우리가 실로 놀라고 훌륭한 총이라 여기면 반드시 마음속으로 다시 구입하고자 할 것이니, 이 또한 장사하는 이들의 계책인 것이다. 장사꾼들이 자신의 곳간 사정 외에 다른 무슨 사정을 살피려 하겠는가? 이것을 수락한다고 해서 우리에게는 해 될 것이 없고, 훗날 이들의 계책에 넘어가 그 총을 다시 구입한다 하여도 단지 사야 할 총을 더 산 것 뿐이므로 또한 우리에게 해 될 것이 없다."


하였으므로, 병판이 따랐다.



그리고 또 다른 개혁안은 바로 서원이었다. 신미양요 후 책임의 포화를 두들겨 맞고 권좌에서 내려온 흥선대원군이 가장 결정적으로 단행했던 일 중 하나가 서원의 혁파였는데, 이로 인해 많은 선비들이 당시 "서원을 복구하게 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곤 했다.


이에 대군주는 놀랍게도 서원의 복구를 허가했는데, 흥선대원군이 깜짝 놀라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사대부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결국 서원 복구는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군주는 오히려 이를 역이용할 계획이었으니, 서원이 복구되고 곳곳에 다시 서원 건물들이 사대부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세워지자 "서원이 다시는 이전과 같이 패악질을 부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모든 서원에는 관아와 조정에서 내려보내는 감독관이 상주할 것이고, 또한 팔도의 감찰사들은 수령뿐 아니라 서원까지 감찰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으로 모든 서원에 파견된 감독관들은 단지 패악질을 막는 감독관이라 했지만, 서원을 폐할지 말지에 대해 결정할 권한을 갖고 있었고, 대군주는 이들을 통해 전국 각지의 서원들의 시설, 교육 체계, 모시는 위인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분야에 깊이 관여, 간섭했다. 대군주는 서원을 복구하도록 허락한 후 패악질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교육제도의 기틀을 잡는,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 된 것이다.


곧이어 조선은 미국으로 50여 명의 유학생을 보내고, 오스트리아, 대영제국,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 제국 등과 매우 급격하게 통교하면서 국제무대에 나섰다.


한편, 당시 청나라는 조선이 보낸 국서에 뒤집어졌다. 일단 그 국서에서 쓴 단어들부터가 참으로 오만불손하기 그지없었다. 자국 임금을 "대군주 폐하"로, 국가의 이름을 "대조선국"으로 명시했으며, 한양을 적을 때는 오직 황제가 주재하는 도시에만 붙일 수 있는 "곡하"라는 명칭을 썼으며, 미군을 격퇴한 것을 "적들이 많은 병선을 끌고 들어왔으나, 과연 관군민이 합심하여 뜻을 모으니 적군에 대하여 힘을 크게 떨쳐 그들을 조유(詔諭. 황제가 오랑캐를 깨우친다는 뜻)했다"와 "적선을 당파하였다"고 명시하였다.


여기에 동양 특유의 모호한 국서 표현이 거대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이 구체적인 미군함의 수를 적지 않고 "많은 병선"이라고만 언급하고, 또한 어떻게 이겼는지 적지 않고 "힘을 크게 떨쳐 그들을 조유했다"와 "적선을 당파했다"고 적었던 것이 청나라 조정을 한바탕 난리법석으로 만들었다. 여기에 베이징 주재 미국 대사였던 프레드릭 로우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경질되자 청나라는 조선이 미국이 감행한 엄청난 규모의 침략을 완전히 분쇄했다는 오해를 하고 말았다.


이하는 당시 청나라 조정의 논의를 담은 청실록 사초의 내용이다.


...(전략)...


예부상서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해동의 땅은 참으로 범하기 어려워서, 이미 한나라 시절에 고구려에 의하여 요동 태수의 목이 잘렸고, 조위는 관구검을 보내어 고구려의 도성을 쳤으나 결국 취하지 못하였습니다. 수 양제는 백만대군을 일으켰으나 모두 수장당하였고, 당 태종 또한 고구려를 이기지 못해 돌아왔습니다. 거란족은 세 번이나 고려를 쳤으나 역시 몰살되었고, 몽고제국은 서른 해 동안이나 고려를 공략했으나 끝내 그 땅을 얻지 못했습니다. 일전에 왜인들에게 조선이 노략당하고, 또한 태종(= 홍타이지)께서 정벌하실 때 그 용력이 퇴락한 바 있어 한동안 잊고 있었으나, 동이족은 본디 그 무략에 있어 옛 돌궐이나 토번에게도 비하는 사납고 흉포한 족속임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니 황제께서 매우 두려워하셨는즉, 병부참의가 아뢰기를,


"이것은 달리 말할 바 없고 단지 고구려의 재림일 뿐이니, 섣불리 단지 그들의 군주를 높이기 위한 국서의 가소로운 몇 자를 문제삼았다가 이들이 노하여 끝내 옛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요동을 범한다면, 현재의 우리 조정으로서는 이를 당장 막을 도리가 없사오니, 우선은 큰 나라의 아량을 보여 이를 꾸짖지 않음도 또 하나의 계책이 될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황제께서 조선의 국서를 문제삼지 않으신 것이다.


고구려의 재림이라는 당시 병부참의의 말은 이후 대한제국의 팽창과 연결되어 "대한제국의 팽창을 예견한 청나라 관리"라는 식으로 인용되곤 했는데, 실제 사초를 들추어 보면 글자 그대로 "조선이 다시 강군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일 뿐이다. 이조차도 당시로서는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 조선군은 무장이 부족하여 미국이 남북전쟁에서 쓰다가 버리려던 야전포나 개틀링을 허겁지겁 긁어오는 군대였다.


또한 한양도성을 필두로 조선 팔도 곳곳의 대도시들에 하수도 등을 확충하기 위한 사업도 시작되었다. 예산의 부족으로 인해 별도의 임금 지불 없이 이전처럼 백성들을 역부로 징발해 진행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를 두고 일부 식자들은 "분명 신역을 없앤다 하고 모두 금납화하더니, 이제는 그것을 모두 금납화하여 이전의 용력을 다 세금으로 바치고 나서도 또 역에 동원되니,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라고 상당히 합리적인 비판을 가하기도 했지만, 대군주는 묵살하였다.


이어서 조선에서 가장 큰 항구였던 제물포(인천), 원산, 부산포를 조약대로 개항했다. 한양에는 미국, 오스트리아, 대영제국, 러시아 제국, 프랑스 등의 공사관이 세워졌다. 이에 맞춰서 조선도 전권대사나 공사를 파견해야 했는데, 당장 태평양 건너에 상시 외교관을 둘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에 우선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으로 답례했다.


대신 조선은 청나라에 통교를 요구, 1877년 말경에 청나라 공사관을 들이는 조건으로 북경에 조선 공사관을 세웠으니 조선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공사관이었다. 청나라도 어리석기만 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조선이 대등한 외교관계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당장 조선에 척을 질 의사는 전혀 없었으므로 이를 승낙하였다. 미국에 조선의 공사관이 세워지는 것은 1881년 간도 참변에서 미국의 중재가 있고 나서의 일이었고, 러시아에 조선의 공사관이 세워지는 것은 요동전역 직후인 1879년의 일이었다.


또한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통교하고, 조선 수군의 최대 거점이었던 통영에 근대식 조선소를 설치하기 위해 노력했다. 조선에 제대로 된 국산 전투함이 들어서는 것은 1880년대 후반에 들어서이지만, 이는 미국으로부터 중고 전투함을 구입하는 것이 저렴했기 때문이지 능력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1870년대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 당시 이미 구식화되었음이 확인된 연안전투용 증기 외륜 무장상선과 중소형 비증기선 목재 프리깃들을 처분하느라 바빴는데, 열강 사이에서는 쓰레기보다 못하면 못했지 그 이상은 아니었던 이 전투함들이 당시 동양 세계에서는 상당한 근대식 전력으로 군림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미제 목제 슬루프 2척(250톤급)과 깡통외륜선(Tinclad: 남북전쟁 당시 연방군이 목재 상선에 철판을 대서 만든 임시 외륜 전투선) 4척을 구입하고, 동시에 신미양요 당시 좌초되었던 콜로라도 함과 모나카시 함을 건져 올려서 고쳐 배치했다. 대군주에 의하여 콜로라도 함에게는 "충무", 모나카시 함에게는 "무의"라는 함명이 새로 하사되었다.


사실상 쓰레기를 돈 주고 사 온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구입하는 것에 들어간 비용은 조선 수군 전라좌수영 1년 예산에 필적하는 거액이었다. 조선은 필사적으로 건조기술을 흡수하고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기술자들을 불러와 이 배들을 최대한 쓸 수 있게 고쳐나갔다.


또한 아직 쓸 수 있을 만하다고 평가되는 판옥선 30여 척에는 급한 대로 당시 (어디까지나 동양에서는) 최신 기술이었던 피봇 마운트(회전식 포대)를 도입하여 전투 능력을 확충하고, 미제 10인치 포를 올려놓았다. 조선 수군에서 개량 판옥선은 1880년 극동대전 시점까지도 현역이었으며 종전 후에서야 퇴역하기 시작했고, 일부 판옥선은 외륜으로 개조되어 1890년대 후반까지 하천에서 무장 화물선으로 사용되었다. 때문에 당시 판옥선은 불사의 아시아 갤리(Immortal Asian Galley)라고 놀림받기도 했다.


이와 같은 개혁에 박차를 가하던 대군주는 개혁의 슬로건을 내걸었으니 그것이 바로 "광명천지(光明天地)", 즉 온 세상에 밝은 빛을 내리겠다는 것이었다. 얼핏 듣기에는 아름다운 슬로건이었으나, 시간이 지나고 조선이 점점 강해지면서 이 말의 의미가 드러난 후에는 천하만방의 국가들이 광명천지라는 말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제6장. 운요호 사건

이러던 중, 당시 폐번치현을 마무리짓고 메이지 유신에 박차를 가하던 일본 제국이 조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것이 바로 운요호 사건이었다. 조선이 급격하게 근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일본은 슬루프 운요호를 투입해 강화도 일대를 배회하며 영해 진입 통보를 보냈다. 조선에 대한 명백한 도발이었다.


당시 조선은 신미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느라 바빴다. 홍성익은 광성보를 다시 쌓고, 강화도 곳곳을 요새화하며 제물포를 개항한 후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대비하여 군사 기지화했다. 또한 미국으로부터 구입한 구식 해안포를 배치하고 강화도 곳곳에 초소를 설치한 후 경기수영을 강화도로 이전하는 등, 강화도의 요새화가 거의 끝나가던 상황이었다.


홍성익은 운요호에게 진입을 거부하는 통보를 보냈으나 운요호는 무시하고 들어왔다. 이에 조선 수군은 영해 진입을 막기 위해 운요호를 향해 총 10여 발을 쏘았다. 단순한 경고사격이었으나 운요호는 그것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서 운요호가 포문을 열어 강화도 초지진에 10여 발을 꽂았다. 그러자 피봇 마운트로 무장한 판옥선 두 척이 긴급히 출격하여 운요호를 향해 방포, 돛대를 분지르고 구멍을 냈다. 운요호가 응전하면서 판옥선 한 척이 박살이 났다. 해안 포대들도 사격하여 운요호에게 협차를 달성하고, 초지진 동남부의 포탑에서는 명중탄을 냈다. 경기수영 소속의 판옥선 세 척이 더 출항하여 운요호를 향해 더 포를 쏘았다.


조선 수군의 반격이 만만찮자 운요호는 일단 물러가려고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홍성익은 운요호를 돌려보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신미전쟁 이래 조선 수군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만약 허가받지 않은 이양선이 진입하면 반드시 나포하여 조선 수군 병선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 수군 소속의 충무함이 출격했고, 화약 부족으로 42문의 활강포를 모두 쓰지는 못하였으나 10여 발의 포탄을 퍼부으며 운요호를 멈출 것을 요구했다. 운요호는 꽁지 빠져라 달아났으나 결국 충무함에게 붙들렸고, 조선 수군은 일본 수병들을 모두 퇴함시킨 뒤 배를 접수했다.


이에 격분한 일본 제국은 전투함 세 척을 보내 진상규명을 요구했고, 조선은 일본 수병들을 퇴역 판옥선에 실어서 돌려보냈다. 일본 제국 해군은 매서운 속도로 강화도에 진입하여 포격전을 벌였고 조선 수군은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 등에 비치된 해안포를 퍼부으며 맞섰다. 그러다가 운요호의 동형함인 호쇼가 썰물을 타는 바람에 모래톱에 걸려 좌초되었고, 기함이었던 칸린마루가 포탄을 맞고 중파당하는 바람에 물러가야 했다.


조선 수군은 호쇼까지 접수하고 운요와 호쇼를 각각 "사비"함과 "서라벌"함으로 개칭하여 조선 수군에 편입했다. 1875년 시점이 되면 조선 수군은 스크류 슈퍼 프리깃 1척(충무), 일반 비증기 프리깃 3척, 외륜 건보트 4척(이중 1척은 무의), 외륜 연안무장상선(깡통외륜선) 16척, 슬루프 4척, 개량 판옥선 28척, 자체 제작한 연안전투정 2척으로, 나름대로 구색을 갖춘 근대 해군이 되었다.


또한 중국에서 대형 정크선 10여 척을 구입하고 청과의 무역도 시작했으며, 미국 자본과 곳곳의 광부들을 끌어들여 운산 금광을 개발하는 등 경제 역량 확대에도 집중했다.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탄생한 기업들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미국 자본을 끌어들여 경인선 철도를 놓고 한양도성 곳곳에 전봇대를 두었다. 도시재건계획으로 한양도성에 가득하던 불법 토막집을 싸그리 밀어버리고 벽돌집들을 세우는가 하면, 한양도성을 가로질러 전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제7장. 병자출병과 여계론의 발흥

1877년 1월, 청나라의 적법한 영토였던 간도 일대에 조선군이 출몰했다. 그리고 이곳을 지키던 청군 병사 140여 명을 강제 무장해제시키고 간도를 점령, 당시 이곳으로 야금야금 진출하고 있던 조선인들을 규합한 후 민병대를 조직했다. 당시 형조판서를 지내던 무관 이경하의 아들 이범윤이 당시 장교로 조선군과 동행하였는데, 조선군을 지휘하던 홍성익은 그동안 눈여겨보던 이범윤에게 민병대 지휘권을 맡겼다.


이범윤은 간도 민병대에게 사포대(私砲隊. 사사로운 포수들의 군대)라는 명칭을 붙이고 그 규모를 200명으로 확충시켰다. 또한 미제 롤링블록 소총으로 무장시키고 이들을 정식 편제화시키니, 대한제국 역사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외교적으로 전방위적인 가장 거대한 영향을 끼친 무력집단이자 대한제국 침략전쟁의 선봉장, 그리고 식민 제국주의의 결정체 그 자체의 탄생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청이 대경실색하여 급히 철군을 요구하자, 조선은 이미 사문화된 백두산정계비의 토문강을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의 지류라며 억지를 쓰고 간도가 조선의 적법한 강토라고 주장하면서 생떼를 썼다. 그리고 청군 700여 명이 무력투사 겸 토벌에 나서자, 사포대와 조선군은 매복하고 있다가 가야하 일대에서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쏘아 죽이니 청군은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청은 사태를 파악하고 1만 3천 명의 병력을 끌어모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봉금정책으로 사는 사람이 거의 없던 만주에서 끌어모을 수 있는 만큼 끌어모은 셈이었다. 그러자 조선은 간도의 명칭을 "하간도(河間道)"라고 붙이고 이범윤을 하간도 관찰사로 임명하면서 아예 조선 행정구역에 편입시켜 어디 해볼 테면 해보자는 듯 초강경 태세를 취했다.


실상 당시 이곳에 진주한 조선군의 수는 1천이 채 안 되었으며, 사포대와 함경도 속오군까지 합쳐도 1천 2백 내지 1천 3백 정도에 불과했다. 청군이 무장 수준은 다소 열등했지만, 10배에 육박하는 물량으로 밀고 내려올 경우 청은 즉시 간도를 수복 가능했던 것은 물론, 당시 조선에서 급격하게 발흥하고 있던 식민 제국주의를 사전에 차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청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선이 미군을 격퇴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청은 조선에 대해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청나라라는 국체의 존속조차도 어렵게 만든, 중국사를 통틀어 중국왕조에서 내린 최악의 실책 중 하나였다. 석경당의 연운 16주 할양과 만력제의 30년 태업과 함께 청나라의 간도 정벌 포기는 중국사에서 역사를 통째 바꿔놓은 판단 중 하나라고 평가된다. 대신 청나라는 재조선 청나라 공사관과 사절을 통해 조선에게 항의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대응을 펼쳤고, 대군주는 이들을 노골적으로 묵살했다.


청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인해 조선은 청의 내부적 문제가 상당히 크며, 또한 자신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또한 뚜렷하게 꿰뚫어보았다. 조선군은 철군하지 않았다. 이로서 결국 청나라의 적법한 영토였던 간도는 침략자 조선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1877년의 일이었지만 1월에 벌어진 사건이라 음력으로는 아직 병자년(1876)이었으며, 이에 따라 이 침공은 조선왕조실록에 "병자출병"으로 기록되었다.


동시에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신미전쟁에서 활약했던 홍성익의 위상은 더더욱 높아졌으며, 간도에서 사포대를 조직하고 하간도 관찰사로 임명된 이범윤 또한 단순히 혈통 좋은 집안의 한량에서 쓸만한 신흥 무관으로 평가가 반전되었다. 홍성익은 당시 조정에 있던 젊은 관리들을 하간도로 보내 이범윤과 연결시키는 동시에 점령지를 관리했고, 이범윤은 이 일대에서 활동하던 조선계 마적들을 끌어들여 사포대에 편입시키며 주변 청나라 부락에 대한 노략질을 좌시 내지 권장했다.


이 당시 서간도로 진출했던 젊은 관리들과 무신들, 또한 홍성익을 위시한 개화파 대신들과 이범윤 등 사포대를 기반으로 성장한 약탈경제 세력들이 18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하나의 계파를 형성했다. 이들의 공통된 인식은 "서구 열강의 힘과 제도를 받아들여 우리 또한 동방의 패권국으로 부상해야 한다", 내지는 "만주와 요동, 대마도를 적극적으로 공격해 고토를 수복하고 나아가 천하 만방에 힘을 떨치며 고구려의 영광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이들을 당시 실록에서는 여계론(麗係論), 풀어서 고구려계승론 내지 고구려법통론이라고 부른다.


여계론자 혹은 여계파라고 부르는 이들은 대한제국의 식민제국화와 침략전쟁을 긍정했으며 정왜론(征倭論. 일본을 정복하자는 주장)과 정중론(征中論. 중국을 정복하자는 주장)을 제창했다. 정왜론은 복임론(復壬論. 임진왜란의 보복)이라고도 불렸고, 정중론은 복병론(復丙論. 병자호란의 보복)이라고도 불렸으며, 심지어 복당론(復唐論. 당나라의 보복: 고구려 멸망의 보복이라는 뜻)까지 나왔다.


특이하게도 여계파는 고구려법통론을 주장하면서도 고구려의 숙적이었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았는데, 이는 정왜론 때문으로, 이들은 "대마도가 한때 계림에 속하였다"는 역사 기록을 근거로 "대마도는 신라의 영토이니, 신라의 정통성 또한 잇는 조선이 대마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백제가 일본에게 문물을 전해주었다는 역사를 근거로 "일본은 본래 백제의 지방 정권인데 백제가 망한 뒤 배은망덕하게도 독립해 나간 후 여말선초나 임진년에는 급기야 우리를 공략했으므로, 지금이라도 이를 정벌하여 다시 복속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았다.


여계파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바로 대군주가 세운 광명천지라는 국시였다. "온 세상에 밝은 빛을 내리기 위해" 조선은 "온 세상의 어두운 곳을 공격해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유럽 열강들과는 다소 다른,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들과 동일하거나 그 이상의 악질으로 취급되는 조선식의 제국주의가 탄생했다.



제8장. 해동요순

대군주는 권력 2선으로 물러난 흥선대원군에게 매일같이 찾아가 인사를 올렸다. 대군주의 아내 민씨도 마찬가지였다. 대군주는 흥선대원군을 극진히 모셨고, 조정에 행차하기라도 하면 최고의 예우를 했다. 흥선대원군 역시 종친의 큰어른으로서 나름대로의 정치적 입지를 유지했고, 개항을 통해 빠르게 발전하는 조선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의 관계는 권력을 두고 쟁탈하던 부자지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만했다. 대군주는 흥선대원군의 생일이었던 1874년 1월 24일에 창덕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날 흥선대원군과 대군주 사이에서 오간 대화는 다음과 같았다.


이 날이 대원군의 생일이었으므로 (대원군이) 창덕궁에 행차하였다. 상께서는 그 부친이 오신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설레어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 기다리셨다.


대원군이 마침내 행차하여 상께 절하였으므로 종친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상께서는 창덕궁에서 성대하게 연회를 베풀고, 한동안 멀리하던 가무를 이날 다시 하였다. 대원군 또한 매우 즐거워하였으므로 상께 아뢰기를,


"본디 소신이 궁 한가운데에서 물러날 적에 나라의 흥망을 크게 우려하였는데, 상이 이와 같이 외세에 강인하면서도 덕망을 보여 교화하고 또한 백성들을 보듬어 살피며 윤택하게 하니, 이 노신이 더 이상 걱정이 없습니다."


하였으므로, 상이 답하기를,


"어찌 이 한 사람의 능력이겠습니까. 모든 것이 나라에서 으뜸가는 식견의 대신들 덕분이고, 이 불초한 사람을 믿고 따른 백성들의 덕입니다. 또한 내가 어릴 때 기존의 구폐습을 모두 소탕하신 부친께서도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원군이 크게 황송해하며 아뢰기를,


"이미 나라가 잘되었고 또한 모든 백성들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해동요순을 노래하는데, 어찌 이 노신이 할 일이 더 있겠습니까. 이제 죽어서 썩어 한 줌의 재가 되어도 여한이 없을 따름입니다."


하였으므로, 상이 이를 듣고 슬퍼하며 답하기를,


"이리도 정정하신데 어찌 벌써부터 관 속의 일을 생각하십니까. 백 년이라도 예우하여 모시겠으니 부디 오랫동안 이 불초한 사람의 곁을 지켜 주십시오."


하며 크게 울었다. 이에 대원군이 소매를 들어 상의 눈물을 닦았고, 부자지간의 정이 이와 같았으므로 궁녀들도 울고 내관들도 울었으며 연회에 앉아 있던 대신 가운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후략)...


흥선대원군의 말대로 당시 백성들은 대군주를 해동요순이라 칭했으며, 조선 백성들의 생활은 빠르게 나아졌다. 대군주는 1877년에는 삼권의 분립을 선언하고 중추원과 형정원을 설립하면서 입법, 사법, 행정을 분리시켰다. 동시에 법원 역할을 하는 형정원의 분관을 전국 9도에 두어 수령들로부터 사법권을 빼앗고 행정권만을 남겼다.


중추원은 299명의 의석으로 구성되었으며, 모든 백성들에게 투표를 하게 하여 각 지역에서 1~2명씩의 의원을 뽑아 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대군주는 이것이야말로 구중궁궐의 군왕이 백성의 목소리를 직접 정치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맹자가 주장했던 민본정치라고 주장했으며, 곧 서구식 민주주의의 정착이 시작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조선은 전제군주정이었고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이를 폐하지 않았으므로, 입헌군주제와 전제군주제가 동시에 양립하는 이른바 "유교군주정"이라 불리우는 특이한 정치체제가 존속하게 된다.


대군주는 1876년에 일찌기 고려에서 시행되었던 노비안검법의 전례를 찾아내어 조선의 노비들을 대거 조사하도록 했다. 그리고 빚을 갚지 못했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노비로 전락한 이들을 모두 양인으로 환속시키고, 노비보유세를 제정하여 노비를 보유한 이들이 그 머릿수에 비례하여 막중한 세금을 부담하게 해, 4천 년을 이어온 신분질서를 뿌리부터 흔들기 시작했다.


궁극적인 지향점은 노비제도의 폐지였으나, 대군주는 노비제도를 근본적으로 폐지하는 것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변모하고 근대국가로 향해가던 19세기 말~20세기 초에 걸쳐 노비제를 대대적으로 혁파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으나 노비주 세력의 반발을 두려워하였으므로 노비제는 크게 약화되었을 뿐 끝끝내 폐지되지 않았다.


이후 거의 100년이 지난 광만제 후기로 접어들 때까지도 명맥이 남아 있던 노비제는 경주 홍씨에 의해 일어난 2차 세도정치에 의해 대거 부활하고 말았다. 2차 세도정치기의 노비제는 침략전쟁으로 인해 복속된 식민지의 백성들과 노비 사냥꾼에 의해 납치당한 일반인들에 의해 지탱되는 모습을 보이면서 조선 말기 시절의 노비제는 물론 고대 아시리아의 식민 통치나 벨기에 왕국의 콩고 지배를 초월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노예제도로 타락, 대한제국의 사회를 파탄으로 몰아가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