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연호의 건원

1878년 1월 1일, 대군주는 광무라는 연호를 선포하고 진정한 자주국으로서의 체제를 완성한다. 이에 대신들은 1월 7일, 25일, 2월 8일에 걸쳐 "황제의 위에 오르시라"고 권했다. 특히 2월 8일에는 대신들은 물론 유생들에 백성들까지 작정이라도 한 듯 영남, 호남, 관동, 관서, 관북에서 일제히 만인소가 올라오니, 서명자의 수는 51,700명에 이르렀고 그 명단을 늘어뜨리고 이으면 1리(600미터)를 뻗쳤다 한다.


그러나 대군주는 이와 같은 요청을 거절하였는데, 이에 대한 거부의 사유는 다음과 같다.


...(전략)...


이와 같이 만백성의 요청이 성화와 같았고, 그 기세에 하늘과 땅이 진동하자 상이 직접 하교하기를,


"비록 오늘날 우리의 국토가 수천 리에 이르고 백성은 수천만에 이른다 하나, 본디 천조질서라는 것이 오직 천명을 받은 한 명의 천자에게만 내려지는 것이므로, 아직까지 중원의 천자가 건재한 것으로 보아 우리는 단지 자주국으로서의 위세만을 가질 수 있을 뿐, 천명을 받지는 못한 듯하다. 만약 언젠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천명이 내려진다면 중원의 천자는 몰락한 뒤일 것이며, 중원의 천자를 섬기던 곳곳의 번국들이 줄지어 우리 조선을 섬기려 할 것이니, 단지 나라 안 백성들이 크게 소리 높여 외친다 하여 천명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온 천하 백성과 곤여 만국 조정의 뜻이 있어야만 천명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라 하며 물리쳤다.


사관은 논한다. 본디 맹자에 이르기를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 하였으니,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원하면 이는 분명 천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께서 이를 천심이 아니라 여기셨으며, 말을 이으시기를 "온 천하 백성과 곤여 만국 조정의 뜻이 있어야 한다" 하셨으니, 이미 상께서는 나라와 나라의 경계를 매우 가소로이 여기시고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자신의 백성이라고 믿으시고 그들 모두의 뜻만이 천심이라고 여기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나이 대장부의 포부가 크고 또한 가슴이 더없이 넓으니, 이런 분이 천자가 아니되신다면 하늘 아래 대체 누가 천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사관의 평론에서 당시 조선인들이 대군주의 거절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확실하게 보인다. 당시 조선인들은 대군주의 거절이 의례적인 거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단지 청나라에 대한 외교적 문제 때문에 거절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이는 상당 부분 사실이기도 하지만, 대군주의 근본적인 제국에 대한 구상에 칭제건원이 정면으로 위배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광무제 치세가 끝나고 한참 뒤인 강청여제 원년(2014)에 영의정 윤지영의 주도로 공개된 기밀 문서, 그 중 특히 광무제의 제국에 대한 구상도를 통하여 당시 대군주가 어떤 국가를 꿈꾸었는지 들여다볼 수 있다. 광무제가 궁극적으로 구상한 제국은 근본적으로 대조선국이라는 종주국을 중심으로 전 동아시아의 국가들이 별도의 군주인 제후로 기능하는, 전통전인 전근대적 동아시아관에서 말하는 천조질서였다. 다만, 대조선국의 천자가 모든 국가의 제후를 마음대로 바꾸고 갈아치울 수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 천자가 이를 겸하기도 할 수 있는, 어찌 보면 주나라 내지 진나라 시대의 제후국 시스템을 이상으로 여겼다.


동시에 소득의 구분지일은 그 취득 방법을 막론하고 세금으로 징수한다는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다시 말해 그것이 소득세든, 부가가치세든, 상속세든, 법인세든 무조건 구분지일로 통일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군제제도에 대해서도 각 지역별로 제후가 거느릴 수 있는 병력과 황제의 직속병력을 구분하고자 했고, 거대한 제국을 경영하기 위해 제후국의 자치권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보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후에게 병력을 별도로 귀속시키고자 한 것은 마치 대영제국이 영국본토군과 영연방군을 구분하는 것과 흡사한 체계인 듯하다.


그러나 이를 통해 광무제가 가졌던 사상의 한계 또한 알 수 있다. 본질적으로 황제가 제후를 봉하고 이들에게 자치권을 주는 체계는 주나라의 봉건제와 유사하며, 소득의 구분지일을 징수한다는 것은 땅을 9할로 나누어 8개 구역은 각자 경작하고 1개 구역은 공동으로 경작하여 징수한다는 주나라의 정전제와 유사하다. 즉 광무제의 사고방식이 열려 있었고 외교감각 및 경제감각이 뛰어났다는 사실과 별개로, 그는 근본적으로 상나라, 주나라를 이데아로 삼았던 성리학자와 유학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러시아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 나치 독일 등의 근대국가들이 로마 제국의 계승을 주장했던 것을 보면, 중화문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주나라의 정통성을 이으려 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가 단순히 정통성을 이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광무제는 중화 중심의 천조질서를 이을 생각이 없었으며 오히려 (중국 왕조와 별도의 천조질서를 가졌던 국가인) '고구려'의 법통을 주장하는 여계파를 조정 핵심 세력으로 만들었다.


다시 말해 그는 "주나라에 대한 정통성" 내지 "주나라의 계승"을 꿈꾸기는커녕 그 반대였고, 단지 그 제도에만 관심이 있었다. 이미 멸망하고 3천 년 가까이 지난 국가의 낡을 대로 낡아 빠진 제도 그 자체를 신봉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방향성을 가진 제국을 건설했으니 제국이 오래갈 수 있었을 턱이 없다.


각설하고, 이 구상에 따르면 대군주는 아직 황제의 위에 올라서는 아니되었고, 제후국을 갖추고 난 다음에야 천자국으로서의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시점의 조선의 군사력과 지형적 이점을 고려하면 사실 당장 천자국을 선포해도 청나라의 반발 정도는 무마할 수 있었겠지만, 대군주는 그러지 않았다.



제10장. 정치 기구들의 발달

3월 1일에는 전국 관아에 투표소가 설치되고, 중추원의관을 뽑기 위한 첫 번째 만백성투표가 이루어졌다. 나름대로 홍보는 열심히 했지만 아직 근대적인 정당도 없었고, 특히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던 전라-경상 일대는 이 때가 파종을 시작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투표율은 25%에 그쳤다. 대부분의 투표자는 선비들이었고, 선출된 이들은 지역 유지들이었다.


광무제는 문제가 뭔지 단번에 알아차렸고, 미국의 정당법을 들여와 개수하고 형조에서 정리하도록 했다. 3월 15일에는 처음으로 중추원의관 회의가 열렸고, 이 날의 의제는 "중추원의 수장인 중추원의장을 어떤 예로 대해야 하는가?"였다. 이 날 중추원에서 합의된 사항은, "중추원의장과 형정원의장은 국가의 한 조직을 총괄하는 수장으로서 재상보다도 그 권위가 높으니, 당상관이 아닌 제후의 예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중추원의장으로 당선된 이는 최익현이었는데, 신미전쟁 직후 재야에서 강경한 위정척사를 주도하던 그가 대군주의 개혁 정치에 동조하게 된 것에는 여러 추정이 있으나 가장 유력한 설은 그의 제자가 위정척사를 떠나며 남긴 말, 즉 "이충무공이 왜적을 무찌른 것은 단지 무략이 출중해서가 아니요, 옛날 중국에서 들여온 최무선의 화포가 있었기 때문이니, 어찌 양이들과 같은 병장기와 그것을 쓸 무관조차 들여오지 아니하고 양이들을 무찌를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듣고 돌아섰다는 설이다. 물론 죽어가던 그의 작은아버지를 미국인 의사가 살려냈다는 야사도 신빙성이 없지는 않지만.


최익현은 "제후가 없으면 황제는 의미없다"는 대군주의 뜻을 꿰뚫어보았고, "그렇다면 대군주께 제후를 만들어드리자"는 생각으로 중추원의장과 형정원의장을 제후로 봉하여야 한다는 결론을 승인한 것으로 보인다. 결과론적으로 대군주가 칭제하는 것은 중추원의장과 형정원의장의 제후화와는 관계없었지만, 향후 100년간 중추원과 형정원의 독립성을 보장하게 되는 결정이기도 했다. 황제가 중추원, 형정원의 일에 직접 관여하려 들면 "제후의 자치권"을 들어 봉쇄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군주는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종로에서 관악으로 이전시켰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서원들을 서구식 대학교로 취급하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등 공교육기관의 확대를 위해 예산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전국에 130개의 고등학교, 344개의 초등학교가 세워졌다. 교육과정에는 교련이 포함되었으며, 대한제국의 모든 백성은 총을 쏠 줄 알아야 했다.


대한제국 본토에서 본격적으로 상업이 발흥하면서 거대 상인 집단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기존 조선에서 평양을 중심으로 상업하던 유상, 개성을 중심으로 상업하던 송상,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상업하던 경강상인의 3개 상인들이 연대하고 복합하여 대한제국의 역사적인 첫 번째 상전, 즉 기업을 세웠으니, 이것이 21세기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대한 영향을 끼치는 범세계적인 스케일의 초거대재벌 세별상전이다. 세별상전은 한양도성, 개성, 평양 등에 10여 개의 근대식 공장을 세우고 제조업 중심의 기업으로 발달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세별상전은 국수나 면직물 등을 중심으로 판매하고, 기껏해야 개항장에서 소규모 금융업이나 하는 아담한 규모의 상전이었으나, 이후 정치와 유착하고 공업 능력이 발달하면서 총기, 탄약, 포탄, 대포를 만드는 군수기업으로서의 능력을 갖추었고, 20세기에는 언론사를 창설했으며, 수십 년 뒤에는 반도체와 석유화학 분야에 있어 대영제국이나 소련을 압도하면서 종국에는 유라시아의 정밀전자공학 분야를 사실상 독점하는 거대 공룡 그룹으로 성장한다.


동시에 조선의 수군 본부였던 거제 일대에서는 통영상전이라는 조선기업이 부상했다. 통영상전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정낙용이 수군 병선의 조달을 좀더 빠르게 하기 위해 설립한 상전이었으며, 그가 러시아 제국의 조선 기술자를 불러들여 가르치게 해서 건선 기술자를 양성하고 이들을 통해 원양 고기잡이를 위한 어선과, 조선의 매우 중요한 조운선(세금 수송선), 나아가 조선 최초의 국산 연안 전투함 2척을 건조하기도 했다.


한편 조선 남부, 부산 - 경주 - 대구 3개 도시와 조선 북부 의주-안주를 거머잡으면서 유통업 중심으로 성장하는 새로운 상전이 있었으니, 의주의 만상과 동래(부산)의 내상이 연합하여 조선 유통망을 거머잡기 시작한 월성상전이다. 월성상전은 다른 상전들과 달리 처음으로 "본사"의 개념을 도입한 상전이었으며, 본사 건물을 경주에 두어 경주의 다른 이름인 "월성"을 상전 이름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주로 활동하던 부산, 경주, 대구를 잇기 위한 도로와 의주와 안주를 잇기 위한 도로를 내게 되며 조선의 도로 체계를 닦는 기틀이 된다.


마지막으로 곳곳의 요새 건설을 주도하던 홍성익이 일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공기업과 비슷한 성격으로 세운 건설 중심의 상전이 있었으니 백한상전이다. 백한상전은 조선 곳곳의 요새를 짓고, 한양도성 현대화 당시 벽돌집을 세우는 일에 동참하면서 조선의 건설업 근대화에 앞장서는 기업으로 성장했으며, 주로 조정의 수주를 받고 일해 "백한청(廳: 관청)"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 중 세별상전, 월성상전, 백한상전은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부상하고 나서는 거대한 규모의 거대기업이자 군수기업, 다국적기업으로 그 규모를 키웠고, 식민지 착취 시스템 구축 등을 통해 거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수백만 명의 주주 세력과 정경 유착, 가격 담합 및 적성기업 테러, 자신들끼리 오가는 '황금씨족 통혼'은 물론, 소득세와 상속세를 노골적으로 무시해 버리거나 민간군사기업을 창설하여 조정의 허가도 없이 다른 국가에 쳐들어가 식민지를 세우는 등, 국제 판도를 마음대로 다시 짜고 대한제국을 집어 삼키는 엄청난 세력으로 뻗어나가게 된다.


이와 같이 조선 본토가 바쁘던 동안, 하간도에서 20대의 나이에 외로이 북방의 눈발을 맞으며 군대를 기르는 청년이 있었으니 바로 하간도 관찰사 이범윤이었다. 그는 대군주의 특명을 받고 사민정책을 펼쳐 주변의 조선인들을 끌어모으고, 또한 러시아와 몽골에서 말을 수입해 기병대를 창설했다. 사포대의 규모는 2년간 급격하게 확장되어 2만 8천 명에 육박했으며, 이 중 1만 명 가까이가 기병이었다.


사포대는 단순한 군사집단이 아니라 노략질 집단이기도 했다. 병자출병 직후 시점에는 간도 일대에 한정되어 있던 노략질과 약탈은 어느새 창춘과 무단장 등 주변 도시는 물론 요동과 선양 일대까지 확대되었다. 이범윤이 노략질로 사포대를 경영하면서 얻은 부의 규모는 동시기 세별상전을 능가했으며, 사포대 대부분은 미국제 롤링블럭 소총이 아닌 독일제 게베어 1871 볼트액션 소총과 프랑스제 MAS-1873 권총을 제식배치했다.


이미 이들은 하간도 감영 소속의 관군과는 별도로 움직이는 무장집단이었으므로 그 자부심이 대단했고, 1878년 중후반 시점이 되면 이미 간도에 볼트액션 소총의 탄약을 생산하는 공장을 두 개나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개틀링과 탄약이 호환되었으므로 개틀링 기관총도 50여 문이나 보유했으며, 청나라 부락을 약탈하고 노략질하는 방식으로 그 경제를 유지했다.


이와 같이 조선이 지속적으로 군사력을 확충해 나가던 중, 본격적인 동아시아 격돌의 신호탄이 쏘아올려졌다.



제11장. 광무전쟁

1879년 3월 11일, 일본 제국이 오키나와의 류큐 왕국을 침략하여 합병하니, 쇼씨 중산왕조의 19대 중산왕 쇼타이는 폐위되었고, 구스쿠 시대 이래 900년간 이어져 온 독립국 류큐가 멸망했다. 이것을 류큐 처분이라고 한다.


류큐는 조선에서 유구국이라고 불리우며 조선 전기 48회의 사신을 보냈던 교린국가였다. 유구국의 군주는 중산왕이라고 불리웠으며, 국교가 끊어진 뒤에도 조선과 서로 표류민을 돌려보내 주며 교린관계를 유지하였다. 국제정세에 눈을 뜬 조선은 주선 일본 공사관을 통하여 일본 제국의 유구국 침략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으며 침략의 주체인 사쓰마 번은 더더욱 그랬다. 사쓰마는 조선의 요구를 무시하고 오히려 800명의 일본 수병을 류큐에 진주시키며 완전히 자기 땅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에 대군주가 조선에 있던 일본 공사관을 찾아가 다음과 같은 국서를 넘겨주었다.


대조선국 대군주 이형은 논한다.


지난날 그대들은 본디 돌과 나무로 만든 칼로 베고 먹으며 살던 미개하고 무지몽매한 족속이었는데, 아국의 조상인 대백제국의 근초고 어라하께서 그대들에게 철로 된 병장기와 한자를 기쁘게 주어 봉신으로 삼았으니 참으로 우리는 형과 동생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대들이 우리의 오랜 벗인 중산을 멋대로 폐하고 나아가 그 백성들을 창검으로 위협하며 노객으로 삼으려 하니 어찌 형으로서 이를 꾸짖지 않겠는가? 어찌 교린국으로서 그와 같은 행위를 가만두겠는가?


분명 짐이 그대들에게 중산의 땅에서 물러나라고 전하였거늘, 교린하는 나라 사이에 있는 말조차 무시하고 이제는 급기야 중산의 땅에 군사들을 내려놓으니 이것이 과연 교린을 하려는 의지가 있는 나라가 할 일인가? 이 국서가 전해지고 20일 안에 중산을 복위시키고 유구국의 강토에서 멀찌감치 떨어지지 않는다면, 장차 짐이 그대들의 백성이 가지고 있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다 합쳐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병들과 그 갑절이 넘는 병장기를 거느리고 그대들의 경도(京都. 수도)를 밟는 일이 벌어지고야 말 것이다.


이 국서가 전해진 시점에 사실상 대군주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었으며, 이 국서가 전해지자 곧 일본 도쿄에서는 재일 조선 공사관에 다음과 같은 국서를 보내왔다.


대일본제국, 지난날 대군주 폐하께서 보내신 국서에 회답합니다. 국서를 읽어 보니 그 내용이 가히 참담하고 참람하기 그지없어, 애시당초부터 교린의 뜻을 속에서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고 우리 대일본제국과 무력으로 겨루기 위한 의도만이 가득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대일본제국은 지난날 야마토 정권이 수립된 이래 이천 육백년 동안 독립된 정권을 유지하였으며, 정신라대장군(征新羅大将軍)이라는 직책을 세워 오늘날 대조선국에서 논하는 정권의 직계 정통인 계림국(신라)과 대등하게 겨루었습니다. 또한 억만 번 양보하여 대군주 폐하의 말씀이 사실이라 한들 천 년이 넘은 옛이야기이며, 우리가 이와 같이 자주한 제국이 되었으니 이는 귀국에서 우리를 버려 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저희 대일본제국 정부는 나흘간 내각대신들이 모두 모여 마음을 맞추고 뜻을 함께하여 논하였으나, 끝끝내 대군주 폐하의 무례한 궤변과 비합리적인 요구가 가득한 국서에 대하여 뭐라 평화적으로 응답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으며, 이는 나아가 양국의 외교적 신의가 유지될 수 없을 정도의 문제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두 국가의 이해관계를 통일하기 위해서는 양국이 동반할 수 있는 무력을 통한 외교적 해결책을 도출하는 것밖에 없다는 저희 조정의 판단 아래, 현 시각을 기하여 우리 대일본제국은 대조선국과 전쟁상태에 돌입하였음을 선포하는 바입니다.


이로서 운요호 사건 이래 7년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 온 조선과 일본 제국의 외교관계는 파탄으로 접어들었으며,  두 국가는 지난 수년간 해 온 근대화의 결과를 최종적으로 테스트하는 의미의 전쟁을 시작했다.


대군주는 즉시 당시 경기수사였던 홍성익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였으니 이때 홍성익의 나이 고작 29세였다. 대한제국 역사에 길이 남을 시대의 권신이자 경주 홍씨 세도가의 실질적인 기원으로 꼽히는 정복왕 홍성익의 정복 경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사쓰마의 전투함들은 류큐에서 다수 철수하여 사쓰마 본토에서 3,000명의 병력을 싣고 오기 위해 정박했다. 또한 5척의 슬루프와 1척의 증기 장갑함을 보내어 조선 수군의 본영인 삼도수군통제영을 쳤다. 이 과정에서 조선이 피땀 흘려 만들어낸 조선소 2기 가운데 1기가 파괴되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이 통영에 도달했을 때 조선 수군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두 국가는 같은 시간에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같은 행동을 더 파격적으로 시행한 쪽은 조선 수군이었다.


조선 수군은 근대식 병선을 거의 총동원하여 일본 해군함들이 보급을 받고자 류큐에서 철수하여 사쓰마에 도달, 정박할 때 갑작스럽게 사쓰마 일대를 강습했다. 조선 수군의 전투함들은 상대적으로 일본 해군함보다는 노후화된 중고 선박들이었지만, 일본 해군이 이제 막 정박하여 닻을 내리고 지친 병사들을 토해 내고 있을 때 뒤에서 덮쳐 포격하는 방식으로 다수의 전투함을 중파시켰다. 이 강습으로 일본 해군은 보유하고 있던 근대식 전투함 다섯 척을 잃고 일곱 척을 수개월간 수리해야 할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해안포 등은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조선 수군의 2등 기함이었던 무의호는 일본 해안포에게 3발을 맞았으며 침몰 직전까지 몰렸다. 충무호는 기적적으로 해안포 포격을 모두 피해나갔으나 대신 일본 전투함 갑판의 수병들이 필사적으로 퍼부은 총격에 선미 부분을 손상당했다. 일본 해군으로부터 나포해 보유하고 있던 사비호(=운요호)는 이 당시 포격으로 인해 격침당했다.


결과적으로 이 해전을 통해 조선 수군은 전력의 10%에서 15% 가까이를 무력화당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일본 해군의 50% 가까이를 무력화함으로서 류큐 주변의 제해권을 어느 정도 장악할 수 있었다. 한편 통영에서는 해안포가 결사적으로 반격하여 일본 소속의 철갑함 한 척을 나포하는 데 성공했고, 나머지는 조선 수군 본영 곳곳에 포탄을 퍼붓다가 조선 수군 병선이 단 한 척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물러났다.


같은 시각, 제주도에 매복하고 있던 조선 수군의 판옥선 26척이 2,000여 명의 병사를 싣고 위험천만한 원양항해를 시작했다. 판옥선은 원래 원양항해에 적합한 병선이 아니었으므로 중간에 한 척이 전복하는 참사도 일어났지만, 나머지는 무사히 살아 류큐에 도달했다. 이들은 이른바 "조선 수군 육전대"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이후 "해병대"로 독립하였다.


이들은 류큐에 상륙하고, 판옥선에 1문씩 탑재된 10파운드 포를 이용해 일본 해안 진지를 포격하면서 류큐에 있던 일본 수병 800여 명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중화기의 지원과 함께 작정하고 몰려든 조선군에 비해 류큐 조정을 상대로 무력시위하기 위한 용도로만 진주해 있던 사쓰마의 병사들은 대등하게 싸울 수 없었다.


조선군은 일본군 800여 명 중 250여 명을 죽이고, 6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 중 100여 명은 단순히 조선 수군 육전대 병사들의 재미로 유구국 앞바다에 던져졌다. 이어서 홍성익은 유구국 수도인 슈리 성에 강행돌파, 폐위되어 감금된 상태에 있던 유구국 19대 중산왕 쇼타이를 끌어내어 도로 복위시켰다. 그리고 그를 창검으로 위협하여 다음과 같은 국서를 쓰게 했다.


유구국 중산왕이 대조선국 대군주 폐하께 삼가 고하옵니다.


신(臣) 쇼타이, 대군주 폐하의 충의롭고 강건한 군대로 잔악한 왜적들을 모두 물리치고 이제는 다시 중산의 자리에 올랐으니, 이와 같은 대군주 폐하의 은덕을 어찌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대군주 폐하께서 내려주신 은혜에 몸이 만 개라도 감사 올릴 도리가 없사오며, 단지 눈물이 따라 흐를 뿐입니다.


폐하께오서 또한 신과의 교섭을 위하여 보내신 전권대사 겸 전라좌수사의 칭신(秤臣) 제의를 듣고 참으로 기뻐, 신 그 몸을 펄쩍 뛰며 폐하의 은덕에 감사하였사옵니다. 오늘을 기하여 소신은 폐하의 하늘을 가리고 땅을 덮는 그 은덕에 감복하여 영원하고도 영원한 제후이자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오니, 부디 소신의 충성을 받으시고 또한 천명을 거스르지 마시옵소서.


이로서 유구국은 대조선국의 제후국으로 전락했으며, 홍성익은 대조선국 병사들을 위한 주둔지를 짓는다는 명목으로 병조청(兵助廳)을 세우고 아예 문관들을 주둔케 했다. 사쓰마의 해군 기지를 초토화시키는 데 성공한 조선 수군은 정비와 수리를 위해 유구국에 정박했다. 그리고 유구국에게 "광명천지"를 해 주겠다며 유구국의 모든 관청과 행정조직들을 장악, 내정에 깊이 간섭하면서 쇼타이 조정을 사실상 괴뢰정부로 전락시켰다.


때문에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하간도를 단순히 대한제국의 "점령지"로 간주하는 반면, 유구국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 없이 "식민지"이자 "주권 침탈"로 본다. 쇼타이는 이후 10여 년간 괴뢰정부의 허수아비 노릇을 하다 1892년 한영전쟁 당시 유구국을 조선 남부 수군 기지로 삼기로 결정한 광무제에 의해 폐위당하였다.


조선이 유구국을 장악하고, 사쓰마 군함들 대부분이 장기간의 수리를 필요로 했으며, 조선 수군이 유구국에 정박하면서 사쓰마 해군을 견제했으므로 일본 제국이 더 손쓸 도리가 없어져 버렸다. 이에 일본 내에서 한창 주류 세력으로 떠오르던 정한론자들은 이 전쟁을 국가간 전면전으로 확대해 조선을 아예 정복해 버리자는 주장을 거리끼지 않았다.


조선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여계파는 지금 당장 일본 본토로 진공하자는 주장을 펼쳤으며, 병조에서는 "현재 병부에 기록된 대로 속오군과 상비군을 모두 결집시키면 30만 대군을 편제할 수 있으며, 포환과 총환도 넉넉하니 왜인들을 정벌할 수 있다"고 아뢰었다. 이에 대군주는 "이미 우리의 교린이었던 유구국을 자주독립(?)시켰고, 이제는 광명천지할 것인데 어찌 왜인들의 본토마저 공략하겠는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천하를 지배할 수는 없다 하였으니, 우선 말에서 내려 밟고 지나온 땅을 다시 살펴야 할 것이다"라며 거부했다.


그리고 유구국을 봉속국으로 만들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명목상 유구국의 종주국이었던 청이 전혀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고 대군주는 마침내 결심을 굳힌다.



제12장. 대한 제정연합국의 탄생

마침내 1878년 7월 16일, 대군주는 유구국과 대조선국을 영원한 하나의 "연합 제국"이라고 선포하고, 이 "연합체"에 "대한 제정연합국"이라는 명칭을 선포했다. 또한 "조선군"은 "대한 제정연합군"으로 개칭되었고, 모든 공문서에서 국체를 명시할 때는 "대한 제정연합국"이라 칭하게 되었다. 동시에 대조선국 대군주는 대한 제정연합국 황제를 겸할 것을 선포했으니, 이때부터 "대군주 폐하"라는 호칭은 사문화되고 "대한 제정연합국 황제 폐하"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으며, 유럽식 군주 칭호와 같이 이때부터 군주에 대한 정식 호칭은 "극동의 천조질서를 수호하시는 유일무이한 천자이시자, 대한 제정연합국의 대황제이시자, 대조선국 9도의 대군주이시자, 대한 제정연합군의 통수권자이시자, 사포대의 주군이시자, 유구국 중산왕의 종주이시자, 유학의 대통을 이으시는 분이시자, 불교, 천주교, 기독교 신앙의 영원한 보호자이신 만민의 왕중왕 황제 폐하"라는 호칭을 쓰게 되었다.


이로서 발해의 멸망 이래 952년 만에 한반도에서 (외왕내제가 아닌) 황제국이 부활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대군주를 "광무제"라고 칭할 것이며, 국가의 칭호는 "대한 제정연합국"을 축약한 공식 축약 표기였던 "대한국"과 "대한제국" 중 후자를 사용할 것임을 밝혀둔다.


이 선언을 반포하자 다른 국가들은 마땅히 벌어질 일이 벌어졌구나 싶었고, 일본은 전쟁을 마무리짓자는 의미에서 칭제건원을 축하하는 의례적인 표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에 격노해서 버선발로 달려온 자가 있었으니 주선 대청국 대사였다.


당시 대청국 대사는 청의 권신 이홍장의 측근 우창칭이었으며 그의 참모는 위안스카이였는데, 이때 우창칭은 위안스카이와 함께 의관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급히 광무제를 알현하여 이 칭호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했다. 실록에 기록된 당시 우창칭의 말은 다음과 같다.


...(전략)...


오장경(우창칭)이 아뢰기를,


"황제의 위에 오르심은 교린하는 국가로서 매우 기뻐할 일이나, 이 칭호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니, 어찌하여 극동의 유일무이한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하셨는지 저희 대청에서는 크게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명 우리 대청의 황제 폐하께서도 황제이시고, 또한 저희가 듣기로 일본의 군주 또한 천황으로서 황제라는데, 어찌하여 황제 폐하께서만 스스로 황제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크게 웃으며,


"광명천지."


라고 짧게 하교하신 뒤 손짓하여 청 대사를 끌어내었다.


사관은 논한다. 상께서 광명천지의 뜻을 세우심은 천하를 다 상의 은혜로 밝게 하고자 하셨기 때문인데, 어찌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지위의 황제를 인정할 수 있으셨겠는가. 상께서는 분명 청주(淸主. 청나라의 영주: 청 황제를 낮잡아 이르는 말)와 왜주(倭主. 일본의 영주: 덴노를 낮잡아 이르는 말)를 이때부터 더 이상 황제로 보지 않으시고 단지 천명을 참칭하는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 보셨음이니, 삼한 땅의 대장부라면 누구라도 상을 보고 그 가슴이 벅차오르고 용력이 솟지 않을 수 없었다.